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 가르치심은 교육과 치유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행해졌습니다. 가르치시고 고치신 것이죠. 당시 예수님이 행했던 치유는 대부분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너무 이상한 모습으로 이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주도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를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은 세상의 왕인 사탄의 통치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본인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 내가 무슨 사탄의 통치를 받는 것인가? 반문할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대해서 가끔씩 제가 소개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한번쯤 기독교인들이라면 읽어보길 권합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답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쓴 책이죠. 사탄의 입장에서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자신들의 계략 안에 묶어 둘 수 있는지 그 비법을 고참 악마인 스크루테이프가 초보 악마인 자신의 조카 웜우드에게 가르치는 내용이죠. 그들의 원수인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사람들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들 말입니다. C.S 루이스는 그 책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 편지들을 읽는
여러분은 악마가 거짓말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크루테이프는 이렇게 초보 악마에게 조언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속삭이라는 것이죠. “기도의 힘에 대해 의심하게 하라. 종교에 있어서 중용을 지키게 하라. 정치나 과학의 힘으로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게 만들어라.” 이 악마의 속삭임이 거짓임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정확히 반대로 읽으면 기독교의 진리가 됩니다. 기도의 힘에 대해 의심하지 마라. 종교에 있어서 중용은 없다. 우리는
유일한 진리를 택해야 한다. 정치나 과학의 힘으로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수는 없다. 또 스크루테이프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속삭이라고 가르칩니다. “여하튼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어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어떤 인간이 말했듯이,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안에서 은혜를 받고 깨달음을 받은 후, 그것에 만족하도록 만드는 것만 성공하면 그것은 사탄의 승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사탄에게 그것은 성공입니다. 결국 행동하지 않는 일이 많아지면 나중에는 은혜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적극적으로 내가 사탄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지 않는 거의 모든 순간 우리는 사탄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죄의 통치가 실현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의 통치를 받는 자들을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로 나아오지 않은 채 죄의 통치,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탄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탄의 통치 가운데 특별히 귀신이 그 내면을 괴롭히는
자들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눅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눅 11:25)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눅 11: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우리의 마음을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집을 노리는 또 한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거처요, 주님을 예배하는 성전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공간은 사탄이 들어오고 싶어 하는 그러한 공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 안에 있다가 나가게 됩니다. 아마도 나간 사이에 그 집이 깨끗하게 정리되고 수리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책에서 본 것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주님이 정결하게 하시고
회복시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혹은 복음서의 사건들처럼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내어 쫓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 귀신이 망가뜨렸던 여러 부분들이 보수되고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쫓겨난 귀신이 갈 곳이 없어서 자기가 전에 살던 그 집에 다시 와보니 너무 좋은 것이고, 결정적으로 아직 그 집에 정확한 임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집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그 비참한 결말을 성경이 비유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즉, 귀신들린 것과 같은 사탄의 적극적 지배가 사라졌다고 해서 온전한 치유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진짜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고 다스리셔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행해지는 하나님 나라, 성전이 이뤄질 때 그것이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가로 유명한 ‘리처드 포스터’라는 영성신학 교수가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돈, 섹스, 권력’이라는 유명한 책도 있습니다. 또한 ‘기도’라는 책도 유명합니다. 그의 책 가운데
기독교인의 영성훈련을 위해 쓴 <영적 훈련과 성장>은 100만 명 이상이 읽은 매우 유명한 책입니다. 그가 이 책에서 내적훈련을 말하는데, 하나님 나라를 이 구절로 설명합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저도 계속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가는 장소적 개념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며 우리의 통치자가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의 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버려야 합니다. “의무”가 아니라 “소원”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 안에 여러 번민들과 염려들과 복잡함이 있으면 ‘명상’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묵상’을 합니다. 우리가 묵상하는 시간을 QT(Quiet Time)이라고 칭하기도 하듯이, 뭔가 조용함 가운데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묵상과 명상은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반대의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동양인들에게 유명하고 서양인들도 배워서 따라는 기독교 밖의 묵상 혹은 명상은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강조합니다. 개성과 자아를 버리고 범아와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이 세상의 수고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비인격의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을 동경합니다. 초연해지는 것이 명상의 목표입니다. 명상은 ‘비움’에 그 목적이 있다면, 묵상은 ‘채움’에 그 목적이 있죠. 명상은 ‘사고를 비워가는 과정’이라면, 묵상은 ‘사고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자기
암시와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것’입니다. 명상은 ‘신과의 합일, 신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묵상은 ‘신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면, 묵상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이 누군가의 통치를 받지 않는 상태, 어떤 것으로부터도 간섭이 없는 상태가 ‘자유’라고 느낄 수 있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가 자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연해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초연을 넘어 집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위의 혼란으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은 하나님께 더 잘 집착하기 위한 것입니다. 무언가를 비워내는 과정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비우고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잡스러운 생각들로 가득한 내 머리를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며, 세상의 염려와 근심의 통치를 받는 것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기도를 위해서 한 가지 팁을 더해 드리고자 합니다. 중세의 묵상법이고, 경건한 청교도 운동가들인 퀘이커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으며 했던 방법으로 그들은 ‘전념’이라고 불렀습니다. <손바닥 아래로> 이것은 여러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염려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든, 신경이 쓰이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그냥 ‘손바닥 아래로’ 떨어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비워내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친 후에는 손바닥을 뒤집습니다. <손바닥
위로> 이것은 주께로부터 받기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조용히 내가 버렸던 모든 염려와 문제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일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듣고 채우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비어진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평안케 하시기를 소망하며, 그분께 집중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당신을 사랑하시는 그분을 느끼는 것입니다. 때론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주님께 집중하고 그분과 교제하십시오. 이것은 기도가 시작하면서 하셔도 좋고, 기도를 마무리하면서
해도 좋습니다. 핵심은 오늘 내 마음에 악한 것을 모두 비워내고, 그 마음을 빈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다스리시도록 나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빈 집. 그것이 자유라고 말하는 사탄의 거짓된 속삭임을 끊어내십시오. 내 마음에 아무것도 없고 초연해지는 상태가 자유로운 상태라는 세상의 이야기에 대해서 조심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의 짐이 벗겨져야 우리에게 참 자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결코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네 마음대로 살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도 사탄의 성공입니다. 사탄의 유일한 실패는 인간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사탄의 통치와 죄의 억압으로부터 참 자유를 얻기 때문입니다. 운전대를 놓아버린 자동차는 자유한 것이 아니라 위태로운 것입니다. 그것 안에 평안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바르게 인도하는 운전사가 그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내 안에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들어와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가 찬양하고 말씀을 들으며 이미 이 안이 거룩해지고 정결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찬양을 할 때, 세상을 향했던 내 시선과 갈망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바뀌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그분의 진리가 나의 진리로 깨달아지고 그분의 뜻이 나의 뜻 안에 스며듭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하며 함께 나아갈 때, 내 내면이 성령의 통치에 순종하여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이 보기에는 어떻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가장 기뻐하고 부요하며 모든 것을 가졌다는 고린도후서의 고백과 같이, 오늘 주님께 예배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졌다는 성도의 고백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