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마태복음 강해는 아시다시피 진도에서 조금씩 늦어져 있습니다. 매일성경 묵상 기준으로 오늘이 마태복음 26장을 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주일설교로 마태복음 20장까지 다뤘습니다. 사실 얼마든지 중간에 건너뛰고 마태복음을 마칠 수 있습니다. 부활절에도 설교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순서들이 많은데, 저야 설교하지 않으면 편할 것 같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 늘 고민은 무엇이냐면, 마태복음을 우리가 언제쯤 또 이렇게 다룰 기회가 있을까? 마태복음에 너무나
소중한 가르침들이 많은데, 그것을 지금처럼 다뤄도 다 못 다루고 넘어가는 아쉬움이 크기에, 가급적 마태복음의 소중한 본문들을 조금이라도 다루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5일간 마태복음 21장부터 한 장씩을 설교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21-25장까지 다룰 수 있기에, 다음 설교를 통해서 마태복음을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마태복음 21장. 드라마바이블 영상] 먼저 21장은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유대인의
전통상 유월절 순례는 걸어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도 걸어서 예루살렘에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불과 10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귀를 타시겠다는 것인데, 이는 의도가 있는 행동입니다. 마태에서 나귀는 두 마리입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 마가복음에서 새끼 나귀는 아직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보지 않았던 것으로 나옵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새끼 나귀가 홀로 갈 수 없기에 새끼 나귀 외에 어미 나귀 한 마리를 대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겉옷을 그것들(복수) 위에, 예수께서 그것들(복수) 위에 타시니..” 아마도 이 모습을 그려보면(마가복음에서 새끼 나귀를 탔다고 표현하므로) 예수님은 새끼 나귀에 타시고 반쯤은 어미 나귀에 기대서 가셨던 것입니다. 그냥 어미를 타시면 되는데 왜 그러셨을까? 구약의 예언 때문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스가랴 당시의 왕의 모습은 예수님 당시의 군사적 메시아와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겸손한 평화의 왕이십니다. 병거와 말을 끊고 전쟁하는 활도 끊습니다.
백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는데 나귀 새끼를 탑니다. 이는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으로 웅장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메시아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등장은 스가랴 9:9의 성취와 같았기에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예루살렘은 소동했었죠. 이제 그가 왕으로 입성할 때 다시 소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영하고 기뻐하기보다 어찌할 줄 몰라 소동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갈릴리로부터 온 순례객들은 예수님을 익히 잘 알기에 환호했고,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소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며 들어옵니다. 이어지는 사건이 성전 청결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성전 건물 안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쌓고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300m x 450m) 성전 건물 안이 아닌 뜰에서의 시장 형성은 묵인해오던 관례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시장의 형성은 필요하고
편리한 것이었습니다. 먼 길에서 짐승을 데려오다가 흠이 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픕니다. 돈을 가지고 와서 사면 편하죠. 이미 검증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세를 내는 돈은 특별한 것이었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바꿀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업적 행위는, 여러모로 편리했고, 성전의 관리를 맡은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돈놀이가 될 수 있는 요긴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중심으로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미쉬나에 보면 100배의 폭리)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것에 대한 메시아적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메시지는 무화과 나무의 저주인데, 이 내용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죽이거나 파괴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죽이고 있습니다. 몇몇 신학자들은 이 내용의 진정성을 의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보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나 마가가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다면 이런 이야기를 넣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행동은 의도적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모습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선지자는 3년 동안이나 발가벗고 돌아다녔습니다. 행동으로 예언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이야기는 앞선 성전 청결 사건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병행본문인 마가복음에는 ‘무화과-성전청결-무화과’의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즉 무화과나무의 이야기의 의미는 성전청결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구약의 관점으로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즉, 성전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한 심판입니다. (렘 8: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미 7: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레미야의 예언. 메시아가 와서 찾을 때 열매가
없다는 미가의 예언. 샌드위치 구조에 비춰볼 때, 이것은 성전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전이 심판 받을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성전에서 나오시면서 성전이 버려질 것을 예언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뒤이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될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며 성취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성전,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을 예수님은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즉 21장 전체는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왜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메시아는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끝으로 ‘두가지 비유’를 보겠습니다. 먼저 두 아들 비유이죠. 이 비유는 유대인들, 특히 지도자들의 상황을 빗대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예’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대답은 하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둘째는 싫다고 말해놓고, 나중에 뉘우치고 순종합니다.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죄인들(세리, 창녀)라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종교는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하나님을 향해 있는 듯 하지만, 그 본질과 태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은 멸시의 대상이었고, 나중에 가장 먼저 심판될 사람들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접 받게 될 것이며,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라고
쓴 4가지 부분 중 한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포도원 농부들 비유입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멀러 떠납니다. 그리고 소출할 때가 되어 자기 종들을 농부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니, 아들도 죽입니다. (마 21:43)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이는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대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한 마태복음 내의 가장 명백한 언급입니다. 옛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단순히 이방인들로 대변된다기보다는 모든 나라들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백성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유대인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는 이방인이니까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원가지도 찍으시는 분입니다. 유대인의 실패를 남의 이야기로 들으면, 우리도 같은 결론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마태복음 21장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하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가야할 길, 우리가 벗어난 부분, 돌이켜야 할 것들을 깨닫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온전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이 중요합니다. 내가 입으로만 ‘주여’하는 자가 아니라, 내 마음이 늘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며 하루를 살아갑시다. 특새 둘째날입니다. 마음다해 참여하신 모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고난주간은 단순히 슬퍼해야 하는 고통주간이 아닙니다.
주님을 더욱 깊이 담아내며 십자가를 묵상하는 경건주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던 시간이었듯, 우리도 금식하며 주님 앞에 더 머물고, 금식한 헌금을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힘쓰는 주간입니다. 이번주 특새를 참여하시는 것이 훈련이라면 훈련입니다. 이런 시간도 필요하죠. 내 삶의 리듬을 바꾸고, 주님께 나를 맞추는 훈련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더 누리고 싶은 것은 말씀으로 시작하는 하루를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임재가 가득하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2장입니다. 우선 마태복음 22장을 드라마 바이블로 들려드리겠습니다. 함께 잘 묵상해봅시다. [마태복음 22장. 드라마바이블 영상] 22장은 혼인잔치 비유로 시작합니다. 이 비유는 앞장 마지막 부분에 나온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농부들이 죽였던 비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부름받은 유대인들의 실패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해 기록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보셔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출신의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아프지만 유대인들이 왜 복음의 첫 번째 대상에서 마지막 대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고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어쩌면 이제는 성경을 읽으며 다시 깨달을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인만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음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복음에는 늘 초청이 있고,
초청하여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초청받지 못한 잔치에 갈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청은 늘 거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을 어떻게 준비하고 반응하여야 하는지 모르면, 우리도 초청에 거절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관점에서 혼인잔치 비유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실제생활의 상황에는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드러내는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핵심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에 도덕성의 잣대를
가져다 댈 필요는 없습니다. 비유에서는 주님이 ‘도적’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비유는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면 됩니다. 왕이 혼인잔치를 열었습니다. 일반 혼인잔치는 거절해도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의 거절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절한 사람들의 거절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갈 곳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자꾸 자신들에게 오라고 하는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여기서 종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초청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첫 이야기의 결과, 초청은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초청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함께 섞여서 잔치에 손님으로 오게 됩니다. 그래서 11절의 ‘결혼 예복’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에게 자유로이 열려진 가능성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원칙도 없는 자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 22:12)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하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마 22:13) 그 때에 임금이 종들에게 분부하였다.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 22:14)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예복은 무엇일까요? (계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중요한 것은 세마포 옷은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입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은 스스로의 힘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산물입니다. 빌립보서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선행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입지 않은 것에 대해서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어진 것을 거절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혜의 결과가 하나님 안에서 옳은
행실을 보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주요 주제가 옳은 행실입니다.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나타나는 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왕이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들어간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경구로서 비유의 두 측면의 메시지를
모두 강력하게 요약해 줍니다. 어떤 자는 청함에도 응하지 않습니다(길가 밭). 어떤 사람들은 청함에는 응했으나 택함을 받지 못합니다(돌짝밭, 가시밭).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거절 때문입니다. 초청에 대한 거절, 예복을 입을 것에 대한 거절. 즉 우리의 거절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시선에서 볼 때, 그는 곧 택함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애초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은 세금 논쟁이죠. 이 논쟁은 예수님을 어떻게든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수작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대답에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답은 간단하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우리는 국가 안에서 국가의 질서와 법을 따릅니다. 그것이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대에 입대하고 나라의 법을 지킵니다. CS루이스는 신앙을 가진 각기 다른 나라의 군인들이 전쟁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 상황에서 적으로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 각 국가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답이었습니다. 거기서 서로 네가 먼저 쏴라, 내가 널 위해 희생하겠다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질서에 대한 인정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땅의 질서를 존중하는 일이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 사랑의 마음 가운데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논쟁에 대한 것은
유대인의 수혼법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는 지금과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맺게 될 것이기에 그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모습은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귐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기대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가장 큰 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가? 우리가 잘 알 듯, 이중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중요한 것은 39절의 “둘째도 그와 같으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마음을 오늘도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실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길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고자 힘쓰는 여러분의 그 마음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특새 셋째날입니다. 참여하신 모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되기 위해, 우리가 오늘 주어진 본문을 함께 잘 따라가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23장. 드라마바이블 영상] 23장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평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가르침과 행위를 비판하시는 주된 이유는, 그들이 보다 사소한 율법적 규율들에 지나친 관심을 빼앗김으로써 정작 율법에 나타난 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요구들을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23장은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12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관하여 무리와 제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고, 13-36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주어진 직접적인 경고입니다. 기본적으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죠. 모두 그 뒤에 등장한 것인데, 서기관은 헬라의 통치기에 생긴 그룹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며 그것을 가르치고 기록하는 ‘성경 전문가’라 일컬을 수 있는 그룹입니다.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모든 율법 전통을 세부적인 것까지 엄격하게
지키는 유대교의 중간계층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자칭 구약성경을 가장 잘 알고, 율법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습니다. 분명 나는 A라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말한 것을, 모조리 B로 왜곡하고 도리어 나에게도 B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우기기 시작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보다 더 답답하고 화가 나는 상황이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A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준대로 B라고 해석하고 적용하며, 하나님은 B라고 말씀하셨다고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보셨을 때, 얼마나 기가 막히고 답답한 노릇입니까? 예수님이 아무리 그 뜻이 A라고 해석하고 설명해줘도, 한번 B라고 이해하기로 마음 먹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좀처럼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선 첫 번째 단락에서는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요점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리는 잠재적 제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리 중에서 제자로 한단계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무리입니다. 즉, 무리는 예수님의 적대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라고 부를 정도는 아닌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말하는 것은 지키되, 그들의 일은 따르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율법을 낭독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죄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단들도 우리와 같은 성경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해석과 적용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 해석과 행동은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성경 곳곳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성경에 대한 지식은 정확합니다. 그들은 미가서에 근거해서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신명기의 규정들에 근거해서 이혼에 관한 질의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도 이해하지만,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놓치기도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적용하는 것이죠. 그들은 한가지 율법에 수천가지 규례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지키도로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최선의 예배를 드려라’는 율법이 있다고 하면 거기에 세부적인 사항을 수백가지 만들어서 다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정작 최선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죠. 무거은 규례의
짐을 사람들 어깨에 지우지만, 정작 사람들이 그 짐을 지고 나르는 데에는 자신들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또한 그들은 위선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남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줄곧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 섬김의 원리와 반대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그것이 가장 성경적입니다. 양용의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의 이러한 경고는
특별한 호칭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좋아하는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도 깊이 경청되어야 할 것이다.” 섬김과 겸손의 원리.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 주님은 우리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부터는 직접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책망입니다. 일곱 개의 ‘화’ 선언입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위선자들아’라는
형식이 반복됩니다. 마태복음은 그들을 ‘위선자’라고 자주 표현하는데, 이는 그들이 율법 해석자로 있으면서도 율법의 참된 의미를 따르지 않고, 그 결과 자신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배우는 자들까지도 멸망에 이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눈먼 인도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이러한 문제를 잘 보여줍니다. 일곱까지의 화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과 대칭을 이룹니다. 팔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면, 일곱 화는 하나님께저 진노하시는 그릇된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첫째 화는 일곱 화를 대표합니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들은 잘못된 삶으로 스스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릇된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까지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의 안내자 책임을 맡은 자들이 그 나라 문을 닫아놓고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표현은
충격적인 역설입니다. 넷째 화도 한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율법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율법 조항들 때문에 정작 중요한
율법 조항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는 규정은 건축법이기 이전에 이웃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나 난간을 만들라는 규정을 더 심화한 세부적인 규정을 지키느라 정작 이웃과 불화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로 표현되는 모든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도 1/10을 드리는 것을 강조하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평가
받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그 마음에 대해서는 찬성하십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것은 둘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눈에 보이는 어떤 것, 주일성수, 십일조, 경건생활 등은 잘하면서, 정작 삶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없는 것처럼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비유하죠. 둘다 부정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부정한 곤충에 해당하는 하루살이는 열심히 걸러냅니다.
그러나 역시 부정한 동물인 낙타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듯한 모습이 그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죠.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더 큰 것을 놓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섯째 화에서 설명하는 그들의 모습도 그와 같죠.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속이 더러운 것은 그들의 이러한 이중성을 지적합니다. 여섯째 화의 회칠한 무덤도 같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란 겉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그 속에 죽은 것들이 들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그들의 적대적
행위입니다.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는, 아마도 역대하 24장에 나오는 순교자의 이름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따르면 아벨이 첫 순교자이고, 역대하에 나오는 스가랴가 마지막 순교자입니다. 아벨의 피로부터 스가랴의 피까지라는 것은 구약의 모든 순교자를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므로 또 다른 순교자를 만들 것입니다. 23장 마지막 단락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할 것을 말씀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려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품고자 하셨지만, 이스라엘의 거절로 그 일은 실패하게 됨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집이라 표현된 이스라엘 성전은 버림받을 것입니다. 성전에 대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너희 집이라 부르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것일까요? 성경과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성경과 가장 멀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어쩌면 그들이 저지른 실수와 잘못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의가 더 커지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머리만 커지는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는 신앙생활이지만, 내 마음은 점점 더 주님과 멀어지고 있는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는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봤기에, 새로운 삶으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율법에 정통했던 사도 바울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깨닫고 돌이킬 수 있었으며, 자신에게 있던 모든 것이 배설물과 같은
것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겉모습만 자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머리만 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저 더욱 주님 닮아갈 수 있는 속사람의 변화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외적인 모습도 중요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것,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내어 묵상하는 것, 다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오늘 하루 살아갈 때, 정말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지에 집중해보십시오.
종교인으로 살지 마시고 신앙인으로 사십시오. 내 삶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힘써 주십시오. 특새 넷째 날입니다. 오늘도 함께 예배하기 위해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어느덧 마태복음 24장을 볼 차례입니다. 그래도 이번 주일 강해 설교와 새벽예배를 통해서 마태복음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먼저 묵상하고 설교를 나누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드라마바이블 영상] 마태복음 24장은 선교단체나 부흥회 등에서 들어봤을
말씀입니다. 흔히 종말에 관해서 설교할 때 많이 언급하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에 학자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저는 마태복음 24장의 해석은 R.T. France와 T. Wright의 견해를 따라서 종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전 파괴에 관한 본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 마태복음 24장을 두고 해석적 논쟁이 발생하는지 한번 설명해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24장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이 다가와서, 성전 건물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당시로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문합니다. 바로 물은 것이 아니라, 감람산(올리브산)에 오르시자 그때 제자들이 따로 묻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질문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1) 언제 성전 파괴가 일어나겠습니까? 2) 또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 즉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습니까? 즉, 성전 파괴의 때를 물었고, 종말/재림의 날에 대한 때와 징조를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4절부터입니다. (마 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마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 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마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말씀은 보통 종말이 왔다고 말하는 부흥회나
선교단체의 집회에서 많이 거론됩니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이것이 세상 끝날에 있을 이야기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으니, 곧 세상 끝날이 온다는 식으로 연결하여, 우리의 마음에 경각심을 주고 자극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첫 번째 질문, 즉 성전 파괴의 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원어로 보면 이것은 구분됩니다. 3절에서 제자들이 ‘세상 끝’에 관해 물을 때는 헬라어 ‘쉰텔레이아’를 썼지만, 이
부분에서 6, 13, 14절의 ‘끝’은 목표점을 뜻하는 ‘텔로스’를 씁니다. 즉 세상의 끝이 아니라, 성전 파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등장, 전쟁, 기근은 지금 시대를 반영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 승천 이후에도 빈번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6절에 나오는 표현대로 ‘끝이 아닙니다’. 8절에 표현하듯 재난의 시작입니다. 즉,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 성전 파괴의 때가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끝이 온 것이 아니라,
끝을 향한 예언의 성취가 시작된 징표입니다. 이 진통은 마치 출산의 산통과 비슷합니다. 진통이 처음 오면, 그것은 아기가 나오기 직전의 신호가 아니라, 이제 아기가 나온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계속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났다, 난리가 났다’라고 해서 야단 떨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아직 정확한 징조가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는 이것이죠.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소란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끝에는 아무런 징조가 없이 갑자기 올 것입니다. ‘말세지말’이라는 이야기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9절부터 설명하는 것처럼, 이 산통이 시작된 후 제자들은 핍박과 미움을 받게 됩니다. 교회가 당하는 핍박, 성도의 고난이 예견대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전 파괴의 때나, 세상의 끝에서나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종말이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 시대
이후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14절은 대표적으로 오해가 심한 말씀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에서 끝은 종말이 아닙니다. 즉 성전 파괴라는 목표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많은 선교단체가 이 구절을 종말을 설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세상 끝을 위해 열심히 선교해야 한다며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세상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민족은 유대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있습니다. ‘온 세상’을 의미하는 ‘오이쿠메네’는 성경 시대에 로마 세계 전역을 의미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이 다 전파되는 것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대략 30년 경이었고, 성전 파괴는 70년 경이었는데, 그럼 70년이 될 때쯤, 로마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을까요? 네 적어도 성경은 그렇게 표현합니다.
바울이 60년경에 로마에 복음을 들고 가게 됐는데,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즉 60년경에 로마 전역에 복음
전파가 일어난 것을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라 봐야 하고, 그것이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이 성취되기 위한 조건을 달성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지금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 시켜야 끝이 온다며,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하러 가자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어도 이 구절의 해석에는 맞지 않는 선동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산통의 시작이 아닌, 진짜 성전 파괴가 임박한 순간에 나타날 징조는 15절 이후에 나타납니다. 징조는 이제 진짜 때가 되었으니, 위험하다고
알려주는 사인(sign)입니다. 그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은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다 깨달을 수 있다고 표현한 것이고, 그때는 진짜 위기가 온 것이므로 도망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전 파괴는 로마의 침공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전쟁이 터지는 상황이므로 백성들은 피신해야 합니다. 즉, 1-14절의 내용은 산통처럼 계속 반복되는 것이고, 진짜 임박한 순간에는 징조를 보고 화를 피하라고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종말의 징조는 없다고 말합니다. 도적같이 임합니다. 도적은 징조를 알려주고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전 파괴는 징조가 명확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론 설교를 하며 사람을 선동하는 부흥사나 선교단체 강사들은 이 말씀을 반대로 적용합니다. 4-14절을 세상 끝에 대한 징조처럼 해석하고, 진짜 징조인 15-20절은 무시해버립니다. 4-14절에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것은 인내입니다. 핍박은 일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5-20절의 상황에서는
도망해야 합니다. 왜냐면 전쟁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도망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려는 조치입니다. 유대 땅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은 매우 실제적이죠. 그때는 피하는 데 여러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대한 징조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 28절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29절부터는 성전 파괴의 날에 대한 결정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마
24:29) "그 환난의 날들이 지난 뒤에, 곧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그 빛을 잃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마치 이 표현들이 종말과 재림 때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이사야에 나타난 바벨론 제국의 멸망 장면과 에돔의 멸망 장면에 대한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전 파괴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33절까지는 성전 파괴와 함께 나타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예언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실패와 특권 소멸을 의미합니다. 이제 모든 나라 가운데서 택하신 백성을 모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답을 하셨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한다는 산통부터, 그 임박한 때의 징조부터, 그 후 벌어질 일까지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4장 36절부터 25장까지 이어서 진짜 세상 끝에 있을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한 답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아의 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데, 이 이야기의 결론은
종말은 징조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말은 불시에 일어납니다. 밭에 있다는 것이나, 밥을 짓기 위해 맷돌질을 한다는 것은, 그날을 계산할 수 없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므로 불시에 심판의 때를 맞이할 것이지만, 제자들은 끊임없이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지막에 나오는 두 종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충성된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 부끄럽지 않게 맡겨진 일을 하는 종입니다. 나쁜 종은 주인이 늦게 오신다고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고 놀고 있는 종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징조를 알고 싶어 하고, 끝날의 시기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것은 없습니다. 다만,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주님의 예언대로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났다면, 아직 오지 않았지만, 주의 재림 또한 예언대로 성취될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까지 우리는 늘 깨어서 주님의 오심이 언제 일어나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조금 더하다가, 나중에 죽기 직전에 잘 믿어야겠다는 말이 얼마나 경솔하고 무지한 것인지 깨닫게 합니다. 인생의 끝을 우리가 알 수 있나요? 우리의 인생의 끝이 먼저일지, 세상의 끝이 먼저일지 우리는 어느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하루는 다시 오지 않을 하루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하루가 내가 주님께 드릴 최선의
모습일 수도 있음을... 믿는 자들은 기억하며, 이 하루를 소중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늘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완벽이 아니라, 최선입니다. 최상의 결과보다, 최선을 다하는 진실한 마음입니다. 오늘도 그 마음을 드리며 우리의 하루를 주님 앞에 보내기를 소망합니다. 특새 마지막 날입니다. 함께함이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5장입니다. 본문을 먼저 묵상하고 설교를 나누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드라마바이블 영상] 어제
마태복음 24장은 ‘성전 파괴’라는 예언과 ‘종말과 재림’이라는 예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전반부는 성전 파괴와 관련된 예언이 주어진 후, 후반부에는 종말과 재림의 때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종말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이 25장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5장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열 처녀 비유>로 시작합니다. 이 비유는 도둑 비유에 나타난 준비성과, 다른 비유에서 잘 보여주는 것처럼, 마지막 때 구원과 심판이라는 다른 결과에 이를 것이라는
점을 함께 잘 드러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잔치는 메시아의 잔치, 구원의 잔치입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한 측면은 신랑의 도래가 지연된다는 점입니다. 즉,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의 기대보다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 것이라는 기대가 성경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재림의 날은 우리가 알수도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때를 알려는
시도보다는,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지만,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주님, 그래도 제가 주님을 위해 이렇게 힘써 살아왔습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많지만, 그래도 주님을 닮고자 힘써왔던 내 마음을 주님이 아시죠?” 이 고백이 저는 우리에게 있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비유에는 열 처녀가 있는데, 신랑이 예상보다 늦게 오니까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자나, 미련한 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시간에 신랑이 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과 기름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만 있을 뿐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즉, 신랑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비유는 늘 비유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비유를 과몰입해서, 왜 여자가 남자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하느냐,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유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비유는 어떤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해 거기에 필요한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처녀가 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서 기름을 나눠주지 않았느냐고 따지면 안 됩니다. 비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유에서만큼은 예수님도 자신을 도적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마지막 때를 위한 준비성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 없음을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신랑이 오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 이후에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잔치의 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비유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제가 설교로도 몇차례 다룬 바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므로 핵심만 설명하겠습니다. 결국 달란트 비유도 ‘준비’에 대한 것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명령이 있는 시간이며, 종들에게는 맡겨진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보통
달란트 비유에 대해서 갖는 많은 오해는 달란트를 작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일학교의 영향이 큽니다. 주일학교에서 1달란트 주면 기뻐합니까?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1달란트는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달란트보다 작은 것이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노동자가 6000일을 일 해야 하니, 1년에 300일을 일한다고 치면 20년 연봉에 해당합니다. 그럼 다섯달란트는 100년 연봉이니, 평생을
통해서도 벌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즉, 종으로서는 결코 주인으로부터 받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는 무엇을 받은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1달란트, 즉 20년 연봉을 투자해준다면, 그 자체가 엄청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럼 이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연적 재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특권들과 기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들은 그 특성과 크기가 다를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맡기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책임의 크기를 정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이 돌아오기에 앞서 그 기회들을 충실히 활용해야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해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인의 기대는 우리에게 주신 그 기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썩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평생 벌 수 없는 돈을 투자해 장사를 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큽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투자하는 것은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이처럼 엄청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달란트 비유는 말도 안 되는 위험한 투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는 가장 안전한 투자입니다. 그 투자의 대상이 하나님이고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셋째 종의 이야기는 가장 긴데, 셋째 종을 통해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죠. 그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주인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활동하지도 않은 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기대 안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정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만나로 먹고 살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신에게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내어놓음에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펼쳐졌습니다. 수많은 과부와 고아를 책임지고 살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순종으로 시작됩니다. 이 비유는 그런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메시지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는 세상적인 안전이 아니라, 위험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주님의 뜻에 반응하는 적극적인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이러한 가르침을 대하면, 구원이 선행을 통해 주어지는가? 생각이 듭니다.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가장 기본적 원리는 ‘사죄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혜가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그가 선행을 했기 때문에 1만 달란트를 탕감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선행 이전에 회개와 그에 대한 주인의 용서로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제 그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에게 기대되는 선행이 있습니다. 그것은 100데나리온 빚진 것 정도는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런 행위입니다. 만약 이것 조차도 하지 않으면 1만 달란트 탕감한 것도 없던
일이 됩니다. 마태복음에서 유명한 말씀이죠. ‘주여 주여 하는자가 구원받지 못한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은 인정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함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피스티스)은 ‘순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원이 믿음 +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안에 순종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선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그 믿음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순종이 동반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을 반드시 수반합니다. 선행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고민은, 당시에 가톨릭의 믿음과 무관한 행위들이었습니다. 그런 종교적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행위구원과 맞서 싸워야 했기에 ‘칭의’를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믿음
없는 행함’을 반대한 것인데, 역설적으로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행함 없는 믿음’으로 치우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양극단에 빠지면 안됩니다. 믿음 없는 행함이나, 행함 없는 믿음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준은 성경이 아닙니까? 성경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의인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이런 선행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선행을 쌓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의 뜻에 맞는 삶, 주인이 주시는 마음에 반응하는 삶의 태도가 선행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는 삶, 자신의 선행을 의식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삶입니다. 당대에도 유대인들의 구제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는 자기도 모를 정도로 선행을 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의 마음에 따르는 것은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문제를 종교적 열심으로 행했던 자들은 선행을 예수님께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것을 보고 계십니다. 거기에 진짜 진실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높은 자, 영향력 있는 자에게 뭔가를 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섞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은 진실합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로 하는 일에 대해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활동을 앞세운 사람들은 그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배를 하더라도, 찬양을 하더라도, 사역을 하더라도,
선행을 하더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한주간 새벽예배 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나 새벽예배 했어’라는 것에 중심을 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되면 도리어 위험합니다. 그보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과 머묾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보고 기도하며 주님께 가까이 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주님 마음 내가 받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오늘 사랑하시어 여러분을 이곳 가운데로 부르셨습니다. 예배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럼 이제 주님 마음 받아, 주신 삶의 터전으로 나아가 그 삶의 기회 안에서 부여받은 그 사명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하루를 잘 보내고, 오늘 밤 함께 모여 우리와 함께하신 주님을 노래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사귐 가족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