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그녀는 누구를 사랑했을까?

2025-04-27 · 아가 1~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여러분과 제가 함께 다룰 설교의 본문은 흥미로운 본문입니다. 바로 <아가서>입니다. 한번 가지고 오신 성경에서 아가서를 찾아서 펴보십시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구약 960페이지 정도에 있습니다. 아마도 설교본문을 설교자가 매주 자유롭게 정한다면, 아가서를 강해할 일은 거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설교 본문으로 잘 만나기 어려운 설교입니다. 사실 우리교회는 2019년에도 매일성경 본문으로 <아가서>를 만나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함께 하셨던 분은

약 30명 정도였으니, 대부분의 분들에게는 오늘 말씀이 사실상 처음으로 들으시는 아가서 설교일 것입니다. 아가서는 가장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약 39권이 결정될 때, 가장 논쟁이 심했던 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율법, 구원에 대한 언급이 이 책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주제 또한 독특합니다. 하지만 랍비 아키바는 ‘이 책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책’이라고 말하며 강력히 옹호했습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사랑을 상징하는 책으로 인정되었고, 무엇보다 유대 공동체 안에서 유월절에 낭송되었던 기록 등의 전통이 있기에, 결국 치열한 검증 과정을 통과하여 구약성경의 한 책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미 정경 채택의 시기로부터도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으므로, 그 이후에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고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면 저는 그것을 성경의 능력으로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치된 견해로 정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모든 교회가 동일한 신앙적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유대인들 안에서 아가서는 ‘19금’ 책으로 분류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단독으로 읽기보다는 ‘랍비’라고 불리는 신앙교사의 지도 아래에서 해석을 들으며 읽어야 할 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전통에서도 공적인 자리에서 아가서를 해석 없이 읽는 것은 조심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혹시 매일성경이나 원데이원바이블로 아가서를 묵상하거나 읽었다면,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난해함에 대해서

공감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묵상해서 적용해야 할까. 해설을 곁들이지 않으면 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그토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온 이 아가서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지, 함께 그 길을 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두 가지 해석 아가서를 해석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집니다. 보다 전통적이고 여러분도 들어봤을 해석은 ‘두 인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견해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세 인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인 사이의 삼각관계로 아가서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먼저 전통적인 입장에서 아가서의 전체 내용을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간단한 편입니다. 아가서 내의 남자는 ‘솔로몬 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술람미 여인이라는 솔로몬의 사랑 대상입니다. 두 사람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

또한 조금은 직설적인 성적 친밀감, 애절한 그리움 등이 아가서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 혹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을 풍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전통적 해석 방식입니다. 이 경우, 사랑과 결혼의 거룩함을 찬미하는 이야기로 아가서는 해석됩니다. 이 해석의 장점은 쉽고 상징적입니다. 결혼과 사랑을 존귀하게 바라보는 데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의 단점은 모든 구절을 상징과 신학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적으로 아가서를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6년 전의 아가서 첫 설교는 <두 남녀 이야기>의 관점에서 설교했는데, 두 번째로 아가서를 설교하는 만큼, 오늘은 <세 인물 해석>의 조금 더 주요한 관점으로 삼아서 아가서의 메시지를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번역은 이미 한번의 해석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어 성경은 <두 인물 이야기>의 입장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원어인 히브리어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본문을 그대로 보면, 세 인물로 봐야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습니다. 약 200년 전부터 제시된 해석의 관점입니다. 어떤 해석의 관점이 나름의 지지를 얻은 하나의 입장으로 자리 잡으려면 적게는 수십 년, 많게는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고민하고 나름 합당한 하나의 관점이라는 지지가 있을 때, 하나의 해석적 관점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세 인물 이야기>의 해석 구도는 이렇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동일합니다. 다만 술람미 여인이 진짜 사랑하는 참된 사랑의 대상은

‘목자’라고 부르는 한 남성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권력자, 유혹자, 헛된 화려함의 상징과 같은 남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람미 여인과 목동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삼각구도를 만들며 여인을 유혹하는 구도로 아가서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아가서 첫 부분부터 조금 열린 해석이 필요합니다. (아 1:1) 솔로몬의 아가라 두 사람 이야기로 볼 경우에는 ‘솔로몬이

지은 노래’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세 사람 이야기로 볼 경우, 이 시작구에 대해 2가지 견해가 존재합니다. 우선 ‘헌정’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 혹은 ‘솔로몬에 관하여 지어진 노래’라는 의미이죠. 이러면 솔로몬의 사랑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아가서는 시작하게 됩니다. 다른 견해는 아예 반어법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솔로몬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 아니라는 반어법적 제목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잘~ 했다’와

같은 시작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아가서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봅시다. 2. 아가서 톺아보기 (아 1: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아 1: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아 1: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여기서 ‘왕’은 솔로몬이죠. 그리고 여인이 왕궁에 들어가게 된 상황입니다. 5절의 ‘검으나 아름답다’는 것은 이 여인이 왕궁의 여자가 아니라, 시골 여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7절이 바로 여인의 진짜 연인인 목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자’라고 나오죠.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는 곳을 내게 말하라’는 것은, 지금 몸은 궁에 와 있지만, 여인의 마음은 자신이 사랑하는 목자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 2:8)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아 2:9)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아 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아 2:17)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아마도 여러분에게 아가서 내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이 부분일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솔로몬은 왕궁에 있는 데 반해, 여인이 바라보는 존재는 자유롭게 들판을 달려오는 목자입니다. 여인은 그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죠. 즉, 이러한 대조를 통해 왕궁의 화려함이 채워줄 수 없는 참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묘사하는 구절과의 온도 차이는 그것을 극대화합니다. (아 3: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아 3:7)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아 3: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아 3:9)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아 3:10)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구나 (아 3: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솔로몬의 행차는 화려합니다. 용사 60명이 그를 호위합니다. 향품과 금장식으로 그의 가마는 꾸며져 있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부와 권력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여인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결정해야 합니다.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아 5: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아 5: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아 5: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아 5: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아 5:8)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현재 궁에 와 있는 여인을 사랑하는 목자가 찾아옵니다. 밤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6절을 보면, 망설이는 사이 둘은 만나지 못하고, 목자는 돌아갔습니다. 급히 후회하며 여인은 거리로 나아가 그를 찾지만 끝내 만나지 못합니다. 여인은 궁전에 있는 솔로몬의 삶에서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여전히 목자를 찾습니다. 내면의 갈등과 갈망이 엿보입니다. (아 6: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아 6: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아 6: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아 6: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아 6:8)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아 6: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아 6: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아 6: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아 6: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아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솔로몬도 여인을 사랑합니다. 앞부분은 그런 솔로몬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8절을 보면 이미 솔로몬에게는 왕비가 60명이고, 후궁이 80명이며, 시녀는 무수히 많습니다. 9절을 보면 그럼에도 술람미 여인을 매우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 나타나지만, 현실은 여러 왕비나 후궁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왕비나 후궁의 자리를 거절합니다. 13절을 보면 여인의 마음이 사랑하는 목자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녀는 왕궁의 여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한

남자의 사랑하는 아내로 살아갈 것을 선택합니다. 그녀의 갈등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아 8: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여인은 마침내 참사랑의 가치와 깊이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아가서가 노래하는 이 참사랑은 권력이나 부도 살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온 가산을 다 주어 사랑을 얻으려고 해도, 사랑은 그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아가서의 전체적인 내용을 세 인물의 관점으로 볼 때, 분명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 해석이 오히려 덜 상징적이고 더 현실적이어서 아가서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하나의 이야기로 읽게 합니다. 이쯤 되면, 다시 두 인물 해석에서는

위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해지시죠?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렇게 재미있는 일입니다. 간단히만 비교해서 설명하면, 두 인물 해석에서는 솔로몬의 프러포즈에 여인이 화답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솔로몬이 여인을 궁전에 초대하자 여인이 겸손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사랑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달려오는 목자의 이미지는 왕이지만 순수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솔로몬의 모습을 여인이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화려한 행차는 왕의 혼례식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고, 여인이 그 대상으로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왕궁에 있을 때, 문을 두드린 것도 솔로몬의 방문이고, 여인이 그것을 거절했다가 후회해서 찾아 나서는 장면으로 봅니다. 이는 두 사람 사이의 사랑에도 긴장과 시련도 있고 그리움도 존재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왕비와 후궁이 나오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술람미 여인이 가장 특별하다는 솔로몬의 고백으로, 마지막 장면은 여인이 솔로몬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강조하며,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하면 ‘참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두 관점에서 모두 동일합니다. 다만 세 인물 이야기는 ‘현실적인 유혹’이라는 측면이 하나 더 등장해서, 그 유혹을 이겨낸 사랑이라는 의미가 한 겹 더 강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솔로몬에 대한 성경의 평가도, 역대기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열왕기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에, 아가서가 솔로몬을 긍정적으로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모두

가능합니다. 만약 아가서가 열왕기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 서 있다면, 솔로몬이 가진 부와 명예와 성공은 가장 경계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로 보게 됩니다. 세 인물 해석에서 여인을 하나님과의 사랑을 추구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이해한다면, 솔로몬의 유혹은 바로 그런 유혹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아가서의 신학적 메시지 아가서가 ‘참된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선 그만큼 우리가 ‘참된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의 관계는 창세기 1-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만나기 이전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 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맡길 수 있는 온전한 사랑의 관계라는 것의 의미합니다.

수치심이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이 선악과를 먹은 후,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자기들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 가렸다는 것은 이제 아담과 하와 두 사람 사이에서도 수치심을 느끼는 어떤 관계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숨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이전과 다른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 3장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가

모두 망가지고 깨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까 아담은 하나님께서 선악과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시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즉, 이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를 잃어버렸을 때, 우리의 고갈된 마음은 남탓을 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 밖에서 원인을 찾는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에서 사람은 늘 경쟁합니다. 가장 사랑하겠다는 부부 사이에서도 은근히 서로가 우위를 차지하려는 그런 모습이 바로 깨어진 우리의 단면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참으로 많은 문제를 겪습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종종 이기적입니다. 남탓만 합니다. 먼저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도권 싸움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릴 때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죄로 망가진 본성적 태도입니다. 연인 사이에서는 어떻습니까? 상대방을

나 중심적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줄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끌고 가기 위해서 가스라이팅도 하고,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데이트 폭력도 발생합니다. 그런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참된 사랑을 할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에 굉장히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이 남녀 간의 ‘성’입니다. 성경은 ‘성’을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연합’의 방식으로 주십니다. 그래서 부부가 한 몸이 되라는 의미는

성적 연합을 의미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서로에게 풍성히 채워주도록 하신 방식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적 연합’에서 중요한 것은 ‘섬김’의 마음입니다. 나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 곳곳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내 욕망의 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의 아들인 ‘암논’이 그런 예시이죠.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헌신과 섬김, 그리고 기다림과 절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을 ‘부부 관계’에서 잘 사용하는 것을 가르치고, 혼전순결과 동시에 혼후순결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축복인 ‘성’을 잘 사용하면 하나님이 주고자 하신 사랑의 관계를 누리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면 우리의 삶과 관계 안에 깊은 상처를 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 안에서 혼전순결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단순히 율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성의 사용법에 대한 순종의 마음이며, 그렇게 결혼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는 동일한

태도로 혼후순결 혹은 혼외순결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지켜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관계와 욕망도 하나님의 뜻 아래 두겠다는 훈련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가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주신 사랑의 아름다움을 다시 일깨우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아가서는 에덴에서의 깨어지기 전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떠올리게끔 합니다. 아가서에는 ‘동산’이라는 표현이 일곱 번 등장합니다. 다양한 꽃과 나무와 새, 동물, 시냇물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마치 창세기 2장이 그려지는 푸르른 정원이 아가서의 배경이고요. 새 생명이 땅에서 나오고 하나님 안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던 깨어지기 전의 관계가, 아가서에 회복된 듯 등장하고 있습니다. 남녀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극찬합니다. 이들에게 어두움의 모습은 없습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서로를 탓하지 않고 인정하며 선함을 경축합니다. 창세기에서 첫 부부이자 사랑의 관계였던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잃어버렸던 그것을 마치 회복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 아가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됩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나오는 부부이자 연인인 이들도 서로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트슈카(히브리어) : 원하다, 사모하다, 욕망하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 7: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창세기 3장은 죄가 들어온 이후

상황입니다. 이때는 깨어짐의 모습 가운데 ‘원하고 사모하고 욕망함’을 의미한다면, 아가서에서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남성이 여성을 사모하고 원하는데, 깨어진 관계가 아니라 회복된 관계 안에서의 ‘사모함’을 의미합니다.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창세기에서는 불균형과 지배의 욕망으로 나타났다면, 아가서에서는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가서의 이야기는 창세기 3장의 죄로 인한 깨어짐이 극복되고 회복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유혹과 방해가 있는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꿈으로 소망하게 만듭니다. 마치 약육강식의 세상이 된 오늘날 세계가 망가진 것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그것과 대비되는 사자와 어린양이 뛰노는 세계로 묘사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갈망하고 소망하듯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죄로 인한 깨어짐이 우리 모두 안에 있어서, 가장 사랑해야 하는 관계에서도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과

죄된 본성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서 배우듯, 그 모든 관계는 참된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회복되는 것이며, 그분으로부터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하는 사람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가서는 바로 그러한 우리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며 맺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가서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해보고자 오늘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가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는 성경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특별히 3인 이야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혹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상의 거대한 힘과 유혹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내밀고 있는 손이 커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영혼을 진정으로

만족시켜주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그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참사랑', 진실한 한 사람을 갈망했듯, 우리의 영혼도 진정한 사랑을 찾고 있습니다. <세 인물 이야기>로 아가서를 이해하는 사람은 목자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왕이 아닌, 들판의 목자로 오셨고, 화려한 유혹보다, 찾아와 문을 두드려 주셨죠. 아가서의 목자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를

진짜로 행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공급받는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얻습니다. 그분과 멀어질 때,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극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에 익숙하게 되고, 서로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위를 점하며,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관계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사랑을 배워야,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소중한 가치를 따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설교를 통해 여러분을 찾고 부르십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검으나,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깨어졌던 관계, 상처받은 마음, 외롭고 지친 영혼을 향해, 다시 사랑하자고, 다시 회복하자고, 다시 걸어가자고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아가서를 통해 이렇게 말하십니다.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그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다.” 오늘 그 사랑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가까이에 계시는 그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