네. 어, 오늘도 어,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올라왔는데요. 오늘의 설교의 제목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라는 주제로 함께 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어, 내년부터는 금요 예배가 수요 예배로 바뀐다는 거 이제 다들 아시죠? 그래서 어쩌면 당분간이 인사를 오래 못 할 것 같아서 한번 인사하고 시작해 보겠습니다. 한 주간 수고하셨습니다. 네. 어 오늘 나눌이 설교도요. 어 지난 어 금요 설교 때 제가 나눴던 그 기독교의 치명적인 7대 죄악을 다루고 있는 매혹적인
악덕들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어 여러분 혹시 당근 마켓이 이용해 본 적 있으신가요?네 많이 있으시죠? 어, 저도 종종 이용하곤 하는데요. 저는 원래 어 중고 마켓을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참 잘 사용하지 않다가 아무래도 제가 자취생이 되었기 때문에 어, 사용하게 되더라고요. 양조로 이제 이사를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어, 살림 사리들을 그 당근 마켓에서 이렇게 구입했습니다. 어, 그런데 이용하지 않을 땐 몰랐는데 막상 이용하다 보니까
제가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있었어요. 혹시 어떤 건지 아실까요? 이런 것도 팔아가 저의 가장 큰 생각이었습니다. 아, 정말 다양한 물건들이 그 안에 있더라고요. 어, 그런데 제가 가장 어, 이해되지 않았던 물건 중 하나가 바로 명품 쇼핑백이었습니다. 굿 쇼핑백, 루이비 땡 선물 박스 등등이 어, 개인적으로는 이걸이 가격에 산다고 할 만큼의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거래되고 있는 거 실제로 경험하게 됐어요. 어, 그걸 보면서 제가 들었던 생각은 아, 이제는 쇼핑까지
우리가 명품을 들어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구나.이 사회가 참 보여지는 것, 나를 드러내는 것을 많이 집중하고 있는 세대가 되었구나라는 거였습니다. 어, 여러분,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통계 자료를 몇 개 살펴보았는데요. 한국 소비자 학회에서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그 전체 응답자 중에서 약 72.2%가 %가 명품 모조품을 산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어 쉽게 말하면 그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72%가 넘는 사람들이 나는 짝퉁을 사봤다라고 체크한 거죠.
또 올해 연구한 한국 소비자원의 한 어 설문 조사에 따르면요.이 응답자 중에 절반 이상이 그것이 짝퉁인 줄 알면서도 나는 구입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것이 짝퉁 즉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걸 구입하려고 할까요? 비록 그것이 가짜라고 하더라도 내가 명품을 입고 명품을 신고 명품을 들었을 때 왠지 사람들이 나를 더 좋게 봐 줄 것 같은 어 그런 마음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걸 갖고 싶어 내가 이걸 원해라고 하는
나의 만족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이걸 갖고 있으면 내가 이걸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좀 더 좋게 봐주지 않을까? 나를 좀 더 멋지다고 생각해 주지 않을까라는 그 마음이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러 마음이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눌 허영이라는 마음입니다. 어, 여러분, 허영은 보여지는 것에 어, 집중하는 악덕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실제의 존재보다 보여지는 이미지에 더 집착하는 거죠. 그래서 허영은 쉽게 말하면 이미지 메이킹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될까? 나의 이미지를 꾸며 나가는 거죠. 나의 실제 재정 상황은 굿땡을 살 수 없어요. 그런데 더 저렴한 가격으로 가품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구입합니다. 어떤 사람은 허세를 부리고 잘난척을 하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내 존재의 실상보다 더 세 보이고 싶고 더 우월해 보이고 싶고 더 잘 나가 보이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사실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그렇게 세지 않지만 센 척을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많이 가지지 않았지만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라고 부풀리기도 하죠. 사실은 잘 모르지만 잘 아는 척을 하기도 합니다.이 모든 것들이 바로 오늘이 허영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죠. 여러분, 그런데 허형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 나를 좀 뽐내는 잘난 척이 아닙니다. 실제로의 나보다 보여지는 나를 더 중요하게 생 어 생각하는 어긋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보다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그 평가에 기대어 살아가는 아주 불완전한 어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 허형에 빠진 사람들은 내가 실제로 누구인지는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이고 나의 실존적 가치가 어떠한지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여요. 그저 이들에겐 그래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지?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이 더 중요할 뿐입니다. 참 안타까운 삶이죠. 어 그런데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이 통계처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안타까운 허형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어 게다가
제가 느끼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허형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여러분 왜냐하면 이 허영이라고 하는 것이요. 어 한 발 뒤에서 보면 아 왜 그렇게 살아? 왜 저렇게 안타깝게 사는 거야라고 하는 마음이 들지만 사실 가까이에서 보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허영심은 생각보다 괜찮아요. 어, 제가 여러분에게 허형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설명드리기
위해서 어, 조금 단적인 예시를 앞에 설명드렸는데요. 뭐 명품, 모조품을 사는 거라던가 아니면 뭔가 과한 허세나 잘난척하는 모습들을 설명드렸죠.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허영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어, 많은 사람들은 허영과 교만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엄연이 달라요. 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표현해 죄송하지만 속된 말로 지잘난 맛에 사는 겁니다. 내가 최고야. 나 잘랐어. 이것에 자도체 빠져 사는 사람들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 어 그래서 교만은 비교적 금방 들통납니다. 나만 잘났고 나만 오라라고 생각하는 그 교만한 태도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죠. 아 왜 맨날지만 올? 왜 자기만 잘났대?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교만해라고 금방 들통납니다 여러분. 그런데 허형은 어떨까요? 허영은 교만과 달리 남들이 남들이 잘났다고 해 줘야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바라봐 줄 관객이 필요해요. 여러분, 교만은 관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허형은 관객이 필요해요, 여러분. 그래서 오히려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허용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에게 좋게 다가와요.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허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어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꽤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고 쉽게 느껴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남들의 시선이 중요한 것을 넘어서 그 시선이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좋아 보이고 괜찮아 보이고 행동하는 것이 굉장히 능통하기 때문이죠. 교만은 자기를 위해 살아가지만이
허영에 빠진 사람들은 남들을 만족시켜서 그것으로 나를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봤을 때 어 저 사람 되게 열심히 사네. 되게 좋은 사람이야. 저 사람 되게 젠틀해라고 느끼게끔 만들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칭찬을 듣기도 하고요. 실제로 꽤 많은 영역에서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여러분, 제가 어릴 때 참 착했습니다. 안 착해 보이나요? 착했습니다. 어, 실제로도요. 참 양보를 잘하는 어린이 중에 하나였는데요.
어, 처음에는 정말 그 착한 마음에서 동생한테 뭐 양보하고 친구한테 뭐 양보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양보하면 뭐가 따라오죠? 네. 칭찬이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저는 그 허영의 이치를 깨달은 거죠. 아 내가 양보하면 사람들이 나한테 칭찬을 해 주는구나. 그래서 때로는 양보하기 싫지만 억지로 굉장히 쿨한 척하면서 양보를 해 줄 때가 있었습니다. 칭찬을 더 듣고 싶고 남들에게 내가 어 예진 참 착한 아이야. 걔는 양보를 참 잘해라고 듣는 것이 꽤 짜릿했거든요.
여러분, 그 작은 어린아이에게도요. 허영이 주는 만족감이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왠지 허형에 빠지면 뭐 이렇게 좀 꼴보기 싫게 허세를 부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처럼 우리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춰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 허영은 어 거기에 빠져 있는 나조차도 내가 꽤 괜찮다라고 느끼게 만들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허영을 깨닫지 못하고 버리지도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허영이라고 하는 함정이 있다는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어요, 여러분. 그래서 어쩌면 이것은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허형에 빠져 있는 것이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죠. 여러분, 성경은 교회 안에도요. 얼마든지 이 허영심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 마태복음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 여러분이 말씀은 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인데요.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봤을 때 굉장히 나쁜 사람들이라고 인식을 하지만 사실 그
당시 사회적으로는 굉장히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이 가진 율법의 지식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참 거룩하다,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했죠. 더 나아가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요. 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가 배울 만한 스승이야라는 의미를 담아 랍비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 주고받고 있던 바리새인을 향한 사회적 시선이었어요.
여러분, 그런데 이 마태복음의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예수님은 그 사회적 시선과 완전히 반대된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들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시죠. 오히려 박수를 받고 있는 그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위선자야라고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의 거룩은 마치 짝퉁 가방을 들고 있는 것처럼 거짓된 거룩함이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그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이 아니라 철저히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계산된 거룩함. 하나님의 만족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들고 싶은 사람들의 시선을 만족시키고 싶은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어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도 이런 바리새인의 허영 신앙에서 어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는 이 함정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허영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체가 아니라 나의 이미지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마태복음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이죠. 어, 여러분, 그런데 하나 질문을 한번 드려 볼게요.이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허영에 찢은 사람들이었을까요? 이들의 마음은 애초부터 거짓된 마음이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들도 처음엔 하나님 잘 믿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 마음이 진짜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거룩하게 살아보고 싶고 율법을 잘 지키며 살고 싶은 그 결단이 그들에게도 처음엔 진짜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진심을 사단이 허영으로 쓱 바꿔 놓았겠죠. 여러분, 사단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죠? 어, 제가 생각했을
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연구하는 일에 밤낮주로 아마 매진했을 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야, 너희 정말 대단하다. 어쩜 이렇게 말씀을 사모할 수 있어? 마치 오늘 우리로 하면 어떻게 그렇게 매일 성경 매일매일 묵상할 수 있어? 너 진짜 대단하다. 너 어떻게 원대 원밥 그렇게 하루도 안 빼먹을 수 있어? 너 진짜 멋지다. 이렇게 칭찬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런 칭찬을 들었을 거예요. 그 틈 사이로 사단은 허영의 씨앗을 심었겠죠.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워지려는 그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에 더 가까워지려는 목적으로 바뀌도록 사단은 그 틈을 타서 허영의 씨앗을 심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거룩하게 살기 위해 진짜로 애었을 거예요. 그렇게 살아갔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박수를 쳐줬겠죠. 야, 너 정말 주님 따르기 위해서 그런 결단을 했다고, 그런 선택을 했다고. 너 진짜 대단하다. 그거 정말 쉽지 않은데 너 정말 멋지다라고 말해 줬을 것입니다. 그 박수 소리에 순간
마음을 뺏기고 하나님을 향해 있던 나의 시선이 순간 흔들렸을 때 사단은 그들의 눈꺼을 위로 얼른 허형의 렌지를 씌웠을 것입니다. 거룩함을 애쓰는 그들의 동기가 사람들의 박수가 되도록 말이죠.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 할 것이 있습니다. 사단은 얼마든지 우리의 좋은 마음, 좋은 동기로 시작된 것들도 악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단은 우리의 나쁜 것들, 약점들, 실수들만 갖고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심, 우리의 좋은, 우리의 좋은 동기들도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처음 동기가 나쁘지 않았고 그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서 더 열심히 해 봐, 더 잘가 봐라고 했던 그 칭찬과 박수도 사실은 나쁜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사단이 그것을 악용하여 그들의 마음을 틈탔을 때 흔들리고 넘어지게 된 것이죠.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것을 매우매우 조심해야 해요. 여러분, 서로의 결단과 어 믿음의 고백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거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 답답게 어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그 삶의 모습과 선택들을
향해서 야, 너 정말 대단하다라고 박수쳐 주고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거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사단이 틈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성경은 서로 격려하라라고 말하면서도요. 동시에 이렇게 말해요.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것, 사람들에게 너무 칭찬과 격려를 듣는 거 사실 그렇게 좋아할 거 아닐 수도 있어. 그거 조심해야 하는 걸 수도 있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고요. 그리고 칭찬받을 만한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 저도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것에 나의 시선을 빼앗기면 우린 사단에게지는 거예요. 칭찬 듣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어 그런 허형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 때 과연 우리의 신앙에는 어떠한 문제들이 생길까요? 여러분, 어떤 문제들이 생길 것 같으신가요? 여러분,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배경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 저희가 가끔 예배팀 안에서 예배에 대한 것을 설명할 때 예배를 연극에 주로 비유하고 하는데요.
한번 여러분 맞춰 보시겠어요? 어, 관객과 배우와 스텝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팀은 어디에 해당하는 사람들일까요? 네. 스텝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회중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네. 배우에 세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실까요? 네. 관객이십니다. 어, 여러분, 예배를 돕는 예배팀은 영극을 돕는 역할과 어, 마치 비슷합니다. 어, 제가 지난주에 우리 현서의 공연을 한번 보러 갔다 왔는데요. 어, 거기도 막 현서가 막 공연을 하는데 불이 꺼질 때마다
막 누군가 막 분주하게 막 움직이면서 막 음양도 체크하고 막 조명도 체크하고 이런 일들을 하더라고요. 막 음악도 깔아주고 뭐 그렇게 말이죠. 여러분, 예배팀은 예배 안에서 이런 역할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잘 집중할 수 있도록 보이게 보이지 않게 섬겨 주는 사람들이죠. 여러분, 회중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 안에서 모든 예배자 여러분 모두는 다 배우여야 합니다.이 말은 예배를 연기하라는게 아니에요.
우리를 배우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관계이시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누구도이 예배 안에서 관객이 되어서 안 되죠. 그래서 예배는 마치 연기를 하고 공연을 하는 배우처럼 정말 나의 내가 예배자로서 최선을 다해 내가 관계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허용에 빠지면요. 하나님을 관객 속에 안치지 않아요. 하나님을 내 공연의 배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허영에 빠진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사무엘상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사울이 간청하였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백성 이스라엘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제발 나의 체면을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가셔서 내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어 사울이 아말렉에 속한 모든 사람들과 짐승을 죽이라고 말씀하신 그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찾아가서 책망했어요. 왜 불순종하셨나요라고 책망합니다.
그런데 그 책망을들은 사울이 보인 반응이 바로 방금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이에요.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제발 나의 체면을 세워 주십시오. 여러분, 사울이 이렇게 말한 뒤에 사무엘과 함께 가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거예요. 이때 사울의 예배는요. 하나님이 관객이 아니었어요. 사울은 철저하게 나의 백성 이스라엘과 백성의 장로들을 관객삼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잘 보면요. 나와 함께 가셔서 내가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언작해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사울은 자신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게 아니에요. 그저 하나님을 배경 삼아서이 백성들 앞에 나의 체면을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제가 앞에서 허형은 교만과 달리 관객이 필요하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마치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허형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여러분. 그러나 모든 죄가 그렇겠지만 허영도 그 뿌리는 나를 위한 자기 중심성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허영은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죠. 사울이 말합니다. 제발 나의 체면을 세워 주십시오. 엄밀히 말하면 사울은 지금 자신의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예배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좀 실수했지만 내가 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여전히 괜찮은 왕이야라고 보여지고 싶은 그 생각으로 자신을 위해 예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 사랑하는 사귀의 가족 여러분 우리도 이런 허영심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나의 체면과 나의 만족과 나의 어떠함을 위해서 예배할 수 있어요. 여러분, 사울이 이렇게 말하고 그 뒷 구절에 보면요. 실제로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를 어 좋게 볼 수 있게끔 우리는 교회 생활 열심히 할 수도 있고요. 사역과 봉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보기 위해서 우리는 두 손을 들고 열정적으로 찬양을 할 수도 있고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는 오래 기도하는 척 버티고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어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때로 우리는 일부러 굳은 일을 맡아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관객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관객은 오직 누구뿐이시죠?네 하나님뿐이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관객처럼 보여지면 사실은 가짜일 뿐이에요. 가짜 관객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예배, 나눔, 모임, 봉사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는 진짜 관객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여러분, 우린 이걸 아주
잘 기억해야 해요. 허영은 사람을 관객으로 삼지만 신앙은 하나님을 관객 삼는 것입니다. 어,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허영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진실된 열정인지 아니면 저것이 허형인지 우리는 개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죠?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간단합니다. 가짜 관객을 없애 보면 진짜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교회에서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 예배를 드리지만 나의 삶의 예배는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 어쩌면 그것은 허형에 빠진 것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어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정작 홀로 골방에서 기도한 시간이 없다면 그것 또한 허영에 빠진 것일 수 있습니다. 내가 사역하고 봉사하는 일 뒤에 누군가 박수쳐 주지 않는 것, 누군가 격려해 주지 않는 것에 화가 나고 내 신앙과 내 예배와 나의 다른 모든 영역이 흔들릴 정도로 내가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 우리는 허영심을 의심해야 합니다. 어 물론 우리는 연약하죠. 연약하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과 인정에서 100% 자유롭기는 힘들 거예요.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와 봉사와 신앙 속에서 남의 시선 나 일도 신경 쓰지 않아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쩌면 거의 어 불가능에 어 가깝울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적어도 남의 시선 때문에 나의 신앙이 중심 흔들릴 정도라면 저는 그것은 점검을 해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관객은 누구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한테 물어봐야 해요. 때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가짜 관계을 더 신경 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요.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네. 여러분 허형은 그 말 자체가 비어 있는 영광이란 뜻이에요. 한자로 빌허의 영화영이라는 한자를 씁니다. 이것을 헛된 영광이라고 성경이 부르고 있어요. 속이 텅 비어 있는 영광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이 속이 텅빈 허영을 따라 살아가면요. 공허해집니다. 여러분, 마치 연예인들이 그런 고백하는
거 들어보셨죠? 공연장에 사람들이 가득할 때는 뭔가 나를 벅차게 하고 뭔가 채우는 거 같았는데 그것이 끝나고 홀로 숙수에 돌아갔을 때 홀로 집에 돌아갔을 때 너무 허무하고 공허했다라는 말들을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거예요. 마치 허영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어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이 우리를 채워 주시는 거예요. 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봉사하고 내가 무언가를 쏟아부어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내가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곤 하죠. 여러분, 그러나 허영에 빠진 사람들은 채움이 없습니다. 내가 얻는 것이 진짜 얻는 것이 없어요. 잠시 잠깐 인정받고 박수받을 수 있지만 마치 공연이 끝난 그 연예인들처럼 뒤돌아서면 다시 공허해집니다. 왜냐면 그것들은 비어 있는 인정이고 비어 있는 박수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어, 여러분, 우리 교회는 비교적 사역이 참 많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함께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을 꿈꾸고 또 실천하는 교회이기도 하죠. 어,
저도 올해를 지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어, 청년들에게 내년에는 작은 역할이라도 한번 사역을 섬겨 봐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사역이라는게 나 개인의 신앙과 또 공동체도 필요한 부분이 있고 또 여러 부분에서 유익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일 모래면 사역헌신 주의를 어, 보내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진실하게 기도하시고 또 잘 고민해 보셔서 정말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많이 사역에 지원하셨으면 좋겠어요. 어 그런데 사역 헌신 주의를 맞이하기
전에 먼저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사역하고 하자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전도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역하는 하려 하는가를 저도 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죠. 여러분 만약 헛된 영광, 허영이 동기가 되어 살고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 가지 않아서 다 지치게 될 거예요. 어, 저는 어, 한 때 부끄럽지만이 허용으로 사역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 회심하지
않고 주님을 어 따르지 않는데 마치 선생님께 칭찬을 듣는게 좋아서 양보를 했던 그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교회 어른들한테 칭찬받고 신앙 좋은 청년이야라고 인정받는 것이 좋아서 여기저기 어 기웃거리며 사역을 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을까요? 어, 정말 너무 많은 공허함을 어, 경험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남들의 시선에 의존하여 살아간다는 건 굉장히 공허하고 지치는 일이에요. 사역은 더 그런 거 같습니다. 여러분, 사역하다 보면 굉장히 지치는 순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누구를 섬긴다는 것, 그것 자체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니까요. 그래서 지치면 때로 우리 속에서는 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거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하는 거지? 하는 그런 불평들이 올라올 때도 있어요 여러분. 그런데 문제는요. 허형은이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허영이 아니라 진짜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이미 비어 있는 공허한 시선이 아니라 나를 채우기에 충분한 그 꽉찬 하나님의 시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마음이 잠시 찾아올
수 있지만 그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허영이 아니라 진짜 영광이 무엇인지를 바라보고 그것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시선을 돌릴 수 있죠? 우리는 어떻게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또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을까요? 어, 성경이 제시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의도적으로 숨는 것입니다. 허영은 자꾸만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는 허영과 싸우기 위해서는요.
의도적으로 때때로 나를 감추는 훈련이 필요해요. 일부러 숨어 버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여러분, 의도적으로 나를 감춘다는 것은요 때로 익명으로 무언가를 섬기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또는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혼자 주님 앞에 결단한 것을 나아가서 어 섬기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방법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이 책에 저자가 말하고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침묵하는 거예요.이 침묵을 통해서 나를 감추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책의
저자는 예수님을 모델로 제시하는데요. 우리 요한복음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은 사역하는 기간 동안 정말 많은 무리와 함께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이 어딜 가든지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어, 이런 예수님의 인기가 정말 정점을 찍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오병이어라고 불리는 사건이죠.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이에요. 여러분, 그 기적 이후에 사람들이요. 예수님을 왕으로 떠바들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정말 그야말로 예수님의 주가가 정말 취소된 그런 시기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아셨어요. 그때 예수님이 보이셨던 반응이 무엇이었나요? 혼자 산으로 떠나시는 거였습니다. 제자들도 데려가지 않으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 버리십니다. 여러분, 주님은 어차피 왕이신 분이시죠. 그러면 사람들의 존경과 그 명성과 명예를
누리기에 마땅하신 분이시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습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 나는 이런 칭찬을 받기 마땅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혼자 산으로 떠나 숨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들의 그 환호 앞에서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자신을 숨기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 그들의 동경 어린 시선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십니다. 방금 읽은 이 요한복음 말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복음서에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이었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사역을 잘 보면요. 사람들이 더 열렬히 환호하고 반응하면 반응할수록 정말 말 그대로 사역이 잘되면 잘될수록 예수님은 꼭 한적한 곳에 아무도 없는 그 한적한 시간에 스스로 감추어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여러분 허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거예요. 사람들과 또 사역에서 벗어나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한적한 곳에서 주님을 독대하는 시간만이 나를 허영에 빠지지 않게 지켜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에 굉장히 취악합니다. 사람들이 잘한다고 박수쳐 주면 정말 뭔가 내가 잘하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러한 사람들의 시선과 환호와 또 사역의 어떤 결과에서 물러나서 나의 진짜 관객이 되시는 주님과 눈을 맞추고 조용히 머무는이 침묵의 시간을 꼭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이런 것들이 나의 능력이 아니라 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구나라는 것을 주목할 수 있어야 해요.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내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더 높임을 받고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이 침묵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 저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어, 사역자로 살면서이 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정말 뼈저리게 느끼곤 합니다. 어, 여러분, 정말 신기하게도 제가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그러면 내가 막 드러나고 싶어요. 내가 노력한 거, 내가 섬긴 거, 내가 돌본 거, 내가 도은 거 이런 것들 막 말하고 싶어요.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남들이 몰라 주면 너무 섭섭하고 서운하고 막 힘이 빠질 때도 있어요. 이렇게 해서 뭐 해? 이렇게 살아서 뭐 해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그 사실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더라고요. 여러분, 그런데 제가 아무리 사악이 바빠도 하나님 앞에 머무는이 침묵의 시간을 하루에 다 몇 분만이라도 지켜내잖아요. 그러면 저의 고백이 바뀝니다. 제가 어떤 수고를 하고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헌신 했을지라도 저의 고백은 단 하나로밖에
결론나지 않아요. 주님이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로 결론이 납니다, 여러분. 그리고 제가 주님 앞에 있을 때만 남들이 진짜 몰라줘도 주님이 알고 있잖아라고 하는 말이 진짜 위로가 돼요. 아무도 몰라도 예진아 내가 너를 알아라고 하신 그 말씀이 진짜 위로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 왜 이게 가능했을까요?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진짜 박수를 보낼 진짜 나의 관계가 내가 눈을 맞췄기 때문이에요. 나에게 진짜 박수를 보내주고
나에게 진짜 환호를 보내주고 나에게 진짜 내가 너 다 알아. 너 수고한 것 내가 다 알아라고 인정해 줄 수 있는 나의 진짜 관계가 내가 눈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시선에서 때로 아니 주기적으로 의도적으로 여러분을 숨기셔야 해요. 침묵의 시간을 꼭 지켜내십시오. 이거는 내가 사역자이거나 사역자가 아니거나 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이 침묵의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왜냐면 그 시간이 여러분을 결국엔 지켜낼 것이기 때문이죠. 어,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허영은 타인의 평가에 묶긴 불안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 여기 계신 분들은 아마 다 풍삶초를 하셨을 것 같아요. 여러분, 우리가 풍삶초에서도 배우지만 사람은 누구나 뭘 받고 싶어 하죠? 사랑받고 싶어요. 인정받고 싶어하고 나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해 주는 것을 참 원합니다. 여러분, 사실 허영이라고 하는 것도요.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풍삶초에서 어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행복 사피에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말한 뒤에 풍삶초가 이것들이 진짜 행복을 가져다 주나요라고 물을 때 우리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어 사람의 마음은 참 간장 종지처럼 너무 작은 것 같다가도요. 정말 바다만큼 넓어서 도저히 채울 수가 없는 그런 것 같습니다. 어 그래서 그 누구도 우리의 마음을 완벽하게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느끼게 되죠.
여러분, 그런데 그런 우리를 완벽하게 사랑으로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이 있다고 성경은 말해요. 그게 누구일까요? 네, 바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와 위로가 우리 삶에 필요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어느 것도 나를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부족한 거 같고 배우자의 인정도 부족한 거 같고 어느 순간 나조차도 나를 사랑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 분명히
우리 삶엔 찾아올 것입니다. 여러분, 그럴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요. 외로워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 같지만 공허하기도 합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텅 비어 있는 허영의 민낯을 저는 마주하는 순간들이 바로 그런 순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만약 그런 순간이 지금 찾아오셨다면 하나님 앞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런 순간이 찾아오신다면 하나님 앞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침묵으로 눈을 맞추십시오. 하나님과 아이 컨택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분의 위로가 그분의 박수가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의 수고를 알아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위로만이 여러분을 진짜 채울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는 허영의 유혹 앞에선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나는 이 선택을 똑같이 할 것인가? 저는 오늘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계신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귐의교회야. 칭찬이 없어도 인정이 없어도 박수가 들리지 않아도 너는 나를 위해서 같은 선택할 수 있니? 계속 이 길 걸어갈 수
있겠니?라고 말이죠. 주님이 던지시는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오늘 지금이 순간에도 눈을 맞추고 있는 여러분의 관객은 누구입니까? 어, 제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사랑 그 좁은 길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 중에 제이 가사를 참 좋아하는데요. 사랑 그 좁은 길 누가 그 길을 가려나. 겸손 그 이름 없는 길 누가 그 길을 가려나. 어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이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허영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주님이 사람들의 그
많은 환호와 박수로부터 몸을 숨겼던 것처럼 스스로 혼자 되셨던 것처럼 나도 주님께로 나를 숨기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 겸손이 허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겸손 그 믿음 없는 길. 누가 그 길을 가시겠습니까?이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어 주님께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보기 위해선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두 눈을 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눈을 맞추기 위해선 사람들의 눈을 일부러 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박수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아요. 어쩌면 진짜 신앙의 성숙은 그런 것이 없더라도 주님의 길을 걸어가고 그런 것을 일부러 피해서라도 내가 정말 주님 앞에 진실된 선택을 하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거 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