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금요기도회 설교

2025-04-11 · 마태복음 5장 13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는 지난 시간 예수님의 산상수훈, 그중에서도 팔복에 대해서 설교를 나눴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양육’을 통해서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할 때, 이 표현을 제일 좋아합니다. “예수 따르미가 되는 것이다.” 풍성한 삶을 1,2,3단계 양육을 했는데, 그 결과 예수 따르미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꿈꾼다면 그것은 양육을 잘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배우는 과정이

풍삶기의 과정입니다. 양육의 유익은 예수를 따르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것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알려주는 데 있습니다. 알려준다고 따르미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선은 알아야 방향을 잡고 애쓰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적을 바라며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폼을 잡고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살아내고자

하시는 삶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팔복은 바로 그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1)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2)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3)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4) 하나님께 입맛이 당기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다. 5)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6) 내면세계, 곧 마음과 생각이 올바른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바깥 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7)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될 것이다. 8)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박해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에서 겪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난과 박해입니다. 물론 우리는 제자의 고난 외에 제자의 영광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견딜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영광이 있어도 고난은 되도록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게 되면,

우리 안에는 자연스럽게 세상과 분리되어 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이 이것이죠.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정체성과 삶의 자리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물러날 수 없습니다. 도망칠 수 없습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이미 소금입니다. 그저 소금은 소금다우면 됩니다. 그렇다면,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은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계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목회를 정말 잘하는 것뿐이네요.” 그러자 저의 은사님이 맞장구를

치시며 말했습니다. “목사가 목회를 잘하고, 교수는 잘 가르치고, 학생은 잘 배우고 그것이 최선이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거든 예수를 따라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것도 어려우시거든 여러분이 주변에서 가장 존경하는 신앙인을 보며 그의 좋은 모습을 따라서 살아가십시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화학적으로 정상적인 상황에서 소금은 짠맛이 바뀔 수

없을 만큼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상황에서는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사해 주변의 염석을 캐서 갈은 후 소금으로 썼습니다. 당시의 기술로는 염화나트륨만이 아니라 다른 물질도 함께 섞여 들어오곤 했습니다. 소금은 다 좋은데, 물에 약하죠. 그래서 소금 자루를 잘못 보관하면, 진짜 소금은 다 증발하고, 섞여 들어온 소금 비슷한 하얀 물질만 남습니다. 그것은 소금 같아 보이지만 짠맛이 없죠. 소금 같지만, 소금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맛을 잃은 소금의

정체입니다. 그것을 길에 버리게 됩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즉,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다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너무 쉽고 단순합니다. 마치 “그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들리기도 하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답지 못할 때가 더 많은 우리에게 이 말씀은 매우 괴로운 이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행동합니다. 생각은 그럴싸해도, 말은 참 밉고, 행동은 전혀 닮지 않았고… 기도할 때는 주님을 따라 살겠노라 결심하지만, 돌아서면 금세 세상 속에 휩쓸려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마음 안에는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자격이 있을까?”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도, 주님은 나를 받아주실까?” “그리스도인의 맛을 잃은 나… 나는 소금처럼 버려지고 마는 걸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 앞에 서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정말 나는 버려진 존재는 아닐까? 주님의 기준에 미달 된, 실패한 제자 아닐까?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런 생각의 끝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넌 안 돼.” “넌 실패했어.” “넌 이미 버려졌어.” 이런 생각으로 우리를 몰아세워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보려는 시도조차 못하게 만들죠.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싶어 하는 그

마음과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실존 사이에서, 그분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십니다. 실패했기에 더 깊이 의지하고, 넘어졌기에 더 진실하게 붙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빛으로 살아가는 것도 동일합니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빛으로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것이 있습니다. 빛은 숨길 수 없고,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자연스럽게 눈에 띄며, 밤이 되면 더 잘 보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면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너무 어둡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한 걸음만 나아가도 우리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구별됨’을 쉽게 느낍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숨겨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로 신앙은 그렇습니다. 신앙은 그래서 사적 영역의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순간,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우리 삶의 모습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죠. 그러나 동시에 은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가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애씀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우리의 선행과 섬김으로 영향을 받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소금다움과 빛다움에 대한 현실적 모습은 무엇입니까? ‘착한 행실’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가끔 ‘행위’라는 단어만 나와도 깜짝깜짝 놀라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행위’에 대해 과도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 그것은 종종 잘못된 교육이나 편향된 신학 교육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행위를

조금이라도 강조하면 곧바로 “혹시 행위 구원론 아니야?”라고 의심부터 하는 것은, 사실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적 태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특정 교리에 치우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직 믿음’을 주창했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조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고, 항상 선한 행위를 동반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이어지며,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든 바울이든, 믿음과 함께 나타나는 행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그 삶의 열매로 분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다른교단에서 배워서 다르게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각자의 신앙적 색깔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결교,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그 전통 속에서 익숙해진 관점들이 다를 수 있겠지요. 저도 여러교단 목회자들이 함께 모이는 곳에서

공부를 할 때, 우리 안에 각자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벗고 말씀으로부터 답을 찾는 것을 많이 고민하고 배웠습니다. 목사들이 다 그렇죠. 각자 자란 교단의 교리의 렌즈를 끼고 자꾸 수업에 들어와 성경을 배우려 하니,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님들에 의해, 그 렌즈를 먼저 벗는 것부터 계속 훈련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따르미의 삶을 제대로 살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이 담긴 성경을 진실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입니다. 교단이라는 것은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적 정체성은 ‘예수교’이고 ‘성경교’여야 하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먼저가 아닙니다. 교리가 성경보다 위에 있지 않고, 교단의 색깔은 성령이 주시는 진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착한 행실’을 명령하신 우리의 구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붙잡고 따라야 할 신앙의 목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착한 행실은 ‘팔복의 원리’를 추구하여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영적 결핍을 인정하기 때문에, 타인의 영적 결핍과 그로 인한 모습에 대해서도 정죄하기보다 불쌍히 여기고, 이해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죄악과 자신의 연약함 앞에 아파하기에, 깨어진 세상을 향한 무관심이 아닌, 기도와 회개의 삶을 살아갑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 앞에 다스려진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을 절제하고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이루는 존재가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기 때문에, 세상의 불의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바른길을 추구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판단보다는 마음을 헤아려 주며, 실수한 이들을 정죄하기보다 품어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며,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분열시키는 말을 중단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자가

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는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제자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내 삶으로 옮기고자 할 때,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할 태도가 한 가지 있습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는 말씀은 자칫 이 말씀에 대한 실천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착한 행실을 하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 이어지는 말씀은 ‘은밀한 선행’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보이게 하려는 선행은 ‘칭찬받기 위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선행을 드러내어 보여 주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은밀히,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행하는데 어떻게 이 빛이 사람 앞에 비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은밀히 하지만, 결국 이것은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며, 오히려 은밀히 했기에 더욱 깊이 있게 사람들에게 다가갑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교회의 은밀한 곳에서 섬기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늘 있습니다. 그래서 은밀히 섬기는 장면을 목격하면 찾아가서 고마움의 말이라도 건네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지 못하는 선행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누군가는 우리의 공간을 은밀히 정리하고, 남들이 치우지 않은 것을 치우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돌봅니다. 테라스나 교육관과

같은 곳까지.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누군가 은밀히 모든 성도님을 위해 섬겨주고 있기에 우리가 이것을 편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섬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교회에 오면 계속 섬겨야 할 것만 보입니다. 수선할 것만 보이고 정리할 것만 보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것만 보입니다. 내가 안 하면 누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귀찮지만 먼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만 하더라도 그렇게 은밀한 선행들이 모여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보지 않는 것 같지만 보이고, 그래서 대부분의 공동체에는 그렇게 조용히 주변을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평판이 좋습니다. 그러하기에 신약에서는 교회의 리더를 세울 때 그런 사람들을 세우라고 권면하는 것이죠. 사람의 시선에 보이려고 하지 않지만, 또 주변에 그 사람의 영향이 스며드는 것. 이것이 신비입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존재가 복음’인 법입니다. 이번 주에 ‘질문있어요’라는 시간을 통해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함께 성경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거기에 ‘선한 영향력’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저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끔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의도에 대해서 경계할 때는 있습니다. 제가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선한 영향력’이라는 표현이 간혹 기독교 성공주의자들의 주장을 포장하는 언어로 사용되곤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교회 안에서 ‘선한 영향력’은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더 영향력 있는 직장에 들어가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 뭔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래서 정말 슬프게도 고3이 되면 신앙이 좋다는 부모가, 아이의 교회 생활을 막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 공부가 우선이야.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합격하는 것이 더 잘 쓰임 받는 길이야.” 뭔가를 이뤄서 영광이 되거나, 뭔가를 이뤄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겠다는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공부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성과를 내야만 영광이고 그래야만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좋은 학교에 가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은 세상에서도 아이들에게 매일 같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선한 영향력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짜 선한 영향력이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우리라도 아이들에게 진짜 가르쳐야 하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자칫 우리도 세상의 가치를 은연 중에 아이들에게 들이밀기 쉽습니다. 우리도 은연중에 세상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평가하거나, 내 안에 있는 삶에 대한 불만족을 아이를 통해서 풀어내려고

하기 쉬운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먼저 나에게 새겨넣고, 또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 삶입니다. 자기 이익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세상의 방식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고, 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 경쟁하여 성취하라는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주님이 원하시는 착한 행실을 따를 것인가 고민하는 것. 이러한 예수 따르미의 삶은 그의 직업이나 위치와 상관없이 어디에 있든지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이해인 시인의 <작은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칭찬받지 않아도 좋으니 빛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해받아도 좋으니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실패해도 좋으니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이름 빛나는 것보다 당신의 이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는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그리스도인은 많이 말하는 사람보다, 삶으로 주를 열심히 따르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근심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은 초라한데 말은 앞서는 그 모습 때문입니다. 주를 따라 낮아지고 섬기려 하기보다, 주님의 이름 위에 자신을 세워 자신의 존재를 드높이려는 모습 때문입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내려 주변을 물들이는 것이죠. 빛은 어두운 곳곳을 찾아가 밝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요, 예수 따르미의 삶입니다. 우리의 그 진실한 목표를 낮추지 마십시오. 목표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내 삶이 그 목표로부터 멀어 보일 때마다 더욱 나에게 주가 필요하다는

진리를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 주님으로 나를 채우십시오. 주님을 가까이할수록 주님의 마음도 내게 가까워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따르미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창한 무엇을 이루는 삶이 아닙니다. 말보다 삶이 앞서고,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가 우선이며, 드러나기보다 숨겨지기를 택하는 삶입니다. 그 삶이 고요해서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은밀하기 때문에 오히려 깊고, 작지만 분명하기에 오히려 밝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과 비교하여 우리의 제자 됨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있다면, 그것이 곧 선한 영향력이고, 그 삶 자체가 복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미 우리의 존재를 그렇게 바꾸어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새로운 생명이 우리를 그런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이제는 그 존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흔들려도, 실패해도, 낙심해도, 다시 일어나 예수를 바라보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