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죽음 이후의 세계 / 강정규 목사

2023-09-1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성경에는 단기적 예언과 장기적 예언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성경 전체가 바라보는 가장 장기적인 예언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본 것처럼 ‘성전파괴’라는 단기적 예언의 성취를 통해, 우리는 ‘주의 재림’이라는 장기적 예언 또한 성취될 것임을 소망하게 됩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죽은 후의 시간을 거쳐 그 완성에 닿을 것이고, 또 살아 있는 동안 그 시간을 맞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부터 하나님 나라의 완성까지의 시간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나누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까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애초에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을 제가 유추해서 할 수도 없고, 직통계시를 받아서 할수도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그래도 제법 있기에, 그것들을 모으고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오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1. 죽음 이후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재림이 없이는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꿔말하면, 이전에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지 않고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는 대혼란을 겪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이들이 이미 ‘완성된 천국’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현재 없습니다. 재림과 부활도 아직 남겨진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죽은 자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살전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이들의 상태를 ‘잠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진짜 수면 상태에 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들의 상황이 먼저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말씀에서 보듯,

첫 열매로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다음 부활의 차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신자와 살아서 믿는 신자들인데, 그 시기는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어느 누구도 부활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즉, 모두가 재림과 종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은 이후 부활의 날까지의 상태를 ‘잠잔다’라고 표현하며, 신학적으로는 이 상태를 ‘중간상태’라고 부릅니다. 죽은 후 완성된 천국에 가는 것에는 단계가 있는 것인데, 그중 첫 단계인 ‘중간상태’를 의미하는 성경적 표현으로는

‘낙원’이 적절해 보입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중간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범주별로 구분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즉, 낙원에 등급이나 구분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에 있고 모두 성도입니다. 낙원에는 강도뿐 아니라, 모든 구원받은 백성이 있을 것입니다. 낙원의 전제 조건은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살전 4:13)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살전 4:14)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살전 4: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말하는 잠든 상태가 무의식 상태이며, 부활 때에야 의식을 가진 상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후 상태가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바울이 그 상태를 현재 우리 상태보다 ‘훨씬 더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서 마지막 구속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식이 있고,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정의가 이루어질지 물을 수 있습니다. (계 6:9)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계 6:10)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지배자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지배자님께서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어 우리가 흘린 피의 원한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계

6:11) 그리고 그들은 흰 두루마기를 한 벌씩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동료 종들과 그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든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가 분명히 존재하고, 이들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들이 이미 먼저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죽은 ‘성도’들이 우리보다 앞서 ‘하늘’에 있는 ‘나라’로 들어갔으며, 우리가 이미 벌어진 잔치에 나중에 들어가서 먼저 들어간 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신약성경이 결코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 그때 우리 모두가 부활의 몸을 입습니다. 중간 단계에 있는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서고, 그때 살아있는 자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매우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계 20:6a)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요한계시록에는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첫째 사망은 모든 인간이 겪는 육체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에 상응하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도 나옵니다. 왜 그런 표현을 쓸까요? 첫째 부활이 바로 ‘낙원’에 가는 구원의 첫 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의 길로 한 걸음 나아간 것입니다. 그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중간상태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낙원과 대비되는 악인의 ‘음부’가 있습니다. (행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그러니까 죽은 자들은 낙원과 음부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재림의 때가 되면 모두가 부활합니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행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정리하면 죽은 이후, 의인은 낙원으로, 죄인은 음부로 일차적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 상태는 부활의 몸을 입은 상태는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가 이 상태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은 그들이 ‘잠잔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할 뿐이고, 확실한 것은 그들 또한 주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후 재림과 함께 각각 부활하여 최종 심판을 받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에 따르면, 둘째

사망이 부활 후 맞이하는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둘째 사망은 ‘불못’이라고 표현합니다.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모든 사람은 첫째 사망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둘째 사망은 경험하지 않습니다. 둘째 사망은 최종적이고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영원한 사망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되는 불못에

던져집니다. 여기에 사망과 음부도 함께 던져진다는 것은 이것이 부활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으며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는 악한 것들이 없습니다. 더 이상의 사망도 없고, 음부도 없습니다. 이것이 최종적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약에서 오시므로, 구약의 백성 중 성도들은 이미 그 전에 죽어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은 죽은 자입니다.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산자와 죽은 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 표현은 주님이 부활하신 때, 죽어있는 자들에게도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소망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죽은 자는 소멸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죽어서도 주님의

것으로 존재하며, 주와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2. 오해에서 이해로 1) 죽은 성도는 지금 천국에 있는가? 이것은 '천국'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안에 속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에 가는 어떤 곳으로 오해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죠. 이 땅에서부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로 보자면, 낙원에 있는 상태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상태이므로 ‘하나님 나라’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표현도 가능하죠. 다만, 이것이 흔히 이해하듯 부활하여 맞이하는 ‘영원한 천국’에 있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혼용해서 쓰면 오류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성도들이 ‘천국’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제에 따라서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표현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많이 말하는 완성된 천국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면 틀린 것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상태로서 천국을 말한다면 그들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이라면 우리도 천국에 있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이미 천국에 있고,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이런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한 가지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게 될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이죠. 이 비유의 설명이 죽음 이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 속에서 부자는 나사로를

볼 수 있으며, 음부에 있음에도 육체를 입은 것과 같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또한 아브라함과 부자가 대화하는 이야기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성경의 흐름에서도 ‘부’에 대한 경고를 하다가 비유로서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유에서는 어떠한 설정도 가능합니다. 심지어 비유에서는 예수님을 도적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대교의 고전 동화와 같은

것으로서(ex: 흥부전), 후반부는 메시지 전달을 위해서 예수님이 차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후 세계에 대한 실제적 묘사라기보다는 부자와 다섯 형제와 같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은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3) 휴거 휴거에 대한 오해도 해소해야 합니다. ‘휴거’라는 단어는 신약의 어떤 종말론적 본문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끌려 올라감’이라는 개념이 데살로니가전서 4:17에서 발견됩니다. (살전 4:14)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살전 4: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살전 4:16)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의 전제는 문맥입니다. 이 본문은 재림에 관한 비밀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이 불이익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의 강림을 ‘왕의 방문’에 빗대어 기록합니다. 고대세계에서 그것에 큰 축하 행사가 필요했고, 그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오는 고관을 영접하기 위해 도시 밖으로 대표단을 보내는 것은 성경시대의 관습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도, 바울의 로마 방문 때도 그렇죠. 14절의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라는 바울의 진술도 그렇게 봐야 합니다. 이는 주님의 오심을 무덤에서 일어나 맞이한 자들이, 주와 함께 성으로 들어올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이것에 대해서 기록하여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죽은 자가 살아서 재림을 맞이하는 자보다 우선권을 가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주와 함께 있을 것’에 대해 말하지만, 어디서 영원히 주와 함께 있을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문맥을 보면 그 최종 목적지는 땅입니다. 결국 신자들과 함께 땅으로 오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4:40-41(눅 17:34-35)에 나오는 ‘데려감’이 대중적 종말론에서 휴거의 근거 구절로 흔히 사용됩니다. (마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휴거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 앞의 문맥은 홍수를 예상하지 않았던 노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마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뒤에 땅에 남았던 이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데려가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심판을 당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노아 시대에 상응하는 종말론적 사건을 설명하는 배경에서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이 불의한 자입니다. 심판을 받으러 데려감을 당하는 것입니다. 휴거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평행본문인 누가복음을 보면 더 명확합니다. (눅 17: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36) (없음) (눅 17: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주여 어디오니이까?’라고 제자들은 질문하는데, 어디로 데려감을 당했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심판에 대한 언급이지, ‘구원’에 관한 것일 수 없습니다. NRSV, KJV, NIV에서 ‘데려감’은 ‘쓸어 가버린’, ‘제거한’으로 번역하는 동사입니다. 기본적으로

‘휴거’는 종말에 살아 있는 신자들을 땅에서 하늘로 옮기는 것이므로 하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땅이 심판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요 14: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이 구절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로 가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임하는 것입니다. 4) 연옥설 특별히 이 부분이 ‘연옥설’과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톨릭에서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연옥설은 이런 것입니다. 죽은 사람 가운데 세례를 받지 않은 자, 믿지 않은 자, 큰 죄를 지은 자는 곧바로 지옥으로 갑니다.

이들은 바로 끝입니다. 그리고 순교자나 현세에서 매우 거룩한 자들은 바로 천국으로 직행합니다. 그러나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연옥에서 고난 당함을 통하여, 더 정결해 질때까지 기다리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이 연옥설이 중간상태인 셈인데, 우리의 이해와는 다른 개념인 것이죠. 이러한 교리의 틀을 만들어 놓고, 이 땅에 남은 자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미사함으로 그 연옥의 시간이 빨리 지나갈 수 있으며 정결해 질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리 안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면죄부 판매’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거짓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음 이후에 신자와 불신자의 운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은 몸의 죽음 자체로 실제로 죄가 끝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롬 6:6)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롬 6: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사실상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천국에 갔다왔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경험들이 거짓된 것으로 밝혀진 적도 있었고, 너무 주관적인 것이기에 거기에 믿음의 근거를 두기는 어렵습니다. 알렉스 말라키(Alex Malarkey)가 쓴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도 천국에 대한 비슷한 경험담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2010년 7월 출간되자마자 미국 아마존 종교분야 서적 1위를 차지하는 등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을 정도로 주목 받았지만, 후에 저자 스스로 이 책의 내용이 거짓이라고 밝혔습니다. (참조: 국민일보 2015년 1월 16일 기사) 그러므로 저는 누군가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만큼, 그 진리 위에서 우리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약속과 예언을 믿고 소망해야 하지만, 근거 없는 교리로 인해서 불안해하거나,

망상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솔깃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분별하고, 또 바르게 소망해야 합니다. 중세시대 면죄부 판매가 왜 가능했습니까? 성경을 보지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습니다. 더 이상 말씀은 감춰진 신비가 아니라, 주어진 진리입니다. 사도바울은 사후세계에서의 연옥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연옥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현세의 삶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후 상태에서 겪는 고난이 아니라, 현세에 겪는 고난이 우리가 영광스러운 미래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할 계곡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주로 믿는다면,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었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생명으로 나아가는 문인 고난을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주어진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참고 견디고 믿음으로 소망하며, 이 고난을 잘 통과하여 주님께로

나아가기를, 그리고 그가 약속한 부활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