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보통 사람" / 강정규 목사

2023-10-15 · 열왕기상 16-1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열왕기상 6번째 설교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해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복을 누릴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남유다의 왕인 르호보암 – 아비얌 – 아사, 북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 – 나답 – 바아사 – 엘라 – 시므리 – 오므리 등이 바로 그 왕들입니다. 과연 이들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모신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중심인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될 것인가 열왕기서는 그들의 삶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남유다는 ‘아사’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솔로몬 - 르호보암 – 아비얌에 걸쳐 행해진 ‘우상숭배’를 벗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받잖아요. 그런데 아사가 3대에 걸쳐 우상숭배를 해온 집안에서 다른 길을 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죠. 특히 그의 아버지 아비얌이 등극 3년 만에 죽었기에 어린 나이에 아사가 왕에 올랐고, 실질적으로는 그의 할머니인 ‘마아가’가 섭정으로 대리 통치를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 아사가 통치할 때, 태후의 지위에 있던 ‘마아가’가 우상인 ‘아세라’ 신상을 만들자, 할머니의 태후 지휘를 박탈하고 아세라 상을 불태워버립니다. 아사가 아주 강도 높은 개혁을 했다는 것이죠. 반발과 저항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나아갑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부터 시작하여 다윗의 길을 간 왕이 한 명도 없었고, 여로보암의 잘못된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의 왕조는 계속된 배신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됩니다. 6번째 왕인 오므리가 이미 4번째 왕조이며, 그 사이에 3대를 통치한 왕이 없었습니다. 왕이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기도 합니다. 왕권의 불안정함이 극에 달합니다. 사람이 힘으로 왕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왕권을 지켜주시는 것도 하나님입니다. 목사로서 한 교회 공동체를 대표한다는 것도 버겁고 무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왕은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자리입니다. 왕관의 무게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왕을 돕고자 하셨어요. 다윗에게 함께한 것처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의 왕 대부분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보다는 자신이 왕이 되는 길을 택합니다. 분열왕국 47년째에 북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 오므리는 성경 밖에서도 유명합니다. ‘메샤 비문’에는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한 내용이 적혀있고, 앗수르 문헌에서 이스라엘 땅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불렀던 기록도 있습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고 정치적으로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때,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깁니다. 오므리는 그럼 좋은 왕이었는가? 성경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왕상16:25) 오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의 악한 정도는 그의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였다. 이 오므리에 이어 왕이 된 인물이 우리에게 더 유명한 ‘아합’입니다. 그리고 이 아합에 대한 평가는 그의 아버지 오므리를 경신합니다. (왕상 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그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왕상 16:31)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앞질렀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서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였다. (왕상 16:32) 또 그는 사마리아에 세운 바알의 신전에다가 바알을 섬기는 제단을 세우고, (왕상 16:33) 아세라 목상도 만들어 세웠다. 그래서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다. 우리는 이 평가에서 ‘주님께서 보시기에’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므리도 세상에서는 이름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아니었습니다. 이게 엇갈릴 수 있다고요. 여러분은 어떤 평가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만약 누군가 저에게 와서 “목사님, 이렇게 이렇게 하면 교회가 더 잘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잘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좋은 방향인가? 아니면 세상의 기준에 따른 것인가? 우리는

그 두 가지 평가가 상반될 수 있음도 잘 알아야 합니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아합은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며 더 큰 악을 길로 갑니다. 이렇듯 누구를 만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잘 만나는 것도 큰 복입니다. 성도를 잘 만나는 것도 복입니다. 좋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지혜입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시돈의 공주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바알신앙의 본거지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엣바알’은 이름 자체가 바알 숭배자입니다. 마치 ‘엘리야’의 뜻이 ‘야웨가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인 것처럼요. 아합은 그의 아내 이세벨의 요청에 따라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당을 세웁니다. 아세라 목상도 만듭니다. 이세벨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에는 본격적으로 바알신앙이 전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비주류와 음지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예 이것이 공적인 신앙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면, 이제 아합에 의해 사마리아에는 바알의 신전이 세워집니다. 또한 아합의 악행 가운데 하나는 무너진 여리고성을 건축한 일입니다.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 무너졌죠. 그때 하나님은 여리고성 재건을 금지하셨는데, 아합은 이를 무시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합의 명을 받아 건축을 담당한 히엘의 집이 저주를 받습니다. 아합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정치적 권력에 있었습니다. 나라가 어디로 가든,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믿든,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시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예언자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 때, 모든 예언자를 대표하여 나타난 인물이 아닙니까? 그가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이유는 그가 예언자들을 양육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의 제자 엘리사이죠. 제가 예레미야 설교를 하면서 예언자에 대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예언자(나비)는 그 뜻이 ‘지명하다, 부르다’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맡기어 전달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언(豫言 : 미리 예, 말씀 언)으로 미래의 것을 예측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預言 : 맡길 예, 말씀 언)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시지 않은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래의 것을 말하게 하시면 할 수도 있죠. 그러나 단순히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말하고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대언하여 전하는

자입니다. 예언자라고 하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전반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로 보내십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왜 비일까요? 왜냐하면 농경사회에서 ‘비’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꼭 필요한

것이지만, 억지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바알신앙이 유행했는가? 바로 가나안 지역에서 바알은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알이 비를 내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바알을 믿으면 돈이 잘 들어온다, 원하는 것이 이뤄진다,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서 가뭄을 예고한 것입니다. 누가 처음에는 관심이나 가졌겠습니까? 어차피 비는 ‘바알’에게 달린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관심 밖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비가 오지 않으면, ‘엘리야의 말’에 따라서 비가 온다고 했으니, 아합이 엘리야를 찾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 후 엘리야를 숨기십니다. (왕상 17: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왕상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다. 이것이 예언자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죠.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동쪽 그릿 시냇가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 그릿

시냇가에서의 경험은 엘리야에게도 ‘시험’이기도 하고 ‘훈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품고 그렇게 살아갈 사람을 찾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아합의 시대에서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가뭄’에 대해 예언하는 정도의 사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세요.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에는 더욱 굳건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엘리야에게도 성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신

후, 훈련하는 과정이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 때로는 하나님을 떠난 시대의 흐름에 과감하게 역행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분별하십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 삶의 모습도 하나님이 그렇게 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도 보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은 ‘훈련’입니다. 순종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살지?” 바로 그 사람도 처음에는 그렇게 못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며 살다 보니까, 그런 일에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은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부르셔서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이 돌보심을 믿는 것입니다. (왕상 17:3) "이 곳을 떠나서, 동쪽으로 가거라. 그리고 거기 요단 강 동쪽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지내며, (왕상 17:4) 그 시냇물을 마셔라. 내가 까마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게 하겠다." (왕상 17:5)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가서, 그대로 하였다. 그는 곧 가서, 요단 강 앞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머물렀다. 여러분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마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곳은 알지도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먹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냥 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엘리야처럼 ‘그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무모하게 따르는 힘도 생기는 것입니다. 저도 조금 편한 목회의 길을 거부하고 이런 시대에 개척했으니, 무모함도 분명히 있었죠. 그런데 저에게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들이 삶에 참 많았습니다. 제 삶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께 내 삶을 거는 것은 결코 무모하지 않다는 믿음을 갖는 일들이 많았어요. 보통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제 모교회 청소년부 수련회 4개 교회 연합으로 잡혔어요. 그래서 군대에 있지만,

그 수련회에 맞춰 휴가를 가서 교사로 섬기려고 다 계획을 했습니다. 아주 신실한 교사였죠? 마침 쓸 수 있는 휴가가 있어서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중대장님에게 ‘컷’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포상을 제법 받아서 휴가를 많이 나간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부대에 한 번에 휴가 나갈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는데, 제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정사정해도 중대장님이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뭐 방법이 있나요? 제가

가는 것으로 미리 다 정해져서 역할을 맡기로 했는데, 제가 못 나간다고 하니 교인들도 상실감이 있었죠. 저도 너무너무 가고 싶었고요. 그래서 기도했죠. 뭐 방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더 상급 부대에서 하는 평가가 있는데, 거기에 저희 중대의 소대 하나가 대표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 준비하느라 그 소대는 휴가를 다 연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수련회 가려고 했던 그 주간에 휴가를 신청했던 사람 3명이 그 소대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휴가를 신청할 수 있게 되었고, 바로 달려가서 휴가를 신청했더니, 중대장님도 참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승인을 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수련회에 교사로 참석했을 때, 만났던 학생이 ‘다영’ 자매였습니다. 쌍둥이 자매가 제가 담당한 조의 조장이었거든요. 그게 인연이 되어서 그 뒤로 관계를 맺고, 지금 이렇게 교회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수련회에 휴가를 써서 그냥 나갔다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안고 나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일에는 한계가 없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무모해 보여도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선택할 용기와 믿음이 생기는 것이죠. 엘리야도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원래 까마귀는 레위기 11장에 근거하면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러니 까마귀를 통해서 먹인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왕상 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물은 그 곳 시냇물을 마셨다. 그래서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까마귀로 먹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로 먹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는 땅의 소출로 먹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공급 방법이죠. 그러나 엘리야가 그 땅에서 떠나서 있을 때는 다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이나 우리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그럼,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는 어떤 것을 배우고

있었을까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훈련,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하나님과 자신과만 아는 사귐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삶에도 ‘그릿 시냇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골방’이죠. (마 6:6a)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우리의 삶에 그릿 시냇가가 필요하고, 우리의 일상에 골방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에만 초점을 두면 하나님을 종종 잊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회의 모임을 시작할 때마다 찬양을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양을 준비의 시간으로 시간 떼우려고 하면 의미가 없고, 그것에 마음을 담아서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 찬양을 하면서, 업무와 사역에 빠지곤 하는 저의 초점을 다시 하나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초점을 잡아주는 그릿 시냇가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과의 은밀한 여러분의 시간과 장소를 만드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자라가는 토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훈련하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훈련은 그다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가 끝이 아니죠. 때가 되었기에 또 떠나라 하십니다. (왕상 17:8)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왕상 17:9)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앞서 시돈 땅이 바알 숭배의 본거지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곳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허를 찌르는 명령입니다. 풍요의 신 바알의 땅은 어땠을까요? 그곳에도 가뭄과 기근이 심했으며, 그가 만난 사람은 당장 먹을 것을 고민하는 한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여인을 통해 엘리야를 먹이려 하십니다. 까마귀나 시돈의 이방 여인이나 ‘부정’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고, 더 나아가 ‘먹을 것’도 달라고 합니다. 아마도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예언자임을 밝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17:12) 그 여인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왕상

17:13)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왕상 17:14)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참,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도 때로는 고약합니다. 말 그대로

벼룩의 간을 내어 먹는 상황입니다. 이 여인이 죽기 직전에 한끼를 먹으려고 하는데, 그것을 먼저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말하다니요. 이것은 반대로 이 여인이 마주한 순종의 훈련입니다. 어쩌면 이 여인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죽기 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이 사람을 대접하는 선행을 하려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여인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엘리야의

말대로 행합니다. 그 결과 엘리야가 말한 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공급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까지일까요? 아닙니다. 그 와중에 이 여인의 아들이 위독하더니 죽게 됩니다. 나이는 모르지만 품에 안을 정도의 어린 나이의 아들로 보입니다. 궁핍을 해결하여 잠시 여유를 얻었던 여인의 삶에 더 큰 시련, 어쩌면 전부를 잃는 것 같은 위기가 옵니다. 이것이 인생이죠. 이 상황은 이 여인에게 ‘바알의 저주’라고 해석될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를 집으로 불러들인 결과, 자신의 아이가 죽게 되었다고 해석할만한 상황이죠. 실제로 이 여인이 이 사건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왕상 17:18) 그러자 그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이신 어른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저에게 오셔서, 저의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그러나 이 위기는 반대로 또 기회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양식의 공급자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이 난처한 상황 앞에서 엘리야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엘리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기도’ 뿐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보통의 사람입니다. 보통의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와 찬양은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의 하나님께 다가서는 통로입니다. (왕상 17:20)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집의 과부에게 이렇게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왕상 17:21) 그는 그 아이의 몸 위에 세 번이나 엎드려서, 몸과 몸을 맞춘 다음, 주님께 또 부르짖었다. “주 나의 하나님, 제발 이 아이의 호흡이 되돌아오게 하여 주십시오!” (왕상 17:22) 주님께서 엘리야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의 호흡을 되돌아오게 하여 주셔서, 그 아이가 살아났다. 이 일은 성경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첫 번째 사건이 됩니다. 바알의 심장부 시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적진에서의 승리이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을 통해 여인에게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셨지만, 동시에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런 표현을 종종 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일에 대한 첫 번째 증인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자이고 내가 증인입니다.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부터 사르밧까지의 일로 이끄시는 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본격적인 사역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후반전 엘리야의 가뭄 예언 사건으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하나님은 그동안 순종의 훈련을 통과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십니다. (왕상 18:1) 많은 날이 흘러서, 삼 년이 되던 해에,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아합을 만나거라. 내가 땅 위에 비를 내리겠다." 어쩌면 그 시기가 얼마나 될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처음에 예언은 ‘수년’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엘리야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담대한 마음을 품고 아합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왕상 18:17)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요?” (왕상 18:18)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아버지의 가문이 괴롭히는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내버리고, 바알을 섬기십니다.” 엘리야와 아합이 드디어

마주합니다. 여기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두 관점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합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엘리야가 바알을 분노케 해서 이 땅에 가뭄이 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비를 주관하는 신이 바알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심판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죠. 같은 상황을 보고 이렇게 이해와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바알 신앙의 프레임에서 보기에 하나님의 심판조차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비를 내리는 신인지 입증하는 영적 대결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녹을 얻어먹는 바알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즉,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있었다면, 우상을 섬기는 예언자들은 왕궁에서 대접을 잘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대결을 살펴보면 아세라 예언자 이야기는 없기에, 아마도 갈멜산 영적 전투에는 바알 선지자 450명이 왔던

것 같습니다. 갈멜산 자체가 바알의 산당이 즐비한 바알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돈에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적의 중심지에 엘리야가 서게 된 것입니다. 바알이 거짓 신임을 증명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왕상 18:21) 그러자 엘리야가 그 모든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엘리야가 대결에 앞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아합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양다리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는 신앙. 그런 신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간음입니다. 엘리야가 돌이키게 하고 싶었던 것은 바알이라는 우상에 빠진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대결에 앞서 백성들의 마음에 강력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대결 방법은 제단을 준비하고, 제물을 바치되, 불은

각자의 신이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판결은 백성들의 몫입니다. 먼저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이 바알에게 기도를 합니다. 오전부터 저녁 시간까지 내내 기도하지만, 어떠한 반응도 없습니다. 뒤이어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가져와 제단을 쌓습니다.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죠. 그리고 도랑을 파고 도랑과 제물에도 물을 흠뻑 부은 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저는 주의 종이며,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지금 이 순간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 제게 응답해 주십시오. 제게 응답하셔서, 주는 참 하나님이시며 이들에게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 이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불로써 응답하십니다. 제물과 장작을 다 태우고 그 불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도랑의 물까지 다 말려 버립니다. 이 대결을 주변에서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온 백성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모두 외칩니다.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엘리야가 외칩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십시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가뭄을 해결하는 비가 내릴 차례입니다. 방법은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왕상 18:42b)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 (왕상 18: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그 시종은 마침내, 사람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부터 떠올라 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어서 병거를 갖추고 내려가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였다. (왕상 18:45a) 그러는 동안에 이미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캄캄해지고, 바람이 일더니, 곧 큰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는 것은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엘리야는 보통 사람이었어요. 다만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도’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누린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위대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영적 준비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통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 안에 나타나기를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엘리야는 승리를 경험하고, 아합은 기가 죽게 됩니다. 완벽한 승리죠.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를 절망시키는 일이 발생합니다. 악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아합과 이세벨의 반격은 다음 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7장과 18장은 ‘비’로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17장은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고, 18장은 이제 비를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비는 농경사회의 생명과 같아서 ‘비’를 내리는 신이라면, 내게 ‘비’만 내려준다면 누구든 섬기겠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비’만 내려준다면 누구에게나 마음을 주는 그런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비가 오든지 안 오든지. 그분을 향한 신뢰를 가지며 말입니다. 우리도 내 삶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면, 그것이 어떤 종교든지, 어떤 신이든지, 무슨 방법이든지 취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발휘해서 나아가야 하는 길로 부르기도 하십니다. 그 길에 그릿 시냇가와 같은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도 있고, 사르밧과 같은 우연한 만남도 있으며, 갈멜산과 같은 영적 대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보다시피 하나님은 그 모든 곳에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뚫어내길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원하십니다. 같은 상황과 같은 시대를 산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합은 그 가뭄을 해결하려고 바알을 더욱 의지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붙잡고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 엘리야, 또 사르밧 과부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특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특별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우리의 삶은 늘 선택입니다. 어쩌면 날마다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여호수아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택하는 것은 언제나 옳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머뭇거리지 않고, 여호와만을 택하기를 다시 한번 다짐하며 여러분에게 주어진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갈멜산에서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믿음의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함께 그분을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