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신앙의 세 단계" / 강정규 목사

2023-03-12 · 마태복음 11-13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마태복음 강해설교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세례식이 있었기에 마태복음 강해를 다시 이어가며 맥을 잡기 위해, 지난 네 편의 마태복음 설교에 대한 흐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 구약에서 신약으로 _ 마 1-3장 마태복음 1장은 족보로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족보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하려는 것이죠. 이 부분은 특별히 구약과의 연관성을 주목하게 합니다. 2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또한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라는 명시적 언급이 많이

등장합니다. 3장의 세례 요한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에 따르면 엘리야의 사명을 갖고 메시아를 준비하러 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2)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_ 마 4-5장 마태복음 4장은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부분인데,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인생을 건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산상수훈을 가르치십니다.

그 첫 부분인 팔복은 바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3) 산상수훈 _ 마 5-7장 산상수훈을 세가지 관점으로 나눴습니다. 첫째, 우리의 존재인 ‘소금과 빛’. 둘째, 우리에게 주신 명령인 ‘더 나은 의’. 셋째,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기준인 ‘새 계명’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숨길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세상을 회복하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자기 의’가 아닌 성령에 의한 의로움으로 살아갑니다. 끝으로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언약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4) 존재가 복음이 되어 _ 마 7-10장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치심’과 ‘고치심’으로 요약할 수 있죠.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면 그 삶에 치유가 있습니다. 5-7장은 가르침, 8-9장은 치유사건을 기록한 후,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그들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세상은 존재가 바뀐 하나님의 사람을 싫어합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된 존재로서 주님의 뜻과 거룩함을 지키며 살 때, 우리의 삶 자체가 세상에 전하는 복음이 됩니다. 여기까지가 4편의 설교를 통해 다룬 마태복음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마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의 결과입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결론은 세상의 무관심과 거절입니다. (마 11: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마 11:17)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마 11:20) 그 때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 반응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무엇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고치시며 다니셨지만, 그 기적에는 반응하지만,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여러분, ‘관심’과 ‘회개’는 다릅니다. ‘동의’와 ‘회심’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자 중 하나, 혹은 기독교의 주인공 정도로 인정하는 것이 회심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누군가는 ‘산타클로스’처럼 여기고, 누군가는 ‘램프의 지니’ 정도로 여깁니다. 내 삶에 특별한 무엇을 더해주는 존재쯤으로 여긴단 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보다는 하나님의 자기 뜻에 맞추고 싶어합니다. 이런 신앙은 문제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산타클로스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기에 산타클로스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을 좋아할리 없죠. 내가 부를 때마다 나타나서 응답하지 않는 램프의 지니는 가져다 버릴 것입니다. 즉, 이런 신앙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까? 처음에는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가룟 유다가 회심을 안 했을까요? 저는 했을 것이라고 봐요. 사도행전에서 부활 후 예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던 사람이 120명이요, 누가복음을 보면 70인의 전도대가 있었죠. 그중에서 12명의

사도에 부름을 받은 것은 그만큼 가룟 유다에게도 특별한 헌신과 마음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뜻과 예수님이 다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키는 메시아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다른 길로 행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자신을 예수님께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가룟 유다와 같은

선택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 뜻과 다름을 발견해도 수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마 11: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마 11:3)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세례 요한이 사역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전해 듣는데, 아리송한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과 맞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제자를 보내어 물어봅니다. ‘오실 그분’은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그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당신도 메시아가 아니고 다른 분이 메시아로 오실 것입니까?’ 의심스러운 것이죠. 즉, 세례 요한이나 가룟 유다가 보기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역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모습이었다는 말이죠. 세례 요한에게는 예수님이 답을 주십니다. (마 1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마 11:5)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마 11:6)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지금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이 바로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이라는 것이죠. 즉, 사람들의 기대와 다를 수는 있지만, 자신은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적 사역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사명을 담당한 메시아를 준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옛 언약의 마지막 선포자입니다.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1장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시대를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실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12장에서 기록합니다. 메시아의 나라가 임하면 나타날 그 일. 바로 메시아적

치유 사건들입니다. 치유는 기본적으로 악한 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 예수님이 보이시는 치유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인(SIGN)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흐름을 정리해보면, 예수님의 사역에 반응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것은 크지 않았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보이시며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드러내어 보이십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조차도 그것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고, 제자들도 함께 선포했지만, 무관심과 반대를 직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그리고 마태복음의 독자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궁금했을 것이죠. 무엇이 문제일까? 왜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어도 이처럼 거절하는가? 바로 그 문제를 13장에서 비유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 8개의 비유가 여기에 소개됩니다. 8개의 비유 중, 첫 번째 비유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혹은 <네 가지 밭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야기인데요. 이 비유는 샌드위치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샌드위치는 전에 설명했던 인클루지오와는 다른 것인데요. 인클루지오가 앞과 뒤를 감싸는 단어 혹은 문장이라면, 샌드위치는 빵과 패티로 이루어진 삼중 구조로 각각이 하나의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인클루지오가 그 사이에 있는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면,

샌드위치 구조는 반대로 가운데 위치한 이야기(패티)가 앞뒤 이야기(빵)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3-9절이 A, 10-17절이 B, 18-23절이 A’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A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A' (마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마 13: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B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B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때, 누군가는 깨닫지만, 누군가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 복음의 말씀이 주어져도 같은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것과

그로 인해 맞이할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A는 비유에 대한 소개이고, A’는 비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하신 비유이므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겠죠.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이 비유는 농경사회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농업과 다른 것이 있죠. 일반적인 농사법에 따르면 씨앗 대부분은 좋은 밭에만 뿌립니다. 그 와중에 어쩌다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밭에 뿌려지겠죠. 그러나 이 비유는 다릅니다. 네 가지

밭에 모두 씨를 뿌립니다. 뿌리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실한 밭은 하나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 앞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사람보다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 가지 밭에 모두 말씀이 뿌려졌다는 것은, 어쩌면 이 네 가지 밭의 상태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가를 빼고는 돌밭, 가시밭, 좋은 땅 모두 초기에는 반응이 있습니다. 3/4에서

크든 작든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결실한 밭은 하나뿐입니다. 처음의 반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에도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가 적다고 나옵니다. 오늘 이 예배당 안에서도 누군가는 ‘길가’처럼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마음에 담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빨리 도움을 줘야 하고, 스스로도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돌밭’처럼 말씀이 들어가지만, 말씀이 내면에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이죠. 그래서 작은 환난과 어려움에도 말씀을 까먹습니다. 다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만 늘 은혜를 받고 삶은 변하지 않는 상태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는 ‘가시덤불’처럼 변화하는 모습까지 나타날 것입니다. 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실에 이르기 전에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등에 막힌 사람들입니다. 금요일마다 진행하는 하나님 나라 설교에서 듣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내 삶의 소유권을 내어드려야 하는데

그 결단을 못 하고 끝내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회심했다가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상태. 앞서 언급했던 가룟 유다 같은 인물이겠죠. 그럼 우리는 이 비유 앞에서 각자의 신앙의 모습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즉 신앙에는 통과해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저는 3단계로 구분하겠습니다. [신앙의 1단계]는 교회에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것은 신앙이 전혀 없어도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지난주 간증에서도

들었지만, 교회에 나온 시점과 복음 앞에 반응한 시점은 다 다릅니다.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나올 수도 있고, 결혼하는 조건으로 나올 수도 있고, 심심해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온 것 자체가 감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나와야 씨가 뿌려지는 현장에 참여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2단계]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앞서 교회에 나왔다는 것을 성경 시대로 빗대어 보자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무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속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죠. 예수님이 멋있어 보여서 그럴 수도 있고, 기적이 신기해서 그럴 수도 있고, 어느 시대에나 심심해서 따라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복음의 이야기를 잘 듣다 보면, 복음은 ‘선택’하는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복음은 나를 초청하고, 그것에 반응한다는 것은 내 삶의 모습에 어떠한 변화를 다짐하는 것이죠. 이것을 성경의 표현으로 ‘대가 지불’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산타클로스로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낙오하게 됩니다. 산타가

나에게 선물만 줘야지, 도리어 나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여기서 많이 걸러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도 사람들이 떠나가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복음은 자신의 삶을 바꾸도록 우리에게 어느 순간 요청하고 질문합니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그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내 삶을 고수할 것인가 결정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결정을 통과해야 [신앙의 2단계]로서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심은

내 삶의 왕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금요일 하나님 나라 8번째 설교를 통해 다뤘던 <보화와 진주 비유>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내 존재 자체를 드리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일부를 업그레이드하고자 하는 사람은 멈칫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을 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화와 같고, 좋은 진주와 같음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기꺼이 그 하나님 나라를 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세례식을

통해서 바로 [신앙의 2단계]를 결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주인됨을 고백하고, 자신의 이름을 십자가에 걸고, 주를 따라 살겠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그 결단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이 선택의 고민 앞에 서 있는 분들에게 드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1911년에 만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고 성능이 좋은 배. 대서양이라는 큰 바다를 횡단할 목적으로 최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배였습니다. 이 배를 만들 당시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선전되었습니다. 그만큼 완성도 높은 인류 최고의 배였습니다. 이름은 타이타닉호. 이 배의 재질은 강철이었고 길이는 268m에 달했습니다. 100년 전, 순수 제작비가 120억이었으니, 100년이 지난 지금의 값어치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총 탑승 인원이 3547명, 승무원만 900명이었습니다. 900명의 승무원과 최고의 숙련된 항해술을 연마한 초특급

항해사가 운항한 타이타닉호, 이 배의 결말은 북대서양에서 빙하를 피하지 못하고 충돌하여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1500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과연 타이타닉호는 그들의 선전 문구처럼,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항해사가 배를 움직이는 키를 잡고 있었고 첨단의 기술력이 그 배를 운항했지만, 그것은 빙하에 부딪혀 침몰하는 배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배 한 척을 기억해봐야 합니다. 그 배는

하나님의 배, 노아의 방주입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나무로 만든 배였습니다. 배를 조정하는 키도 없습니다. 움직이는 동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삼킨 큰 홍수 속에서 그 배는 떠다녔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그 배 안에는 노아의 가족 8명과 각종 동물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배를 움직이시고 돌보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배를 조종하는 키 하나 장착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조종하시는 그 배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침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타이타닉에 탑승할 때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 세상의 기대와 방식입니다. 네. 충분히 그래 보입니다. 그리고 내 삶을 노아의 방주로 표현되는 하나님께 맡길 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 배에 내 삶을 걸어도 괜찮을까? 고민이 필요합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고민. 성경에서도 늘 사람들은 이 두 갈래 길 앞에서 고민합니다. 세상의 추구, 하나님의 부르심. 이쪽은 큰길, 이쪽은 좁은 길. 이쪽은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 다른 쪽은 미련하다고 말하는 방식.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언제나 이 좁은 길로 와야 진짜 행복하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좁은 길을 갈 때, 아픔이 없다거나, 위협이 없다거나, 고난이 없다고 뻥 치지도 않습니다. 다 말해줘요.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그런데 그와 함께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 고난을 통과하면 진짜 영광을 볼 수 있어.” 못 믿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을 주시고 교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그 미련한 길을 택하여 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선택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교회를 시작했고, 2000년 동안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늘 있었고, 그들은 복음을 고백했으며, 그들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또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자 결단할 때, 그때 비로소 진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내가 나를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내 삶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으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이자,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떠한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라지 비유>가 대표적인 설명입니다. (마 13:24)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마 13:25)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마 13:26)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이 비유는 복음이 역사하는 현장에 늘 사탄도 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밀이 자랄 때, 가라지도 그 안에 함께 섞여 자랍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을까요’ 물었을 때, 주인은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추수의 날,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사람은 어디에나 공존합니다. 교회 안에도 공존할 수 있고, 세상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모르기에 같이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에 대해 판결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나라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인내하며 견뎌야 합니다. 제가 [신앙의 2단계]가 끝이 아니라 3단계라고 설명드린 이유는, 회심과

세례가 끝이 아닙니다. 복음을 선택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3단계]는 세상에서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내는 과정입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벧전 5: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건너간 사람들, 존재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여러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동안 이러한 영적 싸움이 있음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 세례자들의 고백 가운데 이들이 회심을 결단하고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마주할 싸움을 잘 이해하고 있음이 감사했습니다. 회심한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 가장 큰 교만입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속하는 것이 1단계요, 복음을 마주하고 반응하는 것이 2단계라면, 복음으로 끝까지 사는 것이, 끝까지 맡겨진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교회에서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라는 양육을 필수적으로 합니다. 몇몇 분들이 저에게 솔직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있어요. 갑자기 목사님이 <풍삶초>를 모든 교인들에게 하라고 했을 때, ‘솔직히 약간의 반발심이 있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압니다.

제가 바로 그 반발이 가장 심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교회는 그냥 성경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만이 필요할 뿐, 그 외에 어떤 프로그램을 하는 것에 대해서 반발이 가장 심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풍삶초를 접하고 이것으로 복음을 전하고 양육을 하면서, 한사람 두 사람 해 보니, 제 생각이 완전하게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첫 생각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성도님들 안에 복음과 신학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과 말씀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있어요. 그러나 정리되지 않아서 필요할 때 꺼내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말씀이 필요하고 신앙이 필요한 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설교만으로 제가 성도들을 정성스럽게 세워갈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한 것입니다. 설교는 1:1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설교만으로는 확인이 안 됩니다. 양육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때와

시기에 맞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결국 <풍삶초>를 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진짜 회심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없으므로, 복음을 직면하게 하고 결단할 수 있는 2단계로 이끌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한사람에게 3주의 시간을 1:1로 내는 것은 사랑입니다. 감사하게도 먼저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그것을 내리사랑으로 흘려보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교회 안에 풍삶초로 서로를 돕는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제가 참 많이 듣는 소리가, 풍삶초에 대해서 부정적 인식이 있었던 분들도 ‘막상 해 보니 너무 좋았어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완벽하지 않아요. 이것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이것에 잘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면 신앙의 성숙을 위한 기초를 놓을 수 있습니다. 풍삶초를 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 즉 회심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풍성한 삶의 기초>라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13주입니다. 13주를 1:1로 시간을 내어야 하기에 더욱 쉽지 않습니다. 저도 이제 교회 안에서 7명과 이 과정을 마쳐갑니다. 그런데 저는 이 과정도 모든 성도들에게 정말 필요한 과정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도 아무리 힘들어도 최소 일주일에 2~3팀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돕고 싶은 것입니다. 풍삶기를 마친 후, 그 깨달음을 토대로 평생을 훈련하며 살아간다면, 저는 반드시 주님을 닮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드리고 싶은 선물입니다. 신앙은 ‘교회 다닌다’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알았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복음을 품고 날마다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중간에 돌아설 위기, 버릴 위기가 옵니다. 사탄이 여러분을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묵상하며, 주님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자들에게, 팔복에서 나눴던 진정한 행복이 고백 될 것이라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0장까지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 이후 벌어진 복음에 대한 오해 및 반발을 중심으로, 13장의 비유까지 살펴봤습니다. 어쩌면 마태복음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복음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이탈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꽃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길을 걸어갑니다. 다만 그 안에서 세상이 알 수 없는 놀라운

것을 비로소 경험하게 됩니다. 이유가 있다면 세상은 모르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 하심이 이 세상에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13장의 8가지 비유를 모두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비유는 총 3가지 교훈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는 성장한다 : 씨 뿌리는 자 비유 & 가라지 비유 _ 언젠가 추수하는 날까지 이르게 된다. 2)

하나님 나라는 철저한 요구를 수반한다 : 보화 비유 & 진주 비유 _ 하나님 나라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전적인 포기를 선택해야 한다. 3)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응은 둘로 나뉜다 : 씨 뿌리는 자 비유 & 가라지 비유 _ 모두가 복음에 반응하지는 않는다. 그럼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저는 이 세상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 나라에 속한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며, 그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살아가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있는 것 자체가 은혜요, 우리는 이 안에서 서로를 붙잡아주고 격려하여, 함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다짐하고 위로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고, 아직 믿음이 어린 사람들에게 참된 삶을 보여주며, 함께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