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당신도 부활을 보았습니다

2025-04-20 · 누가복음 2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복음서가 네 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관한 풍성함을 줍니다. 사복음서의 저자는 마치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4명의 화가와 같습니다. 만약 초상화가 어렵다면 놀이공원에서 캐리컬쳐를 그리는 네 사람을 기억해 보십시오. 동일한 한 인물을 보고, 4명의 작가가 각자의 표현 방식대로 그것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후에 하나의 캐리컬쳐 작품을 두고 그 인물을 상상하는 것과 4개의 캐리컬쳐를 보고 상상하는 것의

풍성함은 다르겠죠. 사복음서가 마치 그와 같은 풍성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중 누가복음을 강해식 설교로 다뤄왔고, 오늘이 열한 번째 설교, 누가복음의 가장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부활절은 누가복음의 관점으로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부활의 첫 증인 누가복음 23장의 마지막 부분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새 때 살펴본 강도 이야기나 백부장 이야기가 모두 여기에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인계받고 예수님의 장례를 행하는 이야기도 여기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개념으로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는 유대인들이 안식일로 지키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후 첫날, 즉 우리로 따진다면 주일 아침이 사흘째 되는 날 아침입니다. 부활 이야기는 바로 이 주일 아침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눅 24:1)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눅 24:2)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나간 것을 보았다. (눅 24:3)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요한을 제외한 남성 제자들은 대부분 다 도망쳐 숨어버렸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죄명이 반란죄에 해당하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반란에 동조한 인물들로 엮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 염려는 남성 제자들에게 더욱 많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별개로

복음서의 기자들은 여성 제자들의 용기와 신실함에 주목합니다. 가장 위험한 순간에도 예수님의 곁을 지켰고, 결국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부활의 아침에 여성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방문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이 일에 관해 설명해 줍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라.”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무덤에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일을 진짜 일어날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현장에서 천사들이 말씀에 대해서 일깨우자, 다시금 말씀을 기억하여 붙들게 되었습니다. (눅 24:8)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눅 24:9)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눅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눅 24:11)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말씀을 잃어버렸던 여인들이 다시 말씀을 회상하여 붙잡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한 걸음 내딛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기쁜 마음으로

열한 명의 사도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아직 절망과 상실감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쉽게 믿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이 부활 이야기를 다루며 주목하는 것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히 부활의 사건을 기술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주목합니다. 우리도 그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은 점차 확장되어 갑니다.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신 그 다음 대상은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누가복음이 주목하는 독특한 이야기입니다.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열두 사도는 아니지만 그보다 좀 더 넓은 범위의 제자 그룹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야기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었죠. 또한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을 안기는 사건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잃은 상태로 그들은 걷고 있습니다. 그 방황의 여정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눅 24:14)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눅 24: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눅 24: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묻습니다. “당신들이 주고받고 있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러자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이 며칠 동안 거기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른단 말입니까?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인데, 그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벌써 그것이 사흘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니, 시신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전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동료들이 무덤에 가보니, 진짜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군요. 그가 진짜 메시아라면 마땅히 그 고난을 받은 후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글’은 당시에 주어진 구약 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본문으로 그것을 풀어주시며,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경공부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자신들과 동행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의 상태가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있죠. 아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 전혀 없었기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동행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있는 절망과 슬픔의 감정이 그들의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공부입니다. 말씀을 통해 가르쳐 깨우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마주 앉아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주십니다. 마치 성찬과 같이 떡을 떼어주실 때, 드디어 그들은 자신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떡을 베푸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설교는 들리는 말씀의 시간이요, 성찬은 보이는 말씀의 시간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이제야 진리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들을 깨우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떠나가십니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고백을 저는 참 좋아하는데요.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여러분은 말씀으로 인한 이런 변화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말씀이 주는 놀라운 힘. 충만함.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런 일 말입니다. 저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힘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믿습니다. 단순히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진리를 마주하게 되는 그 기쁨. 그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크나큰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무언가 특별한 경험을 갖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뭔가 경험이 하나씩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뭔가 그런 경험이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함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경험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삶이 아니라, 함께 하고 계신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자신들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없으니 그 경험을 해석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말씀 안에서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자, 그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그제야 이해하며 누리게 됩니다. 우리교회의 설교는 매우 성경공부적인 설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매우 재미있고 신나는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긴 설교 시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하면서 종종 겪는 일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귀가 열리고, 이해하더니, 변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입니다. 주일설교로 성경 66권 전체를 설교하겠다는 결심이 올해면 성취됩니다.

제가 여전히 믿는 것은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혹시 주일에 예배를 와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느끼실 때가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경험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때 필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예배를 진심으로 사모하며 기도하십시오. 헐레벌떡 간신히 와서 예배하는 것과 차분하게 그날의 본문을 읽어보기도 하고,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예배에 대한 사모함은

예배에 오는 시간에서부터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찬양의 시간을 잘 보내셔야 합니다. 찬양을 통해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과 나의 간격을 좁히는 것입니다. 혹시 모르는 찬양이라도 가사를 되새기며 그것이 고백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이때부터 나를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나의 감정, 컨디션 등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시간을 위한 길을 만드는 법입니다. 전심으로 찬양하면 찬양에는 힘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과 마주 서게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집중하고, 예배자로서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설교의 시간은 설교자도 최선을, 청중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지성을 말씀을 깨달아가는데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롭습니다. 때로는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지만, 때로는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지성도 필요하지만 깨끗한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간절함, 신실함, 열린 마음. 설교를 하다보면, 눈동자만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주 사랑하는 사람들이죠. 말씀에 대한 태도가 눈에 나타나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설교가 미치는 힘이 큽니다. 말씀을 잘 먹었다면 소화를 잘 해야 내 영양분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난 후에는 그 가르침에 나를 헌신하고 결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대한 결단의 찬양을 하면서 말씀과 내 삶을 연결시키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예배 후의 소그룹 나눔은 그것을

공동체와 나누며 서로가 더욱 풍성한 은혜를 얻고, 또한 응원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보십시오.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주일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내 삶으로 승화해 낼 때, 우리가 진짜 예수 따르미가 되는 것입니다. 문명의 발전으로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설교를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설교 전체 원고도 공유합니다. 그렇게 말씀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마음이

채워지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태도가 우리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진리가 주는 힘과 위로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한 삶을 사모하십시오. 오늘도 여러분이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나아가면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3. 제자 공동체 누가복음의 부활 경험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확장됩니다. 여인들에게서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그리고 이제 제자 공동체로 확장이 됩니다. (눅 24: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눅 24:34)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눅 24:35)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눅 24:36)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여기 모여 있는 제자 공동체는 열한 사도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포함한 더 넓은 그룹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이들이 후에 오순절 성령강림의 주역이 되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의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무에게나 자신을 보이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모두 이미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새로운 사람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었던 사람, 이제 말씀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상실감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회복시키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무나 만나고 다니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빌라도나 대제사장에게 나타나서 “봐라, 내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말하고, 주님을 믿지 않은 수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서 부활을 증거하고 다녔다면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예수를 믿겠다고 했겠죠.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며 늘 경계하셨던 것이 기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진리를 듣고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원하시지, 시각적 충격에 따른 복종을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부활의 경험은 신앙인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원하시는 믿음도 동일합니다. 어떤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글자에 불과한 성경의 기록이지만, 그것을 읽고 듣고 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살아 숨쉬며 나를 바꾸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기독교의 가장 놀라운 신비입니다. 간증은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 초대교회로부터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러므로 간증을 나누는 것은 서로의 신앙에 있어서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극적인 경험만을 강조한 간증이 반복될 경우, 신앙이 체험 중심의 불균형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냥 말씀 앞에서 힘쓰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고백되는 것이 저는 좋은 간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삶의 평범한 자리에서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굳게 붙들며 믿음의 비범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목표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시어 그들에게 나누셨던

모든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이제 그 말씀의 요구에 따라 그들이 살아가도록 다시 힘을 주십니다. (눅 24: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눅 24: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눅 24: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눅 24: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눅 24: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이것이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하여 다루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부활 사건의 강조점이 보이십니까? 부활 사건은 말씀을 누리는 삶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신자가 주 앞에서 말씀을 다시 붙들고 말씀의

힘으로 일어서면, 그것이 그들이 부활을 누린 것입니다. 무덤가의 여인들에게 천사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눅 24:6) 말합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반응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눅 24:8)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는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설명하여 주십니다(눅 24:27). 그 결과 그들의 반응은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거웠다.”(눅 24:32)는 고백입니다. 오늘

더 큰 제자 공동체에게 찾아오셔서는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말씀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눅 24:45) 그러자 예수님의 등장에 대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의 마음이 변하여,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합니다(눅 24:52). 결국 부활을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말씀을 기억하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그들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부활 사건이라고 하면

단순히 기적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의 핵심은 그들이 들어왔던 말씀이 그들에게 진리가 되어 작동하도록 하시는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결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하시는 중요한 말씀이 이것입니다.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제가 누가복음 초반부 설교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시험 사건의 순서가 다름을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서의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왕권’이,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 중요한 강조점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마지막 명령은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도시 예루살렘이 포인트가 아닙니다. 바로 성령이 포인트입니다. 성령에 대한 약속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부활 이야기의 핵심 결론은 그들에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기억나고

생각나고 그들을 붙잡게 하는 것이며, 주님이 약속하셨던 성령을 기다리라는 당부입니다. 부활을 누리는 삶의 핵심은, 성령을 누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성령을 누리는 삶이, 부활을 누리는 삶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을 누린 사람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전에 가르치신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신 것을 누린 사람입니다. 즉, 말씀을 붙들게 된 사람들이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일도 동일합니다. (요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성경이 참 놀랍죠. 말씀은 놀랍도록 일치성을 가지고 연결됩니다. 저는 이런 부분을 보면 막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왜냐하면 저는 부활을 보지 못했지만, 저는 성령을 통해 부활을 누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에 대해서도 오해합니다. 성령을 신내림쯤으로 생각하거나,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와 같이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아예 인격체가 아니라, 나에게 임하는 불과 같은 어떤 능력이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도 바르게 배울 수 있고, 배워야만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늘 교정되고, 수술되고, 점점 더 오해에서 이해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원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는 2부작 기록입니다. 동일한 저자가 연결되는 책을 쓴 것이죠. 예루살렘에서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고, 그에 순종한 신실한 제자 그룹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 결과 그들이 무엇을 합니까? 진리의 증언자가 됩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고백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복음의 증인으로 땅끝까지 나아가는 일을 하게 됩니다.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은혜는 그러므로 말씀의 확신을 얻고 마음이 회복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성령님이 동행하시며, 그들의 삶을 말씀에 합당한 삶으로 이끄시며,

그 삶을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의 증인 된 삶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혹시 부활절이 되면, 늘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을까?” 이것을 어떤 기적에 대한 유무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접근하시며 믿음과 의심 가운데 괴로워하셨던 분은 없으십니까? 저는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냥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그 모든 말씀을 믿지만, 현실의 문제 앞에서

넘어졌던 자들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회복되고, 용기를 얻고, 평안을 누리고, 예수님이 하시던 그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어받아서 하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것을 ‘부활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말 본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믿을 수 있는 만큼 믿으십시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로마의 박해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 숨고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떤 계기로 갑자기 세상에 나와 자신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외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팩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배신했던 사람도, 자신이 따르던 스승이 십자가에서 죽자,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던 사람도, 절망과 슬픔 속에 있던 사람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전보다 더 뚜렷하게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으며,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슬픔이 아닌 기쁨의 충만함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변화를 믿지만,

동시에 사람이 변화되는 것에는 정말 납득이 될만한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제자들의 변화를 볼 때,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거나, 혹은 그 정도의 임팩트가 있는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들에게 나타난 일을 해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기적을 믿는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또한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초자연적 사건을 억지로 납득하려 애쓴다는 뜻도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신자들에게 이 부활은 오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런 도전과 변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첫째,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다시 붙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부활의 전 과정을 통해 반복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기억하라”, “말씀을 풀어주시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다.” 무덤가의 여인들이 말씀을 기억하고 절망에서 빠져나왔고, 엠마오의 제자들이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고,

제자 공동체가 말씀을 깨달을 때 비로소 증인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인생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을 통해 다시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십시오. 내게 주셨던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붙드십시오. 그 말씀대로 살아가십시오. 둘째, 내 삶의 현실 속에서, 다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다시 삶의 방향을 찾고, 다시 사명을

붙잡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을 절망에서 ‘일으켜 세우는 사건’이었고, 그 사건을 믿은 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의 실패, 두려움, 상처, 고통의 자리에서도 다시 믿고, 다시 걸어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여러분이 넘어져 있는 부분, 무너진 부분이 있습니까? 다시 일어나십시오. 다시 일으키십시오. 그것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과 동행하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은 믿음 안에 다시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건입니다. 보고, 깨닫고, 그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부활을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자들, 삶으로 살아낼 자들에게 보이셨고, 그들을 세상 가운데 복음의 증인으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는 이제 나의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겠습니다”라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그 증거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달라지고 있는 나의 삶을 감사하며, 그것을 기뻐하며 고백하며 나누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라는 의미가 ‘다시 살아나는 삶’인 것처럼, 우리가 오늘의 말씀에 힘입어 다시 살아난다면, 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본 것이고, 그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무너졌던 신앙이 다시 일어나고,

메말랐던 기도가 다시 살아나고, 무기력했던 사명이 다시 불붙으며, 나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부활에 참여한 자의 삶이며,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부활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부활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말씀이 살아나고, 믿음이 다시 일어나고, 증인의 사명이 다시 불붙는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도 보기 원합니다. 누리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과 예배 안에서 부활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