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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역대하 17-20장 / 키워드로 보는 역대하 (여호사밧 & 아합) / 강정규 목사

2020-11-29 · 역대하 17-2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지난 주 설교에서는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로 이어지는 남유다의 왕의 계보를 살펴봤습니다. 그 중에 아사는 ‘끝이 다른 남자’라고 소개를 했죠. 그는 35년 동안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살았으나, 마지막 6년 동안은 우리가 닮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3년 정도는 발에 난 병으로 인해서 실제적으로 통치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여호사밧이 섭정을 하게 됩니다. 섭정이라는 것은 왕이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을 때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아사가 아직 왕으로 재직하고 있었지만 그가 위병하여 왕의 역할을 할 수 없기에, 당시 35세였던 여호사밧이 왕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역대기는 지난 역사를 다시 돌아보며 잘잘못을 평가하는 책이기에, 왕들의 삶에 대해서 모두 평가를 합니다. 그 기준은 다윗이죠. 여호사밧은 어떠했을까요? (대하 17:3) 여호사밧이 왕이 되면서부터, 그의 조상 다윗이 걸어 간 그 길을

따랐으므로, 주님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계셨다. 여호사밧은 바알 신들을 찾지 아니하고, (대하 17:4) 다만 그의 아버지가 섬긴 하나님을 찾으며, 그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이스라엘 사람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대하 17:5a) 주님께서는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나라를 굳건하게 해주셨다. 성경은 여호사밧이 다윗의 길을 걸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길을 걷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함께 하는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계셨다.” 여러분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럼 나도 다윗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겠죠. 그럼 다윗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1) 바알 신들을 찾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찾는 것 (신앙적으로) 2) 이스라엘 사람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 (삶으로) 당시에 유행이 바알 종교였어요. 분열왕국 이야기에는 항상 이 바알신앙이 따라다니니까 조금 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가나안과 수리아 지역에서

섬겼던 신이 바알인데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다신론이 많았기에 각 신마다 능력과 전공이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바알은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신입니다. 고대 신화에서 바알은 하늘과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나오는데, 당시가 농경사회였으니까 비를 주관하고 풍요를 주는 바알 신의 인기가 높았고, 그로 인해 바알신앙이 급속하게 퍼져나갑니다. 지금도 “교회를 가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이런 말을 하지요. 똑같아요. 여호와라는 신을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바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다는 인식이 당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알과 함께 등장하는 ‘아세라’는 여신인데 비슷합니다. 바알을 포함한 신들의 어머니로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바알과 아세라 이것이 당시의 가장 큰 우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알을 믿으면 내 월급이 2배쯤 오른다고 생각을 해보시면, 고민이 좀 되십니까?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은 흔들림이 없겠지만, 아마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럼 난 바알 믿을래”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이것과 멀지 않은 고민이 생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주일에 출근하지만 조건이 너무 좋은 직장. 그럼 돈부터 일단 벌고 신앙은 나중에 찾자고 타협하게 될 수도 있죠. 어쩌면 고대의 바알 신앙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상 이와 유사한 것입니다. 아이가 고3이 되면 부모의 신앙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너무 교회 교회 하지 말고 일단 대학부터 잘 가야지, 일요일에도

남들은 다 공부하는데 교회에서 시간 보내고, 그러다가 대학 못가면 그게 더 불행한 거야. 좋은 대학 가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야.”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자녀들을 이렇게 가르치면 신앙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대학을 가도 문제에요. 그 경험으로 인해, 이제 이 친구는 평생을 삶의 중요한 지점마다 신앙은 필요에 따라 언제든 내려놓아도 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앙은 상황에 따라 내려놓는 옵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너무 치명적이에요. 우리는

완벽하지 않죠. 저는 DTS 때 만났던 한 친구가 해줬던 한 이야기가 참 깊이 마음에 남아 있는데요. 부모님이 다 성도들인데, 신앙인들도 싸울 때가 있죠. 그런데 자기가 기억하는 모습은 부모님이 다투게 되면 아버지는 항상 교회로 가서 기도하는 분이셨다는 거예요. 항상 어떤 문제를 만나면 아버지는 기도하러 가셨다. 그 친구는 그것을 보고 자라며, 자신의 삶에도 적용하게 된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사람은 다들 그걸 알아요. 그러나 그 상황에서 어떻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려고 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완벽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에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라는 왕에 대해서도 이렇게 나와요.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살기로 다짐하고...” (대하 17:6) 그는 오직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살기로 다짐하고, 유다에서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없애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무릇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의 기준을 바꿔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호사밧은 유다 성읍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파견합니다. (대하 17:9) 그들은 주님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 전국을 돌면서 백성을 가르쳤다. 그들은 유다의 모든 성읍을 다 돌면서 백성을 가르쳤다. 여기서 율법책은 모세오경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여호사밧의 나라에 평안함을 주시며 축복을 주십니다. 이제 여호사밧이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이 평안과 복을 잘 관리하고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2. 결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남유다를 여호사밧이 통치하던 그 때, 북이스라엘에는 아합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북이스라엘 왕 중에서 우상숭배를 가장 심하게 했던 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엘리야의 갈멜산 대결’ 바로 그것이 아합시대거든요.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사람 850명과 엘리야 한 사람이 영적인 대결을 펼쳤던 일이죠. 아합은 그 대결을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악을 행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아합이 바알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사실 그의 부인 때문입니다. 그의 부인은 성경에서 가장 악하기로 소문난 ‘이세벨’입니다. 이 이세벨은 ‘시돈’의

왕인 엣바알의 딸입니다. 시돈은 페니키아라는 항구 도시 국가이죠. 엣바알은 원래 왕이 되기 전 바알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엣바알이라는 이름 자체가 ‘바알과 함께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가 시돈의 왕이 된 것입니다. 바알 제사장의 딸이었던 이세벨이니, 그녀와 결혼한 아합은 당연히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합이 바알 숭배자가 됩니다. 아합은 이세벨에게 전도 당해서, 북이스라엘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을 위한 단을 쌓고 목상을 만들고, 바알을 이스라엘의 국교로 공인해

버립니다. 여러분. 결혼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인생의 동반자이잖아요. 원래 신앙이 좋은 사람과 신앙이 안 좋은 사람이 함께 있으면 신앙 좋은 사람이 끌어 올리는 힘보다, 안 좋은 사람이 끌어 내리는 힘이 더 큽니다. 그리고 남녀가 만나면 대부분 여자가 이겨요. 참 신기해요. 그러니까 안 믿는 남편을 전도한 우리 여자 성도님들은 대단한 분들이죠. 신앙으로 끌어주고 있다면 정말 큰 일 하신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만남. 이세벨이 아합을 끌어내렸어요. 문제는 신앙

좋던 여호사밧입니다. 여기서 여호사밧 인생 최대의 실수를 하는데.. 그는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북이스라엘과 연합을 하려고 합니다. 바로 결혼을 통해서요. 그래서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결혼시키게 됩니다. (대하 18:1) 여호사밧은 재물을 많이 모으고, 큰 영예를 얻었다. 그는 아합 가문과 혼인의 유대를 맺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여호사밧이 다스리던 유다의 평안함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왔음을 알지만, 정작 여호사밧은

평안함이 누구로부터 오고,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는 정치적 판단을 합니다. 북이스라엘과 사돈을 맺고 돈독한 유대관계를 이뤄서 평안을 도모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 결혼으로 남유다로 오게 된 아달랴. 그녀로 인해서 후에 다윗 가문이 사라질만한 엄청난 위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성경은 여호사밧의 잘못된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죠. 3. 신앙은 다수결이 아니다 여호사밧과 아합이 혼인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자고 합니다. 길르앗 라못은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새였는데, 이곳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과 싸움을 벌이곤 했습니다. 이 당시에 아람의 벤하닷이 다스리고 있었고, 그것을 남북이 힘을 합쳐 탈환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아합의 제안에 여호사밧이 함께 하기로 동의합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어요. 여호와의 말씀을 묻고 여호와의 뜻에 맞으면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여호사밧은 두 주인 앞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당시 아합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은 강력한 국가였고 사돈의 나라였습니다. 아합의 요구를 묵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의 주인인 하나님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여호사밧은 두 마음을 품은 자였던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데 또 없는... 어쨌든 아합도 여호사밧이 전쟁에 나갈 명분을 만들어줘야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무를 선지자를 궁으로 부르는데 무려 400명을 부릅니다. 아마도 이 선지자들은

왕의 꼭두각시이거나, 바알과 관련된 선지자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합 왕은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그런 선지자를 원했으니, 엘리야 같은 참 선지자를 부를 일이 없죠. 400명이 한 목소리로 대답을 합니다. (대하 18:5)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사백 명이나 되는 예언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길르앗의 라못을 치러 올라가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그만두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예언자들이 대답하였다. "올라가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성을 임금님의

손에 넘겨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언은 뭔가 미래의 일을 예측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참된 예언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예언자입니다. 가감 없이. 설교자도 그렇죠. 저도 제가 전해야 할 설교 본문이 때론 우리 성도님들이 듣기에 좀 부담스러울 때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듣기에 위로가 되는 좋은 소리, 축복하는 설교를 하면 여러분도 듣기에 기분은 좋겠죠. 그러나

말씀과 상관없이, 혹은 말씀을 의도적으로 그런 것만 골라서 전하면 여러분도 망하고 저도 망하는 길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벗어나지 말고, 그것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때론 여러분이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새겨 들어야 하는 것이죠. 지금 북이스라엘의 400명의 예언자는 그런 의미에서 왕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면서 먹고 사는 거짓 예언자들인 것입니다. 삯꾼인 것이죠. 직업적 선지자.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호사밧이 좀

미심쩍게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묻죠. 이들 외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에 또 없습니까? 그런데 사실 있었어요. 바로 ‘미가야’라는 선지자인데, 아합은 이 선지자를 일부러 부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선지자들은 아합이 하고자 하는 일에 항상 ‘YES, 왕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분 좋게 말해주는데, 미가야 만큼은 항상 아합이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아합이 미가야를 싫어합니다. 여호사밧은 아합이 미가야를 싫어한다는 소리에

“왕이시여, 하나님의 예언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말하며 미가야를 청해 듣기를 원하게 되죠. 그래서 아합이 신하를 시켜서 미가야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미가야가 올 때까지 두 왕은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마련된 보좌에 앉아서 기다립니다. 아까 와있던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그 사이에 열심히 왕에게 예언을 합니다. 그들 중에 ‘시드기야’라는 거짓 예언자는 퍼포먼스까지 합니다. (대하 18:10) 그 예언자들 가운데서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신이 만든 철뿔들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아합은 철로 만든 이 뿔을 가지고 시리아 사람들을 찌르되, 그들이 모두 파멸될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하십니다." 아합의 신하가 미가야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예언자들이 모두 하나 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했으니 당신도 왕의 승리를 예언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한마디로 분위기 알지? 똑바로 해. 이런 협박이죠. 여기서 미가야의 대답이 참으로 멋집니다. (대하

18:13)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새번역) 미가야가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나는 다만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하겠습니다." 벌써 참된 신앙인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고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죠. 미가야는 두 왕 앞에 나와서, 잠시 거짓 예언자들의 흉내를 따라 하기도 하지만,

이내 400명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거짓된 예언을 하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대하 18:22) 그러므로 이제 보십시오, 이미 주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여기에 있는 임금님의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게 하셨으니, 주님께서는 임금님께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400명의 선지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이단들, 거짓 설교자들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400명은

틀렸습니다. 미가야 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였습니다. 여러분.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을 갖는 것은 ‘다수결’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종종 다수의 결정과 선택이 옳은 것은 아님을 증명합니다. 열 두 정탐꾼 때도 그러했죠. 그래서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절대 다수가 주는 다수결의 힘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 이쪽으로 간다고 이쪽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누가 참된 선지자인가? 이 싸움에서도 400명이 아니라, 미가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전하는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이제 그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아합은 미가야의 말에 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리죠. 애초에 아합이 원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해줄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미가야는 감옥에 갇히기 전 아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왕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나는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닙니다.” 4. 나쁜 신앙과 좋은 신앙의 차이 아합은 사실 이미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은 선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가장 나쁜 기도를 하는 것이 이런 모습이죠. 이미 내가 다 결정을 해놓고 기도합니다. 기도는 정말 하나님의 뜻에 따를 마음을 갖고 다 내려놓고 주님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쁜 신앙입니다. 여호사밧은 이 광경을 보고도 아합과 함께 합니다. 그래서 결국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이 또한 여호사밧의 나쁜 신앙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뜻대로 전쟁에 나갑니다.

그런데 아합은 미가야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뭘 하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여호사밧에게 자신의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왕이 아닌 모습으로 변장을 합니다. 이것이 뭘하는 것입니까? 미가야의 예언이 혹시 성취되더라도 자신이 아닌 여호사밧이 아합을 대신해 죽도록 하는 행위였던 것이죠. 비열한 꾀를 낸 것입니다. 아합은 나쁜 신앙 뿐 아니라 그냥 나쁜 놈입니다. 실제로 전쟁 중에 아람 왕은 오직 ‘이스라엘 왕’만을 죽이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아합 왕의 옷을 입은 여호사밧을 보고 아람 병사들이 뒤쫓습니다. 병사들이 아합인 줄 알고 여호사밧을 죽이려고 달려들자, 여호사밧은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릅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로인해 적군은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돌아갑니다. 우연이었을까요? (대하 18:31)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여기서 ‘감동시키다’는 히브리어 ‘쑤트’인데, 이것은 ‘유인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합은 여호사밧을 유인하여 전쟁에 동참케하고 그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갔으나, 하나님은 아람 병사를 ‘유인하여’ 여호사밧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소리를 질렀다는 표현은 ‘자아크’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말 그대로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단어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을

표현하는 성경 구절에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럼 비겁한 아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호사밧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그때. 바로 그 때입니다. (대하 18:33) 그런데 한 군인이 무심코 활을 당긴 것이 이스라엘 왕을 명중시켰다. 화살이 갑옷 가슴막이 이음새 사이를 뚫고 들어간 것이다. 왕은 자기의 병거를 모는 부하에게 말하였다. "돌아서서, 이 싸움터에서 빠져 나가자. 내가 부상을 입었다." 정말 우연히, 무심코 날아간 화살이 아합이 입은 갑옷의 이음새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서 아합에게 박힌 것입니다. 그는 일반 병사로 분장을 하고 전투 중이었으나, 그의 전략이 하나님의 계획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죠. 아합은 수하에게 자신을 데리고 나가라고 명령을 하지만, 그날의 전투는 너무 격렬하여 병거가 빠져나갈 수 없었고, 아합은 그 병거 안에서 서서히 죽게 됩니다. 이를 통해, 미가야가 참된 선지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옳습니다. 말씀이 옳습니다. 세상이 다 다른 것이 중요하고 옳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임을 붙잡는 것이 신앙입니다. 또한 우리는 깨달아야 하죠. 악과의 동침을 멈추어야 합니다. 악에 대한 침묵과 동조를 여호사밧이 했던 것이죠. 아합이 적극적으로 죄를 지었지만 여호사밧 또한 그 죄에 동참한 것입니다. 신앙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옳다고 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죄악된 길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잘못된 길이라면 돌이켜 떠나야 합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그 이후 유다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여호사밧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십니까? 선지자를 보내주시죠. 아버지 아사 때에 하나님은 ‘하나니’라는 선지자를 보냈고, 아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니’의 아들인 ‘예후’가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어서 여호사밧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의 잘못을 책망합니다. 그 책망의 내용은 바로 악한 일에 동참하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한 죄입니다. 우리는 이제 나쁜 왕과 좋은 왕의 차이를 이

선지자의 책망에 대한 반응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쁜 왕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죽입니다. 인간의 본성이에요. 우리의 본성은 옳은 소리보다 듣기 좋은 소리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망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나쁜 신앙입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서 꾸짖습니다. 그때 다윗이 만약 나단의 말을 무시하고 한걸음 더 갔으면 끝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설교를 통해서도, 목회자를 통해서도, 아니면

예배 중에, 말씀을 보다가, 또 누군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물론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말씀하시는 분임을 기억하고 그 앞에서 합당한 반응을 하십시오. 그것이 좋은 신앙입니다. 말씀 앞에 겸손함입니다. 여호사밧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좋은 신앙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망을 받아들이고, 다시 나라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개혁해 나갑니다. 5.

모두 거기 있었다 19장에서 여호사밧이 다시 하나님께 돌이킨 후, 유다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가나안 지역의 모압과 암몬과 마온이라는 세 나라가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한 것입니다. 앞서 예후 선지자는 여호사밧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는데, 바로 이것이 그 심판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역대기를 보면서 깨닫는 것은 위기는 기회입니다. 여호사밧도 같았어요. 평안한 때 그는 잘못된 행동을 했습니다. 위기는 그에게 하나님께 더 집중하고

매달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3개 나라의 연합군과 맞서 자신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가 삶에서 겪듯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국가적 위기입니다. 여호사밧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 그는 간절한 기도의 마음으로 온 나라에 ‘금식’을 선포합니다. (대하 20: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대하 20:4)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그러면서 그가 회중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합니다. 그 내용은 바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며 하나님께 드렸던 간구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의 조상인 솔로몬이 주님을 높이는 거룩한 예배의 처소를 짓고, 이렇게 아뢰었죠.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때,

전쟁이든 홍수든 질병이든 기근이든, 우리가 이 성전 앞에 나아와 고통과 환난 가운데 부르짖어 기도하면, 주께서 들으시고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바로 지금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께서 그들을 막아 주십시오. 우리를 공격하려는 저 무리 앞에서 우리는 무력합니다.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메시지 성경 20장 8절에서 12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호사밧이 이렇게 기도를 하였던 것을 기록하며 13절에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 유다 사람이 거기 있었다. 어린아이와 아내와 자녀들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께 집중하고 있었다.” 저는 목사로서 이 한 구절이 너무나 크게 다가옵니다. 그 기도의 장소에 그 예배의 자리에 모두가 있었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께 집중하고 있었다는 이 기록. 목사들의 최고의 소원이 온 교우가 한명도 빠짐없이 다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의 소원이기도 하셨어요. 제가 지난번에 모든 교인들 선물을 챙겨보니

80명 정도 되더라고요. 어떻게 다음 주에 가능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모두가 모이고 싶어도 못 모이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러나 여러분. 장소는 상관없습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그 시간, 주님을 예배하는 그 자리마다 그대는 있었는가? 모두 거기에 있는가? 오늘 주님을 예배하는 소중한 이 시간, 이 예배당은 아니어도 좋습니다. 온라인으로 예배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주님 앞에 예배자로 서 있고, 모두가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다면... 그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전쟁이라는 위기를 앞두고 모두 모여 하나님께 기도하던 그 때, 하나님의 영이 아하시엘이라는 사람에게 임하여 그가 주님의 뜻을 온 회중에게 전합니다. 우리 이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오늘 주님께 예배하는 여러분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당연히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십니다. 하나님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입니다. 그 이후는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언제나 내가 할 몫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선택하느냐. 옳은

말씀에 순종하여 그렇게 행동하느냐.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잘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의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그 인생에 잘한 부분 잘못한 부분이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온전한 다윗의 길로 가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긍정 평가는 그의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평가가 더 많습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가 걸어간 길에서 멈춰 서거나 벗어나지 않았다.

지역의 음란한 종교 산당들을 없애지 않았으므로 백성이 계속해서 이 산당들을 찾아가 기도하고 예배했다.” 결국 그는 늘그막에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합니다. 그는 온전히 다윗의 길로 가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귀환민들에게 여호사밧의 실패를 바라보며 우리는 다른 길을 가길 바라고 계시겠죠. 오늘 이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사밧 안에 있는 실패의 요소가 우리 안에도 있죠. 그것을 보고 그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주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