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무너진 성전" / 강정규 목사

2023-09-24 · 열왕기상 5-1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열왕기상 3번째 설교입니다. 사역 간사님들과 올해 남은 일정 동안 무엇을 훈련할지를 나눴습니다. 저는 보통 자발적인 의견을 묻는 편입니다. 그중에 성묵 간사님은 ‘주일 설교’를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진 간사님은 안 해봤던 성찬식 인도를 해봐야겠죠. 그래서 다음 주일에 성묵 간사님이 주일설교를 맡고, 예진 간사님이 성찬식 인도를 맡습니다. 당연히 저는 그 모든 부분을 돕고, 제가 하던 때보다 더 은혜가 있도록 서포트 할 것입니다. 저희가 매일성경과

발맞추어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솔로몬에 대해서 설교를 한번 했고, 오늘도 솔로몬의 성전건축에 대한 설교를 하기에, 다음 주 설교는 매일성경 묵상 일정을 앞질러, 그다음 주에 대한 예습 설교로 솔로몬 후대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지난주에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다뤘지요. 결국 솔로몬이 진짜 지혜의 왕이었는가? 세상적으로 볼 때, 그는 유능한 왕이었고 업적이 확실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지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는 왕이었는가 볼 때는 지혜 없는 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이야기는 솔로몬 하면 ‘지혜’와 함께 떠오르는 키워드인 ‘성전 건축’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왕권이 안정되자, 드디어 아버지 다윗 때부터 숙원사업이었던 성전 건축을 준비합니다. 솔로몬 즉위 4년째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이방 나라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가 동반됩니다. 페니키아와 레바논 지역이죠. 5장은 그러한 협업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룹니다.

이러한 부분은 성전이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전에 대한 별명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것이죠.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규모는 이렇습니다. (왕상 6:2)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성전은 길이가 육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삼십 규빗이며 규빗은 약 45cm의 길이를 뜻합니다. 그럼, 길이가 27m(60규빗), 너비가 9m(20규빗), 높이가 13.7m(30규빗)으로 약 75평입니다. 이것도

성막의 규모에 비해서는 2배인데, 현대의 건축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오늘날 교회처럼 사람들이 모두 모여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지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제사와 분향만을 담당하는 곳이라고 본다면 상당한 규모이죠. 큰 무리가 모일 때는 성전의 큰 뜰을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에 돌입했을 때,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왕상 6:11)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왕상 6:12)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왕상 6:13)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등장하여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경우에 “여호와의 말씀이 ~에게 임하여”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표현법은 ‘예언과 성취’라는 주제와 관련된 핵심 어구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으로 시작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으나, 이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자는 재앙이 임하곤 합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성전 건축’이 가진 의미를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였으니’ 복을 주겠다는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다른 부분에 하나님의 포커스가 있죠. 다시 말해, 성전 건축을 해서 하나님이 솔로몬을 복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 다윗의 때, 다윗이 성전 건축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때,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그 유명한 ‘다윗 언약’을 주십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다윗 또한 주변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이제 어엿한 왕이 되어 왕궁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안에는 자신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신은 이제 너무 평안하게 왕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궤는 성막에 있는 것이 죄송한 것이죠. 이것은 다윗의 영적 민감성과 순수성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적 멘토인 나단을 불러서 이런 마음을 터놓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나타나시죠. 누구에게 나타나요? ‘나단’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집이 필요 없다. 나는 집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집 지어달라고 했느냐. 괜찮다.’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선을 그은 것입니다. 내가 인간 왕과 견주어 조금 더 높거나, 대우를 받고자 하는 그 정도의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세계가 주의 처소와 발등상에 불과한데요.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기억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쉽게 설명해 본다면, 예를 들어 여러분이 강아지를 너무 예뻐했더니, 강아지가 꿈에 나와서 여러분에게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자기가 “땅을 파고 나무를 모아서 최고의 개집을 만들어줄테니 거기 와서 사십시오”라고 말하면, 여러분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웃겠죠. 그래도 이쁘겠죠. 딱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에게 가르치고 싶은 핵심은 그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 사랑하는 그 마음이 뭔지도 아시기에, 그 마음은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내용이 ‘내가 너의 나라와 너의 왕권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반대로 다윗이 그런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뭘로 꼬실까?’ 생각하며, ‘성전을 지어볼까?’ 했으면 다윗은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뜯어내려고 하는 신앙은 100전 100패입니다. 그냥 나는 하나님을 너무 좋아해서 진심으로

뭐라도 하면, 그게 하나님께 설령 도움이 하나도 안 될지라도, 그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이런 존재적 차이를 알아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사실 ‘신’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껏 보고 듣고 자란 신이란 존재는, 우리가 뭘 열심히 지극정성으로 빌면 거기에 뿅 가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신, 혹은 민속신앙에 나오듯 부엌신, 요강신, 현관신 등 너무나도 지엽적이고

우스운 신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우리는 하나님도 고작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의 비위를 살살 맞춰줘서 그가 가진 능력을 뜯어내는 것을 전문 용어로 ‘사기’라고 하고, 사기꾼들이 그런 돈 많은 호구 찾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내 신앙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그 순수한 마음을 보셨고, 그러므로 이런 약속을 주십니다. 다윗 언약에 해당하는 말씀이죠. (삼하 7:12) 너의 생애가 다하여서,

네가 너의 조상들과 함께 묻히면, 내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삼하 7:13)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삼하 7: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삼하 7:15) 내가, 사울에게서 나의 총애를 거두어,

나의 앞에서 물러가게 하였지만, 너의 자손에게서는 총애를 거두지 아니하겠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14절이죠. 아버지 역할이 무엇입니까? 잘못하면 혼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목회를 계속해보면서 느끼지만, 제가 누군가에게 강하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꾸짖고 바로잡을 때, 상대방을 보면서 합니다. 뭘 보는지 아세요? 이 사람이 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면서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이해하고, 정말 ‘아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최소한 담임목사로서 저를 ‘인정’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사랑하니까 뭔가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나 혼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대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다윗이 염원했던 하나님의 집을 짓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약속대로 다윗 왕조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다윗의 후손들이 죄를 지을 때 혼내시는 역할도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받으시고, 솔로몬을 통해 짓게 된 건물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 이것은 비유해 보자면, 아까 꿈에 나온 여러분이 사랑하는 그 개가 땅을 파서 집을 지었어요. 제 딴에는 좋은 것으로 짓겠다고 막 열심히 뛰어다니며 합니다. 그럼, 여러분이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 개집에 한 번 누워줄 수는 있죠. 그런데 그것이 여러분에게 편하고 격이 맞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눕는 것은 여러분이 그 개의 정성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낮추는 것이죠.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시는 것은 낮아지심입니다. 하나님이 집이 없어서 떠돌고 계시다가 집 지어준 솔로몬에게 감사하며 들어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고작 인간이 지은 건물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받아주신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사실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지금 받고 계신 것도 기적이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도를 받으실 이유가 없죠.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의 특권인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서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가치는, 그가 정성을 다했다는 측면에서 귀한 것이지, 거기에 사용된 재료가 무엇이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것은 ‘정성’이 담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할 때도 ‘정성’으로 하는 예배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과 정성을 다해도, 수만 명 모이는 교회의 예배 퀄리티를 객관적으로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도긴개긴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성’을 다하면 되는 것이고,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야, 어차피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해 봤자 수준이 딸려서 안 돼’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들도 안 하면, 그 자체가 망한 예배입니다. 반대로 정말로 두세 사람이 모여서라도 그 예배를 정성껏 드리기 위해 준비합니다. 악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두세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그 예배를 준비하는 데부터 드려지고, 끝까지 그런 마음으로 자신들의 최선으로 예배한다면... 저는 그 예배가 수만 명이 모여서 준비하는 성대한 집회보다 어쩌면 더 값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 정성의 핵심은 ‘내 만족’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의 뜻이 잘 드러날까? 만약 이 부분을 놓치면, ‘우리의 열심’은 나를 위한 것에 머물러 버릴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예배에 지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하면서, 그날 예배에 못 오신 분 중 생각나는 분들에게 주중에 카톡을 보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한 분이 너무 피곤해서 조는 모습 보일까 봐, 비염도 있고 해서 따로 예배를 드렸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분의 그 마음이 뭔지 알아요. 예배 시간에 참여해서 졸고 있으면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죠. 그래도 제가 말씀드렸어요. “오셔서 졸고 계셔도, 얼굴 뵈며 예배하고 싶습니다.” 저는 최고의 예배는 최선을 다하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때로는 악기를 쓰지 않는 <마리아 예배>가 최선일 수도 있는 이유는, 우리가 뭔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에서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저의 몫이고 사명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미움받을 용기를 내어서라도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기는 여러분은 이 부분에 대해서 서로를 정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조금 예배에 일찍

왔으면, 이 예배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고, 혹시 오늘 실수로 늦게 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들어오는 일이 민망하지 않도록 뒷자리도 그들을 위해 비워주고, 와서 졸고 있더라도 끝나고 격려도 해주고, 만약 정말 친하고 아끼면 졸다가 끝나지 않도록 깨워도 주고, 지각하지 말자고도 서로 응원해주고, 도와줄 일이 없는지 물어도 보고, 먼저 찾아도 보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떤 것을 하기 원하실까?’ 고민하며 나아가는 것이 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솔로몬의 성전건축 이야기에서 착각하지 말 것은, ‘하나님도 집을 좋아하나 보다’, ‘명품을 좋아하시나 보다’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보다는 여러분에게 하나님보다 더 귀한 무엇이 없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축구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내가, 그전에는 시간만 나면 축구하러 갔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그것보다 더 귀하시니 하나님의 일 먼저 하고, 시간 남으면 축구하게 되었으면, 이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전에는 나의 인생의 희로애락을

술과 함께 풀었는데, 이제는 내 인생의 희로애락을 하나님과 함께 풀어가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변화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내가 가진 어떤 것, 내가 이룬 성취의 흔적 등이 나의 자랑이었는데, 이제 정말로 주님이 나의 자랑이고, 그것이 다른 것과 견주어 조금 더 자랑하는 수준을 넘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수록 그분이 나와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자랑이 되어 갈 때, 그것이 진짜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제가 전하는 이런 이야기와

고백이, 지금 당장 나에게 없다고 ‘나는 틀렸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아직 없을 수 있습니다. 풍삶기의 예화처럼, 이제 막 군대에 들어간 훈련병도 ‘군인’이고, 하늘에서 낙하하는 ‘특전사’도 군인입니다. 다만 훈련병이 계속 훈련병에 머물면 안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훈련하고 터득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감당하는 때가 되었을 때 ‘이제 진짜 군인다워졌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 나의 모습보다는 앞으로 나의 모습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결단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건축 이야기에서 핵심은, 다시 말하지만 ‘좋은 건물 짓기’가 아닙니다. 그것 했다고 하나님이 눈이 뒤집혀서 좋아하신 것 아닙니다. (왕상 6:12) 드디어 네가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구나. 네가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또 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그것을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한 바를 네게서 이루겠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계명에 순종하는 일. 이미 다윗과 약속한 것이 있기에 그것을

주고 싶으세요. 그런데 그것을 누리기 위해 솔로몬이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풍성한 삶’이라고 할 수 있고,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고,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고, 다 통칭해서 ‘복’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고 싶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세상적 바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누리도록 주시고자

하는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그 진실한 마음과 태도. 그것이 핵심입니다. 드디어 성전건축이 완료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숙원사업을 7년에 걸쳐서 완공합니다. 6장 마지막 절입니다. (왕상 6:38) 열한째 해 불월 곧 여덟째 달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성전 건축이 다 끝났으니 솔로몬이 칠 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였더라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 또 지울 수 없는 불길함이 묻어 나옵니다. (왕상

7:1) 솔로몬은, 자기의 궁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그것을 완공하는 데, 열세 해가 걸렸다. 기능적으로 더 복잡하고 큰 왕궁을 짓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건축물의 인테리어와 자재, 공간 분배 등을 보면 언제나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일종의 철학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의 실내 공간이 정확히 98평입니다. 저희가 이곳에 이사 올 때, 이 예배당을 어떻게 분배할까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약 100평이라는 공간에 들어가야

할 부속 시설은 많기 때문이고,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예배하는 이 공간이 40평가량입니다. 100평 중에서 40평만 예배당을 분배하는 것은 기존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적은 편입니다. 심지어 저희는 그중에 1/4 정도가 무대입니다. 100평 중에 70명을 예배당으로 만들면 200석이 갖춰집니다. 교회 안에 예배당 크기를 좀 줄이고, 다양한 교제와 모임 공간을 구성한 것도, 교회가 단순히 예배를 드리고 가는 곳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사귐이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담긴 것이죠. 예배당은 1,2부 나눠서 사용하면 되니까요. ‘무대’를 만들 때도 공사에 도움을 주시는 장로님과 저와 의견이 달랐습니다. 목사님이 설 곳을 더 위로 하고, 단차를 두어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모두 같은 무대에 악기팀과 싱어팀이 서는 것 자체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예배자일 뿐이라는, 혹은 모두 제사장이라는 저희의 철학을 공간에 담은 것이죠. 그래서 이런 것들을 보면, 보이는 것이 있죠. 우선

7년과 13년이라는 공사 기간의 차이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헌신 되면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쓰는 방법이 달라진다고 했던 것처럼, 시간 자체가 주는 분명한 의미는 있습니다. 공간의 크기도 분명합니다. 건축된 왕궁의 크기가 성전의 2배입니다. 또한 자재도 다릅니다. 성전 건축에는 그냥 ‘돌’이 사용되었다면, 왕궁 건축을 설명하는 구절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왕상 7:10) 그 초석은 귀하고 큰 돌 곧 십 규빗 되는 돌과 여덟 규빗 되는 돌이라 사실

이런 건축학적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 봉헌식의 시기입니다. 성전 건축이 핵심 프로젝트이고, 그것을 7년에 걸쳐 진행하고, 그다음으로 그것에 비하면 중요도가 낮은 왕궁을 건축하고자 하는 데 13년이 걸리는 계획을 짰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여러분은 성전 봉헌식 예배를 언제 드리겠습니까? 솔로몬은 성전 건축 후, 봉헌식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왕궁을 다 지은 후, 왕궁이 완성된 시점에 성전을 봉헌합니다. 이것은 꽤 의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열왕기상은

성전 건축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중간에 솔로몬의 왕궁 이야기를 넣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분명히 성전과 왕궁을 비교하기 위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거할 왕궁을 지은 후, 그것과 똑같은 궁전을 바로의 딸을 위해 짓습니다. 별궁 개념이죠. <묵상과 설교>의 해설에 따르면, 솔로몬은 이 여인 외에도 정략결혼을 통해 여러 이방 공주를 아내로 맞았기에 이들을 위한 궁들도 무수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에서 잊을만하면 나오는 바로의 딸의 존재는,

열방과의 동맹, 이방 여인과의 결혼, 우상숭배로 치닫는 솔로몬의 위태로운 신앙과 국정, 나아가 이스라엘의 분열과 멸망으로 이어지는 전조 증상입니다. 그렇게 솔로몬은 모든 건축을 마친 후, 주님의 언약궤를 옮깁니다. 그리고 ‘성전 봉헌식’을 진행합니다. 8장 12절부터는 솔로몬의 연설이 나옵니다. 20~21절에 보면,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두 번이 생략되어 있지만, 원어나 영어 성경에는 잘 드러나 있습니다. (왕상 8:20)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내가)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내가) 성전을 건축하고 (왕상 8:21)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왕상 8:20) "The LORD has kept the promise he made: I have succeeded

David my father and now I sit on the throne of Israel, just as the LORD promised, and I have built the temple for the Name of the LORD, the God of Israel. (왕상 8:21) I have provided a place there for the ark, in which is the covenant of the LORD that he made with

our fathers when he brought them out of Egypt." 이런 전반적인 표현들은 솔로몬의 성전건축이 분명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이 모든 그의 잘못된 부분을 덮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이 드러내는 이런 경고의 메시지를 잘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사실상 나를 위한 판단과 나를 위한 결정과 어떤 때는 나를 위한 헌신을 할 때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몇 번 언급 드렸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가장 모범적인 ‘종’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말씀을 가장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주셨던 신명기 말씀, 그중에서도 17장에 나오는 ‘왕’으로서 지켜야 할 명령들을 솔로몬은 무시합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왕으로서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 외에도,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는 말씀도

모두 어깁니다. ‘결혼’하면 ‘솔로몬’ 아닙니까? 그런데 솔로몬이 왜 결혼을 많이 했을까요? 솔로몬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외교’와 ‘동맹’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머리가 좋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실제로 그 방법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거기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이 아내 많이 두는 것을 왜 막으셨을까요?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모세에게 주신 규정에도 결혼이 금지된 이방 민족이

있는데, 솔로몬의 여자들에 그 민족이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은 필연적으로 우상숭배를 가져올 것을 아셨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솔로몬의 후궁이 1,000명입니다. 어떻게 케어할 것입니까? 그렇다고 고향을 떠나서 외롭게 있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 그녀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준 것이 이방 신전을 지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영향을 안 받겠습니까? (왕상 11:4) 솔로몬이 늙으니, 그 아내들이 솔로몬을 꾀어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의 주 하나님께 그의 아버지 다윗만큼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왕상 11:5)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우상 밀곰을 따라가서, (왕상 11:6) 주님 앞에서 악행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 다윗은 주님께 충성을 다하였으나, 솔로몬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왕상 11:7)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에 모압의 혐오스러운 우상 그모스를 섬기는 산당을 짓고, 암몬 자손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렉을 섬기는 산당도 지었는데, (왕상

11:8) 그는 그의 외국인 아내들이 하자는 대로,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며, 제사를 지냈다. 결국 솔로몬의 선택은 정치적으로는 유익이 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자신까지 망치는 결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에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은금은 어떤가요?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했는데, 솔로몬은 막대한 양의 은금을 수집했습니다. (왕상 10:23) 솔로몬 왕은 재산에 있어서나, 지혜에 있어서나, 이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훨씬 뛰어났다. (왕상

10:24) 그래서 온 세계 사람은 모두, 솔로몬을 직접 만나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넣어 주신 지혜의 말을 들으려고 하였다. (왕상 10:25) 그래서 그들은 각각 은그릇과 금그릇과 옷과 갑옷과 향료와 말과 노새를 예물로 가지고 왔는데, 해마다 이런 사람의 방문이 그치지 않았다. (왕상 10:27) 왕 덕분에 예루살렘에는 은이 돌처럼 흔하였고, 백향목은 세펠라 평원지대의 뽕나무만큼이나 많았다. 말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번 했지만, 특별히 신명기 17장에서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어떠했나요? (왕상 10:28) 솔로몬은 말을 이집트와 구에로부터 수입하였는데, 왕실 무역상을 시켜서, 구에에서 사들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솔로몬에게 있어서 말씀은 말씀일 뿐, 말씀이 그의 삶에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런데 말씀은 아무리 '아멘' 하며 들어도, 결국 삶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솔로몬 통치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가 당대 이상의 것을 바라볼 수 없는 ‘미래 없는 정치’를 펼쳤다는 것입니다. 좋은 리더는 자기 때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좋은 교회는 현재를 위해 모든 것을 짜내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지속 가능한 가치가 이어지길 꿈꾸게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통치는 현재만 바라보는 방식, 자신만 바라보는 방식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YOLO와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주어진 시대를 마음껏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누린 강력한 왕권을 이용하여 수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그 일을 해나가는 동안 수많은 백성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누적된 불만이 솔로몬의 통치가 끝난 후 터져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평화’입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평화의 왕’이라고 이름 붙은 솔로몬의 언약적 지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평화와 예수님의 평화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솔로몬의 평화는 마치 로마의 평화와 유사합니다. ‘팍스 로마나’라는 구호처럼, 로마가 가진 강력한 제국의 힘, 그 정점에 있는 로마의 황제로부터 발휘되는 힘 앞에서 모두가 공평하기에 나타나는 ‘힘으로 세운 평화’였습니다. 피라미드식 평화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솔로몬 시대의 평화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의 강력한 왕권에 의한, 왕권을 위한 평화였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오랜 노역으로 백성은 고생했고, 가뜩이나 부자인 그는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샬롬은 그 반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이 아니라 빈들에 계셨고, 그는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는 빈 들에서 오병이어로 육신의 허기도 달래주셨지만, 무엇보다 그가 진짜 채워주고 싶으셨던 것은 영적인 허기,

생명을 잃어버린 그 공허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셨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모두에게 가장 가치 있는 생명을 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과 솔로몬이 걸었던 길의 구분점입니다. 솔로몬은 피라미드 세계를 세운 왕이었고, 예수님은 거꾸로 된 역피라미드 나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힘이 센 자가 더 섬기는 나라. 더 성숙한 자가 더 섬기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결국 이스라엘 실패의 역사를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어진 ‘왕정 시스템’에서 찾고 있는 것이고, 그 왕정을 멋모르고 원했던 백성들의 무지에서 찾고 있는 것이며, 결국 그 잘못된 왕정 시스템 붕괴의 시작점으로 ‘솔로몬’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목해볼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런 솔로몬에 대한 열왕기상의 고발이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담겨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왕상 10:14) 해마다 솔로몬에게 들어오는 금은, 그 무게가 육백육십육 달란트였다. 솔로몬이

세금으로 걷어간 금의 액수는 666달란트라는 것이죠. 이 숫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숫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적대세력을 의미하는 숫자이죠. 숫자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을 ‘게마트리아’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666은 하나님의 영적 대적자 ‘사탄’을 의미하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의 황제 ‘네로’를 의미하는 표현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숫자가 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곳은 솔로몬에 대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거둔 세금 666달란트. 하나님의

나라를 제국의 피라미드 세계처럼 만들고, 그 위에 앉은 솔로몬은 과연 성공의 모델일까요? 저는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결코 하나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것 안으로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낮추어 머무십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도 머물 수 없는 성전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하고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찬 솔로몬의 마음 성전입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무너진 성전입니다. 건물 성전은 중요해 보이지만, 성경 전체를 볼 때, 그것은 모형에 가깝습니다. 결국 성경에 나오는 성전의 최종판은 우리를 성전 삼아 거하시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건물 성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성전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 자체에 임하시어, 우리를 성전 삼는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 거하든 주님을

예배하는 참된 성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서를 통해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으며 설교를 마칩니다. “여러분의 성전은 안전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