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과 12월 두 달 동안 묵상할 부분은 역대하와 베드로후서 시편입니다. 베드로후서는 3장인데 반해 역대하는 36장에 이르는 꽤 두꺼운 책입니다. 그래서 11월부터 총 9번의 주일설교 가운데 7번은 역대하를 다루게 될 예정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역대하는 우리가 가장 잘 모르는 책인데, 이 책을 다룰 수 있는 시간이 7주이므로 조금은 천천히 그리고 비교적 충분히 이 책과 가까워질 기회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의 전달자이고 소개자일 뿐입니다. 저는 소개팅의 주선자와 같이 오늘 역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소개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중매쟁이를 보고 그 대상에 신뢰도를 갖죠. 감사하게도 제가 누구를 소개할 때 ‘목사님이 소개하신 분이니...’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자신 있게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역대하’를 소개합니다. 이 책은 역사책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보다는 조금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남의 나라 역사이기 때문에 생소하다는 것뿐입니다. 부담은 조금 내려놓고 마음을 여십시오. 이 기회를 통해 역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소중한 사귐을 누리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7주라는 시간이 지나면 6년 동안 역대하를 설교로 통해 만나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소중한 이 시간, 소중하게 사용해봅시다. 우선 오늘은 첫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앞으로 역대하를 묵상하며 교제할 수 있도록 제가 그것을 위한 전체적인 밑그림을 여러분과 함께 그려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내용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역대상 설교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늘 우리에게는 망각의 은혜가 가득하죠. 제가 작년 5월에 역대상 설교를 3주간 했습니다. 사울의 도도한 삶 / 왜, 다윗 다윗 할까 / 적은 내부에 있다 이 세편의 설교를 역대상 본문으로 다뤘습니다. 저도 역대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세편을 찾아서 다시 들었습니다. 1년 반 전인데 예배당 상황이 너무 달라서 조금 낯설기도 합니다. 원래 역대상과 역대하는
‘한권의 책’이었습니다. <디브레 하야밈>이라고 부르는 책인데 해석하면 ‘시대의 사건들’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성경의 순서를 따르면 구약의 맨 마지막 책이 역대상과 역대하인 것입니다. 역대상과 역대하를 묶어서 ‘역대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유다 왕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책으로 사무엘하 / 열왕기상 / 열왕기하가 존재하죠. 이것의 차이를 조금 쉽게 설명하면, 삼국지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삼국지라고 하면 여러분은 대부분 유비, 관우,
장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삼국지 연의>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원래는 ‘진수’라는 사람이 ‘삼국지’를 먼저 기록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후에 ‘나관중’이라는 사람이 삼국지 이야기를 조금 더 각색하여 역사소설을 쓰게 됩니다. 그것이 <삼국지 연의>라는 책입니다. 연의라는 뜻이 ‘사실을 부연하여 재미있게 설명함’이라는 의미로서, 삼국지라는 역사 기록을 조금 더 재미있게 각색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는 진수의 ‘삼국지’보다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인 셈이죠.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삼국지 연의’는 역사 그 자체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후대에 특별한 목적으로 기록된 역사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좀 더 영웅전 같은 느낌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삼국지에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역대기는 그 정도로 소설은 아닙니다만, 특별한 목적을 갖고 후대에 기록했다는 측면에서는 성격이 유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평가한 기록들이라면, 역대기는 그보다 후대에 특별한 관점을 갖고 그 시대를 재평가 하여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시대를 다룹니다. 역대상은 사무엘서와 내용이 겹치고, 역대하는 열왕기상하와 내용이 겹칩니다. 우리는 보통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면, ‘사울 – 다윗 – 솔로몬’까지는 크게 말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자신 없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역대하의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조금은 생소한 부분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통하여 내가 잘 모르는 부분들을 새롭게 배운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사야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하스 / 히스기야 시대를 이해해야 했던 것처럼, 역대하 시대는 구약 예언서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7주 동안 역대하를 다루기 위해서, 오늘은 그 이해의 기초를 다지는 시간입니다. 1) 역대하의 시대적 배경과, 2) 왜 후대에 기록한 것인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만 여러분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역대하를 이해하기 위한 모든 기본적 지식을 갖춘 것입니다. 1. 어떤 시대의 이야기인가? 먼저 기록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사무엘서에서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스라엘의 첫 번째, 두 번째 왕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사울이 왕인 시절의 이야기와 왕이 되기 전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이 왕이 된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죠. 그러니 사무엘상하는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무엘하 11장에는 변곡점이 하나 등장하는데, 승승장구하던 다윗 인생에 찾아온 유혹인 ‘밧세바 사건’으로 범죄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주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는 그 모든 다윗의 일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하에서 솔로몬과 그 이후의 분열왕국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분열왕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최근에 깊이
살펴본 이사야 같은 경우도 남유다의 ‘웃-요-아-히’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로보암으로 시작되는 북왕국의 역사와 종말, 그리고 르호보암으로 시작되는 남왕국의 역사와 종말까지 모든 이야기가 열왕기상하에 다뤄지고 있습니다. 남왕국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앗수르가 북왕국을 멸망시키고 근동지역의 최강자였으나, 바벨론이 강성해지면서 바벨론이 모든 패권을 장악합니다. B.C 605년경에 남유다는 실제적으로는 바벨론의 속국이
됩니다. 그러면서 포로로 인재들을 데려가죠. 다니엘과 친구들 같은 경우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나라는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남유다는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어디에 붙어야 할지를 고민하며 줄타기 외교를 하는데 늘 선택을 잘 못합니다. B.C 597년 쯤 여호야긴 때, 바벨론 편에 서지 않은 것을 빌미로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왕과 백성들 중 일부를 포로를 잡아갑니다. 이때 에스겔 같은 사람이 끌려간 것입니다. 아직도 왕국은 속국의 형태로 보존은 되고 있었습니다. B.C
586년 시드기야 왕때는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벨론에게 침공의 빌미를 주어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쳐들어와서 성전을 무너뜨리고 왕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남유다는 완전히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흔히 말하는 바벨론 포로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 끌려가게 된 후, 그들 안에는 심각한 고민을 갖게 되었습니다. 크게 2가지 고민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하나님과의 언약은 깨어진 것인가? 2) 야웨 하나님이
마르둑 보다 약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하면 위대할 것 같지만, 바벨론에 있는 마르둑 신전은 그 크기가 비교할 수 없었거든요. 당시 사람들은 1차원적으로 신전의 크기가 신의 능력과 위상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건축물이 어마하게 큰 것들이 많죠. 이러한 이들의 고민과 질문들에 대해서 성경은 사실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열왕기서>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버린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너희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에 저주를 받아서 잡혀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멸망을 지켜보며 눈물의 애가를 지었던 <예레미야>는 뭐라고 말을 하는 것이냐면, 너희에게 닥친 포로 생활은 너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길 것이다. 70년 동안은 머물러야 하니, 너희가 평안할 수 있도록 바벨론의 평안을 빌어 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 포로로 끌려와서 바벨론에서 사역을 했던 <에스겔>은 뭐라고 말합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은 바벨론 왕이 온 세상의 주인인 것 같지만, 그 위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분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살펴본 <이사야>는 39장까지는 포로 전 상황을 다루고 40장부터는 포로 후에 대한 예언을 다루는데, 40장 이후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바벨론의 모든 신들은 우상에 불과하고 그것은 사람이 만든 나무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신은 야웨 하나님 한 분이므로, 그분의 섭리 안에 너희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구약의 후반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시대의 역사를 반드시 배경으로 삼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쉬지 않고 저를 활용해 주십시오. 제가 여러분이 말씀 앞으로 나아가서 그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일을 최선으로 도울 것입니다. 지금 잘 이해가 안 되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끝까지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한번 듣고, 두 번 듣고 하다보면 조금씩 이해가 되고, 그러다가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역사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그 위대해 보이는
제국 바벨론 한 순간에 망합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죠. 그리고 바벨론 땅을 페르시아가 차지합니다. 페르시아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러니 바벨론 땅에 살아가는 유대인 포로들은 페르시아의 포로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B.C 538년경인데,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립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신 야웨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황당하죠?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참으로 재밌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죠.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을 넘어서, 제국의 간판을 바꾸고, 그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이 분이 믿어봄직한 분이라니까요? 천하를 호령하는 제국도 좌지우지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1차 귀환민이 돌아옵니다. 이들의 목적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부모님 세대가 어디 먼 곳에 포로로 잡혀가서 40~50년 이상을 살면서 여러분을 낳았어요. 그리고 이제 여러분이 그 귀환 세대의 중심이
돼서 귀환하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제 그 포로로 살던 곳이 더 편하고 익숙합니다. 그래도 선조들의 신앙을 물려받아 큰 믿음의 결단을 발휘해서 돌아왔습니다. 이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와보니까 정말 척박한 땅인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귀환민들의 상황이 그래요. 돌아온 사람들의 상당수는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 태생이 아니라, 바벨론 태생인 것입니다. 오직 돌아가서 ‘성전’ 하나 지어보겠다는 열망으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쉽지 않고 방해세력도 많았어요. 그래서 자꾸 늦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학개와 스가랴 같은 선지자가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으로 선포를 합니다. 그래서 귀환 후 20년 만에 성전을 재건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고 다시 지은 성전이라서 제 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또 문제가 생깁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성전만 재건하면 만사형통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포로였으므로, 성전 재건 후에는 자신들이 페르시아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반전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한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예전에 부흥회 하면, 막 은혜 받고 교회 건축에 내가 집이라도 팔아서 헌신하면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며 헌신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치며 기대했던 그러한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축복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부터는 시험에 드는 것이죠. 돌아온 유대인들이 단체로 시험에든 것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해버립니다. 안식일도 어기고, 이방민족과 금지된 결혼을 하고, 고리대금업으로
서로를 뜯어먹는 등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집니다. 이런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2차 귀환이 일어납니다. 이때 돌아온 것이 에스라입니다. 에스라는 학사 겸 제사장입니다. 즉, 율법과 성경에 능통했고 예배를 주관하는 직무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공동체를 이끌고 돌아와보니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일을 합니다. 실제로 큰 회개의 운동과
영적 각성이 나타납니다. 그 후 느헤미야가 3차로 백성을 이끌고 귀환하여 성벽을 재건하면서 이제 귀환 공동체가 팔레스타인에서의 본격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4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세례요한이 등장하며 신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바뀌게 되는 시간들이죠. 이것이 구약 마지막 역사입니다. 그럼 역대기는 이 역사적 배경에서 누구와 관련이 있는가? 바로 종교개혁과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에스라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인 역대기를 에스라가 기록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대하의 맨 마지막 부분과 에스라의 시작 부분의 내용이 같습니다. “아, 이런 걸 나만 모르나?” 걱정마세요. 여기 있는 분들 다 모릅니다. 지금 알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성경의 배치도 역대기는 열왕기서 뒤에 배치되고 그 뒤에 에스라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역대기가 열왕기에서 기록했던 내용을 다시 다루고, 역대기 이후의 역사는 에스라서의 내용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2. 왜
기록하였는가? 에스라가 돌아와서 보니, 이들에게 종교개혁이 필요하고 신앙교육이 필요합니다. 대상은 남유다 출신의 귀환민들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예전에 망하고 이제 없습니다. 다윗의 나라의 정통성은 이 귀환 공동체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들에게 뭘 가르쳐야할까요? 아까 설명한 것처럼 귀환 공동체의 고민은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낯선 땅에 와 있는가?” 그리고 신앙적 고민입니다.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가?” 그들에게 율법의 학자요, 구약 성경에 능통하며, 예배하는 제사장의 사명을 가진 에스라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의 구약의 모든 역사입니다. 아까 제가 ‘삼국지 연의’가 ‘삼국지’보다 훨씬 후대에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다시 풀어쓴 것이라고 했는데, 역대기는 구약의 역사를 에스라가 이들을 위해서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기의 매우 독특한 점이 역대상 처음에 1-9장까지 족보가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누구인가?
그래서 이 족보는 아담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족보 이후에는 누구의 이야기를 다루냐면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입니다. 역대기를 기록할 당시 시대적 화두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재건이 가지는 의미를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두 사람이 중요하죠. 다윗과 솔로몬입니다. 앞서 더욱 역사적 평가의 성격이 강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에 대해서 공과 과를 다 평가합니다. 오히려 그 책들의 초점은 그들도 실패가 있는 왕이며 인간은 다 연약하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성전을 짓는 것에 대해서 강조를 해야 하니, 그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두 왕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다윗에게 가장 취약한 흑역사인 밧세바 사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환 백성에게 ‘모델’로서 제시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의 초점은, 귀환 백성이 성전을 짓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 성전을 통해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찬송이 회복되어야 하며, 그를 통해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역대상은 족보와 다윗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우리가 이번에 볼 역대하는 솔로몬과 그 이후의 남유다 왕조에 대해서 다룹니다. 이것도 독특하죠. 열왕기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을 공평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이제 북이스라엘 왕국은 다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귀환민들은 남유다의 후손이죠. 그러니 남유다 왕들의 역사만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대기가 가진 기록의 이유와 독특한 관점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며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할 메시지를 찾아봅시다. 역대기의 시작을 아담으로부터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의외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혹은 모세 이후부터를 나라의 시작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그럼에도 역대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아담을 제시합니다.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럼 그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요? 아담은 하나님에게 처음으로 사명을 받은 자이죠.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 만드셨고, 그 안에 대표성을 가진 에덴을 만드셨습니다. 에덴은 작은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의 모델입니다. 그 에덴에 제사장적 사명을 가진 자로 아담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에덴을 잘 관리하고 그 안에서 예배하며,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 나라와 성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담의 사명이었습니다. 지금 귀환한 유대 공동체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대하 36:23)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역대기의 저자가 귀환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담의 사명을 다시 이어가는 길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피조세계 전체가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우리의 예배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출애굽을 할 때, 모세가 바로에게
출애굽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출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을 다시 재현한 것이 출바벨론입니다. 출애굽과 같이 바벨론 땅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귀환시킨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언약의
백성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주신 새언약이 있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느끼십니까? 우리에게는 아담을 택한 것처럼 택함 받은 자의 정체성이 있고, 예배를
통해 주님을 나타내는 제사장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어떻게 준비되어 왔는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하시는가? 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책이 역대기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금요일에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이제 건물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전 재건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성령이
거하시는 것으로 우리 안에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성전입니다. 온 땅이 주를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나의 성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안에, 나의 삶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예배가 온전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그 다음이에요. 온전한 예배의 마음이 우리 안에 세워져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그들 안에 참된 예배를 세우는 것. 영적으로 황폐한 백성들 가운데 에스라가 와서 행했던 일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지금까지 해왔던 예배의 과거 모습들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성전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기에 우리는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역대하를 함께 읽어가면서 우리 안에 영적으로 더욱 뜨거워지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오늘 이 예배부터 우리가 그렇게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