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저의 고민은 금요기도회 설교조차도 자꾸 길어져서 그것이 고민입니다. 주일은 길이보다는 깊이에 집중하기로 했고, 금요일만큼은 여러분이 기도하는 시간을 충분히 드리고자 길이 조절에 힘쓰고 싶은데요. 노력해보겠습니다.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주일은 강해설교를 하고 금요일은 주제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강해설교는 말 그대로 본문의 순서에 맞춰서 설교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제가 본문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본문을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제설교는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고 관련된 다양한 본문을 넘나들며 설교를 하는 것이죠. 금요일은 주제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도 가급적 흐름을 맞춰서 설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거의 연결이 됩니다. 10월부터 매주 금요기도회를 드리기 시작했죠. 우리는 사귐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사귐의 기도를 원합니다. 하나님 지금 이곳에 왕좌의 게임 불편한 진실 빈 집의 거짓된 자유를 버리고 자유를 위한
구속, 구속을 경험한 사랑 하나님 나라의 회복 지난 8주 동안의 금요기도회 설교 제목들입니다. 그 메시지들을 되짚어 보면 이렇죠. 교회가 가르치는 모임이 아니라, 그 본질과 특성상 하나님과 이웃과 사귐을 누리는 장소임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사귐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의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인데, 바로 기도가 그 대화이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거나 보고하는 업무적이고 목적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사귐 의기도’여야 합니다. 그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해서 먼저 우리가 믿음을 보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께 예배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최종적 목표는 그 하나님이 바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 대해서 소개를 하면서 주님이 거하시고, 특별히 주님이 내
삶의 운전대를 맡아주실 수 있도록 나의 왕좌를 그분께 드려야 함을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면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경험합니다. 혼자 살던 집에 누군가 들어온 불편함. 내 마음대로 하던 내 삶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면서 겪는 불편함.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가 그 연합에 순종하기까지 함께 도우실 것이고, 어쩌면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외적인 종교생활만이 아닌 내면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시작된 증거겠죠. 당연히 그 일을 가장 기뻐하지 않는 존재는 사탄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것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속삭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이 머리에만 머물고 감정만 느낄 뿐, 내 삶과 행동으로 오지 않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거짓된 속삭임은 사탄의 유일한 공격방법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던 삶, 빈집의 상태로 돌아가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실 때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유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구속’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한 것이 구속이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뭘까요? 성경은 사랑이라고 전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녀를 바라보며 대가 없이 사랑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시죠. 자녀도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성숙한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알고 부모의 뜻에 자신의 뜻을 순종하는 것처럼...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사랑이요.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이 우리의 사명이 되겠죠. 그 사명은 주님께서 이 땅에 갖고 계신 꿈과 비전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해서,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을 교회에서는 ‘지상대명령’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우리가 서 있는 곳곳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을 삶으로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실천한다는 것은 뭔가 엄청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는 가치와 길을 따라서 내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행동을 바꿀 때 그것이 모여 습관이 되고, 습관이 지속되면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끝내 닮아가고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길입니다. 여기까지가
8주 동안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는 큰 키워드 안에서 우리가 나눠온 말씀의 메시지들입니다. 공교롭게 이번 주는 수요일도 금요일도 모두 A/S를 하고 있네요. 많이 배우기보다 배운 것을 잘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니까요. 오늘은 우리가 계속 공부해온 <사귐>의 시리즈와 관련되어 한 가지 짧은 메시지만 덧붙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도 살펴봤듯이 예수님은 부활 후 마지막 40일의 소중한 시간을 <제자들> 만나는 일에 사용합니다. 우리가 매우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장면
가운데는 베드로를 만나러 가신 장면이 있을 텐데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장 먼저 부름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첫 모습은 “나와 함께 일하자”는 주님의 초청에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던 순종이었습니다. 즉시 반응했어요. 가진 모든 것보다 주님을 택했습니다. 베드로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시던 때에 어떻게 하십니까? 부인합니다. 우리가 기대한 결말과는 전혀 다른 베드로의 치욕이죠. 그 스스로도 자괴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죽음의 위기 앞에 있는데 그를 버려두고 도망쳤다고 생각해보세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또 두려웠어요. 그래서 도망쳤고, 목숨은 건졌지만 괴로움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사명은커녕 그 관계도 지키지 못했어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러 가십니다. 그는 다시 예전처럼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원래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자’는
말씀 앞에 나도 한번 멋진 삶 살아야지 하고 노력해봤으나, 돌이켜보니 자신이 그 사명을 살만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 앞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죠. “에이, 나 같은 건 틀렸어”라는 절망에 빠진 베드로. 부름 받아 나설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3년을 지나 돌아온 낙오자 인생. 그에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준비해주신 아침을 먹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삶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식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묻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 “예,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참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죠. 사랑을 하긴 하는데, 차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마음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면목은 없지만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아마 베드로의 마음이었을 테죠. 더 이상 주님의 꿈에 동참하기 어려운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나서 다시 돌아와서 어부로 살아갑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내 신앙이 막 자란 것 같은데,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때. 곤두박질 칠 때. 어쩌면 베드로가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마치 3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딱 하난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3년이 지나서 다시 어부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3년 전과 완전히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게 되어 그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예수님을 따를 능력도 없지만, 예수님을
떠나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명? 감당 못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도망도 쳤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깊이 박힌 것이 있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있어서 차마 자신의 입으로 당당하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하시는 말,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네게 부탁한다.”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은 더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고백을 이미 베드로가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난 그 사명 잘 감당할 수도 없지만,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능력이 있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과 똑같습니다. 여전히 나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이 살 수 없는 관계 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계속 신앙이 사귐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변화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이 관계 안에 우리가 회복되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3년간 제자들과 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풍성히 교제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내면의 터를 닦으셨습니다. 바로 이 관계 안에서,
그 터 위에서 성령이 부어질 때 이들을 통해서 세상이 달라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주역이 됩니다. 진짜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깨어진 우리와 다시 시작하기 원하십니다. 다시 온전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하고 싶은 것은 ‘일’이 아니라 ‘교제’입니다. 구원은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귐의 또 다른 언어인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열정이 좀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서 빨리 저도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거든요. 그러나 때로는 뭔가를 하려는 마음이 커지다보면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바쁘지만... 가끔은 하나님 앞에 있는 저를 생각하며 가끔 이렇게 적어봅니다. Being Useless. 해석하자면 ‘쓸데없이 존재하기.’ 내 존재를 주님은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내가 좀 쓸 데가 없어도. 내가 좀 부족해도.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일들이 다 잘 안되어도. 그러나 나는 내 존재를 기쁘게 맞아주시고, 그저 내 사랑하는 마음을 귀하게 여겨주시는 그 분 앞에서, 쓸데없이 존재해도 충분합니다. 주님이 우리가 정말 양을 잘 먹이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 우리를 찾으시는 걸까요? 어쩌면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그 일에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도 그저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그분의 사랑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아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가 그분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셨고.. 어쩌면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의 가치 앞에서 철저히 뒤로 밀려버려서 내가 필요한 때에 찾는 그런 분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의 존재로 행복하다”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 하나님을 여러분이 마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