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살리는 칼" / 강정규 목사

2023-03-26 · 마태복음 16-1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최근에 우리 교회는 주일이면 <마태복음> 강해를, 금요일에는 <하나님 나라> 시리즈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시리즈도 대체로 복음서를 본문으로 하기에, 저희는 올해 ‘복음서’의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과정입니다. 제가 반전이 좀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최근에 학교에 가서 저의 목회 여정을 나누는데, 이런 반응을 들었습니다. “외적으로 봤을 때는 고생 하나도 안 했을 것으로 보였는데, 치열하게 사셨네요.” 그런데 가끔 설교를 듣고 하는 반응도 유사합니다.

“굉장히 부드럽게 말씀하시는데, 설교의 메시지는 칼 같아요.” 그런데 만약 요즘 설교에서 그런 부분을 많이 느끼셨다면, 그것은 제가 최대한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가감 없이 전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만큼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히 4:13)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입니다. 하나님의 칼은 의사의 메스, 즉 ‘살리는 칼’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찌르고 자를 때가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살려내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수술하십니다. 성경이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나태함과 바르지 않은 태도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는 것은, 구원의 문턱을 지나치게 높여서 여러분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 구원의 여정에서 여러분을 잃어버리지 않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결국 삶으로 드러나기에, 신앙인다운 삶이 무엇인지 배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삶도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그 마음을 잃어버린 행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행함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정확하여, 그 행함이 얼마만큼인지에 그분은 주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함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기에 나오는 것인지 그 진실함을 늘 보십니다. 그래서 혹시 마태복음 설교와 하나님 나라 설교를 들으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강하게 다가왔던 분들이 있다면, 저는 무엇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늘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내 진실한 마음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의 삶에 베푸신 은혜를 느낀 후, 늘 하나님께 어떻게 제 삶을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좌우명은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를 원한다’가 되었습니다. 이미 내 마음을 주님이 아시고, 주님 마음 내가 알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음을 알지만…. 내게 주어진 삶을 허비하지 않고, 그분과 나란히 걷는 것이 저의 행복이기에 그 일에 제 삶을 드릴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늘 잊지 않으려고 하는 한가지 마음은 ‘Being Useless’, 쓸데없이 존재해도 괜찮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고,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받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은 존재가 변했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 무엇을 행하기에 내 존재가 인정받고, 무엇을 하지 않으면 부정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존재의 변화는 내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시작되기에, 때로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 모습 자체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꼭 기억해주십시오. 가치 있게 살아야만 가치 있게 여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결단한 순간 이미 가치 있는 자가 되었기에, 쓸데없이 존재해도 괜찮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만 그 삶에서 각자 나아갈 수 있는 만큼, 각자의 진실함으로, 각자의 최선으로 주어진 삶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 자체가 사랑하는 표현이고, 그 자체가 기쁨과 행복이기에…. 늘 아버지

곁에 있었던 첫째 아들은 무언가를 하는 존재였고 그 모습을 아버지는 사랑하셨습니다. 탕자라 불리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뭔가를 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가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품에 있어야 함을 기억하고 마음을 다해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이미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그런 의미에서 진짜 ‘사귐’일 뿐입니다. 그 관계의 진실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선은 여러분의

마음을 그저 하나님께 드리며, 아버지의 품에 푹 안기는 시간이 되길 저는 축복합니다. 부모로서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서 밥을 해주고 뭔가를 하는 것이 사랑으로서 행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 지금 눈을 맞추고 안아달라고 하는 자녀를 스쳐 지나간다면, 그것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주일에 너무 뭔가를 하려는 마음이 앞선다면, 자칫 하나님도 빠르게 스쳐 지나가 버리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그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 자녀가 되기를 추구하십시오. 오늘은 마태복음 16장부터 몇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마태복음의 소중한 가르침을 나누어보겠습니다. 1. 믿음의 고백, 주어지는 사명 (마 16장) 5,000명, 4,000명의 사람들을 향한 메시아 잔치가 끝나고, 오랜만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지역으로 향합니다. 가이사랴로 시작하는 지명들은 로마의 황제를 의미하는 ‘카이사르’에게 바쳐진 지명들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

16: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고치셨던 사역을 오래 하신 후이므로, 그 사역의 결과와 반응을 묻는 것이죠.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비범한 인물이라고 여겼지만, 정작 메시아에 대한 고백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다뤘던 당대 사람들의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복음에 대한 거절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은 이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단계일 뿐입니다. 아직은 잘 모를 수 있죠.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제자들 안에 믿음이 생겼는지일 것입니다. (마 16: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대답하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메시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미 족보에 나타났기에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마태복음 내 등장인물을 통하여서는 처음으로 고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께서 기대하시던 답이었죠. 지금까지 예수께서 하신 사역이 메시아적 사역이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듣고 보고 경험한 제자들이 이제는 깨닫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안에서도 깨달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함을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도 우리는

때로는 그 시간을 잘 기다려줘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개척하고 처음 세운 목회의 첫 방침은 ‘슬로처치(SLOW CHURCH)’였습니다. 왜냐하면, 사귐의교회의 첫해 함께했던 사람들이나 저조차도 영적으로 회복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천히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사역과 봉사를 위한 채워짐이 안된 사람들을 소비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 단계에서 2년 동안은 교회 청소도 성도들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특히

다른 교회와 달리 청년들에게 사역에 대한 부담을 최대한 주려 하지 않았어요. 대부분 교회에서는 뭐만 하면 무조건 ‘청년들이 해야지’라는 반응들이 많았는데, 저는 ‘청년들이 해야지’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장년들이 해야지’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먼저 채워진 자가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자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아직 섬길 때가 아니라고 여겼고, 대신 조금 더 성숙한 장년들이 교회 안의 헌신이 필요한

부분들을 잘 감당해주며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청년들도 성숙해서 함께 이제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다. 단계가 있는 것이죠. 주님의 교회 안에는 계급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의 단계, 섬김의 단계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공동체는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을 섬기고 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할 줄 알아가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이고, 영적인 회복의 단계에 있는 사람과 신앙의 기초를 배워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공급받을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아이가 청년으로, 청년이 부모로 자라게 되면 그 섬김의 순환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도 실망하지 않았고, 가르치시며 먼저 본을 보이시며, 사랑해주시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제자들에게 진리에 합당한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마 16: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진리를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도 주의 은혜요, 하나님을 고백하며 예배하게 된 것도 주의 은혜입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힘이라면 똑똑한 사람들이 더 잘 깨달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진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들도 가능합니다. 시골의 할머니도 가능해요. 그러나 박사라도 불가능할수도 있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것이 주의 은혜인데, 그 깨달음을 고백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시어 그들에게 더욱 놀라운 특권을 주십니다. (마 16: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이 재미있는 것은 베드로의 이름이 곧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페트로스, 반석은 페트로스의 여성형인 페트라를 썼습니다. 아람어로 예수님이 말씀했다면 “너는 게바다. 이 게바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말씀으로 베드로에게 교회의 권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가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에 대하여 이렇게 화답하십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말씀에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고 말합니다. 열쇠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청지기의 사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럼 베드로만 이 열쇠가 있나요?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반석 삼아 교회를 세우고, 그 같은 고백 안에 머무는 모든 사람, 즉 모든 교회가 가진 사명이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말씀을 주님은 모든 신자에게도 말씀하여 주십니다.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있겠다고 하며 주신 말씀입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이죠. 저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파트가 하나 지어질 때, 그것을 홍보하고 보여주는 일을 분양팀에서 하며 모델하우스도 짓죠. 저는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전하고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가진 제자들에게 하셔야 할 말씀은 이제 하산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의아함을 느끼게 됩니다. 베드로가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을 기뻐하신 후,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하나님 나라 통로라고 하고 난 후, 그것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말씀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안에 2개의 큰 전환점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전환/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 전환/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첫 번째 전환점은 메시아로서 사역의 준비를 마치신 후, 이제 본격적인 메시아 사역을 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환점은 메시아적 사역에서 이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전환점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마 16: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해놓고,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가시는 길이 ‘죽음’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그 예수님의 길을 막아섭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태도를 ‘대들며’, 혹은 ‘꾸짖으며’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이 베드로의 행동이 어떻게 이해되십니까? 두 가지 정도의 관점이 있죠. 첫째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입니다. 그런데 다른 마음도 엿보입니다. “예수님, 이건 아니죠!” 자신들이 꿈꿨던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함께 맛볼 이 땅의 영광이었는데, 메시아의 길 끝에 있는 것이 죽음이라니, 실망하고 화를 내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는 것,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 알리지 말라는

것이 이해됩니다. 제자들도 이 정도 반응을 보인다면, 아마 다른 민중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길을 가는 메시아를 돌로 쳐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예수님이 수단이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반대, 세상의 몰이해 속에도 그 길을 가셔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는 것이 진짜 우리를 위한 구원자(메시아)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자 예수님은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시죠. (마 16: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자가 제자요, 사람의 일을 따르는 자가 사탄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랐던 베드로의 마음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선한 마음도 있었지만, 마음 한 곳에는 인간적인 기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팔자를 고쳐보고자 했던 그 마음. 주님은 그 마음에 대해서 엄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길을 가실 것입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말입니다. 베드로의 마음 때문에 예수님이 바뀔 수 없고, 복음이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베드로가 끝까지 바뀌지 않으면, 주님의 길에 베드로가 동참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를 엄히 꾸짖습니다. 베드로가 바뀌어야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세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

16: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 16: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저는 우리 안에도 주님을 믿을 때, 100% 순수한 동기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대하는 것은 나의 그 마음들이 진리 앞에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알수록 스스로

그 마음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나의 그 못된 마음을 죄악 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회심하기 전 나의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2. 메시아의 영광, 우리의 소망 (마 17장) 17장의 변화산 사건은 앞서 등장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와 균형을 맞춰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헛된 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진정한 메시아의 영광을 위한 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장면을 몇몇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모습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맛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들이 다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마 17:1)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마 17:2)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마 17:3)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3절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제가 구약을 통칭하는 표현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은 모세,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에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이 모습을 보면서 초막 셋을 지어서 그 영광 가운데 머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그 광경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 경험되었다는 것이죠. 그러자 하나님은

구름으로 그 빛을 덮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이러한 경험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주시며,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던 따르라는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모습이 부활과 관련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마 17: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즉, 16장에서 예수님은 메시아의 길이 죽음의 길임을 말씀하셨다면, 17장에서는 영광의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은 예수님만 걷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함께 걸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길을 걷는 자에게 예수님의 영광도 함께 주어질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와 제자들은 부활하신 후 이 변화산 사건을 비로소 이해하며, 부활의 그 영광을 함께 전하였을

것입니다. 17장의 내용 중 주목할 부분을 하나 더 보자면, 한 사람이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데리고 온 장면입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데리고 가서 치유를 요청했으나, 되지 않았고 예수님께 온 상황입니다. (마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마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마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흥미로운 점은 제자들이 치유에 실패한 상황에서, 제자들의 실패를 탓하기보다 무리의 ‘믿음이 없고 패역함’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세대’가 처한 전반적인 영적 질병 상태가 많은 사람들이 귀신들림이라고 표현되는 정서적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또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모든 병의 근원이 영적 질병만은 아닙니다. 바울이나 욥과 같은 사람도 질병을 겪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적 상태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는 몸이든 마음이든 아픈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본인 스스로는 혹시 내가 경험하는 것이 내가 영적으로 회복해야 할 어떤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은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강조하는데, 아주 작은 믿음만 있어도 치유는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적 엘리트의 지위는 필요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맞다고 정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게 믿는 것’, ‘간절히 믿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얼마나 ‘세게’ 믿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음식을 잘못 먹고 속이 더부룩하고 배가 살살 아픈데, 소화제 대신 두통약을 먹으면서 이거 먹고 꼭 나을 것이라고 세게 믿으면 나을까요? 배가 아플 때는 그냥 소화제 잘 챙겨 먹으면 됩니다.

두통약 먹고 “믿씁니다~~!!” 하고 굳게 믿으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나의 의지나 감정이 얼마나 크고 확고하냐가 아니라, ‘바른 것을 받아들이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 그분이 나를 지으셨고, 그분 안에 있을 때 참된 행복과 평안과 자유함이 있다고 말하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회복할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습 (마 18장) 마지막으로 18장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제는 공동체에 관한 것들입니다. ‘서로 낮아짐’, ‘잘못에 대한 권면’, ‘용서’에 관한 것이죠. 복음서 안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교회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입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떠함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유익도 끼치고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을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공동체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은 겸손입니다.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일반적으로 나라는 피라미드 구조와 같은 수직적 높낮음이 있기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지 관심을 갖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 달리 상하관계가 뒤집힌 나라임을 말씀하십니다. (마 18:3)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겸손해야 합니다.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것은 ‘순수함’, ‘해맑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어린아이는

지금과 달리 가장 낮은 존재였습니다. 어른들의 요구에 따라야 하고 희생해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작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서 작은 자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누군가를 실족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앞서 살펴봤던 하나님 나라 비유들과 충돌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유에서는 가라지가 있고,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누구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시며,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그것 또한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는 않으므로, 결국 하나님의 그 마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잃어버리는 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늘 지켜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우리가 신앙적으로 자라가고, 하나 되어 가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모든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능력이나 의지가 대단하여 자라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변화는 곧 ‘자기 의’가 되어 교만이라는 더 큰 죄에 넘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 앞에 약하고, 하나님 아래 있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생각과 지혜를 잘 따라갈 수 있는 ‘종의 마음’이 되어야,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한걸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두 번째 가르침은 잘못에 대한 것입니다. 매우 실제적이지만 참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 18: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 18: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것이다. (마 18:17)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이 가르침의 1원칙은 성경은 죄를 용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다는 것입니다. 드러나고 있는 죄는 반드시 다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룬다는 것은 처벌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당사자나 공동체가 깨닫도록 하고 분별하게

하여,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키고, 죄에 빠진 사람이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돌이키는 것도 하나님이 하셔야 가능합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 안에 지켜야 할 원칙과 순서가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공동체 내의 죄를 다루는 2원칙은 ‘최소 폭로의 원칙’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진짜 가족이라면 잘못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족의 잘못을 다른 곳에 다니며 퍼뜨리지 않습니다. 가족의 특징은 서로의 죄를 방관하지 않되,

함부로 퍼뜨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내에서 관련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다루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내용을 폭로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 원칙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한 구체적인 행함의 단계도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이 있거든 우선 혼자 가서 권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나 관련된 리더의 몫이겠죠. 충고하고 권면하여 이해하고 돌이키면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면, 그 다음은 두세 사람이 함께 가서 권면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당사자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 보다 객관적으로 그 일을 보게 하기 위해 두세 사람의 권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 교회 공동체에 말하고 함께 다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공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방인과 세리’에 관하여, <성경신학 스터디바이블>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예수께서는 대체로 이 사람들을 향해 큰 연민을

나타내신다. 그러나 회개하기 전에는 이들을 제자로 대하지 않으신다. 회개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결코 가족으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회심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가족이 아닌 이유입니다. 회심한 사람이 성찬에 참여하는 이유죠.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했던 그 식사처럼, 회심한 모든 사람이 주님의 확대 가족으로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된 이후 나타나는 죄의

문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일을 행하는 것은 한 영혼을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루지 않으면,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고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도 그 죄의 영향력이 퍼져 공동체가 깨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이것을 가르치십니다. 물론 이때 우리는 연약함과 악함을 구분해야 합니다. 초신자들의 죄는 보통 연약함입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영적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심한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에 기인합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용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행동을 꾸짖으실 때,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인다면, 그 다음 필요한 것이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끝으로 공동체에 대한 세 번째 가르침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에 대해서 익히 많이 들어왔고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인의 용서를 추상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주님은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만 달란트 빚진 것은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그런 받을 수 없는 용서를 받았기에, 우리도 그 마음으로 용서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제한이 없고 끊임이 없기에, 우리도 그

용서의 은혜 아래 사는 동안 제한 없고 끊임없이 용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저는 기독교 안의 용서라는 가르침이 오히려 몇몇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더 이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이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때도,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 주님이 용서하십니다. (마 18: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즉, 용서도 구하지 않는 상대방에 대하여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이 말씀을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종종 이 말씀을 대하며,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그 사람이 가해자이고

여러분이 피해자인데, 피해자인 여러분이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더 괴로움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용서는 그런 의미에서 율법적으로 행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 더 주님의 마음을 구하며 용서하기를 기도하며 힘써보셔야 합니다. 용서의 신학이 중요한 이유는 오히려 다른 관점에서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정죄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그 대상에게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메여서 오히려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함으로 사실은 그 사람과의 관계와 그 사건으로부터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감옥에서 내가 해방되는 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사실 그 마음은 내가 그 사람에게 메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주님이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용서라는 주제를 만날 때마다 고민하는 관계가 있으십니까?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주님의 마음을 구하십시오.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상처가 치유된 후에 용서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는 용서와 화해가 다르기도 합니다. 용서는 내가 그 일에서 떠나는 측면입니다. 화해는 그다음입니다. 그 과정도 주님께서 우리를 각 사람의 상황에 따라 가르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6-18장을

다뤘습니다. 믿음의 고백, 주어지는 사명 (마 16장) 성도는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실제로도 우리가 그분보다 앞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을 따라, 주님의 길로,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명을 가진 것입니다. 메시아의 영광, 우리의 소망 (마 17장)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죽음, 생명과 영광이라는 역설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주님의 변화산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그 소망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복음을 들은 후, ‘믿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시작되어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가고 있으며, 부활의 소망 가운데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습 (마 18장) 하나님 나라 백성은 겸손하게 남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헌신의 성숙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몸으로 묶인 공동체 안에서 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일은 너무나 피하고 싶지만, 때론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따라 행할 때, 코람데오 주님 앞에서 모든 과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용서의 실제성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주님을 따라 우리도 용서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미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기다려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꿈꾸는 것은 정말 성경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말씀으로 세워지는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오늘도 우리를 만지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단순한 율법적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해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과정입니다. 어떤 부분은 칼과 같겠으나, 그것은 살리는 칼입니다. 주님이 내 삶을 더 아름답게 이끌어가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