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Q & A / 강정규 목사

2023-10-13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선 하나님 나라 20주의 설교에 함께 동행하신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제가 많은 경우는 아니지만, 종종 외부 사역이 들어오면 경우에 따라서는 거부하기도 합니다. 올해 3번 정도를 거부한 것 같습니다. 물론 다 섬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귐의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설교를 하면,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것만큼 깊이 전하지 못할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미 같은 신학 안에서

말씀을 나누기에 훨씬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설교를 나누는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마치며 던져주신 질문들을 잘 살펴봤습니다. 총 29개의 질문을 받았는데, 어떤 것은 간단히 설명해도 이해가 되지만, 어떤 것은 그 질문 하나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함께 설명해야 할 신학적 전제가 많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던지신 질문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면, 꼭 저에게 다시금 질문을

던져주신다면, 맞춤형으로 조금 더 풍성하게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모든 정답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저 말고 어떤 다른 목사님이 정답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답은 ‘성경’에 있고, 저는 제가 가진 성경적 이해 안에서 여러분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늘 성경 안에서 함께 답을 찾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언젠가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는 지혜를 더하여 주시지 않을까 생각하며,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좋은 안내자가 되어보기 위해 힘써 보겠습니다. [구원] Q1. 하나님 나라를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하며 신앙생활을 하다 죽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의 구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으로 부족했다고 하여, 그들의 구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시골에서 목회하는데, 그곳에 계신 할머니가 글도 몰라서 성경도 못 읽지만, 설교 때 들은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만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할지라도, 저는 그 신앙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것과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일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나누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저는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내 삶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비전을 찾고, 내 삶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Q2. 제가 어렸을 적 아버지가 본인은 "죽기 직전에 예수님 믿을 거야. 그러면 너의 논리대로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어"라고 하셨는데 가능할까요? 죽기 직전에 정말 예수님을 내 삶의 구원자로 모셔 들였다면 구원을 받았겠죠. 그러나 그것이 때로는 너무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님의 구원을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님의 신앙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나누며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저는 지금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삶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영접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우리의 현재의 삶에 하나님이 주고 싶은 삶을 맛보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죽음 이후에 거할 장소를 바꾸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Q3.

치매 이전에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 : 치매 환자는 기억력을 잃어버리는데 치매 상태로 예수님을 잊어버리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희미해질 것 같은데 이런 경우를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요? Q4. 치매 이전에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 : 구원의 기회가 끊어지는 건가요? (치매의 정도가 심한 상태의 상황에 대해 질문한 것입니다) 우선 저는 치매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네이버를 찾아봐도 치매가 너무 광범위한 케이스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기억력 저하를 의미하는 ‘알츠하이머병’을 의미한다면, 우선 그 질병과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이 질병에서 자유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만약 주님을 잘 믿다가, 노년에 치매에 걸려서 죽기 직전에 주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하여도 그것이 저의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설령 치매의 영향으로 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의 진심인지는 ‘오 주님

당신께서 아십니다’가 아닐까요. 두 번째 질문의 경우에도 조금 극단적인 질문인데, 아예 신앙과 무관하다가, 아예 본인의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치매 상태라고 본다면.... 그전까지 어떠한 주님과의 관계도 없었는데 갑자기 관계가 시작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약간의 인지능력이 있다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구원을 위해 도움이 되고자 힘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믿는 것은 주님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저는 힘써 볼 것 같습니다. Q5. 하나님은 천국에 갈 때 재판을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큰 잘못을 하면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인간의 기준에서도 잘못을 하면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기준에서 잘못을 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잘못이 아닐 수도 있나요? Ex) 강도가 침입하여 자기방어를 하였지만, 뜻하지 않게 강도가 죽었음. 그런데 인간의 기준에서는 재판받음. 우선 이 질문은 우리가 풍삶초를 하면서도 다루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죄와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큰 잘못을 하면 지옥에 가고 작은 잘못을 하면 지옥에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지 않은 삶은 모두 지옥에 갑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느냐는 다른 기준에서의 죄가 아니라, 세상에서 어떠한 죄도 짓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을 떠난 삶’이라면 ‘회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풍삶초의 ‘죄’에 관한 부분을 한번 다시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 Q6.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것이라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었나요?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는 것이 전부였나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되심’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에서는 율법과 상관없이도 하나님 나라를 누렸던 것이고, 아브라함조차도 율법 시대 이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방법은 달랐다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에 대한

인정과 고백은 어느 시대나 가장 핵심입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롬 4: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롬

4: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며 살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은 미래적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누리지만, 메시아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에 대해서는 바라보는 입장이었습니다. (마 11:13)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이 바라보는 그 예언의 성취자요, 율법의 완성으로, 이 땅에 메시아의 나라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망이 현실이 됩니다. 종말인데, 실현되었다고 해서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백성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소망했고, 우리는 마주합니다. Q7.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전 세계가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어차피 전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고 싶었을 텐데 왜 구약에서는 굳이 이스라엘만을 택한 걸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수많은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반응이 중요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방 출신의 여인들도 섞여 있죠. 룻도 그렇고, 라합도 그렇고, 밧세바도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욥도 이방사람입니다.

니느웨에 요나를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셨고, 다른 민족에게도 하나님을 나타내고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고,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들의 후손을 주된 통로로 삼아 일하셨던 것이죠. 만약 제가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 풍삶초를 저희 교회에 시작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임상실험을 통해 먼저 이 일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일부는 지금도 이 일을 적극적으로 동역하며 통로가 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풍삶초를 할 때, 그들에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을 통해 시작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할은 그와 같습니다. Q8. 하나님의 나라를 모세가 바라본 것처럼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이 땅에 이루시길 소망하며 누리며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로 구분하면 어떨까요? 이상한가요? (민 2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우선 모세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바라봤습니다. 모세는 그리고 그 가나안 땅은 밟지도 못했죠.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입니다.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러하기에 모세는 가나안 땅과 상관없이 그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렸으니까요. 또한 변화산 사건 때는 메시아를 예언하는 한 축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나님 나라는 없습니다.

바라만 보는 관계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Q9. ‘하나님 나라가 온다. 임하신다’라는 표현 외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간다’라는 표현은 내가 주체가 되는 표현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저희가 함께 일하시니까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제 고집인가요? 이것을 구분하여 설명하며 명확히 하고 싶었던 개념은 그럼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우리의 어떠함에 달려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그 나라에 우리는 꼽사리 끼는 것입니다. (고후 2:14)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배경주석을 보면,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로마의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수치스러운 포로들을 ‘개선 행진’에 끌고 갔습니다. 고대 전쟁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승전한 군대가

개선하는 행진입니다. 당시의 개선식에서는 향을 피웠기 때문에 이 말씀에 그 이미지가 분명히 있는 것이죠. 개선 행진의 앞에는 대장군이 서고 그 뒤로는 군대들이 섭니다. 그리고 마지막 후미에는 전리품들이 따라오는 것이죠. 이 전리품 중에는 전쟁 포로도 있습니다. 자, 그럼 이 말씀은 전하는 바울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라고 생각할까요? 개선장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럼, 그의 군대? 아닙니다. 바로 전쟁에서 그의 승리로 말미암아 얻은 전리품,

바로 포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승리한 전쟁에서 취득하신 그의 포로가 됨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승리라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만약 제가 제 아들과 레고를 만든다고 해보십시오. 사실 제 아들이 그 일에 진짜 도움이 될까요? 아들의 도움 없이 제가 만드는 것이나, 아들의 도움을 받아서 만드는 것이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 저의 도움 없이 제 아들이 그것을 세우고 만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운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표현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그 일을 아들과 함께하는 것은 그 일의 기쁨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일에 동참하고 참여한다는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표현을 저도 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시며, 그 회복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고, 또 그 나라를 세상에 전하는 일에 우리를 증인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그 나라가

세워지거나 무너지거나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롯이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Q10.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 포로가 되는 심판을 하나님께서 실행하신 것처럼, 지금 현시대의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다운 모습을 잃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교회를 문 닫게 하거나 성도들을 흩으실 수도 있나요? 네. 당연히 그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흩으시는 것도 꼭 나쁜 의미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을 위해 흩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무시한다면, 우리를 심판의 본보기로 삼으실 것입니다. 당연히 지금도 그 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Q11.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 땅과 우리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면, 완성 이후에도 우리는 지금처럼 문명의 발전을 계속 이루어갈 가능성도 있나요? 네. 그래서 풍삶기 강의 속에서도 김형국 목사님께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하는 표현으로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없어질 직업이 많은데, ‘목사는 확실히 없어질 것이다’ 말하기도 하죠. 미래의 모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나라가 다시 원시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악 이전에 주신 명령을 ‘문화 명령’이라고 하고, 저는 지금 우리에게는 나쁜 문화도 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꽃피운 문명과 문화도 있다고 믿습니다. 나쁜 것은 사라져야 하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경영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Q12. 사자와 양들이 함께 뛰어놀고 독사굴에 손 넣어도 되는 하나님 나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서 만든 사람이 자연의 중심에 있어서 사람이 사는데 불편하지 않은 편한 세상이라는 건데, 하나님의 나라에는 동, 식물, 자연은 사람들을 존재하게 하는 도구일 뿐인가. 오묘하고 절묘한 자연의 섭리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걸까? 사자와 양들이 함께 뛰어노는 것이 사람이 사는데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자연세계에 임한 ‘샬롬’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사람은 매우 특별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질서를 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질서도 깼고, 더 나아가 사람과 자연 사이의 질서도 깨버렸습니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일단 에덴에서는 ‘육식’의 흔적이 없습니다. 사람도 동물을 잡아먹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연세계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유해한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전의 질서와 확연히 달라진 것이죠. 약육강식의 세계가 된 것은 죄악 이전의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자연세계가 사람들을 존재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하는 세계이고, 자연세계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 사람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세계를 대충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분이라면,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 피조물을 돌보는 것일 리는 없습니다. (창 2:15)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긴 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돼지

떼가 죽는 것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자연세계와 다른 동식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만큼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Q13.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하나님 곁으로 간 사람들이 낙원에 있다가 예수님 재림 때 부활한다고 했는데, 거기서 사도바울을 만나면 대화해보고 싶은데, 헬라어로 대화하나요? 성경에서 언어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키워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떠나게 될 때, 하나님은 ‘언어를

흩으심’으로 그들의 죄악을 끝내십니다. (창 11:8)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창 11:9)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이 흩어진 언어를 소통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행 2: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행 2:7)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행 2:8)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행 2:9)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행 2:11)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해진 우리의 언어는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삶] Q14. 지난번 설교 때 우리는 이미 이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 우리가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삶을 하나님께서 나중에 허락하여 주실 새 하늘과 새 땅과 비교하면 온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온전함을 누리기도 합니다. 저는 충분할 만큼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점 그 온전함을 회복하여 가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점점 더 온전해지면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10년 전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10년 후를 더욱 기대합니다. 또한 저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일종의 ‘데모 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과 기쁨과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소망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잃어버린 삶도 느끼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시기에, 그분의 그 사랑을 조금만 떼어서 누리게 하셔도, 그 사랑은 이 세상에서도 매우 가치 있고 특별한 것인데,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게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소망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또한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것도 고귀한데,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어떨까? 저는 소망해

봅니다. Q15. 정치하는 사람들 너무 이상해서 시위하러 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싫어하실까요? 아닙니다. 하셔도 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 바로잡기도 해야 하고 목소리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답게 하십시오. 벨트 아래의 공격은 하지 마십시오. 인격적인 모독도 하지 마십시오. 굽은 것을 바르게 하며, 정의를 노래하고 외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싫어하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나와 다른 입장에도 장점도

있음을 이해하십시오. 가짜뉴스와 정치의 흑백논리에 빠지지는 말되, 왜곡되고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나누며, 정말로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시고, 그에 합당한 삶을 위해 함께 힘써주십시오. Q16. 실제 교회밖(가정과 생업 환경 등)에 서 있으면 하나님 나라가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냥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는 상태지요. 그러다 마음을 돌이킬 때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오늘 묵상말씀을 생각하면 되는 걸까요? (참고로 저는 하나님 나라 1~4강을

못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히 한순간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습 되지 않은 것이 그냥 나오지도 않습니다. 하다못해, 아빠로서의 삶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아빠로서 계속 부딪혀 살아가면서 더욱 성숙하고 멋진 아빠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모호하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기도 쉽습니다. 그러므로 더 내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내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풍삶기를 하면 초반의 아침에 3가지를 스스로에게 말하는 훈련도 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를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죠. 하루에 3번 10분씩 하나님과 교제하는 훈련도 합니다. 그를 통해 내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죠. 그런 습관이 내 인격을 만들고 인격의 변화가 내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당연히 좋은 시작입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묻고 듣고 따르십시오. Q17. 이 세상에는 하나님에게

내쫓긴 사탄이 자리 잡고 여러모로 방해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싸움이 여러가지로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옛사람과 싸움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로 인한 것들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것으로 봐도 되나요? 사탄의 관심은 딱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무엇이든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는 이전부터 나를 괴롭히던 죄 된 습성과 옛 습관, 본성과 욕망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님도 그 모든 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삶을 살고자 할 때, ‘와~ 못하겠다’가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삶을 도우시려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보혜사! (엡 3: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엡 3:18)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엡 3: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엡 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Q18.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고자 결단하지만, 관계적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서 먼저 손을 내밀거나 화해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기 싫은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무감(?) 내지 억지로라도 먼저 화해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진심으로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어서 그때까지 기다려도 될까요? 근데 억지로 하기는 싫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자니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 거 같아 죄책감이 듭니다. 저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각 상황마다 각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죄책감도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표현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이죠. 마음에 없는데 억지로

해야 하는가?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면 화해 자체가 의미가 없겠죠. 다만 그 마음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가? 이것은 중요할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우를 종종 만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하기에는 제가 너무 두렵고, 속상하기도 하고, 제 마음이 잘 열리지 않습니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두려움과 거절감을 극복하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매달려 볼 때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일에서, 특히 내가 지독한 상처를 받았을 때는... 우선 내가 그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마다 다르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떠나지 마시고,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구한다면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저는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주인됨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교회공동체가 하나 되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빼버리면 우리는 결코 하나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Q19. 하나님 나라는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면 누리게 되는 건가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방법인가요? being과 doing의 개념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being은 ‘존재’이고 doing은 ‘행동’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doing’을 통해서 ‘being’에 이르려고

합니다. 고행과 수행과 선행과 실천을 통해서 어떤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내 존재를 바꾸셨음을 잘 이해할 때, 그에 걸맞게 사는 것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서 없던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복음 안에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을 깨닫고,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며, 내 존재의 변화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면서 더욱 진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일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복음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나를 먼저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서 그분으로부터 채움을 받으며 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돌려받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상대방이 반응해주지 않으면 서운하고 화도 나죠. 그래서 먼저 하나님과의 충만한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누리면, 자연스럽게 그분의 마음을 알아갑니다. 이

질문을 하신 분은, 저에게 따로 오시거나, 아니면 팸에서 가장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 보이는 분과 대화를 나눠보시면 좋겠습니다. Q20.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인가요? 힘들지만 참아내며 사는 삶인가요?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면 저는 당연히 행복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행복이 힘듦이 전혀 없는 행복인가? 저는 그런 행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지만 행복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예화를 잘 듭니다.

결혼하면 행복하고, 아이를 낳으면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그럼, 반대로 사랑하면 힘듦이 없나요? 그렇지 않죠.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힘든 부분도 여전히 있고, 참아내며 지켜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내게 주는 행복이 더 큽니다. 그래서 기꺼이 힘듦을 버티고 참아냅니다. 헌신 없는 사랑은 본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도 그렇습니다. Q21.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존재적 변화가 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인격적 무시를 당해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진 섬김의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에, 넘사벽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내 속에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도 그저 허허 웃으며 바보처럼 참고 견뎌 내기만 해야 하는게 맞을까요? 그걸 정말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인지 궁금합니다. (다음 질문과 연결) 우선 이 질문을 하시는 분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이런 고민을 가진 것에 충분히 공감하고요. 그러나 조금 오해도 있어 보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허허

웃으며 바보처럼 참고 견뎌 내기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저는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그렇게 사신 적이 없거든요. 악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지, 악함 앞에서 비굴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악과 맞서기도 하셨고, 때로는 인내하기도 하셨죠. 인내와 섬김은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를 가졌기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더 먼저 회복되었기에 섬겨주는 것입니다. 인격적 무시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더러워서’ 참지는

마십시오. 다만 그 악함에 악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지, 우리가 뭔가를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악에 대하여 선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힘과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순간에 짧게라도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제가 이 순간에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그 결과 분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참을 수도 있으며, 선으로 오히려 행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우리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 Q22. (이어서) 그리고 좋은 공동체 안에서 훈련받으면 정말 그렇게 변할 수가 있나요? 공동체 안에서 훈련을 받아도 그 영향이 세상에까지 뻗치지 않는다면 공동체가 문제인가요? 자신의 문제인가요? 만약 안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서라면 교회에서 맡았던 직분을 그만두고 교회를 옮겨야 할까요? 아주 쉽게 말해볼게요. 어느 PT샵에서 몸을 멋지게 만든 사람들이 많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럼 내가 그 PT샵에

등록하면 몸을 멋지게 만들 수 있을까요? 내가 지금 다니는 PT샵이 너무 잘못된 것을 가르치면 바꿀 필요도 있죠.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바꿔도 똑같을 수도 있습니다. 영적생명이 달린 문제이니 민감하게 생각하시되, 가족을 바꾸는 문제인 만큼 기도하며 결정할 문제입니다. 교회를 바꾸는 일은 가족을 바꾸는 것처럼 큰일입니다. 핵심은 좋은 공동체 안에 있다고 저절로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 교회에 와서,

어떤 부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역으로 물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이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무리 모두가 좋아도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은 공동체는 방향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내 옆에 누군가의 변화를 보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변화가 나타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누군가가 변한다고 나도 무조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도 변할

수 있음을 믿게 되고, 그 변화를 더 잘 도울 수 있는 환경이죠. 저는 모든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저도, 제 주변의 사람들도 많이 변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훈련을 마쳤기에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풍삶초-풍삶첫-풍삶기를 다 마치면 변화를 보장하는가? 아니요. 누군가는 풍삶초만 해도 변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교회 안의 모든 훈련을 다 해도 안 변할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변화했다가 퇴보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어느 순간 확 자라기도 합니다. 변화가

있고, 또 그 변화를 지키는 것은 나와 성령님과의 관계 때문이지,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목회자와 좋은 공동체는 그것을 잘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잘 도와줘도 회심은 개인의 선택입니다. 내 신앙이 삶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개인의 몫입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길가와 같은 곳에는 예수님도 씨앗을 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공동체는 그것을 돕는 곳입니다. 깨우치게 하기도 하고, 보다 선명하게 그 씨를 뿌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고, 그 씨가 자라날 때 방해가 되는 것을 도와주며, 그 생명을 지켜내는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안 좋은 공동체는 관심이 없는 것이죠. 영적 생명의 탄생과 보호에 대해서... 교회를 옮기는 문제는 개인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황무지에서도 꽃을 피웁니다. 아무리 안 좋은 공동체에서도 혼자 곧게 자랄 수도 있고요. 아무리 좋은 공동체에서도 혼자 아무런 생명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교회인가, 무엇이 안 좋은 교회인가에 대한 정의와

기준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저기는 뭐가 있어서, 어떤 시설, 프로그램 등을 보고 교회를 고르는 것에 대해 저는 반대합니다. 저에게는 분명 좋은 교회에 대한 기준은 있어요. 또한 교회를 선택하는 문제는 저는 성도의 권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옮길 수도 있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교회의 안 좋음과 별개로 나는 좋은 신자인가? 내가 좋은 신자가 아닌데, 교회를 바꾼다고 좋은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Q23.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지인에게 보여줄 만한 모델이 되는 국내의 교회나 모임이 있을까요? 사귐의교회 빼고요! 네. 저는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에게 맞는가는 별개입니다. 저와 맞는다고 다른 사람하고도 맞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리고 사귐의교회 또한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맞고,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고유한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광주에서 올라오는 예진 자매가 이해가 됩니다. 저는 제가 성도여도 사귐의교회 같은 곳을 찾고자

힘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와 제가 맞는다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갔을 것입니다. 그만큼 좋은 교회를 만난다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녀가 만나듯이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좋은교회가 가진 특성들이 있고,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도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기본적으로 목회자와 일단 맞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교회의 가치관과 비슷하면 좋지요. 완벽하게 맞는 교회는 없고, 큰 틀에서 맞으면 서로 맞추어 가는 것이죠. 하나복을 하고 있지

않아도 좋은 공동체들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함께 찾아보고 추천해드리겠습니다. Q24. 사귐의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얼마만큼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을 수치화해서 ‘30%만 믿어, 70%만 믿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믿거나 안 믿거나’라는 이야기죠. 하나님 나라를 몇 % 이뤘다는 것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것은 모두가 느끼는 바가 다를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미 사귐의교회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부족함 없이요. 이런 예화가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결혼하셨다면 결혼할 때 사랑이 컸습니까? 지금 사랑이 큽니까? 결혼할 때는 그 나름대로 최선의 사랑을 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결혼할 때 서로가 사랑하여 이룬 가정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다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방법도 다를 것입니다. 마음과 별개로요. 오순절 성령강림 때, 초대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교회가 온전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로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냈죠. 그렇다고 온전해진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사귐의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미 누리고 있느냐, 그 누림을 성숙한 모습과 그릇으로 담아내기 위해 힘써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뭘 더해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저는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꿈을 갖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Q25. 달란트가 없다고 생각하는 형제, 자매에게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성도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나요? 달란트가 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다만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죠. 혹은 내가 받은 달란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는 달란트를 탐내고 있든지요. 예를 들어, 제가 가진 달란트가 있겠으나, 제가 가질 수 없는 달란트도 있습니다. 저는 현우만큼 축구를

잘하거나, 인해 자매님만큼 요리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저는 축구도 잘하고 싶고, 요리도 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일을 좋아하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 즐길 정도는 되겠죠. 그래도 그것이 내세울 만큼 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어떤 부분은 타고 나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달란트는 꼭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 아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어진 일을 정말 잘합니다. 성실합니다. 저는 그것이 달란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뭔가를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합니다. 반면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뭔가를 하는 것을 잘하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섬김은 약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는 경청하고 공감해주는 달란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달란트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고, 또 그런 사람의 좋은 점을 봐주고 격려해줄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전도] Q26. 이단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요? 대화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까요? 이단과

그냥 논쟁해야 하는 상황이면, 굳이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논쟁해서 논리적으로 이긴다고 하여 설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단보다 더 행복하고 좋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런데 만약 이단에 빠진 지인이 논쟁이 아니라, 고민을 안고 마주하게 된다면,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며 마음을 나눠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화의 상황이냐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Q27.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요약해서

설명해주고 싶어요. 어떤 식으로 설명을 풀어나가면 좋을까요? Q28. 이미 오신 하나님 나라와 다시 오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안 믿는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29. 우리의 죄로 깨어진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회복 또는 회심이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현실 세상의 깨어짐을 설명하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너무 귀한 마음들입니다.

우선 저는 어지간한 교회에서 우리 정도로 하나님 나라를 다루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이만 보자면, 풍삶초/풍삶기의 가르침보다도 우리는 훨씬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 번에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이미 이해와 깊이가 있는 공동체이고, 저와 여러분 사이에 신뢰가 충분하기에 이렇게까지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서는 <풍삶초>부터 시작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 나라를 지식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더 큰 오해를 양산하기 쉽습니다. <풍삶초>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조금씩 설명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에는 <풍삶초>만한 도구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풍삶첫>을 우리는 이미 했고, 내년에는 소그룹으로 세팅하려고 하는데, 10과의 내용에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의가 덧붙여 있습니다.

<풍삶초>를 하고 <풍삶첫>까지 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여러 개념들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풍삶초>의 장점은 하나님에 대해 잘 몰라도, 인생과 세상에 대한 부분을 통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하고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풍삶초>가 하나님 나라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부드럽게 전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도전>은 조금 더 직구로 강력하게 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에게 쓸 수 있는 도구가 다양하게 있으니, 필요한 부분은

저도 돕겠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던져주신 분들의 마음이 너무 선하고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여 간다면, 저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또 성령님이 그 안에서 일하셔서 복음이 열매 맺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