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성도님들을 심방할 때,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느 것이든 물어보셔도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30팀 정도의 만남을 진행하다 보니, 공통된 질문 TOP3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우리교회 더 커지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느냐? 둘째, 사역 간사님들은 내년에 있는 것이냐? 셋째, 목사님과 사모님은 집에서 뭐 하시냐? 첫째, 둘째 부분은 교회적인 부분이니, 리더들과 함께 논의하는 중이고요. 세 번째 질문은 즉답을 드릴 수 있었는데, ‘저희도 보통의 부부와
똑같습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살아가는 모습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집에서 TV도 보고, 아이들과 게임도 하고, 아내랑 수다도 떨고 합니다. 살아가는 삶의 고민은 비슷하고, 현실에 뿌리 박힌 삶을 동일하게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구별됨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힘쓰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매주 말씀을 준비하는 삶을 산 것이 2008년부터였으니 대략 15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드라마,
영화 등을 볼 때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신학적 메시지’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 세상을 읽어갈 때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 콘텐츠는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노래하는 대부분의 문학은 억압된 현실에서 나왔습니다. 억압된 상황에서 오히려 자유를 소망하게 되고, 그것을 시와 노래와 문학작품으로 풀어내었기 때문입니다. 콘텐츠는 시대의 거울입니다. 지금 저의 삶은 이제 ‘전업 목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제 바운더리가 종교적입니다. 이런 저의 삶이, 자칫 세상에 대한 몰이해가 되지 않도록, 뉴스도 잘 챙겨보고, 문화 콘텐츠도 그런 마음으로 관심있게 읽어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흔히 말하는 정주행을 거의 못 하는데, 그래도 관심이 있는 드라마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저는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제가 가끔 이야기하지만,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 같은 드라마를 볼 때는, 깨어진 삶이 무엇인지가 너무 느껴져서, 그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서
‘풍삶초’, ‘풍삶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는 제가 목회자로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낭만의 본질을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4년 전에 한번 인용했었던 드라마가 있는데 <아스달 연대기>라는 드라마입니다. 사실 판타지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데, 몇 가지 부분에서 꽂히게 되어 보게 되었습니다. 2019년 9월 설교 중에 <아스달 연대기>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해서 예화를 들기도 했습니다. 이 드라마가 시즌제인데,
4년 만에 시즌2가 <아라문의 검>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고 해서, 이번 주간에 2편을 몰아서 봤습니다. 그중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은섬’이 한 부족 공동체의 수장이 됩니다. 이들과 대척점에는 피라미드 구조화 된 ‘아스달’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아스달의 모습과 다른 세계를 꿈꿉니다. 이들도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데, 은섬의 명령을 어기고 부하가 정복한 성에서 약탈하다가 걸린 장면입니다. *** 고대 세계에서 전쟁하고 ‘약탈’을
하는 것이 승자들의 법칙이었습니다. 승리한 족속이 모든 것을 누리는 '승자독식'의 '약육강식'의 세상이죠. 그것이 당연하다 말하는 세상 앞에서 그것과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진 삶을 살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없을 것 같은' 공동체를 세우는 비전이죠. 그것을 말로 외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은 부분부터 삶이 되도록 힘쓰지 않으면 결코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삶으로 그 모습을 행하여 갈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그 삶이 보여주는 가능성,
다른 말로 ‘비전’을 함께 꿈꾸고 소망하며 합류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고 싶으셨던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왕을 통하여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 피마리드 세계화 되어 있는 ‘아스달’에서는 이런 일이 있습니다. 같은 곳에서 출발하였으나 다른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죠. 과거 ‘은섬’과 함께했던 이아르크 출신의 ‘열손’은, 아스달에서 살아가며 점점 ‘아스달 화’ 되어 갑니다. *** 아스달에 살면서 ‘아스달’의
영향을 받다 보니, 아스달 화 된 것입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세상은 다 그러니까….’ 그 또한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안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힌다는 불안함으로, 피라미드에서 한 계단이라도 더 올라가려는 모습이죠. 아마도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은섬’의 행동을 보면, ‘판타지’라고 느낄 것입니다. 아프지만 ‘아스달’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세상과 닮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별됨'이고, 본래
교회(에클레시아)는 세상에서 그렇게 구별된 사람들로 사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거룩한 무리’라는 ‘성도’라고 부르겠습니까? 성도가 세상과 같아지고, 성도의 입에서 ‘세상을 살려면 이래야 해요’라는 말만 남게 되면, 우리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이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서로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 앞에 날마다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드라마가 세상에 나오는 것은,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가치를 꿈꾸는 이
시대의 목마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상황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종’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깨어진 세상은 곧 죄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몸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죄에 속한 삶입니다. 그 영향력 안에 얽매인 삶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가르치는 대로 성공주의,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등, 세상의 가치 안에서 그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고자 힘겨워하면서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세상의 평가에 못 미치는 나의 삶을 비관하고, 우월감과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성경은 그 세상의 가르침 속에서 여러분을 진리로 불러내어, 진리의 든든한 반석 위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 있는 자가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나를 평가하지 않고, 내 존재 자체로 나를 받아주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배운 가치를 따라서 내 삶을 참된 아름다움으로 채워갑니다. 그리고 그 삶을 경험한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삶을 전합니다.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복음은 우리를 타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서는 철저하게 피라미드 되어 강대국이 약소국을 짓밟는 시대, 그 결과 강대국 바벨론에게 짓밟혀 포로로 끌려온 포로기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럼, 이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유다의 가장 전성기였던 ‘다윗과 솔로몬 때’를 소망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스라엘 왕정의 실패를 반추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모델이 ‘솔로몬’입니다. 저는 이번에
열왕기서를 공부하며, 참 어려운 인물이 솔로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하나로 딱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갖고 있습니다.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보통 표현하죠. 솔로몬이 딱 그렇습니다. 솔로몬을 보는 시각이 그만큼 다양합니다. 단순히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열왕기서가 솔로몬의 어떤 부분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어떤 부분을 부정적으로 제시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보편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솔로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꽤 인기도 있는 편입니다. 다윗을 좋아하고 흠모하지만, 다윗이 겪었던 숱한 어려움과 최정점에서의 실패, 아들들의 반역 등을 생각하면 다윗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을 존경하고 흠모하지만, 바울이 겪었던 죽음의 위기와 감옥에서의 삶, 그리고 순교를 생각하면 바울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그 고난이 그들을 더 좋은 신앙인으로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데, 우리는 고난은
쏙 빼고 장점만 흡수하고 싶으니, 모델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죠. 그러다가 결국 몇 사람이 인기가 있는 모델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요셉’, ‘솔로몬’, ‘다니엘’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또한 삶의 문제와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세 사람이 ‘추앙’받게 된 것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명 모두 ‘지혜’의 대명사입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지혜로 주어진 삶을 살았고, 솔로몬은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셋의
공통점은 죄수에서 총리로, 포로에서 총리로 엄청난 신분 상승을 이루어냈거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다이아몬드 수저로 업그레이드 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 주변에도 ‘요셉’, ‘다니엘’, ‘솔로몬’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꼭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인기는 지금까지도 높습니다. 특별히 2002년 한국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다니엘 학습법>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타이틀이 이렇습니다. ‘서울대 수석졸업한 김동환 전도사의 다니엘 학습법’. 표지에는 ‘1억짜리 과외도 못
당하는 공부법! 서울대 수석졸업한 사람에겐 특별한 공부법이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에 1억은 없고, ‘공부 잘해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어른들과 목사님의 가르침에 세뇌당한 청소년들이 ‘하나님’ 빽으로 공부 잘하는 지혜를 얻어서, 신분 상승을 해보려고 애썼고, 그 덕에 저 책은 수도 없이 팔렸습니다. 무려 80만 부. 이제는 좀 먼 이야기가 된 줄 알고 검색했다가 2023년에도 여전히 ‘다니엘 학습법’이 개정되어 나오고, 아예 ‘3년 150주
주단위 내신관리 학습법’까지 책으로 나온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빽으로 ‘능력’을 얻어, 성공을 이루겠다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았고, 교회 또한 그 엄청난 성도의 니즈를 적당히 소화해주며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어서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특강, 프로그램 등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많은 이들이 더 신앙적으로 존경하는 바울처럼 살겠다는 표어는 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만약 ‘바울을 따라
살자’, 즉 ‘예수도 잘 믿고, 복음도 잘 전하여 영혼을 구하지만, 자신은 감옥에 갇혀서 죽고, 결혼도 못 할 삶’을 본받자고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거기다가 바울은 외적으로도 ‘대머리’에 못생겼다고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으니, 바울은 멀리서 존경하고 흠모할 뿐, 내가 바울과 같아지는 것은 인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잘 생겼고 유능하고 하나님도 잘 믿고 성공한 요셉과 다니엘이 여전히 우리가 닮고 싶은 모델인 것 같습니다. <다니엘 학습법>과 필적했던 책이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신비한 야베스에 대한 2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엄청난 기적의 메시지를 뽑아낸 것입니다. 이번에는 땅에 대한 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자신의 땅을 넓혀달라는 기도를 해서 응답받은 야베스. 야베스의 기도 원리를 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구하는 것을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죠. 야베스의 기도로 당시에 설교 안 한 교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마치 주문처럼 따라서 기도하는 경우도 많았죠. 저도 그때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 제 못난 시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분별 못하고 유행에 휩쓸려 가던 때였죠. 그럼 <솔로몬>은 언제 제일 많이 소비되었을까요? 아마 그 이전 세대, 한국교회가 열심히 ‘성전 건축’을 하던 때였을 것입니다. 성전 건축과 함께 더 큰 복을 받고 승승장구했던 솔로몬의 이야기를 통해, 성전 건축의 당위성과 동참에 대한 열망을 만들었겠죠. 솔로몬처럼 건축에 헌신해서 복받자는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 콘텐츠는 ‘시대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 안에 있고, 이 땅에서 부를 더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없겠어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는 잘 고민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가, 내가 원하는 삶인가? 성경이 말하는 삶인가, 세상이 좋다고 하는 삶인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인가, 세상이 인정하는 삶인가? ‘믿음’이란, 세상이 원하지도 바라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그 삶,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그 삶에 기꺼이 나를 맡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솔로몬’과 ‘성전 건축’을 다시 잘 봐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껏 우리는 열왕기서 말씀 또한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솔로몬의 통치 이후, 성경이 가장 먼저 기록하는 것은 ‘반대파 숙청’입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서 ‘인간이 꿈꾼 시스템의 한계’에 대해서 다뤘듯, 왕권은 기본적으로 피라미드 체제이므로, 왕권 강화를 위해 반대파를 숙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그림
위에 색칠하려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는 ‘시스템의 그림자’라고 해봅시다. 그럼, 왕권이 견고해진 다음 이야기부터 봅시다. (왕상 3:1) 솔로몬은, 이집트 왕 바로와 혼인 관계를 맺고,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과 주님의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의 건축을 모두 끝낼 때까지, 그 아내를 다윗 성에 있게 하였다. 솔로몬이 왕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애굽 파라오의 ‘사위’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한 뒤, 외부적으로 ‘정략결혼’을 통해 자신의 나라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한 일입니다. 솔로몬이 ‘신정 안에서의 왕정’을 따르는 왕이었는지, 아니면 세상에서 학습된 정치력을 구사한 ‘왕정’의 길을 갔는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마음이 그리 없었습니다. 성경은 솔로몬의 타락을 이 한 구절로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상 3:3) 솔로몬은 주님을 사랑하였으며, 자기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따랐으나, 그도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 이 또한 솔로몬의 행위에 대한 고발입니다. 물론 솔로몬에게는 또 핑계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성전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여러 신당에서 제사하는 것은 고대 이방 종교의 풍습입니다. 산당이 고대 가나안 사람들의 제의 처소였기에, 산당 제사는 이방 풍습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성전이 없을 때도, 합법적인 제의 장소를 정하고 제사해야 했지만, 솔로몬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그 유명한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일천번제에 대한 교회의 해석과 적용 역시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일천번제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말 그대로 1,000회에 걸쳐서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열심과 그 정성, 그리고 1,000원씩 하더라도 100만 원이라는 헌금을 드리는 그 마음만큼은 순수한 열정이라 말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잘못된 성경적 해석과 적용이라는 점은 짚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장기간에 걸친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1,000일이 아니라 10,000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올바른 목적과 자발적 헌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1,000일의 기도와 헌금을 하는 ‘엄청난 열정’을 통해, 그것에 성공하면 ‘큰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가르치거나, 그런 목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라면 그 신앙은 그야말로 기복신앙입니다. 일단 솔로몬이 했던 일천번제는 1,000회의 제물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천 번을 드리려면 3년 동안 기브온에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죠. 아마도 며칠 동안 머물며 일반인의 1,000배에 가까운 제물을 드리는 왕적 제사를 지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1,000마리 제물인가? 이것이 실제 제물의 정확한 숫자라고 보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습니다. 산당의 크기나 주변 환경을 볼 때, 1,000마리의 제사를 단기간에 드릴 땔감을 구하기도 힘들고, 현실적으로 실현이 어렵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에 ‘일천번제 TMI’를 검색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결론만 말하면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성경이 일천번제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량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예배가 그만큼 ‘최선의’ 예배였다는 ‘정성적 평가’입니다. 왕이 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정성껏 드렸던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솔로몬에게 나타나십니다. 솔로몬의 즉위 자체가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약속에 근거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솔로몬이 왕이 되도록 하신 후, 그 약속에 따라 왕으로서 솔로몬을 돕기 원하셨던 것이죠. 하나님은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시면, ‘직책’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수행할 힘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죠. 다만 그 힘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내 안에서 발휘됩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그래서 내 힘만큼만 발휘되고 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하는 마음을 통해 하나님은 그에게 왕의 역할을 감당할 도움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죠. 이때 솔로몬이 하는
고백은 겸손 그 자체입니다. (왕상 3:6)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이요 나의 아버지인 다윗이,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해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 그 큰 은혜로 그를 지켜 주셔서, 오늘과 같이 이렇게 그 보좌에 앉을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왕상 3:7) 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내가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나의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주님의 종인 나를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직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처신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왕상 3:8)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곧 그 수를 셀 수도 없고 계산을 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백성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왕상 3:9) 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왕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자신에게는
이 역할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특별한 신분을 가진 존재로 스스로 구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 즉 ‘주님의 백성’을 하나님 안에서 잘 통치하기 위한 능력을 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천번제가 솔로몬에게 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뜯어낼 비법은 없습니다. 금식기도는 때로는 우리의 간절함을 담아내는 표현이 될 수는 있지만, 금식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서 응답을 얻어내고자 ‘비법’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단식투쟁에 불과합니다. 일천번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를 힘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뿐입니다. 그에 응답하여 내게 무엇을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것을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내가 구한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구한 것이 내 욕심으로 구하였기에 주시지 않은 것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그의 성공을 위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지혜에도 여러 색깔이 있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구한 지혜의 핵심은 ‘듣고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혜뿐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은 것들도 주십니다.
부귀와 영화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 비법을 또 연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드러내놓고 내 진짜 요구를 다 말하면 ‘하수’이고, 적당히 하나님이 원하는 것으로 먼저 구하면 내가 원하는 것도 덤으로 함께 얻을 수 있다는 ‘고수’의 비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피라미드 세상에서 높은 곳으로 가는 성공을 추구하는 ‘고지론자’들이 대체하여 쓰게 된 표현인 ‘선한 영향력’입니다. ‘선한 영향력’은 사실 애매한 단어이죠. ‘영향력’이라는
말 안에는 성공과 지위가 슬쩍 담겨있으면서도, 또 꼭 그렇지 않다고 피해 갈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선한 사람’이길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향력’이야 하나님이 필요하면 주실 것이고, 아니면 그냥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주는 어떠한 외압과 불합리함과 손해 앞에서도 ‘선하기를’ 추구하는 것, 그로 말미암아 내가 가진 ‘영향력’을 다 ‘상실’한다고 해도,
나는 그 길을 가겠노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즉, 우리는 바른 기도와 바르지 않은 기도가 있음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애초에 하나님을 속여서 내가 원하는 것을 뜯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도 대놓고 ‘부자되세요’라고 서로를 축복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세속적인 때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기도도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가, 이제는 그것이 스스로 보기에도 세속적이었는지 어느 순간 조금 바뀌어 ‘깨끗한 부자’, ‘거룩한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결국 부자되게 해달라는 것이죠. 그러니 조금 더 바뀌어 이제 ‘베푸는 삶’을 사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그 또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재정의 문제 앞에서 그저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따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 청지기조차도 작은 청지기가 되고 싶지는 않은지, ‘창고지기’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집에서 해라’라는
세상의 가치와 오히려 맞는 이야기겠죠. 저는 베푸는 삶의 주체가 어차피 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베푸는 삶을 사는 자가 되고자 기도하는 것은 내가 주인된 삶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의 기도는 내게 무엇이 있든지 ‘나는 주님의 청지기로 살겠다’는 마음과 태도여야 합니다. 다른 미사여구를 부쳐가며 포장하더라도, 결국 내가 원하는 진심은 다른 것에 있다면, 그 기도는 내 욕망의 분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우리가 가난하든 부하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철저한 종이 되어,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잊지 않고, 주어진 삶에서 주님을 위하여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기를 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고, 하나님이 정말 주인 된 종으로서 사는 것이 우리의 고백일 뿐, 부유함과 가난함 등의 환경은 주님의 뜻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을 마주할 때는 주님 의지하는 법을 더욱 훈련하고, 혹시 내 안에 다른
사람을 돌볼 작은 마음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나눌 때, 저도 제 안의 죄성과 부끄러움과도 싸워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여러분에게 너무 가혹하고 엄격하게 말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제 인간적인 마음이야, 왜 여러분이 그저 잘 되고 넉넉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거 바라고 응원해준다고 저에게 손해도 아닐 텐데요. 그런데, 제 안에는 늘 깊은 고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랜 세월 동안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바라는 것’을 이룬 후, 신앙적으로 퇴보하는 것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좋은 직장 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하고,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고 하고, 사업 등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잘됐다’라고 할만한 상황, 축하받을 상황을 경험한 그 후, 그들이 더욱 좋은 신앙인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저는 마음이 아픈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때로는 두렵습니다. 여러분의 사업이 잘되고,
오히려 거기에 에너지가 다 빼앗겨 흔들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솔로몬의 잘됨이 축복일까? 잘됨과 안됨이라는 환경으로 판단할 수는 없으나, 그 환경 앞에 때로는 너무나 영향을 받는 것이 인간인지라,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례를 볼 때, 저는 오히려 많은 경우에는 그것이 ‘복’이 아닌 ‘저주’로 귀결된 경우가 많음을 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영적 생명을 돌보는 목사로서, 여러분의 잘됨이 오히려 여러분의 위기가 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제 이런 걱정이 ‘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무엇보다 여러분의 영의 잘됨이 가장 소중합니다. 제 진심은 여러분이 잘되어 교회를 위해 뭔가 헌신하고, 저에게 고기를 사주는 것보다... 제가 국밥 한 그릇을 사드리더라도, 함께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삶을 동행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늘 이런 이야기를 설교하고 가르치기에, 아마도 성공을 꿈꾸거나 부자로 살고 싶은 성도들은 이 교회를 불편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설교의 시간만큼은 여러분의 편보다는 하나님의 편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면, 저는 여러분이 바라는 것들이 안 되고 가로막히더라도, 그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삶에 대하여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설교의 자리를 벗어나서는, 저는 여러분의 편에 서서 여러분의 고민과 아픔에 함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원통함을 아뢰고 도와달라고 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에 부족함이 있으면 함께 채우고, 지켜주고, 손을 내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열왕기상의 모든 왕 중에 가장 세상적으로 성공합니다. 솔로몬이 누린 부귀와 영화가 그의 삶에 ‘복’인지 ‘화’인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왕으로서 나아가야 하는 ‘왕의 길’ 또한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처음에 보인 겸손함과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지켜낸다면 그는 성공할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은 그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성공적인 왕이었는가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성경의 관심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종’으로 살아내는가? 그것에 온 관심을 기울일 뿐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분명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왕상 3:28)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솔로몬은 지혜롭게 이스라엘의 행정 조직을 개편하며
왕권을 더욱 공고히 가져갑니다. 그에게 맡겨진 왕으로서의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것입니다. 그는 외적으로도 성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왕상 4:20) 유다와 이스라엘에는 인구가 늘어나서, 마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사람이 많아졌지만, 먹고 마시는 것에 모자람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잘 지냈다. (왕상 4:21)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블레셋 영토에 이르기까지, 또 이집트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국을 다스리고, 그 왕국들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조공을 바치면서 솔로몬을 섬겼다. 여기까지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보는 솔로몬 시대의 일은 잘 분별해서 봐야 합니다. 솔로몬의 성과와 업적을 나타내는 모든 내용이 과연 ‘복’인지, ‘긍정적 표현’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과와 외적인 성장에 집중하지만, 사실 성경은 그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향한 그의 ‘충성’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저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4장 후반부의 묘사들은 바로 그 위험성을 부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여기서 위험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잘 먹었고, 솔로몬은 넓은 땅을 다스렸고, 그 땅 안에 있는 모든 백성도 다 잘 살았다는 이야기들입니다. 왕과 왕의 상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도 부족함이 없게 공급했고, 그의 지혜는 모든 사람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잠언 3,000가지를 말할 정도였고, 그가 지은 노래가 1,000편이
넘었으며, 그의 지식은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그는 ‘선한 영향력’을 마구 드러내고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몇 가지 부분이 이미 성경의 기준에서 어긋나고 있음에도, 그가 외적으로 이룬 것들이 너무 빛나서 이 균열을 잘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는 이 말씀을 어겼습니다. (신 17:16) 왕이라 해도 군마를 많이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며, 군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이집트로 보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다시는 당신들이 그 길로 되돌아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왕상 4:26) 솔로몬은 전차를 끄는 말을 두는 마구간 사만 칸과 군마 만 이천 필을 가지고 있었다. 솔로몬에 대한 열왕기서의 묘사는 ‘말 부자’입니다. 정확하게 ‘군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군마를 많이 가졌다는 것은 왕에게 군사력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을 구석’입니다. 그 이야기는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던 그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롭게 운영했던 국정은 어떨까요? 그는 관리들을 왕의 식탁에 초대하여 교제했습니다. (왕상 4:27) 그리고 솔로몬의 관리들은 각자 자기가 책임진 달에, 솔로몬 왕과 솔로몬 왕의 식탁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부족하지 않게 먹거리를 조달하였다. (왕상 4:28) 또한 군마와 역마에게 먹일 보리와 보리짚도 각각 자기의 분담량에 따라서, 말이 있는 곳으로 가져 왔다. 솔로몬 치하의 지방 관리들은 솔로몬 왕의 사치를 떠받치기 위해 엄청난 부담을
짊어진 것입니다. 여기도 군마가 많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다시금 부정적 표현입니다. 솔로몬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을 잘 통치하기 위해 잘 ‘듣겠다’던 그의 지혜는 더 이상 그에게 공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관리들의 고충은 듣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지혜를 뽐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과 그가 왕이 되고 3년 안에 있었던 일입니다. 4장을 다시금 잘 읽어보면, 솔로몬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작은 균열이고, 여전히 하나님은 솔로몬을 떠나지 않고 계시지만,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혜가 뭘까요? 아담과 하와도 충분히 지혜로웠지만 ‘선악을 아는 지혜’라는 더 큰 무엇을 추구하다가 도리어 하나님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한 끗입니다. 정말 한 끗 이예요.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원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정말 ‘지혜의 왕’이었을까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고 있다면 그는 지혜의 왕이겠으나, 만약 그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국 ‘지혜 없는 자’로 마무리 되고 말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고 드리는 기도를 읽어보면, 그의 마음에 결국 무엇이 남아 있었는지 보게 됩니다.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솔로몬은 성전을 멋지게 짓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성공일까요? 성전이 지어져 봉헌되는 동안,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주되심은 무너졌으니, 그것이 어찌 성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지혜는 헛된 것이고, 그의 성공은 신앙의 실패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솔로몬이 누리지 못한 ‘참된 지혜’를 우리가 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의 삶에 무너진 ‘참된 성공’을 우리는 맛보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와 성공’이 날마다 여러분을 둘러싸고 흔들 것입니다. 한
끗으로 여러분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구별된 성도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여, 세상의 가르침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오늘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지키길 원하십니다. 다른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 위에 믿음으로 서는 여러분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