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7번째 설교이며, 열왕기상 마지막 설교입니다. 다음 주에는 어린이부 주관예배 설교와 청소년부 뮤지컬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 사이의 영적 대결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먼저 17장에서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엘리야는 3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성장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릿 시냇가와 시돈 땅 사르밧에서의 경험이 그것이었죠.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엘리야가 아합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합은 비가 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결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엘리야가 바알을 분노케 해서 가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상황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 탓이라고 말하며, 여전히 바알을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 속에 깨닫게 하시는 Stop 싸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잘못된 오해 속에 빠져서 나아갈 수도 있음을 이 말씀 앞에서 깨달아야 하겠죠. 내 삶에서 마주하는 상황과 사건 속에서 혹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고 깨우쳐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멈춰서서 질문해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펼쳐진 영적 대결, 즉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중에서 누가 참된 신인가? 이 대결은 단순한 종교인들의 대결이 아니라, 왕과 백성이 함께 참여하는 매우 중요한 대결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대결에 앞서서 여호와 하나님도 믿고 바알도 믿으며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 대결의 결과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드디어 비가 내립니다. 이 일로 엘리야는 엄청난 영적 승리를 경험하고, 아합은 완전히 기가 죽게 됩니다. 완벽한 승리죠. 그런데, 19장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갑니다. 아합은 이 일로 기가 죽었지만, 이세벨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상 19:1)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왕상 19:2)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여러분, 이 편지를 받은 엘리야의 태도는 ‘무너짐’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호랑이나 사자처럼 바알의 선지자들과 450대 1로 싸우던 엘리야가 이 편지를 받은 후 느낀 감정은 ‘두려움’과 ‘절망’입니다. (왕상 19:3a)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여러분,
이런 엘리야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좀 이해가 됩니다. 정말 어떤 목표를 위해 씨름하고 훈련하고 준비해서, 드디어 갈멜산에서 이기고, 비도 오게 하는 그 예언자로서의 맡겨진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국 돌아오는 것이 ‘같은 현실’일 때, 우리는 한순간에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바뀌는구나.” 그냥 처음부터 아무것도 못했더라면 소망도 없는데, 막 뭔가를 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면서 드디어 이제
뭔가를 이뤄낼 것 같은 소망을 품습니다. 아합도 엘리야의 승리 앞에서 무너졌으니까요. 바알 선지자들도 모두 죽였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세상이 하나도 안 바뀌고 더욱 거세게 나를 위협해요. 소망한 만큼, 기대한 만큼, 좌절도 크게 오는 것입니다. 뭔가 이뤘다고 생각하지만, 넘어섰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나를 엄습해 올 때, 우리는 끝없는 그 싸움 앞에서 영적으로 탈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완전히 탈진한 엘리야, 그리고 여전히 기세등등한 아합.
이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를 각기 살펴보겠습니다. 1. 엘리야 : 위로하시는 하나님 엘리야에게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이것이 갈멜산 사건 직후 벌어진 충격적인 일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이스르엘을 떠나 약 150km 떨어진 유다 남단의 브엘세바까지 갑니다. 동행하던 사환을 그곳에 남겨두고는 혼자서 남서쪽 광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갑니다.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가 사막 길을 걸어가다가 로뎀나무 아래에 이르러 그 그늘에서 쓰러집니다. 그러면서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 이만하면 됐습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이러며 쓰러져 잠이 든 것입니다. 깊은 자괴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 자신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다는 열등감. 이것이 우울증의 모습이에요. 엘리야와 우울증은 선뜻 연결되지 않을 것 같지만, 이것이
또 사람의 모습입니다. 엘리야는 보통 사람이니까요. 사람이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면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우울증’이 생긴다고 현대 의학자들은 말합니다. 일종의 탈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이런 것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극심한 긴장 속에서 계속 사역하다 보면 이런 탈진 증상을 경험할 때가 있지요. 여러분에게도 이런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교회에서도 사역하다가 ‘번 아웃’ 된다고 하죠. 말 그대로 다 타버린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다가 더 이상 뚫고 나갈 힘이 없는 순간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 순간, 그 무기력함 앞에 너무 놀라거나, 스스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인간이기에 누구에게나 내가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은 찾아오는 법입니다. 엘리야도 그랬는걸요. 차라리 신앙을 부여잡고 힘써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해줄 말이 있겠죠. 뭔가를 걸고 부딪혀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엘리야와 같이 힘겨운 신앙의 여정을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며 살아보고자 노력했던 성도들이 마주하는 어려움
앞에서는 해줄 말이 많지 않습니다. 누가 지금 엘리야에게 더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하겠어요. 갈멜산에서 그 대결을 펼쳐서 우상을 섬기는 예언자들을 다 죽였는데도 세상이 안 변하는데... 그런데 엘리야의 이 지침과 무기력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회복시키는지 봅시다. 우리가 말씀에서 길을 찾으라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상 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 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엘리야는 잠이 들어있습니다. 잠만 자려 하는 모습도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또 어떤 시점에 이르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잠만 자려 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엘리야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지금 그의
지친 모습에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실망하셨을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엘리야, 너 그것밖에 안 돼? 너 나 못 믿니? 이게 무슨 초신자 같은 모습이야, 너 선지자 맞아?”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때로는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잘 쉬는 것이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필요할 때 그것을 주시고, 우리에게 쉼이 필요할 때 그 쉼을 허락하십니다. 천사를 통해 그를 어루만지고
먹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자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고 싶은 것은 전인적인 위로입니다. 일어날 수 있도록 먹이시고, 쉬게 하고, 위로합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어루만지십니다. (왕상 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왕상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이번에 천사를 보내어
하시는 말씀은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입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다가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남유다의 끝자락인 브엘세바에 와 있는데, 주님은 호렙산이라고 불리는 시내산으로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멈춰 서서 쉬어야 하지만, 또 다시 때가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으로 육체적인 힘을 얻은 엘리야는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에 찾아온
위기, 탈진, 절망. 그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엘리야에게는 천사를 보내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교회 공동체가 이 세상 가운데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하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주님의 천사 삼아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붙들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위로받은 신앙인이 기운을 차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드디어 호렙산(시내산)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말을 거십니다. (왕상 19:9) 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왕상 19: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물으셨고, 그는 참고 참아왔던 자신의 속내를 주님께 꺼내어 놓습니다. 엘리야는 본인이 여호와께 열성을 다했으나 목숨이 위태로운 채로 혼자 남았다면서 허탈감과 외로움과 두려운 심경을 토로합니다.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헌신과 열정으로 이제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자신은 승리한 삶을 살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자신은 목숨마저 위태롭습니다. 그의 한탄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결과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기대한 것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이 뒤섞여 있습니다. 엘리야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토록 없는지, 자기 혼자 이 어려움을 짊어지고 가고 있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영적 교만함과 영적 외로움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그의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남들은 안 하는 것을
자신이 했다는 마음에서 그것은 교만함이 찾아온 것일 수도 있고, 자기 혼자 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찾아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제 굴에서 나가 그 앞에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상 19:11)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왕상
19:12)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현상들이죠. 구약에서 대부분 하나님의 임재는 지진과 불 가운데 계시하셨습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마주했던 것처럼 그런 강렬한 하나님의 일하심,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진짜 엘리야에게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불이 지나간 이후에, 부드럽고 고요한 속삭임이었어요. 이 또한 사명을 고취하려는 주님의 마음보다는 엘리야를 토닥이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주님이 엘리야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줄이면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나는 너를 통해 계속 나의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너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지쳐 쓰러질 수 있지만, 네가 나를 버리지 않고, 네가
내 사명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너와 함께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시 알게 하십니다.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세우고,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엘리야가 낙담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계속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이 강한 악으로 대항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엘리야의 사역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과정에 있으며,
이제 다시금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엘리야에게 주시며 그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엘리야와 같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그 신상 입 맞추지 않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7,000명의 남은 자들이 있음도 깨닫게 하십니다. 여기서 남겨진 7,000명에 관한 이야기의 초점은 남겨진 ‘수’가 아니라 남긴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왕상 19:18)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7천이란 수는 상징적인 수로 남겨진 무리를 총칭할 것입니다. 이 약속은 홀로 남겨진 것 같아 외롭고 괴로워하는 엘리야를 향한 실제적인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 실제로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엘리사를 예언자로 세웁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어 사명 앞으로 나아갑니다. 누구나 엘리야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 연약함을 붙드시며, 우리에게 힘주시어 우리를 말씀으로 회복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지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지치는 법이 없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아합 :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20~22장까지는 아합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히려 이 부분에는 엘리야가 등장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열왕기서는 왕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20장은 북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의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발발하자 하나님은 무명의 예언자 한 사람을 아합에게 보내십니다. 바로 이 사람이 엘리야에게 약속한 하나님이 쓰시는 남은 자의 모습이죠. (왕상 20:13)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왕상 20:14)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하나님은 아합과 이세벨의 그 악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십니다. 아합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주심으로 순종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는 ‘큰 무리’입니다. 객관적 전력으로 보자면 아람이 이스라엘을 이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호와의 여호와 되심을 드러내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매우 불리한 이 전쟁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승리케 하는 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지키는 신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합 왕이 직접 전쟁을 진두지휘해야 하며, 군사는 전쟁을 잘하는 경험 많은 용사들이 아니라,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구성하라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이 주도하는 전쟁 ‘Holy war’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때도 드러났지만, 이 전쟁의 승패는 순종하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입니다. 과연 아합은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합이 순종합니다. (왕상 20:21)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왕은, 첫 싸움에서 많은 말과 병거를 격파하고, 시리아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두 번째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은 예언자를 아합에게 보내어 다시 아람이 침략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아람은 여호와 하나님도 당대의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이해했고, 산이 아니라 골짜기와 평지에서 싸우면 자신들이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전략을 세웁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하나님의 예언자가 다시 아합을 찾아가 여호와의 뜻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아람 군대에게 ‘산의 신’이 아니라 ‘전능자’임을 평지에서 승리함으로 증명하십니다. 결국 아합에게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에는 언제나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는 못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인 되실 때, 내 삶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믿는 믿음. 문제는 이 전쟁의 승리
다음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하여서 성안의 골방에 숨는 신세가 됩니다. 그때 그의 신하들이 조언합니다. “아합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을 구걸해보셔야 합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믿는다면, 전쟁 후에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주권자가 되어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 주셨지만, 아합이 왕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은 그곳에 함께하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은 ‘왕좌의 게임’입니다. 내 안에서 왕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내 삶의 운전석은 하나뿐이라는 것이죠. 신앙이란 하나님이 중심된 삶을 인정하고 믿고 진짜로 따르기 위해 철저하게 나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이것이 너무 흐릿하고 어렵고 모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 고민하고 물으며, 주님이 주시는 마음대로 행하다 보면, 주님이 움직이시는 내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합은 전쟁의 위기 앞에서 운전대를 내려놓았지만, 위기를 벗어나자 다시 자기가 운전대를 잡습니다. 아합은 다시 하나님 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20장 후반부에 나오는 예언자 두 사람의 상징적 행동은 아합이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아합의 잘못을 들추는 것입니다. 제가 때로는 ‘죄책감’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사인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합은 이때라도 돌이켜야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길을 택합니다. 이어지는 21장의 이야기는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또 다른 고발입니다. 아합이 나봇이라는 인물의 포도원이 비옥해 보여 자신에게 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율법에 근거하여 조상의 땅을 왕에게 팔지 않습니다. 율법에는 땅은 하나님이 분배해주신 것으로 팔 수 없도록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갖고 싶은 것을 못 갖는 것에
대한 심통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이세벨은 아합의 소심함을 질책하고 자신이 처리해주겠다고 나섭니다. 비교적 소심한 아합의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녀는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 내용은 거짓으로 증인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모함해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봇이 죽고 아합이 주인 없는 포도원을 차지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이는 엘리야가 다시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사명의
자리로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 (왕상 21:20)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이렇게 말하였다. "내 원수야, 네가 또 나를 찾아왔느냐?" 그러자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목숨을 팔아 가면서까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만 하십니다. (왕상 21:21) ‘내가 너에게 재앙을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너 아합 가문에 속한 남자는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씨도 남기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없애 버리겠다.’ 아합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예언자는 ‘원수’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 선언 앞에서 아합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놀랍게도 아합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합니다.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두르고, 금식하고, 겸비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진짜일 정도로 그는 회개합니다. 저는 이쯤 되니, 아합이라는 인물의 속내가 참 궁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를 받아주십니다. 아합의
시대에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2장에서는 다시 아람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3년간 전쟁 없는 시대를 보내고 있었는데, 아합이 길르앗 라못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에 남유다까지 참전시켜서 연합군을 만드는 것이죠. 이때 유다의 왕인 여호사밧은 칭찬받는 8명의 왕 중 하나입니다. 그는 이 전쟁의 참여가 하나님의 뜻인지 묻자고 요청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전쟁에 나서려는 아합과 대조적이죠. 바로 앞장에서 아합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재앙을 면했습니다. 하지만 시각이 지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되자, 다시 예전의 악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여호사밧의 요청에 아합이 모은 것은 거짓 선지자 400명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왕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하면서 녹을 먹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어쩌면 갈멜산에 오지 않았던 아세라 선지자들일지도 모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합한 한 명의 선지자가 등장하는데 ‘미가야’입니다. 미가야의 등장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아합의 입장에서는 미가야도 마치 엘리야처럼 아합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아합이 싫어하는 이야기만 하는 나쁜 선지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합은 그를 부르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송구영신의 말씀 뽑기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거기에는 좋은 취지도 분명히 있으나, 반작용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거기에는 늘 좋은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의도와 벗어나게 사용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마치 그것을 운세처럼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입맛대로 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미가야를 불러오기를 요청합니다. 미가야는 400명의 선지자와 달리, 왕이 듣기에 좋은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왕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도 가감 없이 전하는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아합이 이 전쟁에서 죽게 되리라 예언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미가야가 늘 그렇듯 자신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자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합은 자신이 하는 일에 동조해주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미가야는 옥에 가둬 버립니다. 아합은 그리고 출전을 감행합니다. 하나님은 미가야를 통해서도 아합이 돌이키도록 말씀하여 주셨지만, 아합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미가야의 예언 때문에 느낀 불길함인지, 그는 변장을 하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남유다의 여호사밧만 왕의 복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전쟁에 참여한 아람의 전략은 오직 아합만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사밧을 보고, 이스라엘 왕이라고 확신하며 그에게 달려듭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왕상 22:32) 병거대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더니 "저 자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하며, 그와 싸우려고 달려들었다. 여호사밧이 기겁을 하여서 소리치니, (왕상 22:33) 병거대 지휘관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알고서, 그를 추적하기를 그만두고 돌아섰다. 여기서 ‘소리치다’에 사용된 동사 ‘자아크’는 일반적으로 위험이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여호와께 도움을 요청할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여호사밧이 위험 속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 순간 아람의 군사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돌아섭니다. 이 본문에 대하여 역대하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대하 18:31) 병거대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저 자가 이스라엘 왕이다" 하며, 그와 싸우려고 달려들었다. 여호사밧이 기겁을 하여 소리를 쳤다. 주님께서 그를 도우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에게서 떠나가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지대로 나아간 전쟁의 상황.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호사밧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그럼, 반대로 자기 뜻대로 전쟁에 나가면서도 왕의 복장을 하지 않은 꼼수를 쓴 아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상 22:34) 그런데 군인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긴 것이 이스라엘 왕에게 명중하였다. 화살이 갑옷 가슴막이 이음새 사이를 뚫고 들어간 것이다. 왕은 자기의 병거를 모는 부하에게 말하였다. “병거를 돌려서,
이 싸움터에서 빠져 나가자. 내가 부상을 입었다.” (왕상 22:35) 그러나 특히 그 날은 싸움이 격렬하였으므로, 왕은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시리아 군대를 막다가 저녁 때가 되어 죽었는데, 그의 병거 안에는 왕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이 일에 대하여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의도하지 않은 그 화살이 갑옷의 이음새를 뚫고 아합을 쓰러뜨립니다. 자신은 왕복을
입지 않는 꼼수로 어쩌면 유다 왕 여호사밧을 미끼 삼아 전쟁에 나가지만, 그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빨리 전쟁터를 나와 치료했다면 살 수 있겠으나, 누가 억지로 막은 것도 아니었으나, 치열한 전쟁 탓에 그는 결국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아합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셨는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합의 모습은 심판받기에 충분했으나, 그런 아합에게도 하나님은 몇 번의 기회를 주셨고, 그를 돌이키기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그가 회개할 때는 용서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충분히 경험했음에도 결국 끝내 자신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전쟁터 안에서 다른 결과가 나타나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게 된 여호사밧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아합의 모습은 우리에게 또다시 두 갈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제 삶에도 아합과 같은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모습으로 나아가다가 혼난 경험도 있고, 몇 번의 기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바꾸어 가셨던 과정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삶에 엘리야와 같은 시간도 있었습니다. 저도 영적으로 탈진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교역자로 9년간 사역한 후, 저는 완전히 지쳐 있었고, 다시는 부교역자를 못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양주라는 지역에 대해서도 그리 따스함이 없었고, 이곳을 빨리 정리하고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당시 새벽에
일어나서 창밖의 수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땅에도 이렇게 십자가가 많은데 저 같은 사람이 또 하나의 교회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들이 있어서 그 사명을 갖고 사귐의교회 개척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비전은 결코 큰 교회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저는 이 교회가 작은 공동체로 머물 것이라 여겼고, 사실 그래서 일하며 자비량 목회를 시작하게 된 것도 있었습니다. 제 계획에서는 제가 일하며 목회하는 기간이
상당히 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인 저희 딸과 고등학교 되면 아빠가 일하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개척 5년 정도가 되어 두 번의 예배당을 거쳐 자립하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죠. 일하며 목회하는 것도 고단하고 힘든 일이었기에, 가끔은 그것이 서럽고, 남들은 다 교회에서 이런저런 일을 할 텐데, 평일의 일터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저의 이중직 삶이 끝이
안 보여서 막막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5년 차부터 작게나마 사례비도 받기 시작하고,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작은 희망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목회의 어려움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오히려 개척 4년 동안 사례비는 못 받아도 목회적 고민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생존에 대한 고민만 있었을 뿐이죠. 그러나 오히려 진짜 목회자로서의 훈련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현재진행형입니다. 여러분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도 가끔은 ‘제가
언제까지 목회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또 가끔은 엘리야와 같은 마음 앞에서 주님을 찾게 되는 순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2년 전 저도 탈진한 마음으로 호렙산 앞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에게도 다시 새로운 열정이 샘솟게 된 것은 ‘주님이 이 시대 안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저와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제는 생존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사명에 대한
진정한 부르심 앞에 서게 되면서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하나님이 그 일을 함께해나갈 이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정말로 따르고 싶은 남은 자들을 붙여주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어차피 저도 저에게 맡기신 시간 동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사라지는 인간에 불과하고, 저는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이 그보다 더 영원한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사명의 주인이 아니고, 우리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동안 함께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맡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혼도 내고 꾸짖기도 하시며, 때로는 찾아와 위로하고 새 힘을 주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분은 진짜로 동행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지킨다는 것은 내가 잘못된 길을 갈 때, 회초리도 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이 다 떨어졌을 때, 우리에게 다가와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이 많음을 압니다. 그러나 두렵지 않은 것은 제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비유를 좋아하는데요. 우리는 종이 한 장처럼 연약합니다. 손가락으로 뚫을 수도 있는 약함이 우리의 실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종이 뒤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종이 뒤에 벽이 있다면, 이제는 손가락이 부러질 것입니다. 우리 뒤에는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약함은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앞에 살아간다면, 그분께 내 삶의 운전대를 내어드리는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지키실 것을 믿습니다. 그 마음으로 함께 찬양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