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위선

2025-04-06 · 누가복음 19~2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설교는 성경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설교는 그냥 버리시면 됩니다. 설교는 성경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뜻을 배웁니다. 이것은 늘 일치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복음서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이 된 모습을 배웁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가르침보다 더 예리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삶을 통해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상태입니다.

즉,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이 성경의 비전입니다. 그 일을 위한 첫걸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깨닫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누군가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자신의 삶에 잘 적용해갑니다. 그러나 그 일에 상당한 방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별히 본질이 아니라 잔가지에 시선을 뺏기게 하는 것이 우리의 방해요소입니다. 어떤 하나하나에 대해서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왜 꼭 그렇게 해야 되냐? 이렇게 하면 안 되냐?” 이렇게 ‘정답-오답’ 식으로 접근하면, 본질적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질문은 “이 사건과 행동을 통해서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과 접근입니다. 즉, 부수적인 것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분이 가르치는 본질을 잘 파악하기 위해 힘쓰셔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깨닫는 성경의 가르침, 예배 안에서의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이 한걸음 진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가르침과 내가 인격적으로 마주한 것입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늘 그렇듯 내가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듣는 여러분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을 위해서, 이제 그 앞에서 나는 진실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혹은 거부할 것인가.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선택을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세상의 가치관이 유일한 것,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던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길은 낯설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길이 주는 참된 가치를 발견한다면 이제 그것을 붙들고 내 발걸음을 세상의 길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앞에 그렇게 섭니다. 오늘도 주님이 일하시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로드 무비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여행길이나 어떤

목적지로의 이동 과정 속에서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 장르이죠. 누가복음의 구성도 이런 성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부터 19장까지가 바로 ‘여행 서사’라고 불리는 부분이죠. 9:51에서 예수님은 이제 때가 되었으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 후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여행길에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길 위에서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특별히 제자훈련의 강도가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행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고, 그것은 곧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여행길은 제자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 유독 많이 담겨 있습니다. 이 여행길은 ‘여리고’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지난 설교에서 살펴 본 삭개오와의 만남이 바로 이 여리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리고를 떠나서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벳바게와 베다니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여정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이지만, 언제나 환대를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주시려고 찾아가고, 논쟁하고, 화도 내고, 사랑도 하십니다. 그런데 늘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새 인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굉장히 단순하고 복잡합니다. 단순함이 있어요. 그것은 인풋과 아웃풋이 대체로 작동된다는 점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되고, 미움을

많이 받으면 미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잡합니다. 입체적입니다. 완전히 좋은 인간, 완전히 나쁜 인간도 없는 듯합니다. 누구를 만나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또 모든 모습이 다릅니다. 천의 얼굴을 갖고 지내기도 합니다. 다 다르지만, 또 한 꺼풀을 뚫고 들어가면 특유의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바뀌기도 하지만 고유한 모습도 있고, 그래서 변화되지 않을 것 같지만, 어느새 바뀌기도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 나오는 여러 사람의 모습들이 존재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군중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 예수님과 충돌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 당시의 기득권 종교인인 사두개인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있는 수많은 청중들. 진리이신 예수님과 그들의 삶이 마주합니다. 우선 그럼 진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제 그것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어가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주님은 그들의 삶에 다가가서 그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자신을 보게 하고, 깨닫게 해야 했습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이 중요하게 다루시는 사람들 안에 있는 깨어진 모습은 ‘위선’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하나의 깨어진 모습이 ‘위선’입니다. 선하지 않지만 선해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체면을 유지하고 싶어서 우리는 ‘위선’의 가면을 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이 위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그 회복의 삶을 꿈꾸며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겸손의 가면 (눅 19:11-27) 먼저 삭개오 사건 이후에 예수님이 청중들에게 주시는 비유인 ‘열 므나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달란트 비유’와 유사합니다. 주인이 여기서는 10명의 종에게 일을 맡기고 떠난 후, 후에 돌아와서 그에 대한 책임을 확인하는

내용입니다. (눅 19:13)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한 므나가 3개월 월급 정도 되니, 대략 1,000만 원을 생각하면 열 므나는 1억 정도 되는 돈을 장사 밑천으로 준 것입니다. 오늘날로 보자면 투자를 해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투자를 받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이익을 남겨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죠. 다른 종들은 나름의 이익을 남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에 대해 칭찬합니다.

그런데 한 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 19:20)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눅 19:21) 주인님은 야무진 분이라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므로, 나는 주인님을 무서워하여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 종의 말에 주인은 화가 나서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차라리 은행에 예금이라도 했다면 내가 이해하겠다.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해놓고 그것에 대한 핑계로 내 탓을 할 수 있느냐.” 이 비유에 나타난 종의 위선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잘못된 모습에 대한 합리화이죠. 그를 위해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내가 그냥 잘못한 일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 정말 겸손이고 용기이죠. 그런데 우리는 종종 나를 스스로 지켜내기 위한 위선 된 행동으로 핑계하고 회피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 방법을 취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서, 제가 이렇게 했어요.” 때로는 우리는 ‘겸손’이라는 위선

뒤에 숨기도 하죠. 이제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보다 높게 여기면 ‘교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보다 낮게 여기면, 이 또한 ‘교만’입니다. 이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겸손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회피하거나 거부하기에 익숙하죠. 그렇다면 참된 겸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기대하시는 만큼, 나를 보시는 만큼, 나도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만큼, 나도 나를 보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주인은 이 종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주인을 핑계합니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이 종의 실패 원인입니다. 2) 자기 기대의 투영 (눅 19:28-44)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에 오신 후 나귀를 타십니다.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느냐? 구약의 예언 때문입니다. 제가 앞서 예수님의 모습을 관찰하면, 그분이 추구하는 뜻과 가치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보입니다. 당시의 왕들은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말’을 탔습니다. 힘으로 정복한 군왕의 위엄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위선은 겉모습으로 웅장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우리도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면 오히려 겉모습과 치장에 별로 신경을 안 씁니다. 내 직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깨어진 삶 가운데 열등감이나 결핍이 있는데, 그것이 심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다른 것들로 치장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서 자신의 가치를 그분 안에서 인식할수록 다른 시선과 목표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한순간에 완벽하겠어요. 그러나 적어도 그 방향이 맞다고 여기기에 조금씩 더 그렇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구약 스가랴서는 이와 대비되는 모습으로 메시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그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새끼 나귀를 타고 가더라도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것을 본 군중들이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기뻐하고 높이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하지 않아도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군중의 환호, ‘호산나! 호산나!’ 이것이 무엇을 위한 외침인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들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반겨 맞았던 이유는 그것이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메시아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 그 나라의 가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그 메시아의 나라가 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들은 환호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꿈꿨던 메시아는 무엇입니까? 사실상 백마 탄 군주, 힘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 세력을 몰아낼 왕입니다. 이들은 어린 나귀 타신 예수님을 보면서 그것을 꿈꾸며 환호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진짜 메시아를 마주했을 때, 로마의 총독에게 재판받는 힘 없는 메시아를 목격할 때, 이해하고 깨닫기보다는

실망하고 분노했습니다. 즉, 이 군중들의 모습은 주님을 환영하는 예배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기대를 투영하여 종교에 헌신한 위선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포장한 욕망. 하나님이 진짜 원하는 삶에는 관심이 없는 예배자. 우리가 벗어나야 할 모습입니다. 3) 성전 카르텔 (눅 19:45-48)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 후, 가장 먼저 찾아가신 곳은 성전입니다. 당시에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위선의 구조화된 모습이죠. 당연히

잘못된 것인데 이제 하나의 관습과 구조가 되어버려 있는 것입니다. (눅 19:45)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눅 19: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당시 성전에서는 왜 장사를 하고 있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배를 오면 제물을 드렸죠. 그런데 2가지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먼 순례길에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동반하는 것의 번거로움이 있었죠. 그러니까 성전 근처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종교 지도자의 타락이 작동합니다. 제물로 사용하는 동물에 폭리에 가까운 가격이 매겨졌고, 그것은 고스란히 성전 카르텔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편리와 누군가의 욕심이 뒤섞이게 된 것이죠. 그러다 보니, 가장 하나님의 뜻을 잘 담아내야 할 성전이 가장 하나님의 뜻을 배신하는 위선의

공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정의를 때에 맞게 사용하셨습니다. 이 상황을 사랑으로 덮을 수 있나요? 아닙니다. 정의로 그분은 성전의 상을 뒤엎었습니다. 분노하시며 장사꾼들을 내쫓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생각과 뜻과 행동이 맞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당시 성전에 관련된 누군가는 이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불편한 존재라고 여길 수도 있죠. 맞습니다. 예수님은 불편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던 것처럼, 사실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오십니다. 그분은 예루살렘 성전만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하려고 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종 불편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일은 불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연중에 회피하고 핑계하고 합리화할 마음을 먹습니다. 때로는 그 결과 내 마음에서 내 삶에서 예수님을 쫓아내려는 생각도 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견고한 카르텔을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도 같은 생각에 도달합니다.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대제사장과 율법학자가 가장 나서서 했던 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마음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려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같은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한 경계와, 나의 옛사람의 방어기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4) 방어기제

(눅 20장)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방어기제로 나타난 모습은 논쟁입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의 권한’에 대해 논쟁을 벌입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자기편 몇 사람을 위장하여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세금에 대한 논쟁적 질문을 던지죠. (눅 20:21)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눅 20:22)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그들 외에도 사두개인이라는 또 다른 종교인 집단에서도 ‘부활에 관한 이야기’로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 옵니다. 왜 종교인들이 하나 같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요? 진리의 가르침이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그러니 말로써 승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함께 나서서 예수님과

신학적 논쟁을 하고, 헤롯당이라는 정치인들도 바리새인과 노선이 전혀 다른데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한편이 됩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도 지금껏 내가 추구해 온 내 삶의 가치관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통해서 그것과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실 우리 인간 내면의 가장 첫 번째 반응은 ‘방어기제의 작동’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변화에 취약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공허를 느낀 사람은 좀 낫습니다. 그런데

내 삶이 조금씩 이룬 것이 생기고 안정적으로 될수록 내 삶을 바꾸는 것에 대해 방어기제가 작동합니다. 당시 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서도 나름의 영향력과 입지를 갖추고 있었어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답을 정해놓은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앙에 있어서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질문은 ‘방어기제와 트집’의 세련된

방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 질문하는가? 피하고 회피하기 위해 질문하는가? 5) 보여주기 신앙 (눅 20:45-21:4) 신앙에 있어서 가장 피해야 할 위선은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눅 20:4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눅 20: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종교인이 잘못된 모습에 빠지면, 인사받고 지위를 누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얼마나 알아주는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면서도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이자, 사탄이 주는 마음의 걸림돌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누가 나를 안 챙겨준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최소한 교회에 온 지 1년이 넘었다면 누가 나를 챙기냐 안 챙기느냐에 관심을 두기보다,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거기에 마음을 쏟아주십시오. 내가 옆 사람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할 것인가? 그것이 눈에 보이는 자리이든, 남들 모르는 수고이든. 나에게 필요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1장 후반부에서는 ‘박해를 견뎌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매달려 기도하라’며 강력하게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의 삶에 함께 하시며, 그런 하나님의 자녀를 지켜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위선 된 종교인들은 ‘기도’조차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도’를 짧게 하는 것보다 ‘길게’하는 것, 더 자주 많이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따른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오고, 기도의 자리에 더 머무르는 훈련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기도를 하기 싫은 나의 게으름을 “나는 보이려고 기도할 바에야 안 하겠어”라는 핑계와 합리화로 삼지 말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아, 오늘 예배가 안 될 것 같아. 가서 그냥 앉아 있는게 맞을까?” “위선으로 예배할 바엔, 나는 예배를 안 하겠어.” 이것이 맞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또 다른 위선이자 핑계입니다. 내가 예배 중에 집중이 안 되거나,

찬양이 억지로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위선은 아닙니다. 위선은 ‘하나님이 아닌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자기 연출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혼란해도 하나님을 찾으려고 예배 자리에 앉는다면, 그건 진정성이에요. 마음은 부족해도,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그건 이미 진짜입니다. 예배는 ‘내가 얼마나 진실한가?’를 증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리입니다. 내가 진실하지 않다고 느껴질수록,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야 합니다. 진짜 위선은 “나는 거룩하지 않으니 예배하지 않겠다”는 자기 기준의 완벽주의일 수 있습니다. 그건 예배를 자기 성취로 생각하는 시선이죠. 그런 마음에 있으면 예배의 모든 것은 판단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신실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 자리에 계속 나아갈 때, 그 과정에서 점점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는 거입니다. ‘진정한 사람이라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함으로 진정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OO하니 예배하지 않겠다”는 말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나의 상태를 더 신뢰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진정성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방향입니다. 나의 부족함 가운데도 하나님을 향한 최선을 시도하는 것, 그것이 진정성의 시작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이 ‘과부의 두 렙돈’입니다. 우선 부자의 헌금이 먼저 언급됩니다. 이것은 해석이 어렵지 않습니다.

부자들이 헌금을 드립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은 옳은 일이죠. 아마도 앞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봤을 때, 이들이 자신들이 헌금을 좀 했다고 거만을 떨거나 과시했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저 자기가 하나님께 약속한 헌금을 드렸다면 적어도 이것은 이들에 대한 비판은 아닙니다. 그보다 해석의 신중함이 필요한 것은 ‘과부의 두 렙돈’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여인이 없는 형편에서도 헌금을 드리는 것을 통해 그녀의 헌신을 칭찬하는 것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이것이 더 주류의

해석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여인의 행위는 위선 된 신앙 속에서 빛나는 진실함의 모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도 존재합니다. 바로 율법학자들이 과부의 가산을 집어삼켰다고 언급된 후 이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도리어 이 여인에게 자신의 전부를 드릴 것을 강요하는 율법학자들에 의해 이 여인이 과도한 헌금으로 시달리고 있었다는 타락한 종교 시스템에 대한 고발의 한 요소로 이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신앙의 모델이 아니라, 외적인 어떤 요소가 강요된 분위기 속에 시달리는 희생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시선이지만, 주어지는 결론은 동일합니다. 과부가 진실한 헌신의 사람이든, 타락한 종교 시스템 아래에서 고통받는 희생자이든, 이 이야기의 본질은 겉모습으로 드러나는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보다도 마음을 보신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 과부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자기 전부를 드렸고 그것이 누구의 강요가 아닌 하나님께 대한

본인의 신앙고백이라면, 하나님은 그 진심을 아십니다. 반대로, 만약 이 여인이 종교적 분위기와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요받듯 헌금을 드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헌금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누가 얼마를 했다고 알아드리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아주십시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시험들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헌금으로 주님을 따르고 싶다면,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예물을 드리십시오.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헌금뿐 아니라, 모든 신앙의 요소에서 그렇습니다. 나의 최선이 무엇인지는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사람의 판단에 신경쓰지 마십시오. 나의 마음, 나의 최선은 오직 주님만이 아실 뿐입니다. 오늘도 이 예배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그렇게 드려졌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 그 여정 속에서 만나는

종교인들과 군중들의 위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여러 얼굴을 함께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위선을 고발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그 위선을 뚫고 우리를 만나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위선은 우리의 부끄러운 얼굴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내면이 그만큼 깨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불편한 분입니다. 그분 앞에 서면,

우리는 숨기고 싶던 내 마음을 들키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위선의 반대는 진정성입니다. 이것은 완벽한 상태가 아닙니다. 진정성은 내가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그분 앞에 내 마음을 솔직히 드리고 있는가, 그 질문을 계속 던지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가며 자꾸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지라도, 그것을 끌고서라도 주님의 앞에 나아가는 그 순간, 그것이 진정성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나는 어떤 얼굴로 주님 앞에 서 있습니까? 혹시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나만의 기대, 내 방식, 내 방어기제는 없습니까? 혹시 나는 지금, 누군가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예배가 우리 안의 위선의 가면을 조금씩 벗겨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의 여정을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