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 살펴볼 마태복음 19장은 최근에 하나님의 나라 설교를 통해서 다뤘던 본문입니다. 부자와 바늘귀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죠. 하나님 나라는 성경에서,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아주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관계적 개념입니다. 혹은 통치적 개념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주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대사관을 예로 들어보죠. 미국 대사관의 주소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입니다. 지리적으로는
한국에 있지만, 그곳의 통치권이 미국에 있기에, 그곳에는 미국법이 적용되며 미국의 영토로 인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엡 2: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비록 우리는 여전히 육신의 몸을 입고 각자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살지만, 우리의 통치권이 주님께 있으므로, 내 삶은 주님께 속한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하죠. 이것은 내 정체성이 바뀌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이상 하나님께 속하기 전의 상태와 같이 살지 않는 것입니다.
존재가 바뀌었고, 신분이 바뀌었고, 정체성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바늘귀 이야기는, 우리가 몇 차례 살펴본 것처럼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함께 나옵니다. 부자 청년의 실패는 경각심을 줍니다.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는
하나님께 속한 삶이라고 스스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나님께 속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가 율법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있는지 확인하셨고, 그 주님의 질문 앞에서, 그의 우선순위가 드러납니다. 그는 부가 많았고, 그것을 막상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 앞에서, 재물을 더 사랑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맙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 나라 백성 되기를 선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늘상 자신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을 때, 우선순위가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던 것이죠. 신실해 보였던 부자 청년의 구원 실패도 충격적인데, 누가복음은 병렬 구조를 통해서 더 큰 놀라움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부자 청년의 실패 이후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죠. 바로 부자 청년과 같이 관리이면서 부자였던 동일 조건에 있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평생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붙들고 살았던 부를 포기합니다. 그렇게 삭개오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됩니다. 부자 청년의 실패를 보며 함께 고민에 빠진 우리에게 삭개오 이야기는 도전하는 것이죠. 삭개오도 변한다. 주님을 진짜 만나면….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천국은 마치...’로 시작하는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 살펴봤듯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발견하면,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그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 하나님의 가족 되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경우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개념이 하나 있다면,
‘영생 – 제자 됨 – 하나님 나라 – 구원’이 모든 키워드가 사실 하나라는 점입니다. 영생을 얻는 법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얻는 일이며, 다른 말로 구원입니다. 나는 영생은 원하지만, 제자는 싫다거나,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아니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합니다. 이것은 모두 내 안에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에서 진짜 하나님이 주인 된 삶으로의 변화. 우리는 그 삶으로 전환을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분께 내 삶을 드리는 것이 회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제자가 된 사람들이 영생/구원을 받습니다. 이 영생과 구원이 죽음 이후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것은 단순한 신학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이 이것을 잘 설명합니다. (요 3: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3: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기에, 하나님을 잃고 사는 사람은 생명으로부터의 소외, 그로 인한 공허함과 깨어짐, 고갈이라는 죽음의 현상들을 겪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깨어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하기에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우리는 회복과 치유를 경험합니다. 죽음 이후에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간 그 순간부터 우리는 회복됩니다. 그 회복의 완성이 부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생명의 근원,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과 단절되었고, 근원을 잃어버렸기에 공허와 외로움 등의
깨어진 현상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공허를 생명으로 바꿀 그 생명의 근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을 받아들이면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스스로를 생명의 떡, 영원한 생수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풍성해지고 더 나아가 충만해지기 시작합니다. 회심을 기점으로 전과 후의 변화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이 채워짐은 우리의 평생을 통해 점점 더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회심은 점진적
변화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점진적 회심의 대표주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죠. 그러므로 마태복음 19장에서 베드로가 던지는 질문은, 그도 아직은 미성숙한 상태에서 자라가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 19:27)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 이 질문은 예수님으로 인해, 그가 누리게 된 하나님 나라를 믿지만, 혹 그것 이외의 다른 무엇은 없는지, 추가적인
기대를 반영합니다. 앞서 부자 청년도 실패했던 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른 것이 제자들이니, 이런 질문을 던지는 베드로의 순수함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질문하면 답해주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을 보시죠. (마 19:2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메시지
_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나를 따랐다. 세상이 재창조되고 인자가 영광 가운데 다스릴 때, 나를 따르던 너희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시작으로 함께 다스릴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왕과 같은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왕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누구의 자녀라는 것은 같은 존재를 의미합니다. 사자의 새끼는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입니다. 왕의 자녀는 곧 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왕의 자녀가 되는 나라이고,
그러므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는 작은 자가 없습니다. 그곳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와 함께 다스리는 왕권을 시행하는데, 새 하늘과 새 땅, 모든 자연 세계와 피조물을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함께 다스릴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많은 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딤후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딤후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딤후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가 이 설교의 시간에 깊은 신학적
이야기를 다 나눌 수는 없겠으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에덴의 첫 사명을 회복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깨어지기 전에 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누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창조’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셨듯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하는 창조세계의 회복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주시는 두 번째 답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다 버린 자가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그 외 다른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판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버린 것에 대해 100배로 더 받는 것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위에서 설명했던 부분이니 이해할 수 있죠. 그럼 100배 보상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보다 명확하게 이 구절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을 잘 보면, 내세에는 영생을 받고, 현세에서는 포기한 것들에 대해서 100배나 더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현세에 겪는 박해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경험하는 박해는 우리가 많이 설교로 나눠왔습니다. 그럼 현세에 누리는 유익을 이제 설명해봅시다. 복음을 위하여 집과 땅을 버리면, 주님에 의해서 100배로 돌려받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보상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십일조 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받는가? 예전에 그런 식으로 설교하시는 부흥 강사님들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는 신중하게 살펴봐야죠. 같은 차원이라면 땅 10평에 대해서 1,000평으로 돌려받으니 엄청 남는 장사입니다. 땅은 그렇게 해석하면 좋은데, 어머니 100배는 어떤가요? 어머니 100명을 얻습니다. 자녀 3명은 자녀 300명으로 현세에서
얻습니다. 해석의 문제가 생기죠. 즉, 이 보상은 같은 차원의 것,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포기함으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즉 하늘에 속한 것을 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하늘 가족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얻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주인 된 삶을 결단할 때, 그분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을 때, 그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그분께 속한 것을 얻습니다. 우리는 100배의 가족을 실제로 얻습니다.
이 말씀이 하늘 가족으로 해석해야 하는 근거의 핵심은 버리는 것에 아버지가 있지만, 현세에 얻는 것에 ‘아버지’는 빠져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 아버지는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 우는 자, 핍박받는 자들이 역설적으로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행복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포기한 것보다 100배 큰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요소를 포기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알 수 없는 100배 더
큰 행복을 얻습니다. 이 말이 참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고 믿어지지 않지만, 또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모두는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우리의 현재적 삶에 침투하여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부자 청년의 실패를 보면서, 자신의 삶이 누릴 것을 물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주님이 약속한 것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영적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 그대로 보상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그에게
욕심처럼 남아 있게 된다면, 그는 그 마음으로 인해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베드로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하셔야 할까요?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고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에게 설명과 더불어 강력한 경고를 덧붙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이죠.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것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지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갖게 되는 그릇된 보상심리의 마음을 바로잡아주는 가르침입니다. 내용은 쉽습니다. 아침 인력시장에 사람들이 나와 있습니다. 아침 6시에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해 갑니다.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종일 일하는 대가로 당시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약속받습니다. 주인이 아침 9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또 일을 못 나가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불러줍니다. 열두 시와
오후 3시에도 굳이 사람들을 또 모집해서 불러옵니다. 그리고 오후 5시에도 나가보니, 그때도 부름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그러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주인은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라며 데려갑니다. 오후 6시에 일이 끝나고 정산합니다. 12시간을 일하면 주기로 한 것이 1데나리온이었는데,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 1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오후 3시, 정오, 아침 9시에 일한 사람들에게도 모두 1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시간 동안 일한 사람에게도 1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아침에 온 사람들 마음 안에 갑자기 불만이 터집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투덜거립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1시간 일하고, 우리는 12시간을 일했는데, 어떻게 같은 대우를 합니까? 그때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당신에게 약속한 것을 다 주었다. 내가
얼마를 주는지는 내 뜻이다. (마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참고로 저는 대학원 시절에 한 학기 동안 한편의 설교를 다듬고 고치며 준비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다뤘던 설교가 바로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였습니다. 제목을 고심해서 잡았는데, <이제 곧 망할 포도원>이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포도원 주인은
세상의 경영방식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12시간 일한 사람에게 1데나리온 주기로 했으면, 6시간 일한 사람에게는 0.5데나리온을 줘야죠. 왜 굳이 다 줍니까?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3시간마다 장터에 나갑니까? 피곤하게. 그리고 1시간 일할 사람 데리러 가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런 헛된 수고를 합니까? 이 주인은 경영할 줄 모르는 바보입니다.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포도원으로 수입을 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을 맡겨서 그들의 삶이 허비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포도원 경영하면 이 포도원은 망할 것입니다. 제가 <이제 곧 망할 포도원>이라고 제목을 붙였던 이유는, 사람들은 포도원 주인을 칭찬하기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약아서 이 포도원의 운영방식이 소문나면 절대 아침 6시에 가지 않으려 할 것이고, 오후 5시에 가서 조금 일하고 많이 받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세상에 없는 선한 사람인데, 우리는 그 선함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악한 세상과 하나님의 대조점입니다. 이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약속한 품삯인 ‘1데나리온’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먼저 들어왔던 나중에 들어왔던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곳에서도 세상의 가치관대로 서열을 만들려고 합니다. “내가 먼저 왔으니 더 많은 혜택이 있어야 해.”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은 자신들이 부자 청년도 못 한 그 일을 했다는 자부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텃세를 부리려고 하는 것이죠. 베드로의 마음, 유대인들의 마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수제자라는 의식이 가득했고, 경쟁했고,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마음,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바로 아침 6시에 온 일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그는 주인과 동행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 품꾼 비유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이 비유는 전형적인 인클루지오 구조로 이뤄졌거든요. 비유 전체를 감싸는 앞뒤의 문구.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면, 끝내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중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헌신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해야 합니다. 그들을 어떻게 하실지는 주인의 몫입니다. 우리는 자꾸 비교합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비교하면 평생 불행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비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각자가 주님 앞에 순종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며 따르는 것이면 족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했다가, 주님이 그를 찾아가 3번이나 물으며 회복시켜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 다시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 목양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을 따라 죽음으로 영광에 이를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 회복의 은혜로운 순간에도 베드로의 초점은 어디에 있었나요? 다른 제자 요한이었죠. (요 21:21)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 21:2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우리는 종일 뿐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신뢰하고 따를
뿐입니다. 종이 주인을 부리면 안 되죠. 우리의 가치관대로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 이렇게 하셔야죠!’,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꾸짖고 대들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 뜻을 앞세운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포도원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도 저 포도원에는 오후 5시에 들어갈란다.” 쉽게 말해서, “나도 세상에서 즐길 것 실컷 즐기다가 마지막에 들어가서 구원이나
받자.” 그것이 좋으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구원’이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 합격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 나라는 ‘관계적’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해보세요. 그 사람과 지금부터 함께 할 수 있는 것과 삶의 마지막 1년을 함께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큰 행복일까요? 여러분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지금부터 결혼해서 함께 사는
것과, 삶의 마지막 1년 결혼하는 것과 무엇을 더 추구하시겠어요. 먼저 온 자들이 세상의 가치관인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손해일 수도 있겠으나, 관계적 관점으로 보자면 그들은 12시간 동안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입니다. 이 행복의 의미를 모르면, 우리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할수록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극히 반대하는 한국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린 신앙이 있습니다. 바로 <차등상급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헌신하고
포기하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그만큼 더 보상받는다는 논리입니다. 차등상급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았고, 많은 신자들 안에 이런 생각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가치관으로 풀어낸 궤변에 가깝습니다. 제 블로그에 상급론에 대한 많은 글과 설명, 영상 등이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꼭 보십시오. 상급론은 현세에서 우리가 버린 것들이, 내가 이루어 낸 것, 나의 업적, 나의 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보상이
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12시간 동안 내가 누린 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를 누린 자가 그것을 대가로 또 다른 무엇인가를 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은혜를 누린 것 자체가 가장 큰 보상입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 사람들, 오랫동안 헌신한 사람들에게 사탄은 분명 이러한 것으로 마음을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삼키지 않도록 내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릇된 가치관을 갖고 일하면 그것이 은혜인 줄을 모릅니다. 오래 일하고 열심히 일한 것에 근거해서 더 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생명을 걸고 삶을 다 바쳐서 일한 바울은 연약함만을 자랑했습니다. 저도 기본적으로 열정적인 사람이고 늘 어디서나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는 성격과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이 부분을 깨달은 후 저는 ‘사역’에 관하여서 저에게도 그리고 성도님들에게도 늘 독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늘
경계하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 아이디가 ‘Worthless Servant – 무익한 종’인 이유입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하나님이 정말 일꾼이 필요하실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분께 뭐가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그 포도원에 할 일을 만들어서 함께 일하도록 초청해주시는 그 하나님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을
나의 공로 삼는 신앙이 아니라, ‘무익한 종’을 불러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일에 끼워주신 것이 제게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무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교훈을 주신 이후에도 벌어졌던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청탁을 하는 것이죠. (마 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는 마음이 꼴찌가 된다고 가르치셨는데, 바로 전 상황에서 제자 중 1등처럼 늘 보였던 베드로가 꼴찌로 밀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야고보와 요한이 지위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도 웃깁니다. (마 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 이야기는 여전히 열두 제자 모두 그들과 같은 마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히 여겼다는 것은 서열 싸움에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는 언제나 역 피라미드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성숙한 자가 된다는 것은 더 헌신하고 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교회에서 신앙이 성숙해가는 사람들은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각오하십시오. 저는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이 진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이 저하고 양육하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제 연차도 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를 위해 사용했는데,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기를 힘쓰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정말 주인 되셨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두고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지 물어보십시오. 저는 하나님께 민감하면,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이 될수록,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섬기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일에서 각자가 처한 환경이 모두 다르고 상황이 다릅니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처럼 모두 주어진 환경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님을 추구하십시오. 확실한 것은 주님의 마음과 역행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 공동체가 세워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모든 신앙인의 목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십자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십자가를 향한 여정에서 함께 가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0장의 마지막은
이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마 20:29) 그들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마 20:30) 그런데 눈 먼 사람 둘이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마 20:31)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마 20:32)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마 20:33)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마 20:34) 예수께서 가엽게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들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길에 맹인 두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무리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은 그 두 맹인을 고쳐주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 길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걷는 이유는 그 길 끝에 있을 찬란한 세상적 보상, 세상의 복이었습니다. 오늘 특별히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반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십자가 길까지 동행했던 것은 아주 소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바람대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는 정치적 지도자로 우뚝 선 것이 아니라, 로마의 병사들에 의해서 잔혹하게 십자가에서 가장 나약한 인간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길을 예고하셨고,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수없이 말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귀는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인 치유 사건이 예루살렘 여정 가장 마지막에 기록됩니다. 바로 예수님 옆에 있는 제자들의 상태가 영적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있고 보고 있으나, 전혀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눈을 뜨는 일’, 예수님을 진짜로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물리적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의 중심도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들어와 계십니까? 여러분은 물리적으로 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시간도 주님께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듣고 싶은 것만을 열심히 새겨듣고, 내가 듣기 싫은 생각들은 다 가지치기 해내며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베드로의 마음이 없습니까? 우리 안에는 혹시 오전 6시 일꾼의 마음이 없습니까? 우리 안에는 혹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선동적으로 그분을 추구하는 그 마음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눈은
괜찮습니까? 정말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어쩌면 그것이 나를 희생하고 내 것을 내어줘야 함을 알고 있습니까? 그래도 이 길을 주를 따라 걸으시겠습니까? 그저 나는 주님을 따르는 무익한 종이라고 여기며, 주님과 함께함을 기쁨으로 여기십니까? 저는 절대 여러분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눈을 떴고, 저는 주님을 따라 가보려고 합니다. 그 길이 무엇이든. 이미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제 삶에 다가왔음을 저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다려주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리지 않고 싶습니다. 함께 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이 행렬이 우르르 끌려가는 선동의 대열이 아니라, 정말 십자가를 향해서 함께 걸어가고, 주님의 그 마음으로 함께 세상을 치유해나가는 주님의 마음을 닮은 주님의 가족 공동체이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