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역대하를 다룰 수 있는 7주의 시간 가운데, 지난주에 배경을 설명하며 한 주를 보냈습니다. 이제 6번이 최대 가능합니다. 역대하는 1-9장까지는 통일왕국 시대, 솔로몬의 통치를 다룹니다. 그리고 10-36장까지는 분열왕국 시대의 왕들의 통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묵상 본문을 기준으로 오늘이 역대하 6장입니다. 그리고 이번주 목요일까지 9장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다음 주일 설교까지 2번의 설교를 통해서 솔로몬 시대에 대해서 다루려고 합니다. 솔로몬의
시대라고 표현을 했지만 이 시대의 일은 둘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건축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솔로몬 왕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도 2주의 설교를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솔로몬의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각각 다뤄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전 이야기입니다. 이 중에 성전의 크기나 구조, 일천번제에 대한 뒷이야기는 수요일에 다룰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설교에서 역대하의 배경을 다뤘습니다. 역대하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귀환 백성들에게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에스라가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특징을 다시 되짚어 보면 크게 4가지입니다. 1) 정체성을 가르치기 위해서 족보가 등장한다는 점 - 특별히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 2) 성전 재건을 목적으로 귀환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성전 건축이 갖는 의미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 3) 그로 인해 구약에서 성전 건축과 관련이 깊은 다윗과 솔로몬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 그들의 치부보다는 좋은
부분을 다루는 점 4) 귀환민이 남유다 출신들이기 때문에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도 북이스라엘은 생략하고 남유다를 중심으로 기록한다는 점 역대하는 솔로몬의 통치와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대하 1:1)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그의 왕위가 견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환민들은 현재 페르시아의 속국으로서
다른 나라를 지배를 당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상 최전성기는 바로 솔로몬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기를 그리워하고 되찾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을테지요. 우리고 비유하자면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시기의 용맹함을 말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왕으로 기억되는 세종대왕 시대를 기억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 테죠. 역대하 저자는 귀환민들에게 솔로몬 시대를 자세히 기록하며, 그 안에서 우리가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언급하면서 일단 ‘다윗 왕조’라는 그의 정통성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개 또한 ‘그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하므로 솔로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가장 주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런 표현들이 매우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제나 가장 평안하고 형통한 근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귀환민들은 자신들의 삶을 때로는 열악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기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기억하게 하고자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렸던 사람으로 예나 지금이나 유명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이나 왕이 된 후나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솔로몬보다 더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경험한 인물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굴곡이 많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늘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께서 솔로몬과도 함께 하심으로써 다윗과 그의 왕조에 대한 신실함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은 매우 큰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왕들에 대해 정치적 평가를 하는 열왕기서를 보면, 다윗의 후계자를 선정함에 있어서 아들들 사이에 소위 ‘왕자의 난’이 일어났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 ‘솔로몬’과 ‘아도니야’가 왕의 자리를 놓고 대결을 펼치고, 반대편이 숙청을 당하는 등 왕권 초기의 갈등이 컸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그런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사실 독자들이 유대인이기에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죠. 지금 귀환민들에게 그 이야기보다 더 필요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이 평안하였는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는 그 부분에 대해서 주목하여 기록을 합니다. 사실 성전의 모태는 성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시죠. 출애굽은 이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시작점입니다.
창세기까지는 가족 공동체였으나, 출애굽기 이후에 비로소 그들을 국가 공동체로 만드시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을 출애굽 시키자마자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그곳에서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법인 ‘율법’과 예배하는 처소인 ‘성막’을 가르치십니다. 삶과 예배의 법을 가르치시는 것이죠. 백성은 있고, 땅은 가나안에 준비하셨고, 하나님의 법을 그들에게 주시면서 국가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후반부는 모세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막을 짓고,
그 완성된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거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막에 거하시는 ‘성막시대’가 솔로몬이 왕이 되던 때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천막을 짓고 살아가는 유목민인 시절에는 이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르는데, 후에 정착하여 왕이 있는 국가의 시대에 도래하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던 다윗에게는 이것이 굉장한 죄송함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삼하 7: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삼하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다윗에게 하나님은 늘 실존하는 분입니다. 제가 요즘에 늘 강조하는 것이죠. 관념에 머무는 분이라고 여겼다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든 그것이 뭐가 걱정이 되겠습니까? 다윗에게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서 함께 하시는 분이었던 것이죠. 첫 번째 질문) 우리에게 이러한 다윗의 마음이 있는가? 저는
젊은 목회자이므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진짜 살아있는 분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 드러나거든요. 우리 윗세대 성도님들은 성경책을 항상 소중하게 다뤘죠. 그리고 헌금을 하더라도 은행에서 새 지폐로 바꿔오거나 다리미로 다려서 깨끗하게 드리곤 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것을 교육을 받다보니 주일학교 때 동전으로 헌금을 드려도 가장 발행 연도가 최근인 것을 모아서 드리기도 했었죠. 주일이면
평소에 꾸미지 않던 분들도 최대한 곱게 차려있고 예배하러 나오고, 최대한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힘썼던 것이 우리 윗세대였습니다. 무조건 이렇게 해야만 정답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율법주의가 됩니다만... 윗 세대의 신앙 안에 정말 순수하고 소중한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더 좋은 것은 교회로, 좀 안 좋은 것은 집에 두고 했죠. 그런 부모님들의 태도에 자녀 된 마음에서 속상한 부분들도 있었죠. 신앙이 경직되지 않고 조금 더 친숙하고
자유롭게 주님을 찾는 부분에서는 지금 세대의 모습이 좋은 면도 있다고 봅니다만, 우리 윗세대가 하나님께 품었던 그 마음의 진실함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런 부분들이 지나치게 약화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이 된 솔로몬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당시 성막이 있는 기브온으로 갑니다. (대하 1:2)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재판관들과 온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족장들에게 명령하여 (대하 1:3)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에 있음이라 여기서 핵심은 그가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을 먼저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일천번제’라고 하는 제사가 여기에 기록되죠. 우리가 수요일에 정확히 일천번제가 무엇인지를 공부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천일동안 드린 제사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우리가 ‘솔로몬’이라고 하면 꼭 함께 거론되는 이야기, 즉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는 역대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관점은 오직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드린 간절한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대하 1:7)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시니 이때 솔로몬이 지혜와 지식을 구합니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지혜와 지식입니다. 그가 바라던 것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던 아버지 다윗의 나라였습니다. 주변에 더 강한 나라와
그 나라 왕들의 화려함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아버지 다윗과 같이 자신도 하나님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처럼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재판할 수 있기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그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네 마음의 소원이로구나. 너는 부나 재물이나 명예나 원수의 멸망을 구하지 않았고, 오래 살기를 구하지도 않았다. 내가 너를 내 백성의 왕으로
삼았더니, 너는 그들을 잘 통치할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구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구한 대로 지혜와 지식을 네게 줄 것이다. 또한 나머지도 네게 덤으로 줄 것이다. 네 앞의 어떤 왕도 누린 적 없고 네 뒤의 어떤 왕도 누리지 못할 부와 재물과 명예를 줄 것이다.” 구한 것도 주시고 구하지 않은 것을 덤으로 주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깨달은 교훈들이 있죠.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수법이 되지는 않기를 원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사실 나는
부와 재물과 명예를 원하고 그것을 갖고 싶은데, 그것을 구하면 하나님이 안 주시니까... 지혜와 지식을 구하여서 그것까지 함께 얻으려 하는 방법론을 취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적용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소위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기도의 방법’, ‘하나님께 기도 응답받는 법’, ‘하나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법’ 이런 것들이 어떤 방법론을 갖고 하나님이 응답하시게끔 하려는 허튼 시도들입니다. 최근에도 누가 하나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댓글 중에, “하나님 보좌 좀 그만 내버려둬라. 하나님 멀미나시겠다” 라는 것에 저는 더 공감이 갔습니다. 그냥 우리 기도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면 됩니다. 기도 응답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주무르고 조정하려고 하면 그게 가장 안 좋은 것이죠. 솔로몬의 그 참된 마음을 하나님이 보셨고 그 이상으로 더 주신 것도 하나님의 마음이시죠. 중요한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성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 재물, 영화를 원천으로 다윗이 간절히 바라던 성전을 완공하는 데 힘씁니다. 두 번째 질문)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잘 사용하고 있는가? 3일 전에 저희가 운영하고 있는 매장에 잠깐 정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일시적인 정전 현상으로 무인결제기 기계의 패널이 고장이 나서 먹통이 된 것입니다. 무인시스템이 가장 중요하니까 곧바로 연락을 취해서 수리를 했죠. 66만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전은 피해보상이
없어요. 그냥 세상말로 하면 운이 나빴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수리를 마치고 집에 올 때, 마음에 강하게 오는 생각이 뭐냐면... 돈을 아끼고 검소하게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몇 만원을 갖고 너무 인색하거나 아득바득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에게 대접할 수 있는 기회에 더 베풀고, 굳이 깎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 좀 너그럽게 대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가 삶에서 작은 것 하나에 민감하죠. 내 돈이 내 돈이 아니구나. 그냥 작은 사고에도 내가
아끼고자 했던 것보다 몇 배의 돈이 날아가는데, 그것을 내가 막을 수도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2장을 보면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와 재능만이 아니라, 자신과 친분이 있던 두로 왕 후람/히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의 도움을 받아 성전을 건축합니다. 후람이 기술자와 목재를 재공해 주어서 그로 말미암아 협력해서 성전건축을 해나갑니다. 기술자와 좋은 목재를 보내주고 솔로몬은 대한 정직하고 공정한 대가를 지급합니다. 이렇듯 솔로몬은 자신에게 허락된 지혜, 물질,
인간관계까지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했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에게도 꼭 물질이 아니더라도,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인간관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나는 과연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한번 말씀을 통해 나를 비추어보길 바랍니다. 2장부터 본격적으로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꽤나 자세하게 기록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참여를 했는지,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어떤
재료로 건축을 했는지 상세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귀환민들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목표가 성전 재건이므로, 솔로몬의 성전 재건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는 것이죠. 그런데 역대기 저자가 이 성전 건축을 기록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출애굽기의 성막 건축을 매우 유사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출애굽기의 성막 건축 말씀들이 먼저 기록되었으니, 그 기록의 양식을 따라서 역대기의 성전 건축을 기록했다고 봐야겠죠. 주제 역대기
성전 건축 기사 출애굽기 성막 건축 기사 건축 양식 계시 다윗에게 (대상 28:11-12) 모세에게 (출 25:9, 40) 건축 기금 백성이 즐겁게 드림 (대상 28:6-9) 백성이 자원해서 드림 (출 35:4-9) 거룩한 구별 솔로몬에게 기름 부음 (대상 29:22) 아론에게 기름 부음 (출 28:41) 건축 순서 출애굽기를 따름 (대하 3-4장) 하나님의 계시를 따름 (출 36:1-39:32) 건축 기술자 후람, 브살렐 (대하 1:5;
2:14) 오홀리압, 브살렐 (출 35:30, 34) 히람(후람) 후람-아비(대하 2:14) - 단 지파 과부의 아들 (대하 2:14) 오홀리압 (출 35:24) - 오홀리압은 단 지파 출신 구름 가득 – 하나님의 영광 (대하 5:13-14) 구름 가득 – 하나님의 영광 (출 40:34-35) 즉, 솔로몬 성전이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였던 성막의 건축을 다시금 새롭게 행하는 일이라고 강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환민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 역대기 첫 부분에 족보가 있었고, 그 족보는 ‘아담’부터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를 통해 아담에게 주신 사명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어 받았고, 그 사명을 출바벨론한 귀환한 유대인들이 이어 받았다고 가르치는 것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교회 공동체가 이제 그 사명을 이어 받았다는 것이 제가 지난주에 했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역대기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연결하고 있는 것이죠.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었던 하나님의 집인 성막 건축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비록 재료는 바뀌었고, 모양은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성막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리고 솔로몬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담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요. (대하 2:6)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솔로몬은 최선을 다합니다. 성전 건축은 은혜로운 현장이지만, 그곳은 완전한 건축 현장이죠. 피, 땀, 눈물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은 어떤 뛰어난 건축물도 하나님과 격이 맞지는 않습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메시지 성경이 조금 더 쉽게 표현하는데요. “우리 하나님은 다른 어떤 신보다 뛰어난 하나님이시니, 내가 지으려는 성전도 가장 뛰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누가 능히 그런 건물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라도, 온 우주라도 그분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램프의 지니가 아니잖아요. 거기 갇혀서 못 나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담을 수 없어요. 우리와 하나님의 격의 차입니다. 인간이 뭘 해도 하나님께는 부족하죠.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랬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하나님께 어차피 격이 안
맞으니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못 미치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랫소리가 하나님께서 꼭 귀 기울여 들으셔야 하는 수준의 찬양입니까? 어떠한 노래 실력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미천하죠.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저도 설교자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올려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피, 땀, 눈물의 수고를 감내해야 하면... 그렇게라도 내 최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죠. 세 번째 질문)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입니까? 여러분의 일주일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정성평가가 있고 정량평가가 있습니다. 정량평가는 절대적 기준이고, 정성평가는 개인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데... 하나님은 정성평가를 하십니다. 그냥 나의 진심을 받으시는 분이시죠. 솔로몬의 성전이 그렇게 세워집니다. 이 성전에 언약궤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받으십니다. (대하 5:13b-14)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도록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고, 그것에 순종했을 때 그 성막에 임재 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상징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막에 머물렀고, 그것이 움직이면 이스라엘은 성막을 접고 자신들의 천막도 접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것만큼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멈추는 곳에 그들도 머물렀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제로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기적적으로 경험하며, 날마다 임재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경험하며... 광야는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국가 시대가 된 것이죠. 이제는 광야처럼 유목민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아니라 농사를 해서 땅의 소출을 먹습니다. 삶의 방식이 달라지고 시대가 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동일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지 않는 건물 성전에 임재하시고, 백성들이 그곳에
와서 예배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예배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구약의 시대를 다시금 거슬러 올라가서 이러한 솔로몬의 성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해봅시다. 솔로몬의 성전을 기뻐 받으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대하 7: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성전 문에 서서, 주님께 예배하러 그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일러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의지하지 말라.” 같은 건물인데, 솔로몬이 지었던 그 성전에 대해서 주님은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솔로몬의 성전은 바벨론의 공격으로 무너져 버립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끝장나 버립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남아 있는 그 소망의 씨를 주님이 살려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데려오십니다. 바로 그들이 오늘 역대기의 첫 번째 독자들인 귀환민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상황은 솔로몬 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주어진 사명은 같고, 일하시는 하나님은 같습니다. 이들이 다시 지은 성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지은
제2성전. 주님이 그 성전을 받으십니다. (라 6:16)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올렸다. 후에 이 성전은 헤롯대왕이 증축하여 더 그럴듯한 모습으로 예수님 시대에 이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날 성전에 가셔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마 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은 설교를 통해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 성전에 주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행 7:48a)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그리고 이 선언처럼, 귀환민들에 의해 다시 세워진 그 성전마저도 로마의 공격으로 무너져버립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면 성전은 없고 예루살렘 성의 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있죠. 그것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매우 아름답고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고, 이 글을 읽은 귀환민들은 그들의 최선으로 어려움 가운데 무너진 자리에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귀환민들에게 출애굽 백성의 사명이 이어진 것을 의미하고, 이스라엘이 비록 실패하여 포로로 심판을 받았지만, 다시 돌아온 귀환민들이 지은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므로 실패의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의 은혜’를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reset! 이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과거의 실패는 포로생활로 다 청산한
것입니다. 이제 다시 출바벨론의 은혜를 주셨고, 다시 그 백성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다시 실패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잘못과 실패를 ‘반복’합니다. 결국, 인간의 탐욕이 자리잡고 하나님은 뒷전이 되어버린 강도의 소굴 같은 그 건물에 주님은 더이상 계시지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임재의 장소를 바꾸십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으로. 귀환민이 다시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처럼, 이제 우리는 포로전 이스라엘, 포로 후 이스라엘이 모두 실패한 건물 성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시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의 명령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과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귀환민에게 역대기가 과거의 일이었고 그들은 그럼에도 그 길을 갑니다. 여러분은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두 번째 귀환민이고 새로운 사명 앞에 서 있습니다. 아담의 제사장적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우리가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주님을 예배하는 영화로운 성전은 이제 우리 안에 아름답게 세워져야 하고 본래의 의미대로 주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성전도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리고 거짓 예배만 있다면 이 성전도 주님은 버리실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 여러분의 성전은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그곳에 주님은 계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