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역대하 6-7장 / 하나님 마음이 머무는 곳 / 강정규 목사

2020-11-15 · 역대하 6-7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역대하 세 번째 시간입니다. 1-9장까지가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본문이었죠. 목요일 묵상까지가 솔로몬의 시대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는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을 중심으로 설교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역대하에 나오는 솔로몬의 첫 행보는 기브온 산당에서의 일천번제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수요 바이블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깊이 다뤘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 내용 중에 제사에서 예배자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 레위기 1장에 나타난 번제의 순서 (수송아지 기준) 예배자 :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속죄 의식) 제사장 : 소의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린다. 예배자 : 소의 껍질을 벗기고 토막 낸다. 제사장 : 제단에 불을 지피고 나무를 가지런히 놓는다. 제사장 : 예배자가 토막 낸 번제물의 머리와 기름 있는 부위를 불 위에 올려둔다. 예배자 : 제물의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는다. 제사장 : 제물의 모든 부분들을

제단에서 불태운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자가 그 안에서 대부분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동물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아마도 많은 것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반면에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생각해보면 회중은 예배에만 나오면, 목회자와 같은 사람들이 인도해가는 예배에 그저 참여 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린 것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가 보여주듯이 우리 각 사람이 예배자로서 나의 예배에 대한 적극적인 마음과 헌신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저도 저에게 맡겨진 최선으로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여러분도 예배자로서 오늘 이 예배 가운데 여러분의 최선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오늘도 하나님 앞에 전심이고 진심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에 승리합시다. 지난주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과정을 소개했죠. 그가 받은 모든 지혜와 지식과 재물과 명예, 그리고 인간관계까지 동원해서 성전 건축을 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모세 시대부터 성막을 통해 예배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계셨던 하나님은, 이제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가 성전에 들어온 후 ,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게 임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바라본 솔로몬의 고백들이 6장부터 이어지죠. 핵심은 이 일이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지난주에도 설명했지만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윗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언약은 구약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으로서, 이 말씀은 다윗의 통치시기를 기록한 두 권의 역사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무엘하 7장이고, 두 번째는 역대상 17장입니다. (삼하 7:11b)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삼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삼하 7: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삼하 7: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삼하 7: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대상 17:10b)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한 왕조를 세울지라 (대상 17:11)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대상 17:12)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대상 17:13)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대상 17:14)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우리가 함께 공부하는 역대기에서는 역대상 17장에 다윗언약과 함께 ‘영원히’라는 단어가 8번이나 나옵니다. 역대기는 귀환민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비록 포로가 되는 심판을 당했고 나라도 멸망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하기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항구성을 강조하는 것이죠. 자, 그런데 사무엘하의 기록과 귀환민들을 위해 기록한 역대상의 다윗 언약을 비교해보면 중요한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가 신약을 이해할 때도 중요해요.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사무엘하는 후손을 단수로 표현한다면, 역대기 말씀에서는 복수로 표현합니다. 즉 성전을 건축할 인물이 솔로몬만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이라고 범위를 넓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역대상 :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사무엘하의 다윗 언약은 다윗에게 주는 약속의 측면이 강하죠. 다윗의 집과 다윗의 나라 다윗의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반면, 역대상에서는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 메시아의 왕위가 견고할 것임을 말합니다. 장차 역사 속에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는 아닙니다. 두 번째 성전을 짓는 스룹바벨도 다윗의 후손이고, 더 나아가 진정한 성전인 예수님도 다윗의 후손이죠. 그러나 역대기의 강조점은 귀환민들로 하여금 다시 성전을 세우며 다윗 언약을 계승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소망하고 바라보는 말씀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물 성전이 언약을 깰 수 없다는 것도 함께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1장의 시작이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다시 족보를 기록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의 진정한 왕임을 그렇게 열심히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조금은 신학적인 이야기라서 여러분에게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역대기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성전봉헌식을 하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에서도 그는 ‘다윗 언약’을 기억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하 6:13b) 그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대하 6:14)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대하 6:15)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되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솔로몬은 하나님 같은 분은 하늘에도 땅에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이 성전이

지어진 것은 하나님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은혜이며,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 손으로 이루어진 현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어서 그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붙들고 기도를 합니다. (대하 6: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그들의 행위를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율법대로 행하기만 하면 네게로부터 나서 이스라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여기서 솔로몬이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다윗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 언약적 신실함에 기대어 솔로몬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죠. 솔로몬은 다윗이 약속한 하나님을 위한 성전 건축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제 성전을 다 지었으니 하나님께 이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지켜주옵소서.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신실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성경을 보면 지금까지 그래왔고 그분의 그러한 일하심이 역사에 새겨져 있고, 그로 말미암아 앞으로 미래에 약속하신 일들도 우리에게 일어날 것임을 우리가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다윗 언약을 기억하셨고,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언약을 성실하게 지킵니다. 그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벨론 포로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에 충실하시기에 언약대로 행한 것입니다. 솔로몬도 다시

고백하지만 다윗 언약은 조건부입니다.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즉,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행하고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행하면... 그 왕조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이제 역대기가 보여주겠지만, 유다의 왕들은 모두 이 기준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이 조건대로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으면 왕위가 끊어지는 것이 언약적 결과입니다. 언약적 심판입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바벨론을 통하여 심판을 당하게 두신 것입니다.

결산이 필요한 것이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이 언약 앞에 충실하다고 생각을 늘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절기를 지켰죠. 그러나 선지서에서 고발하듯이 그들의 예배는 빈 껍데기였고, 종교행사에 불과했으며,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긋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결산하십니다.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요. 다윗의 후손인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혀서 끌려가고, 솔로몬의

성전도 파괴되었고, 나라를 잃고 땅도 잃습니다. 다윗 왕조가 끝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을 봐주면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를 눈감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결산하시죠.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신실함을 지키면서도, 우리를 잃고 싶지 않기에 은혜와 자비를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는

받을 수 없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하죠. 선악과 사건. 인간이 약속을 어깁니다. 그럼 그냥 끝이에요. 그런데 심판하시면서도 동시에 그 인간들과 살아갈 방법을 만드십니다. 기회를 주시는 것이죠. 이스라엘.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럼 그냥 포기하셔도 되요. 약속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 못하시고, 70년 포로생활로 그냥 사면해버리십니다. 죄는 거의 400년 동안 왕조에서 지었는데 70년의 포로생활로 그 모든 것을 청산하고,

포로 가운데 남아있는 자들을 통해 다시 새롭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처럼 출바벨론을 허락하시고, 솔로몬의 성전처럼 스룹바벨의 성전을 허락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어쩌면 약속을 완벽하게 지킨 것인가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렇지 못하죠. 하나님은 때로는 심판을 미루시고, 더 기다리시고, 다시 기회를 주세요. 이런 신이 참 없습니다. 다시 솔로몬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적어도 솔로몬은 다윗에게 있었던 마음을 이어받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더 살펴봅시다. (대하 6:18)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그는 하나님께서 건물 성전에 담기지 않는 하늘과 땅의 주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겸손함이죠. (대하 6:21)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의 성전봉헌기도의 절정은 7가지 상황에 대한 중보기도입니다. 그는 인간이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한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해서 그 상황 가운데 우리가 주를 찾고 주께 구하면 응답해 달라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공의 심판, 이스라엘의 패배, 가뭄, 기근과 전염병, 이방인, 전쟁, 포로 등의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기도할 때,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용서해주십시오. 회복시켜주십시오.” 기도합니다. 눈여겨볼 것이 있다면,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건축에는 이방인들이 참여했음을 기억해봅시다. 두로 왕 히람이 보내준 일꾼들이 참여해서 이방인 노역자들의 도움으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세계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이방인들을 위하여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달라고 구합니다. (대하

6:3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모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주님은 솔로몬이 드렸던 기도를

기억하십니다. 솔로몬이 드렸던 기도의 내용처럼,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이 되신 것을 탄식하십니다. 사실 구약시대, 특별히 모세 시대의 성막만 보더라도 그 성막은 각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에 따라 머무는 곳이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영역, 이스라엘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영역, 밖에 이방인의 뜰 이렇게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성막 가까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조차도 자기가 속한 민족과 성별 등에 맞는 곳까지만

가도록 성전 안에도 담을 쌓아서 구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었다는 표현을 쓰신 것은 바로 성전 경내를 나눈 담과 같이 가로막은 것을 허물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구약의 관점에서는 혈통적으로 이방인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우주적인 통치자이고, 주의 집은 모든 만민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찾는 곳이기에, 오늘 우리도 이렇게 주님을 예배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솔로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응답하십니다. (대하

7: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성전 봉헌을 마친 후, 솔로몬의 왕궁 건축이 시작되죠. 성전이 7년, 궁궐이 13년에 걸려 완성됩니다. 그 완성 후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마치 일천번제 이후의 그 날처럼. 그리고 13년 전 솔로몬이 드렸던 성전봉헌을 하며 드렸던 기도의 내용에 답하십니다. 그러니 응답이 13년 만에 온 것입니다. (대하 7:12)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대로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유명한 찬송이 되었죠.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솔로몬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았습니다. 잠언은 최고의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존재적 차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그는 흐트러짐이 없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보면 우리에게 계속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고쳐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악한 길을 떠나고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숨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의 완벽성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형편에 맞게 눈을 낮추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래. 너희들이 악한 길에 때로는 빠질 수도 있어. 넘어질 수도 있어. 그래도 내가 기다릴게. 그 사이에 너희가 악한 길에서 떠나서 내게 돌아와 나를 찾으면 내가 용서해줄게.” 여러분.

구원은 절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는 구원받기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나를 구원할 분을 찾지 않게 되고, 그런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저에게 구원받을 의로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저는 죄인임이 밝히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도 그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낮추고 주를 의지하며 그분의 얼굴을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시고 은혜 주셔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기로 결정하셨고,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중요하죠. 그래야 죄의 기준이 서고 우리가 우리의 상태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봐주면 죄의 기준이 무너져 버리죠. 죄는 죄라고 말씀하시고 죄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우리가 다 죄에 패배하니까...

우리는 살리기 위해서 주님이 ‘대속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죄의 값을 치르는데 대신 치르도록 방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그런 것 아닙니까? 구약에서는 소나 양을 들고 예배하러 나와서 값을 치르고 예배를 했어요. 그것을 희생제물이라고 부르는데 그 희생제물에게 안수하여 나를 대신해 그 희생제물이 죽음으로 내가 생명을 얻는 대속의 은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는 해야 하죠. 죄의 삯은 죽음이니까. 죽음을 바라보며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잃고 싶지 않기에 동물이 대신 죽는 것으로 속죄의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은혜를 구하며 나아오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신약시대 이후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쭉 보니 소나 양을 들고 오신 분은 없는데, 그러면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들고 왔습니까? 헌금이요? 아닙니다. 헌금으로 소와 양의 희생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대신해 죽을 희생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히 10: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더 이상 동물을 잡지 않아도 내가 죄를 사해주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구절을 읽어보면 더 은혜가 됩니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히 10: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히 10:21)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히 10:22)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히 10:23)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곳에 언약궤가 있고, 그 방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이 속죄를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죄인인 우리가 죽는 일이었기에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그 휘장을 뚫으신 것입니다.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 즉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 희생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위대한 제사장, 즉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의 몸으로 이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그분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그 속죄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동물의 희생이 아니지만,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담보로 지금도 그 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구약의 백성들보다 더 비싼 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때론 어떻습니까? 차라리 우리보다 구약의 예배가 더 진정성이 있어 보입니다. 내 비싼 소유

중 하나인 가축을 죽이고, 그것도 가장 흠 없는 것을... 그것으로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며 죄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죠. 우리는 구약보다 더 큰 은혜를 입고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하지 않기에 더욱 무감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사건 이후로 제사를 위한 준비들은 더 적어졌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조차도 그러면 안 됩니다. 죄를 더욱 가볍게 여기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그 긍휼한 은혜를 느끼지

못하며... 형식과 요행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가 언약적 심판을 당했던 구약의 백성들보다 나은 것이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오늘은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구약의 백성들에게 이 날은 정말로 참된 감사였을 것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아가는 기적 같은 은혜를 누리고, 땅 없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고, 그 안에서 농사를 통하여 소출을 내는 방법으로 양식을 공급해주십니다. 그 수확물을 거둘 때, 그들은 진짜 은혜를 느끼겠죠. 예전에는

그래도 한 달에 한번 월급을 봉투에 담아서 받으면, 내 한 달의 결실이라는 뿌듯함이라도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예물을 구별하며 눈에 보이는 뭔가 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계좌에 숫자만 찍히죠. 또 무섭게 나갑니다. 카드 값, 공과금, 자동이체들. 헌금보다 더 빨리 구별됩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살면서 우리의 추수, 내 삶 속의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감사도 점점 잊혀지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비록 소출이 월급으로 바뀌고, 이제 그마저도 온라인에서 왔다

갔다 할지라도, 시대가 변했다고 우리의 마음도 변해버리면, 언제나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부끄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마음,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 그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대하 7: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대하 7: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이제 성전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주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삶입니다. 코람데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앞에 서 있습니다. 저에게 목회자로서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있는 여러분들이 모두 함께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성전 삼으신 여러분의 마음이 끝날 까지 예배하는 곳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지 말고, 비록 연약할지라도 주를 향해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맙시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고 신실하신 주의 약속을 붙들고 함께 섭시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 된 그 날에, 이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아름다운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아름다운 예배자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용서하고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신실하셨고 오늘도 신실합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신실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분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