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하나님 나라의 완성 / 강정규 목사

2023-10-06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리즈 마지막 설교입니다. 2022년 11월에 시작한 설교가 2023년 10월에 끝났으니, 거의 1년 가까이 하나님 나라를 다루게 된 것 같습니다. 우선 다음주 금요일은 하나님 나라 시리즈를 복습하면서 질문을 풀어내는 시간입니다. 주제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20번의 설교 중에 다뤘던 내용도 좋습니다. 각 팸별로 질문을 모아서 저에게 화요일까지 전달해주시면 다음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문학적 기법

가운데 ‘인클루지오’는 매우 빈번하게 사용됩니다. 어떤 글의 맨 앞과 맨 뒤에 동일한 반복어구를 배치하면, 그것이 바로 그 사이에 위치한 것의 핵심내용이 거기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시리즈를 하면서도 몇 차례 살펴본 것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인클루지오를 사용해서, 결국 팔복도 하나님 나라를 얻는 사람들의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즉,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행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도 인클루지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하나님 나라

전파>였고, 사도행전 끝장에서 바울의 마지막 사역 또한 <하나님 나라 전파>입니다. 이로써 그 가운데 놓인 사도행전 전체가 어떤 이야기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 전파>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강력한 것은 성경 전체를 감싼 창세기 1~2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의 인클루지오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이렇듯 성경의 첫 두 장과 마지막 두 장이 대칭을 이루면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세상과 완성하시는 세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그것이 죄로 인해 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회복하셔서, 결국 완성되는 이야기가

성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구원의 완성 : 부활 우리의 회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악과 싸우고, 깨어진 세상이 주는 고난도 받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이 우리를 지키고 우리를 승리하도록 성령께서는 이끌고 계십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우리는 잃었던 첫 모습과 완전함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부활’입니다. 그리스 철학은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별히

이원론적 사고가 그렇습니다. ‘물질’은 악하다고 생각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으로 보면, 물질세계는 악한 것으로, 영적 세계만 선한 것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천국’을 떠올리면, 구름 위에서 영이 둥둥 떠다니는 그런 비물질적인 세계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하게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물질세계를 종결시키는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물질세계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세상도 ‘물질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도 ‘흙’으로 빚어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즉, 물질세계는 불타 없어지고 사라져야 할 세계가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세계인 것입니다. 망가진 우리의 육체를 벗어버리고 썩지 않을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고전 15:50)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합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부활’을 통해서 ‘부활의 몸’을 입고 썩지 않을 세계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죽은 상태라면, 우리는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설 것이고, 만약 우리가 그때 살아있다면 우리의 몸은 홀연히 변화되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고전 15:51)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터인데, (고전 15:52)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고전 15:53)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모델인 셈이죠. 회복의 모델이고 승리의 모델입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향하기

전에 경험했던 놀라운 신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증언하고, 예수님의 몸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십니다. 변화산 사건이죠. 이것은 죽음을 향해 예수님이 가시지만,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예표 하는 너무나 중요한 사건입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스러움을 먼저 예수님도 경험하고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요한계시록에서

구원받은 백성은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부활은 ‘몸’을 동반합니다. 영적인 어떤 현상이 아닙니다. 물질세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을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살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힌트가 됩니다. 거기에는 몇가지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일단 만질 수 있었을까요? 네. 만질 수 있었습니다. 식사는 하셨을까요? 네. 식사도 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보자면, 십자가 전의 예수님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었죠.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한 몸은 현재의 몸과는 분명한 차별이 있는 새로운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 몸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그 이전과의 ‘연결성’도 있고 ‘새로움’도 있는 것입니다. 2. 재창조와 새창조 사실 이것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혼용할 수 있기도 하고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재창조는 ‘다시 만드는 것’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하죠. 주님의 재림과 함께 새로워진 세계와 부활로 새로워진 육체를 볼 때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창조는 연결성이 없다는 의미가 좀 더 강합니다. 부수고 다시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러므로 그 연결성을 유지한 채 새로워지는 의미를 담아

‘새창조’라고 쓰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몸도, 이 세계도 ‘새창조’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만물을 다시 창조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새롭게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분명 부활 이후의 세계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측면도 많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이 말씀이죠. (눅 20: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눅 20:35)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눅 20:36)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게 될지 분명 알 수 없는 내용도 많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런 상태는 아닐 것입니다. 이 말씀을 봅시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은 이전의 어떤 부분들은

기억되지 않고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동시에 새창조된 이후에도 우리에게는 ‘마음’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거두어 가시는 것과 같이 우리 마음에 깨어짐과 상처는 완전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소망은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에 그와 더 가까워질 것이고, 지금보다 더 선명하게 주님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요일 3: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해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속하십니다(계 5:9).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기에,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입니다(계 5:10). 왕 노릇한다는 것은 창조 때 주어졌던 ‘다스림’의 사명을 다시 회복하는 것, 죄악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의 환상에서는 마지막 심판을 맞이할 모든 사람의 보편적 부활이 있고, 그때 사망 자체가 불 못에 던져집니다. 사망이 심판당했다는 것은 죄로 인한 깨어짐의 현상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데,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며, 이 환상은 하나님의 거처, 얼굴, 보좌, 빛을 포함해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히 드러내시는 모습을 묘사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수반합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이 말씀은 카이즘(대칭구조)으로서 구성되었습니다. 중심부

X(2~3절)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핵심 내용입니다. 우선 그 밖의 구조부터 살펴봅시다. A.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B.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C. 바다도 있지 않더라. (성경에서 바다는 악의 세계를 상징) X. C'.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B'.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A'.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카이즘 구조로 분석해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은 ‘만물’과 연결됩니다. 이 만물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십니다. 지금의 것을 다 부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재창조), 이 땅을 갱신하여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새창조).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성경의 증언대로 반드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그것을 살펴왔습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은 시작하셨고, 이 땅의 갱신을 통해서 이루셔야 성경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 우리가 처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룰 때, 누구나 품고 있었던 오류가 발견됩니다. 우리도 이전에 들었던 가르침을 바탕으로 막연하면서도 확실하게 각인된 오해가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때에 지금의 세상은 완전히 멸망하고, 우리는 하늘로 솟아서 마치 다른 우주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서 거기서 천국을 이루고 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골인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죽음 이후에 경험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또 누군가는 하나님 나라를 이승과 저승과 같이 죽음 이후의 세계로만 한정 짓거나, 장소적 개념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갇혀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굉장히 주목하는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특성은 이런 것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에 시작된 것이 폭력입니다. 그래서 인간세계도 피라미드화 되어 서로 싸우고 다투고 경쟁하며, 그것은 모든 자연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육강식의 논리, 힘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그것을 깨는 역피라미드 세계, 거꾸로 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공생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왕이 우리를 위해 죽는 종의 삶을 살고, 스승이지만 제자의 발을 씻기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세상에서는 부자가 더 유리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모든 것을 다 팔아야 하기에, 역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세상과 반대의 것이 되기도 합니다. 교만하면 갈 수 없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왕의 자녀가 됩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런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세계의 전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완성된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이 세상에 가득했던 그 죄의 폭력성과 서로를 상하게 하는 것이 없으리라는 소망입니다. 말 그대로 평화의 나라입니다. 죄가 가져온 첫 모습은 서로 남 탓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서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은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회복되는 평화의 나라, 하나님이

최초에 이루셨던 샬롬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그 나라를 이루시리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막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그는 사탄에게 시험을 받기도 하셨지만, 그곳에 들짐승과 함께 계셔도 그것이 그분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서가 바라보는 그 하나님 나라 회복의 소망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복음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장면이나 변화산 사건 등은 모두 매우 의미심장한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이죠. 4.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그리고 설교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창세기 처음 2장에 기록한 첫 창조의 모습은 계시록 마지막 2장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카이즘의 X-1에 해당하는 부분은 바로 우리에 대한 묘사입니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기서 하늘은 공간적 의미의 ‘하늘(공중)’이 아니다. 창조의 일부로서 하늘은 1절에서 이미 사라졌습니다(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고).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가 ‘새 예루살렘’이 되어 내려온다는 것은 부활한 우리가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새 예루살렘’은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로 묘사됩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면서 ‘신부’라는 이 다중적 이미지는 사회문화적이고 심지어 도시적인 특성을 지닌 인간의 구속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문화적인 실체로서 우리를 구속하십니다. 창조가 시작될 때의 ‘에덴’은 이제 ‘성’으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죄 이전에 주어진 것이 경작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어쩌면 그 결과가 도시로 탄생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우리가 죄로 일군 세상과 달리 죄가 없습니다. 에덴에도 금과 여러 보석이 풍부했는데, 새 예루살렘 성 자체가 그렇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표현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거룩한 성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도록 그것을 ‘준비’하시고 ‘단장’시키시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들과 나라들이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성으로 들어옵니다.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계 21: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계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여러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이는 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발전시켜온 인간의 최고 솜씨를 언급한다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더 원시적인 에덴의 세계로 돌아가 발가벗고 뛰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신 역사의 섭리 안에서 이룬 다양한 문화와 문명의 성취를 갖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여기까지 유추해 볼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미래는 신비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현재의 지식으로 짐작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 힌트를 잘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의 변화된 모습인 ‘새 예루살렘’을 표현할 때, 그것을 수치화해놓은 표현이 있는데, 높이, 길이, 넓이까지도 똑같은 모습입니다. (완전성) (계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이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룰 것임을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X-2에

해당하는 구절도 살펴봅시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3절은 본질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줍니다. 이 땅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을 찾고 경험하지만, 그러면서도 답답한 부분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바로 앞에서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갈망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 성자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임마누엘이 성취되었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마누엘의 은혜를 베푸셨고,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죠.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안에서 성전은 묘사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때문입니다. (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톰 라이트의 글을 읽고 마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오는 시대’가 ‘현시대’ 속으로 뚫고 들어와, 저 멀리 형체도 없는 ‘하늘’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땅에서 새 세계를 열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하늘’의 삶, 더 상세히 말하면 새 예루살렘의 삶을 일컫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내용이다(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가 아직도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악은 지금도 넘쳐나요.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요.” 우리도 그렇지만 바울도 악이 여전히 아주 강력함을 알았다. 그는 서신 절반을 옥중에 썼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예수님이 이미 참된 왕이시며 세상의 참된 주님이시라는 주장을 바꾸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서신 장면을 묘사할 때, 카이사르가 교회를 핍박하고 계속 핍박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한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요 온

세상의 진정한 왕으로 등장시켰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은 최초의 기독교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도통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늘 주권자이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퀴리오스 예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