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예수님은 그 나라로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그 초청에 반응하여서 따르는 자들도 있지만 예수님의 추청에도 거절과 무시가 많았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은 성경 시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시대에도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복음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그들에게는 메시아를 정치적인 군주로 이해하는 잘못된 오해 렌즈가 있었습니다. 그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잘되려고 믿는 경우입니다. 성공과 축복, 소원을 이루어 주는 신에 찾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종교를 가짐으로 마음의 안정은 누리고 싶지만 부담없 부담없는 그냥 적당한 헌신, 적당한 관계만 추구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경우를 갖고 기독교를 오게 된다면 이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면 정말 기독교가 주고 싶은 것을 얻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면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됩니다. 첫 번째
성경은 예수님의 믿음으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이나 소원 성취가 아닐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오히려 자기 중심적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 때로는 거절하시는 것이 성경 속에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거절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분은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은 한 몸을 이룬 공동체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은 서로에게 헌신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각자가 밥해 먹고 아이들도 각자가 하고 이러지 않잖아요. 다 각자의 역할에 맞게 서로가 헌신합니다. 그러므로 부담감과 공통 공동체성이란 것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도록 지음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깊은 외로움에 빠지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깊은 외로움을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가족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깨어진 세상의 외로움을 극복하고 회복된 마음으로 우리를 살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 공동체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이러한 진리를 가르치셨고 백성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복음의 진리로서 그들이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지금도 복음은 변함없이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임하셔서 하나님의 그 안에서 그 일들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우리가 봐야 될 때 이것은 그런 의미에서 해석돼야 되는데 오병이 사건은 다른 의미로 말하면 메시아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서 허락하신 메시아의 잔치 더 피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오병현 사건은이 14장 바로 앞에 나타나는 헤롯의 잔치와 대조적입니다. 헤롯의 잔치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잔치입니다. 왕궁에서 열렸고 성대하게 열렸고 음식도 많았어요. 그러나 그것은 본질상 죽음의 잔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잔치, 메시아의 잔치는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서 음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의 주인이 메시아였기 때문에 그것은 생명의 잔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잔치였어요. 영이 살아나는 잔치였습니다. 세상은 자꾸 세상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과 금을 원하지만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어 복음을 얻는 것이었고 주님의 치유가 되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은과 금은 그에게 주지 않지만 그것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참된 성공과 참된 축복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병 사건 좀 더 분석해
보면 오병 사건은 유대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남자만 5,명을 대상으로 벌어졌고 남자만 참여했다시라 참여한 사람들 중에 숫자를 세보니 남자만 셋을 때 5천명 다합치면 15,000명에서 2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2 바구니가 나왔다면 비슷한 사건이 또 하나 기록되는데 또 하나의 잔치는 일곱 개의 물고기와 아 일곱 개의 떡과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이방 지역에서 여기도 남자만 αι을 때 4,000명을 대상으로 벌어졌고 일곱 강주에 남았던 매우 비슷한 사건이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연달아 어 기록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비슷한 기적임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이유는 메시아의 잔치에 초청되는 백성은 유대인만에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메시아가 오셔서 메시아가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선을 구분하고 갈랐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역사하는 곳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뭐 주인이나 남자와 여자나 세상이 만들어 놓은 어떤
분열 어떤 구분을 하나로 묶는 하나로 만드는 그 회복이 복음이 있는 곳에 늘 있었습니다. 즉 죄가 만들어 놓은 개인주의와 분열과 흩어짐이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과 하나됨과 소통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복음이 복음이 성경은 이렇게 능력이 있다. 힘이 있다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복음 안에 두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은 힘을 발휘합니다. 그 받아들임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믿음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있었지만 믿음으로 손을 뻗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 그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저분께 나아가서 저분의 옷이라도 만지면 난 저분에서 치유될 거야. 이런 믿음을 갖고 나아갔던 사람이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가까이 있었지만 제자들도 믿음이 없던 때는 예수님께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믿음은 즉 내가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메시아 잔치의 특징입니다. 제가 아까 우리 리더 모임할 때
이런 질문하셨어요. 여러분 5천명을 먹이는 그 500병열 사건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모두 주님을 끝까지 따랐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즉 우리로 따지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내 모든 걸 결정하는게 아니라 거기 내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메시아 자체 특징입니다. 초청은 제한이 없어요. 모두에게 은혜를 주고자 하십니다. 다만 누군가는 그것을 들음에도 듣지 못하고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잔치에
있으나 그 잔치의 생명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날 메시아의 잔체가 있을까? 혹시 성경 시대 사람만 경험하는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간혹 이런 생각해요. 나도 오병의 사건 있었으면 봤으면 나 진짜 잘 믿었을 텐데. 아, 그 사람 좋겠다. 예수님을 봤으니까. 근데 우리는 간혹 성경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정작 우리가 그 은혜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두 번의
메시아 장치는 모두네 개의 동사로 그 과정을 표현합니다. 가지다, 축복하다, 떼다, 주다. 그런데이네 단어가 모두 사용된 사건이 성경에 한 번 더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영적인 가족들인 제자들과 행하셨던 성만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만찬에 성찬을 행하신 다음에 너희가 이것을 계속 행하여서 나를 기념하라. 즉 모든 영적 가족들과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내가 그것과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나누는
그 모든 예배마다 그곳에 메시아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이 메시아 잔치 생명의 잔치는 우리의 예배에 늘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어떤 것인지 모르면 와서도 누릴 수 없어요. 그러나 이곳이 정말로 예수님의 그 치유가 일어났던 현장.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먹이셨던 현장. 그 현장에 서셨던 예수님이 오늘 이곳에도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 예배는 날마다 우리가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모인 곳에 하나님 나라 단체가
열리는 것이고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와 회복 영적 가족 때문에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함께하는 이 팬예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 은혜의 채워짐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늘에 붙잡고 누리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우리가 어 흩어지면 3C를 하죠. 네. 3C를 하는데 그 3DC에 대한 것들을 제가 오늘 좀 먼저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의 쓰리입니다. 오늘 말씀에 대한 어 저의 먼저 삶의 상황은 어 제가 며칠 전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 그것은 목회자로 사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어 아내는 가급죠. 누군가가 목회하려고 하면 아 난 목회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목회자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참 많이 느끼면서도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어 계속 제 안에 이렇게 양면성처럼 있습니다. 만약 저의 자녀가이 길을 간다면 정말 반반의 마음이 있을 것 같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에요. 말릴까 응원할까?
말릴까 응원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매주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매번 고민하며 전합니다.이 길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포기할 거면 차례 빨리 포기해라. 그래도 만약에 간다면 또한 가장 갑지고 의미 있는 길이다. 예. 저희 교회 지금 인턴십으로 와 있는 우리 사역 간사들과 모임에서도 예. 종종 나눕니다. 자네 정말 이 길이 가려나. 목회적서 늘 설교하지만이 설교를 다시 묵상하며 어 목회자로서 내가 이 하나님을 도구 삼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 삶에서 내가 얼마나 진실할까 자유로울까 어쩌면 목회자이기 때문에 더 하나님을 이용할 수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에 노출되어 있는 자리는 아닐까 그런 고민도 해 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고 어디까지 따를 수 있을까? 다행히 그래도 지금까지는 제가 가진 최선을 다해서 비워내며 살았던 거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은데 그러나 제 안에 있는 영적 싸움, 제 안에 있는 죄성과 그것이 평생 싸워야 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주는 무게와 압박, 스트레스 그리고 고갈의 문제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재임으로는이 자리를 섬길 수 없다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예배가 필요합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저는 함께 무너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충만한 채우심, 그 생명의 양식과 은혜를 놓는 순간 저는 결코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좀 도전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사기 교회는 저에게 사역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저를 샘솟게 하고 저를 채우고 위로하고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때로는 목사로서 목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당이 하는 사역도 많지만 그 사역들을 하면서 늘 새롭게 채워지는 저를 보게 됩니다. 사귐의교회를 개척하고 제일 감사한 것은 저의 회복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도 한데 정작 그 설교를 통해서 가장 먼저 은혜를 누리는 것도 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병이를 경험한 성경 시대 사람들이 부럽지는 않습니다.
저에게도 예배마다 주시는 오병이와 같은 기적이 있음을 저는 진짜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제 안에 변화를 도모한 것이 있다면 한국 교회 명과 암이 있는데 그 암을 꼬집고 개혁하고자 하는 저와 같은 목사들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공격을 받고 더 날카로운 잣대 위에 서게 될 것을 잘 압니다. 제가 말한 것에 부끄럽지 않게 제가 이야기하는 그 공격하는 직업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 저 스스로가 더 나아가야 할 테니까요. 그런데도 제가 계속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 단순히 악한 것을 경계하는 마음뿐 아니라 그 말들을 듣는 이들 앞에서 저 또한 더 책임감을 갖고 겸비하기 위함입니다. 적어도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그 바구니와 광주리를 날라서 가져다 주는 역할 정도로는 부름받아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이 자리를 어떻게 감당할까 고민해 봤습니다. 제가 다짐하는 것은 성도를 위해 존재하는 목사가 되자. 목사를 위해 성도가 존재하게 만들지 말자. 내가 더 이상 이들에게 은혜를 줄 수 없을만큼 고갈된다면 정직하게 인정하고 나부터
충전하자. 이런 마음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예배를 담당하는 모습으로서 이것을 수단째 말고 준비한 예배 준비한 설교로 대충 떼우지 말고 먼저 내가 이 예배를 통해 충만함을 누리기 힘쓰자. 그거 못하겠으면 차라리 목사하지 말자. 죽어가는 영으로 어설프게서 있어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목회는 하지 말자. 그 예배의 회복과 충만함의 은혜를 너의 수혜자로서 누리며 살자. 경험한 것을 나누는 자가 되자. 이런 마음들을 다시 먹어 보게 됐습니다. 그 저의 결단은 하나님 앞에서는
어 시간을 제스로 지켜내기. 두 번째는 맡겨지는 모든 사역에 늘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기입니다. 네. 이것이 제가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서 제게도 도전이고 어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남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네. 나눠주셔서네 감사합니다.네 어 우리 공동치 하나된 평화를 위한 약속이라고 다음 장에 있는데 그 맨 위에 있는 부분 한번 같이 읽어 주면 좋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는 치유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기다려 줍니다. 아멘. 네. 우리의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저는 치유하신다고 믿는데 그 치유가 꼭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으로만 일어난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치후에 저는 우리 공동체를 사용하실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오늘 팬회 때 저는 여러분들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그곳에 있는 치유받아야 될 사람들이 치유된 역사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혹시 오늘 예예배할 때 누군가의 고민과 아픔이 있다면 잘 들어 주십시오. 때로는 우리가 그 어려움에 해 줄 말이 별로 없는 경우도 많아요.
근데 그냥 잘 들어 주시고 사랑으로 잘 들어 주시고 그냥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어쩌면 그것이 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치유의 한 방편일 것입니다. 또한 이 팬 예배에 오고 오지만 아직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나누는 것이 어렵고이 신앙생활 자체가 아직 어렵고 버거운 삶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을 대통해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함께 잘 기다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팬마다 아직 우리 공동체가 어색하고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보듬어 주는 그런 팬 예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뭐보다 서로를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냥 우리가 함께 모여 있는 거 자체가 우리의 치유가 될 줄로 믿습니다. 네. 그런 패로 오늘 나아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오늘 저희가 이제 흩어지면 어 공식적인 모임 시간은네 11시 정도 안에는 끝내시는 걸로 하고요. 그 이상은에 그 패 자발적인 마음들에 맡기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우리 오늘이 후에 순서로 흩어지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