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9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 나라를 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사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방법을 성경은 명확하게 말합니다. ‘내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장사의 비유로 설명한 것인데, 이것은 다른 말로 나의 삶의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생사여탈권이 주님께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인되신다는 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면 내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까? 만약 이런 고민으로 삶을 대하여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추상의 개념에서 실제적 개념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예화는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실 때, 하나님은 사실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냐면, “내가 정말 너의 삶의 주인이냐?”를 확인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하셨기에 이삭을 제물로 받으시지는 않았습니다. 제사가 목적이 아니라, 그 마음이
중요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요구를 하시지는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확인하시는 방법은 다를 수 있어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를 아시죠. 왜 그녀의 이야기를 예수님은 칭찬하십니까? 그 행위는 그녀에게 예수님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잖아요. 향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그녀가 모를까요? 아닙니다. 그것까지도 내어드릴 수 있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어요. 다 판 것이죠. 베드로나 제자들은
어떤가요? 직업을 내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제자들 중 어부들만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죠. 공무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자영업자나, 공무원이나.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해서 따라갔어요. 그들이 열두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이 모두에게 늘 같은 요구를 하시지는 않아요.
여러분, 특별한 부르심이 없다면, 지금 하시는 일을 성실히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신앙을 핑계로 일 그만두시지 마시고요. 그러나, 삶의 어떤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방향 전환을 요구하시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때로는 직업을 바꾸고, 지역을 바꾸고, 삶의 자리를 바꾸는 결정을 하기도 하죠. 그런 특별한 순간에는 분명 하나님이 강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에게는 개척이 삶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이었죠. 제 모든 삶의 자리, 방식을 바꾸어야
했던 순간이었죠. 그전까지는 신용카드도 무서워서 쓰지 않았던 제 성향에서 더 큰 도전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안정을 추구했던 삶에서 모험을 추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했던 시간이었어요. 저를 주님의 필요에 따라 맞추고, 제가 가진 것들도 드려야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임을 더 고백하게 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가끔 보지만, 성도님들 중에서도 직장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평신도 선교사가 되어서 해외로 나가고, 그
일에 남은 삶을 헌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어떤 사명을 주시는 경우가 있고, 때론 우리가 그에 응답해서 나아가곤 합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한다면, 그래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정말 주인이신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 속 ‘부자 청년’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의 같은 본문에서는 그 사람을 ‘관리’라고 하니, 직업도 꽤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성경이 그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교훈은 그가
주님을 따르지 못한 배경에는 그의 재물 많음이 원인이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에서 종종 물질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 선택이 요구되는, 즉 하나님과 물질이 라이벌이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물질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 신학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다만 우리는 그만큼 물질을 높게 보고, 하나님을 낮게 볼 때가 있습니다. <풍삶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헌금을 못 한다고 말하는
성도에게 어떻게 권면하는 것이 좋은 목사인가? “당신은 어려우니 헌금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잘 가르치는 것인가? 저도 목회를 하다보면 종종 만나는 고민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진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대입해서 생각해봅니다. 만약 내 딸이 나중에 형편이 어려워 헌금을 못한다고 말하면, 나는 딸에게 뭐라고 말해줄 것인가?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시고 주님께 철저히 의존하는 그 삶을 돌보신다고 믿는다면, 저는 아무리 어려워도 최선을 다해보자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권면할 것 같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신앙을 제대로 직면하여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은 백성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 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눅 18: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눅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는 율법을 지키고 있기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는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자기중심적 입장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었고, 자신 자체가 그리스도께 드려져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순종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이 일에 대해서 충격을 받은 것은 부자 청년만이 아니었습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이었죠. (눅 18: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놀랍게도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원론적으로 답을 한 후, 누가복음은 바로 다음 장인 19장에서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로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한 사람, 하나님이 삶에 역사하실 때, 우리의 기대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앞서 실패의 모델인 부자 관리와 매우 유사한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리장으로서 관리였고, 부자였습니다. 그가 가난했는가? 그는 물질적으로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은 깨어짐으로 인한
여러 결핍을 대표하는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그는 물질적인 부분 외에는 다 결핍을 느끼고 있었어요. 일단 외모가 가난합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키가 작았어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구약부터 대대로 사람은 외모와 키를 보기 때문에, 자신의 외형이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세리장이라는 직업으로 그는 부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그의 삶에는 다른 결핍이 있었는데, 바로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관계적으로
가난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사는 집은 좋았을 것 같은데, 손님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 집은 유대 사회에서 소문난 ‘죄인의 집’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간 것으로도 이슈가 되었을 정도니까요. 그의 마음은 늘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었을테죠. 저는 삭개오가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세리장이 되었는지, 아니면 어려서부터 다른 것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니,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떵떵거려볼 마음으로 그 길을 간 것인지 잘 모릅니다. 어쨌든
그의 현재적 삶은 ‘돈’에 가장 환장한 사람으로, 그것밖에 삶의 목적이 없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세리장으로 살면서 ‘돈’을 많이 벌었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으로, 그것에 스스로 만족을 두는 것으로, 다른 모든 부분에서 주는 공허함을 잊고 살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풍삶초적 분석으로 봤을 때, 삭개오는 공허했고, 깨어져 있었으며,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삶의 행복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편리함과 좋은 것들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공허함을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그가 돈으로 채우려고 했지만 채우지 못한 그 부분, 즉 그에게 있는 공허함이 그가 예수님께 나아간 통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 공허가 채워지자 그가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과 결핍은 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로 향하게 하는 통로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나라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다가가시고,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다는 마음은,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결함이 하나님을 찾는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님도 대단하시죠? 십자가에 죽으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하루를 삭개오의 집에서 보내기로 결정하십니다. 한 사람의 깨어짐을 회복하고자 주님은 그렇게 행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그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눅 19: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과연 삭개오의 집에 손님이 와서 묵은 것이 얼마 만의 일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으로 향하셨고, 삭개오는 그날 밤에 결단합니다. (눅 19: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눅 19: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눅 19: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이 표현들은 그가 율법에서 요구하는 가르침을 지키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삭개오는 율법과 무관한 삶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셨고, 그가 복음이신 주님을 만나자, 자기 삶의
방향성을 바꾼 것입니다. 다른 것 다 없어도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그가, 이제 그 돈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말씀을 따르는 삶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기로 결단합니다. 회심이죠. 주님은 그에게 구원이 왔다고 말합니다. 구원이 시작된 것이죠.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자였는데, 그가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앞서 실패한 부자 관리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고
있었죠. 아마 인정받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유야 어쨌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물질만을 추구하며 왕따가 되기를 자처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변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대와 다릅니다. 우리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삭개오가 대단했나요? 아니요. 하나님이 하시면 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의 안에서 주시는 마음에 순종한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 절반을 구제하겠다고,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 다 변상하겠다고. 그러면 삭개오의 재산은 다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은 하나님을 얻은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삭개오는 가난한 자의 한 유형이었고, 삭개오의 변화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나, 성경을 읽는 유대인들에게나, 오늘 우리에게나 큰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상태인 ‘프토코스’는 상대적 가난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보다 가난하니까....”가
아닙니다. 절대적 가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내가 가진 것도 나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기에, 절대적으로 가난한 것입니다. 가난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가난한 마음으로 누구를 바라볼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가난하더라도 끝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에서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왕도 가난한 자로 불립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 생사여탈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 왕도 가난한 마음일 때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자신이 무엇이 된 듯 굴 때는 그는 넘어졌습니다. 신앙은 그런 의미에서 역설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절대적으로 가난해야 한다, 생사여탈권이 내게 없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 내면에서는 이런 질문이 올라올 것입니다. 이럴 바에야 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가? 꼭 소유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행복에 대한 추구, 깨어짐에 대한 회복의 마음과
연결됩니다. 지금 내 삶이 만족스럽다면 모르겠으나, 어떤 부분에서 ‘이게 정말 최선일까?’라는 고민이 있다면, 그냥 포기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서 답을 고민해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가장 행복한 상태를 잘 아시는데, 하나님 나라를 얻는 삶이 가장 복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팔복에서 말한 것처럼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선택할 때, 우리가 포기하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습니다. 포기는 나의 주도권과 소유권이고, 얻는 것은 하나님의 주인됨 입니다. 내 삶을 책임지시는
분이 내게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풍요이고,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 붙잡다가 이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다른 것 다 포기하더라도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물질을 가져야 행복하고 가난은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말씀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합니다. 물질이 내게 제공해주는 것과 하나님이 내게 제공해주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안전하고 영원하고 행복을 주는가? 여러분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살살 꼬드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이 질문에 직면하게 만듭니다. 복음은 듣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옛사람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았던 나, 내가
주인 되어 살았던 나, 이것을 내가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내가 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모든 소유를 다 내어놓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마음으로는 그 결정은 불가능합니다.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소유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모든 삶에 대한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 물론 이 죽음은 ‘영적 죽음’입니다. 요즘에 이단이 하도 이상한
짓을 많이 해서,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는데,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를 지배하는 영에 대한 것으로서, 나의 옛사람에 대한 것이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먼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이 죽음도 나중에 선택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선택했고, 현재적으로도 매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나를 기뻐하고 응원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잘했어.”, “오늘도 승리했어.” 나의 옛사람, 나의 죄 된 본성, 나의 주인 되고자 하는 마음이 죽을 때, 하나님께서 내 안에 통치하십니다. 내가 통치하시면 내 안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성경은 언제나 시종일관 우리에게 같은 것을 가르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번 <하나님의 나라> 시리즈를 통해서, 처음 이런 도전들을 느끼신다면,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성경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게 유리한 것, 내가 필요한 것만 봤던 것은 아닐까요?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누군가 성경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모두가 신앙에서
이 질문을 받습니다. 이 결정을 통과합니다. 그 순간에 누군가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의 삶을 기록한 것은 그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지혜롭게 선택하도록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제가 이 시간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 드릴 테니, 잘 들으시며 우리도 이 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1-2 삶의 근본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 믿음이야 말로, 삶을 가치 있게 하는 든든한 기초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입니다. 우리 조상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준 것이, 바로 이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압니다. 4 믿음의 행위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드린 제물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고 의롭다 인정해 주신 것은 다름 아닌 믿음이었습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그 믿음은 여전히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5-6 믿음의 행위로 에녹은, 죽음을 완전히 건너뛰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기 전에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것을, 믿을 만한 증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기꺼이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7 믿음으로 노아는, 메마른 땅 한복판에 배를 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경고하셨을 때,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의 집안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의 믿음의 행위가, 믿지 않는 악한 세계와 믿는 올바른 세계를 예리하게 구분 지었습니다.
그 결과로, 노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8-10 믿음의 행위로 아브라함은, 장차 그의 본향이 될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응답했습니다. 떠나면서도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습니다. 믿음의 행위로 그는, 자신에게 약속된 땅에서 살되 나그네처럼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이삭과 야곱도 같은 약속 아래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영원한 기초 위에 세워진 도성, 곧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세우신
도성에 눈을 고정했던 것입니다. 11-12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 들어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음에도 아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약속하신 분께서 말씀대로 행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약해져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한 사람의 몸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난 것입니다. 13-16 이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된 것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약속된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반겼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자신들이 참된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전에 살던 나라를 그리워했다면,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보다 더 나은 나라, 곧 하늘나라를 갈망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자랑스러워하시며, 왜 그들을 위해 한 도성을 마련해 두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1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이삭을
하나님께 다시 올려 드렸습니다. 그는 약속으로 받은 자신의 외아들을, 얻을 때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돌려드렸습니다. 이 일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네 후손들이 이삭에게서 나올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뒤에 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죽은 사람도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서 산 채로 돌려받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20 믿음의 행위로 이삭은, 미래를 내다보며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습니다. 21
믿음의 행위로 야곱은, 죽기 직전에 요셉의 아들들을 차례대로 축복하면서, 자신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으로 축복하고, 지팡이에 의지해 서서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22 믿음의 행위로 요셉은, 죽어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을 예언하고 자기의 장례를 준비시켰습니다. 23 믿음의 행위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난 후 석 달 동안 아이를 숨겼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준수한 것을 보고, 왕의 법령에 용감히 맞섰습니다. 24-28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어 이집트
왕실의 특권층이 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압제자들과 더불어 기회주의적이고 안락한 죄악된 삶을 누리기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된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메시아 진영에서 겪는 고난을 이집트에서 누리는 부귀보다 훨씬 값지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가 앞을 내다보며 장차 받을 상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행위로 그는, 왕의 맹목적인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께 눈을 고정하고 계속해서 나아갔습니다. 믿음의 행위로 그는,
유월절을 지키고 집집마다 유월절 피를 뿌려, 맏아들을 멸하는 이의 손이 그들에게 닿지 않게 했습니다. 29 믿음의 행위로 이스라엘은, 바짝 마른 땅을 걸어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집트 사람들도 그렇게 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30 믿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칠 일 동안 여리고 성벽을 돌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31 믿음의 행위로 여리고의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맞아들여, 하나님의 신뢰하지 않는 자들에게 닥칠 파멸을 면했습니다. 32-39 계속해서
더 열거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예언자들……. 믿음의 행위로 그들은 나라를 무너뜨리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자와 불과 칼의 공격을 막아 냈고,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었으며, 전쟁에서 이겨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여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랑하는 이들을 맞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나은 부활을 사모한 나머지, 굴복하고
풀려 나가는 것을 거부한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학대와 채찍질을 기꺼이 받았고, 쇠사슬에 묶여 지하굴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고, 톱으로 켜져 두 동강이 나고, 살해되어 싸늘한 시체가 된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짐승 가죽을 두르고 집도 친구도 권력도 없이 세상을 떠돈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혹독한 세상의 가장자리로 다니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기 길을 갔습니다. 39-40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들 가운데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의 믿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이는, 믿음으로 산 그들의 삶도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