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

2025-04-13 · 누가복음 22~23장 · 박예진 전도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어, 오늘은 교회력에 따르면 종녀 주일에 해당하는 날인데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년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것에서 유리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 그리고 이 종료주일 다음 날부터는 예수님께서 어, 고난받으시고 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이 이어집니다. 이런 교회력의 흐름과 또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메일 성경의 순서에 따라서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도 예수님의 순환에 대한 것입니다. 어

지난 설교에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길 그분의 이동 경로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어지는 어 로드무비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어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경로에는 예수님만 계시지 않았죠. 예수님 외에 그 길에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있었습니다. 오늘의 제목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저는 오늘 크게 세 가지 유형을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이익을 추구한 사람들의 유형입니다. 어 특별히 이들은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간접적으로든 또는 직접적으로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죽음에 가담한 사람들이죠. 혹시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는지 예상이 되시나요? 어, 저는 오늘 본문에서 가련 유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빌라도가이 유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가른 유대의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요? 여러분, 유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가련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미워한 사람이었나요? 다른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과 어떤 적대적인 관계이 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가 나는 예수를 언젠가 한번 크게 골탕 먹일 거야라는 마음으로 스파이처럼 잠입한 거였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어요. 예수님과 함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또 3년이나 주님을 따라다녔던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롯이라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줄지를 의논하였다. 네. 복음서에는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기록되어 있는데요. 오늘 살펴보는 누가복음에서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그가 예수를 팔아넘겼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탄이 들어갔다는 건 어떤 걸까요? 어,이 말씀을 언뜻 보면 마치 유다는 원래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는 그런 생각이 일도 없는 선한 사람이었는데 마치 갑자기 악령에 이끌려서 어쩔 수 없이 주님을 배반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거 같아요. 마치 우리가 가끔 공포 영화에서 보면 악령에 쓰인 사람이 어떤 자기의 몸을 통지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죠.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누가복음 오늘 우리에게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유다의 배신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들을 함께 살펴보면 이거 외에도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에는요. 유다가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가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와요.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 주면 여러분은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넘겨 주면 대체 나에겐 어떤 것이 유익이죠? 나는 뭘 얻어낼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는 거예요. 이런 그의 물음에 지도자들은 그에게은 30을 약속해 줍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노리기 시작해요.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는 돈을

향한 그의 탐욕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의 탐욕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어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어요. 어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유다의 배신 이야기 바로 앞에 향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아주 곡가의 향유를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것을 주님께 부었죠. 예수님은 그 여인이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아주 많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니 이렇게

비싼 향유를 고작 이렇게 허의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아 차라리 그걸 팔아서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았다면 그게 더 유익이었겠다. 그게 더 나았겠다라고 그녀를 핀잔 주죠. 그런데 어 요한복음에서는 그 제자들 중에서도 유다를 더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꾀를 막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라.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데 보이지만 사실은 향유를 아까워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뒤어지는 기록은 유다가 공금을 몰래 훔쳐가는 그만큼 돈에 취약한 어떤 돈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그리고 마치 그 향유를 부은 그 사건이 유다에게 도화선이 된 것처럼 뒤어 그가은 30에 예수님을 파는 장면이 전개됩니다. 이런 누가복음과 다른 복음서들의 기록을 함께 같이 살펴보면 아 유다의 배신은 어떻게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전부터 그 안에 가지고 있던 어떤 돈에 대한 욕심, 탐욕 그런 것들을 작동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표면적으로 알 수 있는 유다의 배신의 이야기예요. 어 그런데 여러분 이것만이 진짜 이유였을까요? 유다는 정말 돈의 눈이 멀어서 자기의 스승을 팔았을까요? 그렇다고 단정짓기엔 조금 애매한 부분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유다가 배신의 대가로 받았던 그은 30의 갑어치가 우리가 납득하기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은은 30 또 정확히는 성경에는은 30세겔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의

금액이었을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유다가 얼마 정도의 금액을 대가로 예수를 팔았을까요? 당시에 이것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작은 텃밭 하나 정도를 살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아주 거금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마냥 적은 돈이다라고 보기도 좀 어렵지만 당시 예수님의 인기를 생각해 본다면 다소 적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주 열렬한 지지를 받는 아주 인기쟁이었어요. 아주 스타였다는 거죠.

그런 상황과 또 종교 지도자들조차 그렇게 힘이 있는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유다는 얼마든지 더 높은 금액을 요구할 수 있죠.은 30이 아니라 300을 요구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유다는 그냥은 30에 만족하고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아 넘겼을까요? 어, 이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가 조금씩 다르긴 한데요. 대부분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어, 제가 오스본이란 학자의 저설을 한번 발치해 봤습니다. 그가

예수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겨 주려는 의도는 본문 안에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를 넘기는 대가로 돈을 흥정했고은 30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다의 배반 이유가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는 예수께서 제시한 메시아상이 자신의 기대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께 대한 극심한 실망감에 빠졌고 그 결과 그를 배반하게 일어넣는지도 모른다라고 어 학자들은 대부분 주장합니다. 어쩌면

당시에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유다 또한 예수님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줄 구원자 또는 국가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아주 유능하고 탁월한 지도자를 기대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예수님 곁에 살면서 어 한 자리 차지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 그 옆에서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자신이 더 예수님과 함께 높은 자리에 가겠다고 다두는 장면이 어 소개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유다는 자신 안에 있던 이런 예수님을 향한 기대들 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이런 걸 내가 얻을지도 몰라 내가 이런 걸 누리게 될지도 몰라 했던 그런 기대들 또 그것을 통해서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것들을 거느리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유다의 마음 같나요? 마음 같지 않나요? 마음 같지 않아요. 유다 마음 같지 않은 행동만 자꾸 하시는 거예요. 유다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크고 작은 실망들을 했겠죠.

자신이 기대했던 것들,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누리고 싶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일 때 그는 예수를 넘겨 주는 결심을 합니다. 어, 이건 제가 추측해 보는 유다의 마음인데요.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해서 팔아넘기지만 이후에 정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그가 다시 돌아오거든요. 그러면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받았던 돈을 던지고 후회하고 뉘치며 어 돌아가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어 이런 유다의 모습을 볼 때 어쩌면 유다는

예수님을 죽이게 하고 싶은 그런 마음까지는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뭔가 팔아 넘겨서 예수님께 어떤 고난이 닥치긴 하겠지만 내 스승을 죽음에 넘겨 줄 마음은 없었던 거 같아 보입니다. 다만 아 내가 예수님 옆에 있으면 이 정도는 좀 얻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이 지내면 지낼수록 그게 점점 아닌 거 같아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아 내가 헛다리 짚었다.이 사람 따라다니면 더 많은 거를 얻는게 아니라 나 가진 것도 다 버려야 되겠구나. 나 이제 예수

못 따라다니겠다. 그런데 마침 그때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막 찾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떠날 때 떠나더라도 그래은 30도 내가 챙겨 가야지. 뭐요 정도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저의 생각입니다. 어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유다 안에는 분명히 어떤 부정적인 마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탄은 그것을 정말 말 그대로 귀신같이 알아채서 이용해서 예수님을 배신하도록 했다는 것이죠. 그게 돈에 대한 욕심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유다에겐 부정적인 마음이 조금도 없었는데 사탄에 이끌려서 그가 원하지도 않던 선택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사탄이 들어갔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저는 이것이 어 유다가 가지고 있던 그의 그릇된 마음을 사탄이 옆에서 구축인 거라고 생각해요. 사탄이 유다에게 애초에 없던 마음을 생기게 해서 조종하거나 아니면 유 어 그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데 그거 강제로 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약점과 그 안에 아직 해결되지 않았던 회복되지 않았던 어떤 그릇된 마음에 따라서 그가 죄를 짓도록 부추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사탄이 유다에게 있던 탐욕을 이용해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라고 기록해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 보면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의 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실패하게 하려는 사탄의 열심도 있어요.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할까요? 우리를 어떻게 자빠들이려고 할까요? 유다의 예수님을 향한 실망,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었던 욕심 등을 옆에서 살살 부추여서 그를 넘어뜨렸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약한 부분과 그릇된 마음들을 이용하고 부추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탄이 절대 우리가 하기 싫은 죄를 억지로 짓게 하거나 우리에게 없었던 어떤 악한 마음을 생기게 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사탄은 우리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던 어떤 탐욕, 미움,

시기, 나태함, 불평, 불안등을 부추여서 우리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넘어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마음이 애초에 없으면 좋겠죠? 사탄이 걸고 넘어질 만한 마음이 우리 안에 없으면 참 좋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런 방법을 모릅니다. 순간 미운 마음이 드는 걸 어떡하겠어요? 나도 걱정하고 싶지 않아요. 염려하고 싶지 않은데 내 앞에 있는 이 상황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는 걸 우리가 무슨 수로 맡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마음을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에 머물러 있을지 그 마음에서 떠나 주님 앞에 머물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유다에게 이런 생각을 불어넣어서 그를 부추였던 것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도 우리의 생각을 통해 우리를 도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성경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보해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자꾸만 악한 생각을 막 불어넣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이 더 활르도록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욕심이 더 장성해지도록 막 생각을 부추여요.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에서부터 더 멀어지게 하죠. 그러나 동시에 한편에서는 성령 하나님도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계속 생각나게 하십니다. 설교를 통해서 나눔을 통해서 우리가 나눴던 말씀을 막 떠오르게 하세요. 그러면서 하나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돕고 계시죠. 여러분,이 두 생각과 두 마음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건지는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저는 가른 유다에도 분명히이 갈등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탄이 불어놓은 생각도 그 안에 있었겠지만 예수님과 3년을 함께 했잖아요. 적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통해서 들었던 말씀들 그것도 아마 떠올랐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부딪히는 갈등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갈등에서 사탄이 불어넣어 주는 그 선택을, 그 생각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이죠. 어 예수님의 죽음에는 유다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요. 바로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입니다. 어 가련 유다는 어쩌면 자신이 기대했던 이익이 주어지지 않을 때 주님을 어 버렸다면 이들은 좀 더 직접적으로 어떤 유익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에 가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빌라도가 세 번째 그들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요? 나는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까

하오. 그러나 그들은 마구 우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 네. 먼저 종교 지도자들이 유다의 협조로 예수님을 잡아드린 데까지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법적으로 재판을 열고 거짓 증언들로 예수님을 유죄로 몰아가기 시작하죠.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앞까지 끌고 가는데 성공했어요. 빌라드는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처럼 그들이 고수하는 것처럼 아 정말 예술라는 사람에게 죄가 있나 신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아무리 신문을 해 봐도 죄가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 주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은 죄가 없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이 전혀 듣지 않아요.이 이 신랑이가 세 번 정도 반복되었을 때 끝까지 그들이 물러서지 않자 결국 빌라도가 두 손 두 발을 다 니다. 아 그래 그러면 너희가 하자는 대로 하자. 여러분, 종교 지도자들은 어쩌면 가장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워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사실 이들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가 아니고 정말 어떤 죄가 있었다고 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었어요. 불법적이었고 전혀 정의롭지도 못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은 어떻죠? 아주 맹렬한 살기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누가는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빌라도의 판결도 인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성경처럼 마구이면서 무죄인

예수님을 사형까지 끌고 가죠.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이 감히 인간 주제에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면서 신성을 모독했다라는 이유를 앞세웠지만 사실에 그들의 본심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들이 누리고 있었던 그 것들이 무너질까 겁이 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 지도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이 구축해 온 어떤 종교적인 시스템 안에서 많은 부화 권력을 거느리고

있었어요. 어하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지난주 설교에서 성전 정화 사건에 대해서 살펴봤었는데요. 그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재물을 팔면서 그 시스템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뭔가 더 많은 불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걸 아셨죠. 그래서 가셔서 너희가 강도의 구별로 만드는구나 하고 다 뒤집어 엎으시잖아요. 그들을 향해서 다 잘못되었다고 가르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 다 뒤집어 엎으시니까 이들은 예수님이 싫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그 지위와 그 지위가 준 특권을 유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이 재판에 함께하고 있는 빌라도는 어땠을까요? 그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 빌라도는 로마 황제에게 소속된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황제에게 자신의 관할 지역인이 유대 지역을 아마 잘 관리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야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내가 이 변방 지역을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 인정받으면 좀 더 중심으로 옮겨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유월절 명절 때문에 온 유대 사람들이 다 모여서 막 바글바글 복잡해요. 그런데 거기다가 종교 지도자들까지 몰려와서 예수에 대해서 고소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관할 영역에서 어떤 밀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싶어서 정치적 판단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맞춰 주기로 한 거죠. 그뿐만 아니라 아, 내가 봤을 때이 사람은 죄가 없어라고 말했을 때 종교

지도자들이 그 빌라도에게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면서 협박합니다. 아, 지금이 사람이 자기를 유대 왕이라고 말하는데 빌라도 당신이 무죄라고 말한다고. 그럼 당신도 똑같은 편이네. 당신도 로마 황제에게 순복하지 않는 사람이네. 다른 왕을 섬기네라고 이렇게 말한 거죠. 빌라도가 황제를 거스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협박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에 무서웠던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었음에도 혹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해가 되지 않을까는 걱정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허락해 주고 맙니다. 어 여러분 어쩌면 빌라도 예수님의 무죄에 대해 세 번이나 주장했잖아요. 그리고 그는 아 나는 이 일에 책임이 없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라고 라고 했으니 다소 억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재판에서 판결을 내리는 사람으로서 가장 정의로워야 할 순간에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위해서 정의롭지 않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도 자신들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누리고

있던 이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아주 이기적인 선택을 한 거죠. 여러분, 그렇다면 이익을 추구하는 건 나쁜 걸까요? 그리스도인은 유익을 바라면 안 되는 걸까요? 저는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유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유다처럼 어떤 개인적인 부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종교 지도자들처럼 종교적으로 또는 빌라도처럼 사회적으로 어떤 이익을 얻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는 마냥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우리에게 여러 선택지가 있다면 그중에서

이왕 더 좋은 것을 선택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만약 여러분 그 유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맞지 않다면 그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봤던이 사람들처럼 잠깐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손해지 결코 유익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의 어떤 유익 앞에서 갈등할 때가 있죠.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 더 유익한 것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의 본성이에요. 아마 여러분 중에 나는 손해만 보고 싶은데요. 하신

분 없을 거예요. 이왕이면 다 이익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나에게 유익처럼 보여도 만약 그것이 불리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사탄은 분명히 우리가 혹하고 넘어갈 만한 것들로 우리를 유혹하고 유다하게 그랬듯이 생각을 불어넣겠죠. 그 그때 사탄의 손을 들어 주어선 안 됩니다. 또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빌라도처럼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생길 수도 있어요. 아,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것들이에요. 당연했던 것들. 아, 모두 다 이렇게 하니까 나도 그냥 그렇게 했던 것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마음이 찔릴 때가 있죠. 어, 내가 이렇게 했던 것들이 하나님 나라와 맞지 않구나. 그분의 같이 가는 거 어긋나는구나. 마치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너 그거 잘못된 거야. 너희는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야라고 꼬집으셨을 때 그들이 마음이 찔리고

불편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는 우리에게 그런 순간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어요. 그때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잘못된 방식으로 취하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애초에 내가 잘못된 방법으로 취한 것이라면 그것은 원래 내 거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여러분, 우리가 사회생활 하다 보면 그리고 또 세상을 살다 보면 어 다 하지만 다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이게 옳지 못한 어떤 그런 그릇된

관행들이 있을 때가 있어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남들 다 하는 그릇된 관행을 따르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내 것을 손해 보는 것 같아 보이더라도 아 원래 이건 내게 아니었구나. 이거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니까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거구나라고 생각하고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과 같은 편에서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니 누군가 지금 졸름의 생각을 막 불어 놓고 있는 거 같아요, 여러분. 자, 눈을 뜨십시오. 지시면 안 됩니다.

자, 두 번째 우리 함께 읽어 볼까요? 시작. 알고도 넘어진 사람들. 네. 두 번째 유형은 바로 알고도 넘어진 사람들인데요. 베드로를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수 있어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함께 읽어 볼까요? 시작.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하기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달기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네. 지금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언급되고 있지만 처음 사탄이 예수님께 요구했던 거는 제자들 전체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자신의 제자들에게 사탄이 공격이 있을 것이고 너희의 믿음이 꺾일 만한 그런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

알려 주세요.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고백하죠? 나는 끄덕 없습니다라고 호환 장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런 베드로에게 한 말씀 더 하세요. 아니 너는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거야. 베드로의 배신을 다시 한번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예수님의 말처럼 예수님을 부인하죠. 자신이 예수님 옆자리에 서로 앉겠다고 앞다투어 경쟁하던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잡히시자 저마다 다 뿔뿔이 도망가고 없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왜 베드로는 다 알고 있었는데 왜 넘어졌지? 아 왜 제자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왜 대비하지 못했지? 왜 그대로 다 넘어갔을까? 여러분, 그들이 십자가를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맞닥들린게 아니었거든요.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흔들려요. 너에게 사탄의 공격이 있을 거야. 너희가 나를 부인하게 될 거야. 흔들리게 될 거야. 경고를 미리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다 알았음에도 대비하지 못하고

실패했느냐 하는 것이죠. 이 질문을 좀 더 고민해 보니까 결국 이것은 오늘 우리를 향한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왜 알면서도 넘어질까요? 왜 우린 아는 대로 살아내지 못할까요? 혹시 여러분 이런 고민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 여기서 있는 저는 종종 이런 고민을 어, 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넘어지고 실수하고 잘못할 때가 있죠.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제가 돌아보면 제가 몰라서 그렇게 했다기보다 알고 있었는데 실수하고 알고 있었는데 또 넘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거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 보면 우리는 점점 아는 것이 많아집니다. 이렇게 살아야 돼. 저렇게 살아야 돼. 이거 하면 안 돼. 저거 하면 안 돼. 그런데 여러분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만큼 우리의 삶이 비례하고 있나요? 저는 반비례할 때가 더 많은 거 같아요. 심지어 우리는요. 넘어졌던 곳에서 또 넘어지는 그런 반복된 실패를 하기도 합니다. 아, 그때 내가 여기서 넘어졌는데 넘어지지 말아야지 결단도 했는데 여러분 우리가

오답 노트 얼마나 잘 적어요. 신앙의 오답 노트가 이렇게 많은데도 우린 또 넘어지고 또 넘어져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참 좋아하죠. 저는 그것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베드로의 모습에서 자기 못을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지만 완벽하지 않고 넘어지고 실수하는 그 어떤 인간적인 모습에서 우리가 위로를 얻는 거죠. 저는 여기서 베드로가 호원 장담하고 있는 이 모습도 어쩌면 다 우리가 공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을 절대 부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 진짜 그의 고백처럼 감옥이든지 죽는 자리든지 끝까지 제자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건 우리도 알아요.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으니까요. 우리도 베드로의 고백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베드로처럼 그런 진심이 우리에게도 있고 말씀도 알지만 자주 넘어주고 실패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가 아는만큼 살아내고 또 아는

대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겐 어떤 신앙의 자세와 태도가 필요한 것일까요?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복음은 기도로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좀 비교해 봤을 때 어 비교적 더 기도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시험을 이기기 위해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요.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를 따라갔다. 그곳에 이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신 뒤에 그들과 헤어져서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 이후에 이 장면이 곧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 감남산이라고도 하는 올리브산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셨어요. 기도하러 가셨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세요.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해.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질만큼 아주 간절하게 기도하셨어요. 그런데 그런 예수님과 다르게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혹시 알고 계시나요? 제자들은 자느라 바빴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자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누가는 잠들어 버린 제자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이건 다른 복음사에는 없는 누가복음만의 표현입니다. 어 제가 한번 어 상상을 해 보는 거죠. 여러분 처음에 그들도 분명 기도하러

갔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방 방금 전까지 예수님이랑 명절 어 식사를 막 하다가 예수님한테 느닷없이 너희가 나를 배신할 거야. 너희는 나를 부인할 거야라는 말을 들었잖아요. 우리야이 이후에 상가에 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그랬나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이 당시에 그 말을 직접들은 제자들은 어땠을까 하는 거예요. 제가 이들의 마음을 좀 이해해 보기 위해서 어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를 한번 대입해 봤습니다. 어 제가 마치 목사님과 함께 사역한지가

제자들처럼 한 3년쯤 이제 되어 가고 있는데요. 만약에 제가 목사님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저한테 예전 내가 가만 보니까 너는 나를 배신할 거야. 너는 분명히 내 뒤통수를 칠 거야라고 말을 하면 제 마음이 어떨까요? 아, 걸렸구할까요? 아마 저는 되게 서운하고 속상할 거 같아요. 아니, 내가 그래도 광주에서 양주까지 맞는데 나를 이렇게 밖에 생각 안 하신다고? 내가 그도 목사님 옆에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나를 이 정도밖에 못 믿으신다고 하는 마음이

저에게 있을 것 같아요. 억울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자들은 배신할 것 같아도 아니고 배신할 거야. 세 번 너나 나를 부인할 거야라고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처럼 제자들도 아니 나 진짜 예수님 잘 따르고 싶은 만 진심인데 나 이거 거짓말 아닌데 왜 안 믿으시지? 그동안 내가 금을 버리고 뭐 내 직업 다 버리고 부모 자식 다 버리고 예수님 다른 세월이 얼마데 왜 우리를 이 정도밖에 못 믿으시는 거야라는 그런 마음이 그들 안에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기도하려고

앉아 있는데 기도가 잘 안 됐을 수 있죠. 여러분, 우리도 마음이 심난하고 슬프면 오히려 더 기도가 안 되잖아요. 더 기도해야 될 거 같은데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래서 기도하지 못하고 슬픔에 지쳐 잠들고 맙니다. 예수님이 그런 그들을 다시 찾아오세요.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죠. 왜들 자고 있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서 기도해라. 다시 한번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당구하십니다. 어 그런데 여러분 사실 지금이 순간 가장 슬픔에 지친

사람은 누굴까요? 네이죠. 잠시우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합니다. 한 번도 하나님과 떨어진 적 없는 그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버림받아야 해요. 3년 동안 동고동락한 그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할 것도 그분은 알고 계셨습니다. 철저하게 혼자서 외롭게 걸어가야 할 십자가 길이 임박했음을 주님은 아셨어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가장 슬픔에 지쳐 계셨을 것입니다. 땀바울이 핏방울이 되는 기도로 예수님은 겨우 그 슬픔을 감당하고 계셨어요. 어 44절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모습을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이 단어를 헬라언으로는 어 아고니아라는 단어입니다. 경기나 전쟁을 의미한 단어예요. 그러니까 마치 예수님이 어떤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고군 분타는 사람처럼 사활을 걸고 기도하셨다는 거죠. 여러분 예수님에게도 사탄이 찾아가서 유혹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네. 했습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고난의 길인지 아셨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유혹이 예수님에게도 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험에서지지 않기 위해 전쟁을 치르듯 힘쓰고 애어 기도하십니다. 어 여러분 혹시 2020년에 개봉한 기도의 힘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이 이 영화는 2015년에 미국에서 처음 개봉됐던 영화인데요. 어, 한국에서는 기도의 힘이란 제목으로 상형되었습니다. 이것의 원래 영어 제목은 워룸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기도하는 골방을 부를 때 워룸이라고 부르거든요. 워은 전쟁이란 단어예요. 즉 골방을 전쟁하는 방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참 좋아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 기도에 대한 것들이 이 단어가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기도하는 그 장소를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해요. 여기가 제가 싸우는 곳이에요. 예수님께서도 자기 앞에 주어진 슬픔, 시험, 시련과 고난을 놓고 기도하시면서 마치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고뇌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어쩌면 기도는 우리의 영적 전쟁에 격전지도 몰라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려는 어떤 어둠의 세력과

싸우는 전쟁터 말이죠. 그리고 여러분 동시에 기도는 나 자신과 싸우는 전쟁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탄이 불어넣는 유혹에 못이긴 척 넘어가고 싶은 나. 슬픔과 고난에 포기하고 싶은 나와 싸워서이기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슬픔을 피하고 싶으셨어요. 할 수만 있거든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그 마음과 기도로 싸워서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구하십니다. 예수님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싶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분은 기도로 그 마음을 꺾고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제가 구합니다라고 말하며 순종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치열하게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을 도우세요.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나타나서 힘을 복도어 드렸다.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복돋아 줍니다. 슬픔에 지쳐 있는 몸과 마음을 위로하여 다시 일으켜 세우죠. 그리고 그분이 묵묵히 그분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십니다. 저는

우리에게도 바로 이런 기도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수님도 자신에게 닥칠 일을 다 알고 계셨고 제자들도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겨냈느냐 그것에 졌느냐는 그들이 기도했느냐 기도하지 않았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알고 있는 것에 순종하고 아는 대로 따르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알고 있는 대로 승리하고 아는 대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처럼 아니요 주님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저 이만큼 신앙생활 했으면

이제 이 정도는 껌입니다.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주님, 저는 이 제자의 삶을 살면 살수록 더 제가 연약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안 계시지 않으면 저 끝까지 이길 못 갑니다. 맞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 기도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죠. 일어나서 적과 싸우려면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 사람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네. 예수님은

결국 종교 지도자들의 바람대로 십자가 효행에 처하시죠.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는 막 종료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이렇게 막 싱송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손가락을 흔들며 그를 비안냥하는 조롱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혹시 예수님 따라다니면 나한테 무슨 콩꼼을 떨어지지 않을까? 막 쫓아다녀요. 그런데 지금은 십자가를지고 가는 예수님과 혹시 같이 붙어 있다가 나도 뭔가 엮기는 거 아니야? 나한테 불동 튀는 거 아니야?

라는 마음으로 몸을 살게 바쁩니다. 여전히 예수님 주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죠. 박수와 칭송과 환우는 이제 야유와 조롱과 핍박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장면을 보면서 참 많이 외로우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리는 여전히 바글바글 예수님 주위를 막 둘러싸고 있는데 그들 속에 자기 편 들어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곳에 분명히 예수님께 한 번씩 얻어 먹었던 사람들. 예수님 도움 받았던 사람들도 분명히 거기 있었을 거거든요.

그런데 십자가를지고 있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물 빠진 껌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무리 속에 외롭게 걸어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조용히 걷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백성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예수를 생각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여자들이 그 무리와 함께 주님을 막 따라갑니다. 그런데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죠. 예수님의 순환을 생각하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걸어갑니다. 누가는이 여인들이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하는데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와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었던 그녀들은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이렇게 수습해서 무덤에 이렇게 안치할 때 그것을 다 살펴보고 있다가 돌아가서 향유와 향품을 준비하기도 했었죠. 누가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걷는 그 길을 통해서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서 보여주고

계세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그 길을 같이 걷는 것이 결국 제자가 걷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그 여정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진짜 제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최측근에서 함께 먹고 마셨지만 주님을 다 떠나 버린 12명이었을까요? 갈릴리에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함께 걸었던이 여인들이 제자였을까요?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며 모든 영광스러운 것을 함께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에게

그들이 가장 필요할 때 그들이 정말 예수님에게 힘이 되어들려야 할 때 그 곁에 없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조심조심 뒤따라가다가 어 당신 예수의 제자 아닙니까라는 물음에 아닙니다. 나는 예수를 모릅니다 하고 부인하고 도망가죠. 그건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어쩌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 하고 하는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에선 별다른 도움이 안 됐을 거예요. 예수님의 사역을 도았던 거는 오히려 12 제자에 가깝죠.이 여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아마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이 여인들이 하는게 지금 뭐가 있죠? 사실 따지고 보면 슬퍼하고 우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후에 이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고난의 길을 떠나지 않고 함께 걸었던 이들이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여자들을 돌아다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을 개척했던 그 예루살렘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칠 닥칠 심판과 고난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렇게 표현하시는데요.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해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여기서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예루살렘의 딸들 즉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거죠. 이 말씀을 헬라의 원본에서 보면 더더구나 논증이라는 것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이 논증과 앞서 설명한이 나무의 의미를 같이 종합해서 보면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무지한 아들인 나에게도 이렇게 고난을 받게 하신다면 하물며 죄에 빠진 백성은 더더구나 징계하지 않으시겠니? 그러니까 앞으로 너희에게 너희 죄 때문에 임할 그 심판이 엄중하니 너희는 너희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는 것이 슬퍼서 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는 거예요. 너희의 악함을 회개하고 뉘우쳐 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여러분, 이제 내일부터 고난 주간이 이어지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막 찡해질 때가 있어요. 막 그 사랑의 막 은혜가 막 감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슬프고 비통하게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애통하며 울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정말 삶을

돌이켜서 주님의 그 길을 우리도 함께 같이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그 여자들이 만약 나의 죽음에 나의 고난에 슬퍼만 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어요. 그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진짜 제자이기 때문이죠. 어, 여러분, 이제 내일부터 우리가 고난 중간을 보내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때 뭐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기도 하고 좀 더 그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서 뭐 금식을 하거나 또는 특별 새벽 기도회를 하기도 합니다.

어, 저도 고난 주간에 어, 하루 함께 금식을 하기도 하고 또 뭐 미디어 금식이라고 해서 핸드폰 사용 좀 드리고 그 시간에 말씀도 보려고 하는 노력들을 저도 해요. 저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우리가 진짜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금식하고 아무리 십자가 앞에 모아서 이른 아침부터 특새를 드리더라도 우리의 삶이 십자가로 돌이켜져 있지

않다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때로 제자의 삶을 오해할 때가 있는 거 같아요. 뭔가 사역에 많은 뭔가 도움이 되고 교회 안에서 어떤 두 각을 나타내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된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함께 걸으면서 알 수 있는게 뭐죠? 진짜 제자는 예수님의 공생의 사역에 어떤 많은 공을 들렸던 사람들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사역과 그 공동찬에서 어떤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들도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어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가 있는 쪽으로 삶을 돌이켜 회개한 자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어 사랑하는 사귐의 가족 여러분. 오늘 전 여러분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둘러싼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살펴봤는데요. 첫 번째는 가른 유다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빌라도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해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야기를 잘 보면 다 저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어요. 개인적인 이유, 종교적인 이유, 또는 어떤 사회적, 정치적인 이유가 다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죠. 여러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행동하는데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나누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아닌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 너 참 어려웠겠다. 한 번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라고 하는 그런 상황들이 우리에게 있죠. 그러나 여러분, 그 이유가 얼마나 합리적이든 효율적이든 돈이 되든 되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무리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신리적이어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버리셔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되는 장사, 남는 장사를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운과 맞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거 버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버리지 못한 유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버리지 못해 자꾸만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우리가 포기하지 못해 주님의 길을 포기하게 하는 그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주의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내 마음을 찔러요.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나 내 삶에선 여전히 그걸 포기할 수 없어서 나의 기득권, 나의 유익, 나의 안정성 조금도 버릴 수 없어서 주님을 외면하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는 무엇입니까?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 말씀하시죠.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란 거예요. 그 마음을 부인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들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여겨 스승을 팔았습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주님을 포기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안정과 입질을 버리지 못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는 정의를 버리죠. 그러나 여러분, 이들과 대조되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그 모든 그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시죠. 우리는 작은 유익 하나만 걸려도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는데 그런 주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버리십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알고도 넘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경고를 듣고도 말씀을 듣고도 시험에 대비하지 않아 실패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속상하고 슬픈 일 앞에서 고난 앞에서 이들은 그저 지쳐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다가올 시험을 준비하십니다. 알고 있던 것들을 아는 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힘쓰고 애어 기도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알려주신 그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말 목숨을

거는 장소처럼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영적 전쟁에서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자의 길, 그리스도인의 삶 우리도 다 알고 있죠. 여러분, 이거 쉽다고 생각하고 시작하셨나요? 아니잖아요. 내가 이 이런 일 하면 내가 주 앞에서 이런 결단하면 이런 사역하면 나에게 이런 좋은 것들만 있을 거야. 아니, 우리는 이런 어려움, 때로는 갈등을 만나고 고난을 만나고 때로는 나에게 억울한 일이 생길 거라는 것도 대부분 알고이 길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 때 슬픔에

빠져 지쳐 잠들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고 그리스도의 삶은 좁은 길인게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길이 두렵고이 삶을 주저하게 될 때가 있죠. 그러나 그럴 때 주님은 말씀하세요. 그럼에도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지는 사람이란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 있으셨대요. 두렵고 포기하고 싶고 주저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주님도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거예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낼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도록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아는 대로 살아낼 수 있도록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요? 기도하면 고난이 사라질까요? 우리의 슬픔이 바로 기쁨으로 바뀔까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럴 때 우리가 기도할 때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님께서 북돋아 주신다는 겁니다. 슬프지만 그 슬픔도 감사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모두 우리의 십자가를 칠 용기도 힘도 없을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약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주님께서 북돋아 주신 힘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치고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끝까지 따른 사람들이었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묵묵히 뒤따라 여인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대단하게 이름을 날린 그런 사을 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뭐 그렇게까지 뛰어난 사람들도

아니었지만 그저 끝까지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 저는 때로 신앙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그저 신앙은 끝까지 이 길에서 버티고 버티고 견디고 또 견디는 거구나라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견뎌내고 도망가고 싶지만 버텨내는 것. 어쩌면 이것이 제자가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자에게는 영광도 있지만 고난도 분명히 있거든요.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반드시 뒤따라 우리는 때로 포기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죠. 아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이런 것까지 참아야 되나? 그런 마음이 얼마든지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끝까지 버티고 견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짜 제자로 남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돌이킨 삶의 방향을 끝까지 고정해서 지켜내는 것이 예수 따름이 제자의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날를 하고 십자가 제자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자기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날마다 기도로 힘을 얻어 자기 십자가를지고

끝까지 버티고 견뎌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이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는 증인이 될 것이며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다르게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 길에서 멀어지셨습니까? 혹은 제자들처럼 어떤 슬픔과 시련과 고난과 갈등에 지쳐 지금 잠시 멈춰 계십니까? 다시 복음 앞에 서십시오. 여러분을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따라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제자가 되어 이 길 끝에서 부활의 영광의 주님을 만나길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