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설교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고 초청하셨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거절 반응과 무시가 더 많았습니다. 13장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시는 장면을 통해, 그 거절과 반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이 복음에 관한 이야기와 그 거절과 반응에
대해서 먼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며,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복음으로의 초대 앞에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존재합니다. 진짜 믿고 따르던가, 아니면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우리의 마음을 함부로 조작하지 않으십니다. 억지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시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선택에 따라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 예수님을 따르는 자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 알곡과 쭉정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와 세상 나라에 속한 자로 나뉘게 됩니다. 시대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반대요소들이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시대입니다. 그전부터 계속 강대국에 침략받은 상태로 삶을 살다 보니, 이들이 꿈꾸는 메시아는 강대국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는 그러한 구원자였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상
속에서 갖게 된 일종의 렌즈가 있었고, 그것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메시아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데, 성경 밖에 있는 독자의 경험적 관점으로 해석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의 의도와 달리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던 그 렌즈로 인해, 진짜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 시대의 영향을 받은 오해의 렌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렌즈로 인해 자꾸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했고, 일제의 침략 및 내전으로 인해서 큰 어려움과 비극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경제성장의 시기를 맞이했는데, 이때 함께 성장한 것이 기독교이고 한국의 교회입니다. 제국주의 시대 서양의 기독교가 힘의 논리를 대변하는 서구 문명의 상징으로서 오해되었다면, 한국에서 기독교는 성공시대를 함께하며, 교회의 성장과 함께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신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거기에는 소위 교회를 다니며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도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나 할 것 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시대, 교회는 그로 말미암아 더 커지고 비대해지며 교회 또한 성공주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대가 80~90년대 한국의 기독교입니다. 놀랍게도 이때는 목사가 꽤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이화여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배우자 직업 선호도 조사를 했는데, 목사가 1위가 나왔습니다. 1970년대에는 이발사보다 낮았습니다.
그만큼 80~90년대에 목사라는 직업도 성공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신학교에는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공이 기독교의 본질인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겪으며 기독교는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사실 성경은 1000년 전이나, 100년 전 일제 강점기 때나, 1990년대나, 지금이나 늘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시대의 영향을 받고, 거기서 비롯된 경험적 렌즈로 자꾸 성경을 보려 합니다. 그 렌즈로 인해서 우리는
성경을 본래의 의도가 아닌 나의 필요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성공하고, 부자 되고, 하는 일이 잘 된다더라.’ 이 기독교에 잔뜩 끼어 있던 세속적 거품이 잘못된 거품임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이, 세상에서 원하는 성공이나, 부유하고 잘 살게 해주는 비법이 아닌데, 그런 기대 속에 교회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실망하고 이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잘못된 기대로 교회에 들어왔다가도, 여기서 진짜 복음을
만난 후, 오히려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변화된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종교를 가질 때,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고집과 자신의 기준을 앞세우며, 그것에 맞는 신이면 믿고, 아니면 버릴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진짜 기독교, 진짜 복음은 매력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으로 출애굽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 내부의 썩은
웅덩이들도 한몫을 합니다. 왜냐하면 80~90년대에 기독교의 호황 속에 교회로 향했고 신학교를 향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불순한 동기를 가진 목회자들도 많으며, 도리어 처음에는 불순하지 않았으나,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답습하며 불순해진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왕과 같은 권력을 휘두르며, 본질에 어긋난 것을 추구하며, 복음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일부분이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것을 잘라낼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자정 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지금도 교회라는 이름을 쓰지만, 목사라는 이름을 쓰지만, 전혀 복음과 무관한 삶을 사는 종교 장사꾼들도 적지 않습니다. 언제나 종교는 주류가 되면 타락합니다. 로마의 박해 시절 기독교는 더욱 본질에 천착한 모습이었으나, 로마의 전체 종교로 공인 된 이후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된 기독교는 심각하게 타락해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겪고 있는 현재의 위기와 고난은 예고된 것이고,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대를 지나며, 한국은 유독 교회가 확 부흥했다가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실망도 커서, 기독교에 대한 반대 정서 또한 가장 강한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양처럼 천 년 이상 기독교와 동행했던 곳보다, 우리처럼 너무 뜨거웠다가 식어버린 곳에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기간 중, 전 세계 경제 선진국 14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코로나가 그 나라 국민들의 종교심을
강화했는지 약화했는지 말입니다. 결과는 14개 국가 중 한국만 종교심이 떨어졌습니다. 다른 13개 국가는 다 올랐고, 미국은 가장 많이 오른 데이터를 보여줍니다. 최근에 미국에 부흥 운동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들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지요. 반면 한국은 가장 종교심이 떨어진 곳입니다. 한국인들은 뭔가 굉장히 빠르잖아요. 종교심이 유독 투철하다고 느낄 정도로 뜨거웠던 곳도 한국이고, 가장 차갑게 식어버리고 있는 곳도 한국입니다. 그중에서도 ‘개신교’는 외형적으로 보면
가장 빠르게 축소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 중 하나는 ‘개신교’에서 빠져나간 사람 중 상당수가 ‘천주교’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주교’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이 ‘개신교’로 오는 비율은 매우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천주교는 제가 봤을 때, 이 시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크게 2가지인데요. 첫째, 그곳에 있는 것 자체로 경건성을 느낍니다. 성당에 들어가기만 하더라도 경건함을 느끼고 분위기에서부터 압도하는 그런 것이 있죠.
거기 있는 것만으로 종교적인 힐링을 느낍니다. 둘째,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어떤 부담도 없습니다. 술, 담배, 제사 등에 있어서 모두 자유롭고, 성당은 사역의 부담도 없고, 헌금에 대한 부담도 없습니다. 헌신의 부담은 없고 종교성은 취할 수 있으니,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아주 좋죠. 이 두 가지는 불교와도 유사하죠. 부담이 적은 종교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개신교보다 나은 선택지로 보일 것입니다. 그럼 개신교가 가진 특성 가운데 다른 종교보다 더 나은
부분이 무엇이냐고 저에게 묻는다면, 제가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가장 공동체성이 큰 곳입니다. 저에게 교회를 다님으로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공동체성은 아이러니하게, ‘부담감’이라는 것과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공동체가 다른 의미로 곧 부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공동체를 빼면
뭐가 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 가족이 육신의 가족보다 더 앞선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신앙생활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족을 얻는 것입니다. 가족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반드시 수반됩니다. 그래서 공동체성이 강한 것이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의 특징이었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 사회가 원하는 것과 충돌되기도 합니다. 즉, 이렇게 이 시대와 기독교의 관계를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저는 복음이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주는 수단이나, 나를 성공하게 하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 특유의 정서인 ‘비나이다’ 신앙으로 종교를 바라보는 잘못된 렌즈입니다. 거기서는 신에게 열심히 빌면, 지극정성으로 나아가면 하늘이 감동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적 교회(영적 가족)는
부담스럽습니다. 종교를 종교로만 대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으로의 초대에 반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공동체성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교회의 모습과 달라지는 것이고,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낀다면, 우리는 복음으로의 초청에 응답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시대가 원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 이 질문이 저와 같은 목사들에게 던져지는 것입니다. 저는 포도주와 그릇 이야기가 이
문제에 해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주를 담아내는 그릇은 시대마다 달라져야 합니다. 성경 시대에는 가죽 부대에 담았다면, 이제는 유리 글라스가 어울립니다. 복음을 담아내는 그릇은 시대마다 다를 필요가 있고,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이 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서 시대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소개하고 전하고 초청하고 누릴 필요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복음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에 관심이 있지만, 위에서 설명한 여러 이유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복음이 나에게 성공을 가져다주거나, 내가 원하는 기도를 들어주거나 하지 않는다면, 왜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 무슨 유익이 도대체 있는가?”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반대로 질문을 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원하는 기도를 들어주면 정말 세상이 나아집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정말 그것이 사람의 삶에 주고 싶으신 것일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을 얻으므로 더 삶이 망가진다면, 그 잘못된 성공을 추구하는 삶을 돌이키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삶을 위해 유익하지 않으실까요? 만약 이 깨어진 세상에서 각 사람의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준다면, 그로 인해 정말 세상이 나아질까요? 정말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는 신이 세상을 사랑하는 신일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종교와
신을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성공과 나의 소원을 위해 일해주시는 신이 과연 세상을 모두 돌보시는 신일까요? 저는 20~30대에도 신학을 배우고, 마치 뭔가를 안다고 까불었던 것 같은데, 정작 삶이나 세상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제가 공부한 에스라에서 만난 교수님들은 “40세는 넘어야 진짜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30대부터 한국교회는 목사를 주니까 목사가 됐지만, 겸손하게 배워가고 40세 이후부터 진짜 목사가 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느덧 40대가 되고, 그동안 삶을 경험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특별히 목사로서 성경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배워가며 느끼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너무 철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추구를 쫓아서 살다가, 사람이 가장 본질적으로 원하는 것의 소중함을 망각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사랑’이고, 그것을 잃어버린 현상의 가장 대표적인 그림자는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람들과 교감하며 살아가도록 지어졌는데, 그러지 못함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죠. 동물 중에는 태어나서부터 혼자 살아가도록 지어진 종들도 있는데, 그런 개체는 본능적으로 외로움을 크게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동물 가운데 태어났을 때, 가장 약한 편에 속합니다. 아기는 혼자 두면 결코 생존할 수 없죠. 그만큼 공동체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관계를 떠나서 살면 극심한 외로움에 빠집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볼수록 왜 이렇게 성경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이 시대에 도저히 먹히지 않을 공동체를 말하고, 각자의 삶 살아가기에도 바쁘고 힘겨운 우리에게 ‘헌신’과 ‘섬김’을 말하나 궁금합니다. 너무 시대에 안 맞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개인주의화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학습된 상처의 결과입니다. 개인주의를 원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원하지만, 그렇게 손 내밀었다가 치이고 상처받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고 사는 것이죠. 상처에 치여 죽느니, 가시로 철갑을 두르고, 마음의 공간을
최대한 내어주지 않으며, 깨어진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남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죽하면 반려동물에게 위로를 받으며 살겠습니까? 제가 보면 현대인들은 동물을 키우고 보호하기보다, 동물에게서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마음 한구석이 공허하고,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봤던 한 영화의 대사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센 척하지 말자. 사실 다들 외롭잖아. 여기 안 외로운 사람 있어?” 저는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진짜 복음 안에서 살아가며 서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원하지만, 깨어진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저는 정말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경적 교회 안에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 시대가 성경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시대적 어려움도 있지만, 반면 복음은 어쩌면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 복음에 헌신한 공동체는 인간의 본질적 추구 앞에 진실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답’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사귐의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 그 진짜 복음을 담아내는 일에 있다고 믿어요. 지금 우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가 점점 더 좋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점점 더 성숙하고 변화되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약화를 그런 의미에서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거품이 빠지는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진짜 본질을 담아내는 교회와 신앙인들로 우리가 살아남아서, 진짜 기독교를 지켜내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를 다니면, 우리 안에서 깨어진 것들이 회복되고 인생에 필요한 변화가 일어나는가? 저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을 참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헌신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허나, 만약 그러한 변화가 우리 개개인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다면, 저는 각 사람의 그 의지와 노력의 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믿는 것은, 사람의
힘과 노력과 의지가 아닙니다. 제가 믿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고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변화를 믿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왜 우리에게 주셨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서, 깨어진 삶을 살면서도, 그것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면서 허무함과 공허함, 깨어진 세상에서 깨어진 사람들이 함께 살며, 더욱 가속화되는 결핍과 고난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고 회복하시기 위해 주신 책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첫 장은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우연히 존재했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그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그런 삶에 어떻게 해답이 존재하겠습니까? 뒤이어 성경은 왜 하나님께 속한 삶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렸는지 알려줍니다. 선악과 사건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죄. 그것은 하나님이 내 삶에 필요하지 않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기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살기 원하는 자기중심성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 삶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은 한 명이어야 하는데, 내가 나의 나라의 왕이 되면 하나님은 내 안에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삶은 죄가 가져온 여러 가지 문제를 직면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시대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고민과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것이 아니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메시아가 행하실 일은 로마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악 된 세상의 모든 영향력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셨던 구원의 놀라운 능력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삶의 외적인 부분이 변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니, 같은 상황
속에 살아도 다른 모습과 태도로 사는 삶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회복’과 ‘치유’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얻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것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가르치심’과 ‘고치심’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의 초대이며, 그 역사입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주님은 고쳐주십니다. 그들 안에 있는 여러 결핍과 고난 어려움을 주님은 치유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큰 병을 앓았던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이 제 삶에 찾아와 저를 고치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제 삶에도 주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뚜렷한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는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제 안에서 저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저의 삶을 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 전에 제게 있었던 깊은 허무함을 하나님 나라에 속한 복음의
열정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저의 인생에 있던 허무함, 외로움, 여러 결핍을 주님은 치유하고 계십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치유되었고 앞으로도 더욱 그러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성경 시대나 지금 우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그럼 오병이어는 어떨까요? 성경에서 가장 설명하기 힘든 기적 사건이 오병이어가 아닙니까? 먼저 이 사건을 신학적으로 이해해봅시다. 헤롯의 잔치 vs 메시아의 잔치 14장은 헤롯의 잔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헤롯은 로마의 지방자치제에
따라서 세워진 유대 지역의 왕입니다. 왕이라지만, 사실 독자적인 국가의 왕이 아닌, 지방자치단체장이죠. 어쨌든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가장 권력자입니다. (마 14:6) 그런데 마침,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서, 헤롯을 즐겁게 해주었다. 헤롯이 생일에 왕궁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손님을 초대해서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의 결과 세례 요한이 참수됩니다. 세례 요한을 미워하던 헤로디아가 딸을 이용해 세례 요한을 죽여달라고 요청했고,
헤롯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을 위해 요한을 죽입니다. 예수님의 잔치는 왕궁과 대조되는 빈 들에서 펼쳐집니다. 헤롯의 잔치와 달리 그곳에는 음식이 없습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러나 그곳에 진짜 풍요가 펼쳐집니다. 헤롯의 잔치는 사람을 죽이는 잔치였지만, 예수님의 잔치는 남자만 5,000명, 전체로 보면 15,000명 이상의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생명의 잔치였습니다.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채워진 것은 단순한 육의 양식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은과 금을 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은과 금을 주지 않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나면서부터 못 걷던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은과 금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걸으며 뛰며 찬양하게 된 것이 그에게 더 큰 복입니다. 동일한 관점에서, 우리는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을 정말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도 세상에서 학습된 결과로 공무원을 꿈꾸는 아이들처럼, 막연하게 성공, 재물, 혹은 그 외 다른 것으로 내 삶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5,000명 vs 4,000명 성경에 있는 기록은 복음서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네 편의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오병이어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건이
바로 다음 장에 한 번 더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도 6장에 오병이어 사건, 8장에 비슷한 사건이 한 번 더 기록됩니다. 즉, 예수님이 비슷한 기적을 두 번 행하신 것입니다. (마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 15: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마
1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앞서, 오병이어 사건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이번에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입니다. 두어 마리는 사실 ‘몇 개의’라는 표현입니다. 즉, 몇 개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새번역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칠병이어라고 부르기에 조금 불명확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또 있습니다. 앞에는 이 사건의 수혜자가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두 번째 벌어진 기적 사건에서는 참여한 사람이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도, 남자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그것만 다를까요? 아닙니다.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은 12 바구니가 남습니다. 4,000명을 먹이신 사건은 7 광주리가 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이 일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일어난 후, 이방지역으로 가셔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셨다는 측면입니다.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은 유대인을 위한 잔치였고, 4,000명을 먹이신
사건은 이방인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아시겠지만 12는 유대인에게 중요한 숫자입니다. 12지파, 12사도 모두 그렇습니다. 7은 성경에서 이방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일곱 집사는 이방인 이름을 갖고 있죠. 스테파노스, 필립스. 그들은 이방인 출신 사역자들로 봅니다. 즉, 예수님의 메시아적 잔치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합니다. 온 땅의 주인 되신 주님이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며 공급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먼저 유대인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맞지만, 그들을 제사장 나라 삼으셔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성경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종과 주인이, 남자와 여자가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회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구분하고 깨뜨리고 분열시키고 개인주의화 시킵니다. 죄가 들어온 직후, 아담과 하와가 남 탓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자녀인 가인과 아벨은 형제간의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 인류는 언어가
갈리며 흩어집니다. 죄는 우리의 삶에 상처를 내고, 분열을 일으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있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자,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소통합니다. 바벨탑은 언어로 인해 분열되었다면,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성령 안에 하나 되는 것이 신약에서 보여주는 회복입니다. 로마 시대에 종과 주인으로 극한의 피라미드 구조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 남자와 여자로 차별과 구분이 있던 그 시대에,
성경은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사고방식을 모두 뛰어넘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좋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복음은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좋은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거절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음으로 우리를 차별 없이 부르시지만, 복음 앞에 보이는 반응에 따라 우리는 그 복음을 누리기도 하고,
복음과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옷을 만진 사람들에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그중에는 12년간 혈루증 앓던 여인이 있었죠. 그런 그녀의 마음에는 ‘내가 이분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을 향해 ‘믿음’으로 반응한 여인에게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이방 여인, 우리에게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알려진,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의 도움 요청에 예수님이 굉장히 냉소적으로
답을 주시거든요.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이방인에게 ‘개’라는 속어로 비유하듯 예수님도 그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분명 의아한 장면입니다. (마 15:27)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러한 반응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오히려 믿음을 발휘하며 ‘주님’이라고 예수님을 부르며 요청합니다. ‘개’라고 부른 예수님을 참 멋쩍게 하는 표현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에서 유대인들에게
우선권이 있음도 인정합니다. 또한 자신을 ‘개’라고 표현한 것도 수용합니다. 더 나아가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개에게도 주어지는 최소한의 권리가 있음을 요청합니다. 유대인들이 먼저 떡을 먹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방인인 자신도 그 부스러기라도 먹기를 기대하며 기다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 15:28)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믿음이
크다’라는 이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단 2회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첫 번째는 백부장에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러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죠. 그리고 이 가나안 이방 여인에게 믿음이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대조적으로 바로 앞에서 풍랑 앞에 흔들리는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적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어쩌면 제자들과 대조적으로 이방 여인의 큰 믿음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즉 마태복음 14장에서 15장으로 넘어가면서 정결법 논쟁 등이 나오는 것은, 당시에
그것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눴던 모습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며, 바리새인들을 잘못된 기준과 마음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방지역으로 향하십니다. 거기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유대지역 사역에서 이방지역 사역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해당하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4,000명 먹이신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향한 복음에서 이방인들을 향한 보편적 복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동일한 패턴은 변함이 없습니다. 유대지역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응한 자와 반응하지 않은 자로 나뉘었던 것처럼, 이방인들 중에서도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잔치는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더 피스트(The Feast). 메시아의 그 잔치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 잔치로의 초청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들음에도 듣지 못하고,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에게 열린 잔치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예배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곳 가운데 잔치에는 초청받았으나, 이 예배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므로, 내 전심을 주께 드리지 못하므로, 잔치에서 영적으로 소외되신 분은 없습니까?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을 기다리는 그분께 여러분도 화답해보십시오. 주님이 그런 여러분의 마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신 생명의 잔치. 구원의 잔치. 메시아의 잔치. 하나님 나라의 그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 15: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5,000명을 먹이신 사건과 4,000명을 먹이신 사건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모두 4개의 단어로 표현됩니다. ‘가지다, 축사하다, 떼다, 주다’ 놀랍게도 이 4개의 단어가 이후에 동일하게 사용된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최후의 만찬에서 행하신 성만찬입니다. (마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이 잔치는 오늘 우리의 예배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열리고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와 회복, 영적인 가족 됨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지를 잘 모르기에, 때론 그곳에 있으면서 그 감격에서 멀리 서 있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뿐 아니라, 오늘날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도 메시아의 잔치를 여시고, 그곳으로 초청하시며, 그것에 반응하여 주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그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깨닫게 하기 원하십니다. 오늘 이곳이 바로 그 메시아의 잔치이고, 오늘 이 잔치에서 주님의 식탁에 함께 하는 주님의 가족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세상이 어떠하고,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곳에도 계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진짜 믿는 자를 찾으시고, 부르시고, 모으시고, 함께하시는 이 시대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으로 살아서, 깨어진 세상
속에서 먼저 회복되어 그 삶을 누리고 전하기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