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저희가 다루는 왕들의 이야기는 솔로몬 이후의 왕들입니다.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부터 아비야를 거쳐 아사까지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그 세 명의 왕들에 대해서 몇 가지 키워드를 정해서 주목할 사건들을 여러분과 나누며 그 안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나쁜 왕들의 전성시대” 르호보암이 왕이 된 때에, 그의 신하 가운데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워낙 건축을 오래 하다 보니 백성들이 상당히 피로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마치 회사의 오너와 노동자들의 노사 협정과 같이,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노역을 줄여달라고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백성들의 대표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돼서 이런 요청을 받으니까, 일단 한 번에 결정하지 않고 3일 뒤에 답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때부터 솔로몬을 도왔던 원로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이 원로 정치인들은 르호보암 왕에게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로들의 조언이
르호보암에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제는 자신과 함께 자랐던 젊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이때 젊은 신하들은 전혀 반대의 조언을 합니다. 한마디로 기선 제압을 하라는 것이죠. 자꾸 이런 것 들어주면 왕권이 서지 않으니 확고한 왕권 통치를 조언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합니다. (대하 10:14) 르호보암 왕은 젊은 신하들의 충고를 따라 백성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으나, 나는 이제
당신들에게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당신들을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셨으나, 나는 당신들을 쇠 채찍으로 치겠소." 그러나 이 판단은 백성들의 분노를 가져오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0개 지파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결국 르호보암은 솔로몬이 다스리던 풍요로운 왕권을 물려받았으나, 2개 지파만 다스리는 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대가입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남은 이 나라를 <남유다>라고 부르고, 10개 지파가 세운 나라는 <북이스라엘>이 됩니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다스렸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다스립니다. 이제 본격적인 분열왕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번에는 북쪽의 여로보암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나라가 갈렸는데, 이 당시의 분열왕국은 지금 우리처럼 분단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북왕국에 사는데,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자꾸 남유다의 예루살렘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로보암이 기분이 나빴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신하도록 북이스라엘의 벧엘과 단에 신전을 만들어버립니다. 무슨 신전이냐면 금송아지 신전입니다. 그러니까 여로보암 딴에는 이것이 솔로몬의 성전에 대응하는 예배처소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송아지를 섬기느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금송아지는 힘과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애굽의 신입니다. 즉 우리로 따지면 돈을 사랑하고 권세를 사랑하는
것이죠. 우리는 송아지 숭배를 하는 그들을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물질 만능주의를 살아가는 돈을 위해서는 신앙도 중요하지 않은 모습들이 바로 송아지 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로보암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사람들이 더 환영하고 반길 뭔가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어쨌든 우리에게도 종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씩 그냥 종교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뭘 믿던지 믿고 착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아량이 있고 대인배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아무거나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죠. 유일한 진리이죠. 유일한 생명의 구원자입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나쁜 판단으로 북이스라엘 전체를 우상숭배에 빠뜨리는 주범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여로보암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왕하 15: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15:24)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왕하 15:2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나쁜 왕들의 시대. 르호보암은 잘못된 판단으로 분열왕국을
만들었고 여로보암은 잘못된 판단으로 우상숭배를 가져옵니다. “신앙인의 지조” 제가 어린 시절 전도사님이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다 한발로만 걷는다면, 너는 거기서 그들과 다른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니? 아주 쉽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 두발로 걷는 게 옳으니까요.”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면서 사실 점점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님을 느낍니다. 남들이 다 Yes라고 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남들이 다 No라고 할 때
Yes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로 인해 내가 피해를 보고 희생을 하고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그 결단은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앙인이라면 신앙에 맞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환난 가난과 고난, 수고로움 속에도, 성도는 그 믿음을 지켰네 주를 섬기는 일에, 자신을 다 드리며,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 길을 걸었네 무슨 노래입니까? 성도의 노래입니다. 북이스라엘에 우상숭배를 위한 신전이 생깁니다. 기존의 여호와를 예배하던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북쪽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북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를 반대하며 제사장직을 박탈당합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제사장들이 따로 세워집니다. (대하 11:16-17)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한 모든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그들 조상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예배했다. 그들은 삼년 동안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곁을 지키면서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충실히 따랐다. 북에서 내려온 예배자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든 백성이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아 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분배받은 땅이 북쪽에 있었어요. 그러나 그 땅과 집을 버리고,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러 옵니다. 신자의 결단입니다. 신앙인의 지조입니다. 그들이 남쪽으로 와서 3년 동안 르호보암을 도와 종교 공동체 확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왜 3년일까요? 3년 후에 르호보암이 변절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었다” (대하 12:1) 르호보암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세력이 강해지자, 그와 온 이스라엘은 사실상 하나님과 그 분의 길을 버렸다.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로보암의 배교로 인해서 내려왔는데, 르호보암도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은 길을 갑니다. 하나님이 르호보암을 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방 나라의 침공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애굽의 왕인 ‘시삭’이 남유다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애굽은 유다의 요새와 성읍들을 빼앗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합니다. 르호보암에게 위기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서 이 사건이 가진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대하 12:5) 그 때에 유다 지도자들이 시삭에게 쫓겨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는데, 스마야 예언자가 르호보암과 지도자들을 찾아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내주겠다.'" 이것은 꼭 하나님이 시삭을 이용해서 치셨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 앞에 신실할 때 우리가 받는 것이 ‘보호’인데, 이제 어호와 하나님이 보호의
손길을 거두니 남유다와 르호보암에게 위기가 온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여호와 신앙을 버립니다. 그것이 이 일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소제목처럼,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었습니다. 르호보암에게는 여로보암으로부터 피해 온 예배자들이 합류해서 함께 한 3년이 기회였는데,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위기 앞에서 사실 하나님이 다시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이 일의 근원을 짚으신 것 자체가 기회를 주시는 것이죠.
심판이 목적이라면 그냥 치시면 되는데,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었는데, 르호보암이 이 기회를 잡습니다. (대하 12:6)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왕이 회개하며 말했다. “하나님께서 옳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 르호보암의 모습에 반응하십니다. “네가 뉘우치니, 멸망시키지는 않겠다. 다만 시삭을 통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의 왕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려움은 좀 당하지만, 르호보암이 회개했으므로,
그를 완전히 멸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41세에 왕이 되어 17년간을 통치합니다. 르호보암의 삶에 대한 최종 평가가 기록됩니다. 그는 악한 왕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분을 마음으로 찾지도 않았다. 역대하 12장 14절. “트렌드 보다는 진리” _ 아비야 남유다에서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아비야’가 왕이 됩니다. 이때 북쪽은 여로보암이 여전히 왕이었습니다.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남북전쟁입니다. 남쪽 아비야의 군사는 40만명, 북쪽 여로보암의 군사는 80만명입니다. 전쟁터에서 양측이 마주하게 되고, 이때 아비야가 북이스라엘과 여로보암을 향해 외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가 꽤나 인상적입니다. 먼저 그는 여로보암이 우상을 숭배하는 등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분을 최신 우상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버렸다. 너희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며 우리의 지도자이시다.” 메시지 성경의 표현인데요. “우리는 그분을 최신 우상으로 바꾸지 않았다.” 우리도 가끔 문명의 발달과 함께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이 최첨단 과학시대에 아직도 무슨 신 타령인가? 신이 했다던 창조 조차도 3D 프린터도 해내며, 인류의 생명의 비밀도 이제 다 밝혀서 복제 인간이 나오니 마니 하는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을 믿는 것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것 아닌가? 그랬던 인류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 하나를
막지 못해서 투쟁을 벌인지가 1년입니다. 어떤 뛰어난 의학도 과학도 아직도 이것을 해결할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기술이 모든 것을 이뤄줄 것 같지만, 그것이 할 수 없는 영역이 우리에게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풍요롭다고 하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자살을 하고 아파합니다. 행복과 평안은 돈과 기술로 만들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여로보암은 여호와는 광야에서 만나나 내려주는 신이고,
이제 농경시대에는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우상을 섬겨야 한다며, 트렌드에 앞서갔지만... 진리에서는 멀어져가고 맙니다. 우리 시대에도 트렌드가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부동산이 최고야. 가상 화폐가 나왔다가 들어가고. 이제 다시 주식 열풍으로 뜨겁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교회에도 트렌드가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이 유행하고, 또 저런 프로그램이 유행하고. 열린 예배가 유행했다가 셀 교회가 유행했다가, 이제 문학의 밤은 다 사라지고 새벽송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트렌드는 트렌드죠. 또한 진리는 변함이 없기에 진리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트렌드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던 남유다의 아비야가 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이 당연한 결과가 여러분의 삶에서도 당연한 선택과 당연한 결과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이 다른 남자” 마지막 다섯 번째 키워드는 ‘아사’ 때의 일입니다.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순으로 왕권이 이어집니다. (대하 14:2) 아사는 주 그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다. 아사는 선한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들을 없애고, 신성하게 여기는 돌기둥을 부수고, 음란한 종교의 목상을 베었습니다.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율법을 행하며 계명을 따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선한 왕이었는데, 유다에 우상숭배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얼마나 죄는 시도 때도 없이 파고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도, 존 파이퍼도, 이 시대의 우상이 ‘돈, 섹스, 권력’이라고 말하는데... 우리에게도
얼마나 이것이 교묘하게 틈타고 있습니까? 한번 이겼다고 영원한 승리가 아니라 우리는 계속 싸울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사 왕이 이렇게 올바른 일을 하시니까, 하나님이 그의 시대에 ‘평화’를 주십니다. 아사는 이것을 잘 알고 고백합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역대하 14:7입니다. “이 땅이 이처럼 평화로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모든 고난으로부터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에도 고난의 여정을
맞이하듯, 아사의 통치 때에도 이방의 침략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고난을 맞이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승리하도록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남유다를 침략한 세력은 에디오피아입니다. 성경의 명칭으로는 ‘구스’입니다. 에디오피아 군대는 100만, 유다는 58만입니다. 아사는 싸움을 앞두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주께서는 한번 돕기로 작정하시면 적군의 많고 적음이 문제 되지 않고 그들의 세력도 눌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성품을 신뢰하기에 이 큰 군대에 맞서 싸우러 나왔습니다. 한낱 인간들이 주께 대적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아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여러분이 마주한 고난에서도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사 왕 15년까지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행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큰 예배를 엽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 그들 조상의 하나님만 찾기로 언약을 맺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아사 왕 시대의
일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찾았고, 그분은 기다리셨다는 듯 그들에게 오셨다. 하나님께서 안팎으로 평화를 주셨다. 더없이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다!” 아사 왕 때에도 크고 작은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록되는 것이, 르호보암의 아내였던 태후 마아가 이야기입니다. 아사에게는 할머니죠. 태후 마아가가 아세라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아사는 자기 할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토막 내어 가루로 만들어
불살라 버립니다. 아사 왕은 선한 뜻과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신앙적 결단을 합니다. 그래서 아사 왕 35년까지 나라가 평안하였다고 기록합니다. 20년이 넘도록 평안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사 통치 36년이 되는 때...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침공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답을 알고 있습니다. 뭐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이 답이 여러분의 삶에서도 정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사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예전에 에디오피아 침공 때는 하나님께 기도했었는데, 북이스라엘의 침공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이웃 나라를 의지합니다. 저희가 앞에서 봤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잘못된 일을 행했을 때 뭘 주시죠? ‘기회’를 주십니다. 돌이킬 기회. 이번에는 선지자 ‘하나니’가 아사에게 나아갑니다. 하나니는 이전 에디오피아 침공 때의 일을 꺼내며,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음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니의 말을 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깨어 있어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데, 20년 동안의 평탄한 통치 안에서 그의 신앙이 약화된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죠. 고난에서 주님을 찾았는데, 평탄함 속에 신앙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깨닫게 하시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사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아사는 백성들을 학대하는 왕이 되어버립니다. 아사 39년. 그는 발에 병이 나서 위독하게 됩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고난의 순간입니다. 위기는 기회니까요. (대하 16:12)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이 되던 해에, 발에 병이 나서 위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플 때에도 그는 주님을 찾지 아니하고, 의사들을 찾았다. 그는 2년을 투병하고 죽습니다. 마지막 돌이킴의 기회마저 놓쳐버린 왕. 35년을 잘했지만, 말년에 그는 우리가 가장 닮지 말아야 할 모델로 추락하여 생을 마감합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5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3명의
왕의 통치 기간에 대해서 함께 살펴봤습니다. 나쁜 왕들의 전성시대가 있었습니다. 누가 더 나쁜가 경쟁하듯 악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신앙의 지조를 지킨 참된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선택합니다. 결단합니다. 신앙은 트렌드에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왕들의 이야기처럼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 기회를 잡고 돌이킨 왕도 있었고, 끝내 돌이키지 않은 왕도
있었습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은 끝이 다른 한 남자의 삶을 따라가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평탄함은 약인 것 같지만 때론 독이 되고, 고난은 독인 것 같지만 때로는 약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 무엇이 다가오느냐가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어떤 신앙으로 맞설 것인가 그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끝까지 주님을 붙잡고 끝내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