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누가복음 4:18 / 자유를 위한 구속, 구속을 경험한 사랑 / 강정규 목사

2020-11-20 · 누가복음 4:18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지금 저희 교회의 예배는 3번인데 주일, 수요일, 금요일입니다. 이 세 번의 예배는 모두 각각의 특징을 갖도록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주일예배는 강해설교입니다. 강해설교의 특징은 여러 시간에 걸쳐 한권의 책을 다룰 수 있기에, 깊이있게 다룰 수 있습니다. 만약 역대기를 오늘 하루의 본문으로 삼았다면 배경설명, 전체적 맥락, 이런 것을 전혀 못 다루죠. 본문 몇 구절이 말하는 것을 설명하기도 벅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묵상과 강해설교를 통해서 보다 깊이

있게 점층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수요일은 부제가 바이블클래스입니다. 성경공부라는 것이죠. 이 시간은 다양하게 사용하는데, 주로 예배 시간에 설교 형식으로 다루기 어려운 것을 소화하는 시간입니다. 배경이 되는 부분이나, 고민이 필요한 이야기들, 성경 특강 등 다양하게 다룹니다. 줌을 통해서 자료를 활용하기 더 편하므로 최대한 그 이점을 살려서 여러분들에게 성경과 신앙적 도움을 드리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금요일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최대한 이 날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이라서, 가급적 복잡한 설교보다는 쉽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려고 노력합니다. 함께 기도할 수 있는 메시지를 나누는 시간인 것이죠. 저는 우리의 세 번의 예배가 균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하면 이 틀을 유지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또한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세 번의 예배를 다 드리면 신앙적으로 균형감을 갖출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자유를

위한 구속, 구속을 경험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구속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가요의 제목으로 익숙하실 것입니다. 김종서 씨의 곡이죠. 후렴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처음이야 내가 드디어 내가 / 사랑에 난 빠져 버렸어 혼자인게 좋아 나를 사랑했던 나에게 / 또 다른 내가 온 거야 / 내 앞에 니가 온 거야 그러니까 혼자인 것이 편하고 좋았는데,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자신이 변해서... 혼자라는 자유보다 아름다운 구속을 경험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도 ‘구속’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이야기를 설명했습니다. redemption(리뎀션)이 바로 구속이라는 단어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 구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내다’라는 의미인 것이죠. 즉, 우리가 죄를 짓고 죄인의 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죄를 해결할 능력도 없죠.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 우리는 이 상태로는 사망에 이르게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주님이 하고자 하신 일입니다. 사망의 효력을 무효로 만들었고,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자녀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에서 말하는 ‘구속’이 속박되는 삶을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발음은 같은데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죠. 권영진 목사님이 쓰신 책에 보면 이것을 잘못 알고 사용한 예가 있는데요. 어떤 성도님이 직접 하신 얘기랍니다. “주님께서 저를 붙들고 계셔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비록 주님께 구속되어서 사는 것이 예전의 자유롭던 삶과는 달라서 좀 불편한 면도 있지만 이를 통해 제가 구원 받을 수 있으니 참 감사하죠.” 무엇이 잘못된 이해인지 느끼시겠어요? 구속(拘束) _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함. 구속(救贖) _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여 구원함.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유를 제한한 속박으로 느낀다면, 조금 더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다가서 볼 때 비로소 고백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 자유, 오~자유. 나는 자유 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다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셨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하신 것은 ‘자유를 위한 구속’을 행하신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속해주셨어요. 우리는 이제 자유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속박이 아닙니다. 신앙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내는 노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교회 다니면서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예를 들어...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구제를 하고,

봉사를 하고... 이 모든 것을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하는 노력들로 인식하면 우리의 신앙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주일은 너무 힘든 날이잖아요. 너무 피곤한 날이죠. 제가 청년시절부터 교회에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했어요. 물론 중간에 저도 삐딱선을 탄 적도 있지만, 이내 잘 중심을 잡고 청년 시절부터 교회의 모든 일들을 열심히 참여해서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전도사가 됐는데, 정말 사역을 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전도사가 되기 전부터 그것보다 더 열심히 교회 일들을 해왔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전도사가 된 다음에 하나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례비를 받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참 무서운 것이죠.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하던지 때론 제가 하기 싫은 일이 주어지더라도 어쨌든 저의 자발적 의지로 결정을 하고 순종해서 하는 것이니 기쁨이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사례를 받으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조건 하게 되면서 불평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전도사니까, 이 교회가

나에게 사례비를 주니까, 이거 하라고 주는 것이니까 해야지.” 기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살 아래 친한 동생이 있었는데, 그 친구도 전도사 사역을 곧 준비하는 신학생이었어요. 아직 청년으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는 있었는데, 그에게 이런 마음을 고백한 적이 있어요. “내가 전에는 몰랐는데, 돈 안 받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너무 기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부교역자 10년을 하면서... 그래도 대부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성도님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준비했지만, 부교역자가 어쨌든 직장생활의 측면도 있다 보니.. 때로는 상급자에게 맞추는 것이 목표가 되고, 직장처럼 내 맡은 임무를 무사히 해내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주일을 보낼 때도 있었습니다. 주일이 그냥 빡센 거예요. 제 스스로가 올바른 마음이 아님을 깨닫는 시간들이었죠. 개척을 하면서 제 안에 가장 많이 회복된 것은 어쩌면 주일이 오는 것이 감사한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위해서 그 마음

하나로 뭔가를 해나가는 것이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가를 위한 헌신. 사실 기독교가 추구하는 신앙의 본질은 이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 대가를 계산하지도 않는 것처럼, 사실 우리 안에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김종서 씨의 노랫말처럼 그 주님께 꽉 붙들려 살아가는 그러한 친밀함을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인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마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뭔가를 해야만 된다는 압박감과 의무감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면... 신앙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압니다. 작은 교회에 오면 부담감이 더 있고 뭔가 교회를 위해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있죠. 그러나 그 마음조차도 철저하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행하십시오. 저는 주님이 여러분을 향하신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여러분이 항상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실 유대인들이 이 부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쳤거든요.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의무감 속에 허덕이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처음 율법을 주신 의도는 그것과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주신 마음보다는 율법 자체를 지켜서 의로움을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를 위해 율법의 세부적 사항들을 붙이고 그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 말씀과 함께 6일 동안 일하지만 하루만큼은 하나님이 우선인 삶을 살라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안식일에 주님 안에 안식하라는 것을 말하며 일하지 말라는 사항이 함께 나타납니다. 안식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지 않아요. 사실 안식은 완결했다는

의미입니다. 힘들어서 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완결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폰 라드는 창세기에서 첫째 날-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여섯째 날까지는 ‘시작’과 ‘끝’이라는 양식이 있지만, 일곱째 날에는 끝이 없음을 주목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주님의 나라에서도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끝이 없습니다. 자, 그런데 이 안식일 계명을 유대인 사회에서 지켜 오면서 심각한 변질이 생겨납니다.

이 십계명의 ‘정신’은 사라지고 단순한 ‘법’이 되어 규정과 의무조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자체가 의로움의 기준이 되면서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말라는 것을 지키려면, ‘일’을 규정하게 되겠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39가지로 일의 종류를 규정했는데, 주로 그들의 생업과 관련한 것이 많았습니다. ex: 밭을 가는 것, 씨를 뿌리는 것, 불을 떼는 것, 밥을 짓는 것, 사냥하는 것, 가죽을 벗기는 것, 털을

깎는 것, 천을 짜는 것, 염색하는 것, 세탁하는 것, 장사하는 것, 물건을 내가는 것, 여행하는 것, 글 쓰는 것 등. 또한 2000규빗(900미터)으로 여행의 거리도 제한했습니다. 그 이상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옆의 동네도 못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법의 허점을 노리는 편법이 등장하죠. 그래서 전 날 900미터 거리쯤의 나무에다가 미리 음식을 갖다 놓았습니다(2끼니 오가는 것). 유대인들은 밥을 먹으면 그곳이 거처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중간에 거기서 밥을 먹으면 그것이 집이 되므로, 다시 2000규빗을 갈 수 있는 논리입니다. 웃기고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율법을 법으로 잘 지키는 것에만 목숨을 건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율법에 민감한 유대인들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외국에서 유대인을 이웃으로 둔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한번은 안식일에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유대인이 뒤늦게 탔습니다. 그 유대인이 문 쪽에 있는데, 그

뒤편에 있는 한국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례지만, 오늘이 안식일이어서 제가 일할 수가 없으니 8층 버튼을 눌러주세요” 또 다른 사람에게 들은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한국 사람을 집으로 부르더랍니다. 이유는 자기가 아는 외국인 친구가 자기 집 에어컨을 켜놓고 그냥 갔다는 것입니다. 대신 에어컨을 꺼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유대인들 중에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명목 하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이러다보니,

안식일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안식일은 ‘쉼’이 아니라 ‘짐’이 되는 것이었죠. 안식일의 정신이 오히려 왜곡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위법하지 않도록 힘쓰는 날밖에 안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와라.” 오늘날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것이 나의 삶에 어떠한 의무와 책임을 더하는 것으로만 여겨지고 있다면, 내 신앙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법적 구속력 때문이 아니라,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내 삶에 나타나는 반응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거룩한 삶이 매우 강조됩니다. 저희 교회 또한 그렇죠. 그러나 이것이 절대 추월해서는 안 되는 것이 진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신앙인이 먼저 되어야 하죠.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한 강조이지, 그것 다

제쳐두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참된 신앙 없는 참된 삶은 선한 사람이 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그럼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저도 경험하고 있지만, 여러분 지금 자녀에게 뭐 뽑아 먹으려고 열심히 사랑을 투자하고 계십니까? 얘가 잘 해주면 좋죠. 그러나 안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즉 그거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 주고 하라고 해도 못하죠. 그런데 아무것도 안주는데 합니다. 사랑의 힘으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셨어요.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그것이 바로 ‘구속을 경험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모든 것으로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지 않는 하나님의 일은 그냥 내 열심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이 본질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은 주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놀라운 힘이 있어요. 승자 독식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이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청년들이

막 열심히 교회를 섬겨요.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서 그렇죠. 그러다가 더 사랑하는 애인 만나면 홀라당 신앙에서 떠나 버립니다. 아무리 열심히 했던 헌신도 소용없어요. 남녀 간의 사랑에 눈 뒤집히면 부모도 떠나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어떠한 의무감이 가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내 영이 죄로부터 자유해져서, 그 자유함을 누리는 가운데...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자유함 가운데 내가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런 것 없이 내 삶의 어떠한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께 인정받는 의인이 되고 싶으면 그것은 완전 다른 복음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데 자꾸 넘어지는 죄의 유혹들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술이라고

해봅시다. 자꾸 술자리가 날 유혹해서 주님께로 향하는 내 마음을 꺾고, 주님보다 술이 주는 위로와 기쁨을 의지하게 하고, 그렇다고 칩시다. 그때 여러분이 술을 미워하는 것은 해답이 아닙니다. 미워해야지, 미워해야지, 술을 묵상하면 더 끌려요. 정답은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이죠. 생각을 바꿔서, 주를 더 사랑해야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해야지! 진짜 사랑하면, 그 대상을 깊이 알게 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싫어하는 것을 알며, 그가 꿈꾸는 것을 함께

꿈꾸고 함께 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그것이 참된 신앙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분이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을 알고, 그분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고,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피하게 되며, 그가 꿈꾸는 것을 나도 꿈꾸고 나도 그 일에 동참해서 함께 하고 싶은 것.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들에게 그러한 주님과의 사랑이 마음에서 깊이 묵상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가 교회에 구속되고 예수님께 구속된 멍에를 맨 자들과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우리는 주님이 자기를 다 버려 구속한 가장 소중한 자요. 죄의 멍에를 벗은 가장 자유로운 자임을 고백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