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최근 금요일 설교를 통해 계속 주님 앞에 서는 법,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바, 주님은 새겨진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며, 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며, 우리 안에 계셔서 내 마음에 거하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있는 신에게 종교행위를 하며 내 마음의 성취감을 느끼는 그러한 종교집단이 아니라, 오늘도 모든 세계
가운데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면서도 나와 가장 가까이 계셔서 나를 살피시는 그 주님께 예배하며 나아가고자 합니다. 저는 성결교 목사지만 ‘칼빈’을 좋아하는데, 그는 우리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잘 설명해주는 신학자였습니다. 칼빈이 가장 강조하는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신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하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카톡 프로필에 적은 표현이, “주께 지는 것을 감사하는 삶”입니다. 결혼을 해서 함께 살다보면 그 안에 더 많은 갈등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누구 이야기가 옳은지, 누구의 삶의 방식이 옳은지 크고 작은 갈등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다보면 그 안에서도 분명 그러한 갈등이 생겨납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던 내 땅이었는데, 이 안에 주님이 들어오셔서 자꾸 나와 다른 의견을 내시는 것이죠. 그것이 가끔씩은 불편합니다. “제가 왜요?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죠?” 지기 싫어하는 반발심이 들 때도 있죠.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에게 이러한
불편함을 느끼게 하셨어요. 즉 내가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불편함을 느끼게 우리를 디자인하셨어요. 그것을 뭐라고 부릅니까? ‘양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이것을 말해요. 율법은 밖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기준입니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확하게 말해주죠. 그러나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바른 삶의 기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양심’을 우리 안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법을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직관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법이 밖에서부터 우리에게 부과된 낯선 것이 아니라(율법), 우리가 창조될 때 우리 안에 새겨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렇다’와 ‘아니다’에, 그분의 ‘옳다’와 ‘그르다’에 공명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즉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양심의 법이 작용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함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잡아준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육체의 밖에서 ‘율법’이라는 기준이 세워져 있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향하고자 하였고, 이방민족에게는 마음 안의 ‘양심’이 기준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옛언약(구약)의 산물입니다. 새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 밖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어서 우리의 기준을 세워주고, 우리 내면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 안에서 이따금씩 저를 불편하게 하는 그분의 정체를 성경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너의 마음의 집에는 너만 있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이죠. 자, 그런데 이분은 나를 설득할 뿐 나를 마음대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적어도 내 육체
안에서 그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음소거를 할 수도 있고, 방해금지를 걸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분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수도 있어요. 아직까지는 우리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내 삶이니까요.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질문이 있죠? 정말 네 삶이 네 것이니? “어휴~ 무슨 소리에요. 당연하죠. 제 삶인데요. 내 삶, my life.” 아닌데. 새언약을 맺으면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인데, 왜 너의
삶이 네 것이지? 새언약의 백성이라면서... “네가 나에게 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저를 다스려주세요. 저와 함께 해주세요.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말해서 나는 이제 너의 마음이 내가 거할 성전이라고 생각해서 온 것인데 그 고백들은 뭐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그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는 싫은 것이죠. 내 마음에서도 그리스도가 계신 것은 좋은데, 도우미 아주머니처럼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요청할 때 딱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내가 좀 불편하지 않게 적당히 사라져주는... 제가 예전에 이런 표현을 썼어요. 하나님을 뒷방 늙은이 취급하지 맙시다. 내 집에 있기는 하되, 뒷방에만 계시고 내가 가끔씩 문안 인사드리러 가면 덕담이나 해주는 그런 분으로 가둬두는 것이죠. 우리가 관념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이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안돼요. 관념 안에서는 뭐든지 가능하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실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실존이 내 안에서 고백되고 경험되어져야 내 삶이 진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복음은 내 정신세계를 맑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내 삶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추구하면, 불편합니다. 불편해야 해요. 내 예전의 삶대로 못하는 것이 짜증나야 해요. 내 옛 본성으로는 그래야 해요. 그러나 그 과정을 겪으면서 배워가고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지는 것이 더 기쁜 일이구나.” (시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 37: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맡긴다’는 것이 진실한 고백이 되려면, 바로 내 삶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에 순종하고 복종하여 그분을 따르는 실제적인 일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말로만 맡기는 것은 누구나 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내 삶이 정말 주님의 손 안에서 달라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여러분 편한 것이 아닙니다. 편하려면 믿는
척하지만 아무것도 안해야 편한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변화를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할 수 있죠. 그러나 문제는 진짜 내 내면이 안 변한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내 힘으로 하는 것 아니고 내가 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운전대를 주님께 드리고 순종하는 것은 내 몫이에요. 저는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과 사귐에 대해서 소개하고, 그 삶에 대한 약속들에 대해서 소개하며, 여러분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알려주는 것이죠.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단하는 것은 언제나 여러분 스스로의 몫입니다. 주님도 그건 안 건드리세요. 건드리는 순간 그것은 내 마음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내 삶에 전과 다른 불편함들이 생겼다면 기뻐하십시오.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 내 마음 안에 누군가가 내 양심을 건드리고 내 생각에 침투하여 나와 다른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지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닮는 것처럼, 그 일이 우리의 일상이 되면... 점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고, 어느새 내가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영향력을 가져야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해서 내 삶이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닮아가서 변화된 삶을 살 때 세상은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과정을 겪고 있는 여러분을 위로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두 가지 측면입니다. “누군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첫째,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를 왜 ‘보혜사’라고 부르는지 기억하십시오. 보혜사는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의 머리가 어떻게 주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러한 일들입니다.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더 옳은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간구하시는 분입니다. 정말로 돕는 분이예요. 단순히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함께 그것을 위해 나를 붙잡고 안으시고 손잡고 끊임없이 돕는 분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외로웠습니다. 나 혼자 이런 힘든 과정을 겪는 것 같기도 하죠. 그럴 때마다 주님은 함께 하는 사람들, 남은 자, 동역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 이 길을 갈 수 없음을 주님이 아시죠. 항상 주님은 우리에게 누군가를 주셨어요. 모세에게는 아론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도 제자들이 있었죠. 바울에게도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내 안에서 주님과 내가 해나가는 1대1의 관계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 언약의 백성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말씀이죠.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 혼자는 약할 수 있기에, 성령님으로 한 겹, 그리고 교회 공동체로 한 겹, 이렇게 붙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 우리 안의 불편함의 진실을 알았습니다. 그 불편함은 내 옛 사람이 홀로 차지하고 살던 나의 왕국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불편함이며, 그 불편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내 왕국은 주님의 나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기뻐합시다. 우리의 불편함을 기뻐하십시오. 나의 패배를 즐거워하십시오. 나의 옛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강성하게 세워지고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오늘도
이 시간 주님 앞에 간구할 때에 성령께서 날 도우시고, 주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조금 더 주님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과 더욱 깊이 연합하고, 주님이 나를 이기셔서 주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기를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