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 예배 오늘은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마리아의 마음으로 예배하는 '마리아 예배'입니다. 예배팀, 방송팀, 안내팀 등의 활동 없이 모두 예배자로만 사는 하루입니다. PPT는 없고, 유튜브는 카메라 고정으로 송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MBTI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그런데 저에 대해서는 늘 평가가 엇갈립니다. 왜냐면 공과 사를 진행할 때, 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하고 공적으로 일과 사역을 하면 저는 TJ 성향에
더 가깝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고민을 하며,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적인 자리에서 자연인으로서 저의 삶은 FP 성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의 MBTI는 지금까지 조사했을 때는 모두 ENFP였습니다. 물론 그래봤자 F와 T가 53:47, P와 J가 54:46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행사 계획은 엄청 열심히 꼼꼼하게 세웁니다. 반면 저의 개인적 삶에서는 느슨한 계획과 유동성을 좋아합니다.
이번 여름에도 많은 행사를 기획하며 사역 스케쥴을 열심히 짜고 진행했지만, 정작 저의 휴가는 계획을 하나도 세우지 않고 갔습니다. 여수로 간다는 것과, 숙소 정도만 정해놓고 무작정 내려갔습니다. 여수에 도착할 즘, 하늘 위로 패러글라이딩이 날아다니길래, “어, 여기 패러글라이딩 있네. 저거 해볼까?” 해서 패러글라이딩을 했습니다. 숙소에 가니 ‘짚라인’이 있길래 짐 풀고 “저거나 하고 올까?” 해서 하러 갔습니다. 숙소 1층에 가니 유람선 광고를 하길래 다음날 유람선
탔습니다. 저는 계획이 바뀌는 것에 대해서 전혀 부담감이 없고, 틀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리더는 ‘계획적’이 되는 훈련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업 경영에서 ‘신뢰’는 ‘예측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기분 따라 감정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제시되고, 과정이 이해되고, 앞으로의 행보가 예측되어야 ‘신뢰’가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제가 계획을 세우고 그 틀에 맞춰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 저보다는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타고난 성향대로 즉흥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나마 계획의 틀이 세워져 있으면, 방향에 대해서는 함께 공유하고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획과 자료가 정리되어 있어야, 수정하고 보완하며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서’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지만, 우리와 달리 실수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는 자신의 계획을 공유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해오셨고, 어떤 일을 하고 계시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분 따라, 감정 따라 행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열왕기서도 갑작스럽게 생겨난 예측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세워졌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들을 향한 ‘상과 벌’ 또한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원칙에 따라서 결정됨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가 가능한 것입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난 시점에 그들에게 있었던 일을 다시 역사와 신학 안에서 회고하며, 그들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보고서’와 같습니다. 즉,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실패 보고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상실험에 대한 ‘실패 보고서’입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10월까지 두 달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점검하며 돌아본 실패 보고서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기 위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우선 열왕기서를 조금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이라는 책이 여러분에게 그리 익숙한 책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선 ‘열왕기’라는 표현이 한 번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책의 성격은 영어로 보면 더 쉽게 이해됩니다. ‘Kings’ 열왕기상이 1 Kings, 열왕기하가 2 Kings입니다. 히브리 성경의 원제도 ‘멜라킴’(왕들)입니다. 열왕기라고
해서 ‘10명의 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강’이라고 하면 ‘여러 강한 나라’를 의미하듯, ‘열왕’이라고 하면 ‘여러 왕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열왕기’라는 것을 ‘여러 왕들의 이야기’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열왕기상, 열왕기하는 한 권의 책입니다. 이 책은 사무엘상하와 연결되는 책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는 사무엘상하를 ‘제1,2왕국서’, 열왕기상하를 ‘제3,4왕국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즉, 사사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세워지는 과정부터 사울-다윗-솔로몬에 이르는 통일왕국 시대와 남유다/북이스라엘이라는 분열왕국 시대를 다루는 왕들의 이야기이며, 이스라엘 국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 책은 누가 썼을까요? 한번 옆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누가 썼나요?’ 정답은 ‘모른다’입니다. 탈무드 등의 유대 전승에서는 ‘예레미야’를 저자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분석하면 할수록 그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일단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가 예레미야와 다릅니다. 또한 예레미야의 활동 시기 이후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후반부를 아직 살펴보지 않았지만, 남유다가 망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예레미야는 끌려가지 않고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굽에 가서 삶을 마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서 안에 나타나는 증거를 보면, 이 책은 BC 560-539년 사이 바벨론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포로귀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으므로 포로귀환 전에 이 책이 완성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서는 기본적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온 이유를 해석하고 이해해가며 자신들의 역사를 그 신학적 이해 안에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었는가?’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실패를 분석해야만 실패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실패감 속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실패를 반복해서도 안 됩니다. 실패를 분석하고 실패를
공부하여 극복하고 넘어서야 합니다. 공부를 해보신 분은 <오답 노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틀렸던 것이 극복되면 다시는 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강하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틀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질문을 던졌을 때, 용감하게 오답을 말하고 약간의 망신을 당한 사람은 다시는 그 문제에 대해서 틀리지 않습니다. 실패를 잘 기억하고 되새기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는 척하고 있는 사람이 계속
모르는 상태에 머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열왕기상을 통해서 우리를 닮은 사람들과 우리를 닮은 공동체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못남이 또한 내 안에 있는 모습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발견됨이 잠시 나를 부끄럽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저들과 달라’, ‘나는 문제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는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넘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열왕기상 말씀을 새기며 나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실패 보고서의 키워드는 ‘한계’입니다. 1. 인생의 한계 열왕기서 앞에 놓인 역사서인 ‘사무엘서’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다윗입니다. 사무엘상은 사사 사무엘과 첫 번째 왕인 사울의 시대를 다루지만, 다윗의 준비기라는 측면이 강합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통치 시기를 다룹니다. 아시다시피 다윗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의 아이콘입니다. 사울도 실패하고 다윗도 실패합니다. 실패를 경험했다는 측면에서 둘은 같습니다. 그러나 한 명은 실패를 극복했고, 한 명은 실패를 반복합니다. 밧세바와 간음하여 태어난 아기는 죽게 되지만, 그 이후 정식으로 아내가 된 밧세바를 통해서 태어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만 하더라도, 다윗의 그 약점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열왕기서는 다윗의 말년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왕상 1:1)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왕상 1:2) 신하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저희가 임금님께 젊은 처녀를 한 사람 데려다가, 임금님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하겠습니다. 처녀를 시중드는 사람으로 삼아 품에 안고 주무시면, 임금님의 몸이 따뜻해질 것입니다." (왕상 1:3) 신하들은 이스라엘 온 나라 안에서 젊고 아름다운 처녀를 찾다가, 수넴 처녀 아비삭을 발견하고, 그 처녀를 왕에게로 데려왔다. (왕상 1:4) 그 어린 처녀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그 처녀가 왕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되어서 왕을 섬겼지마는, 왕은 처녀와 관계를 하지는 않았다. 아시다시피 다윗의 인생 최대 실패는 ‘여자 문제’입니다. 그것은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일에 대하여 회개합니다.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회개는 돌이켜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은 극복했는가? 다윗의 노년에 연로한 왕의 시중드는 역할을 위해 아비삭이라는 여인을 신하들이 데려옵니다. 이 아비삭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이 여인을 취하려고 욕심을 내다가 화를 당하게 됩니다. 왕의 시중을 드는 일에는 ‘왕의 품에 누워 왕을 따뜻하게 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이것에는 ‘육체적 관계’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신하들이 다윗 왕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기대와 달리 다윗은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긍정적 해석과 부정적 해석입니다. 우선 부정적으로는 그만큼 다윗이 늙었다는
암시입니다. 반대로 이것이 다윗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그의 변화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긍정적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쨌든 위대한 왕 다윗도 이제 세월의 흐름 속에 저물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존재적 한계입니다. 이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세상 역사의 많은 왕들이 노력했고, 지금도 냉동인간을 만드는 프로젝트가 있는 등 여전히 한계를 뛰어넘고자 힘쓰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유한할 뿐입니다. 우리가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유한함을 아는 사람만이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가던 필리핀 선교지가 있습니다. 그곳은 하루에 1번 30분 정도 물이 나옵니다. 그 물을 아껴서 씻고 설거지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펑펑 물을 쓰던 선교팀도 그곳에서는 금세 적응해서 물을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드럼통 절반 정도로 선교팀 10명이 모두 샤워하고 머리를 감아야 합니다. 배려와 협력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욕심내면 누군가는 더운 필리핀에서 전혀 못 씻습니다. 저는 그곳으로 갈 때면, 거의 삭발을 하고 갑니다. 선교가 끝날 때쯤 되면, 모두가 각오합니다. ‘나 한국 돌아가면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물도 아끼며 살 거야.’ 한국에 돌아와서 일주일 지나면 다시 리셋됩니다. 한국에서는 물이 유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무한할 것처럼 여기는 사람은 삶이 허비되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유한함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죠. 예배를 마음껏 드렸을 때, 교회를 마음껏 올 수 있었을 때는 소중함을 몰랐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예배가 금지되고 교회에 못 오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배가 참 소중한 것이었음을, 모일 수 있는 것이 감사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을 많이 했습니다. ‘예배의 소중함, 교회에 오는 것의 소중함을 몰랐는데 알게 되었다.’ 다시 제한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그 소중함은 그때의 그 고백만큼 절실하게
남아 있습니까? 저희교회가 예배 제한이 있어서 30명, 40명 모이던 때, 했던 훈련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카톡방에서 금요예배는 올 사람을 신청받았고, 주일예배는 A조 B조 나눠서 돌아가며 와서 현장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예배당에는 못 들어오지만, 옆의 공간에서라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은 추가로 와서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만약 예배당에 오는 멤버가 예배 시작까지 오지 않으면, 지각한 사람 대신 위드엔에서 한 사람이 대신오고, 늦게 온 사람이
옆의 공간에서 예배하게 했습니다. 예배를 정말 사모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만 예배당에 들어올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예배’가 ‘드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특권’임을 바르게 인식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에 소홀하지 않도록 훈련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예배당 외에 영상으로 예배할 별도의 공간이 있다면, 예배를 시작하면 더 이상 예배당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도 다시 시도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코로나 때는 오히려
그 소중함을 깨달았다가도, 이제는 그 소중함을 다시 망각했다면, 그때의 그 마음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처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는 그 땅에 있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고 은혜였습니다. 땅이 없는 자신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셔서, 그 땅의 소산물로 먹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격,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감격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에게 그 땅은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땅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 땅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와 있는 동안, 그들은 가나안 땅에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바벨론 땅에서 다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회복될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늙음. 우리의 인생의 유한함. 우리는 이 안에서 나의 삶을 소중하게 사용하기 위한 진지한 질문이 필요하고,
그 질문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답을 알고 계시는 우리에게 ‘삶을 주신 분’, 우리에게 ‘생명의 시간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구하고, 답을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시스템의 한계 열왕기는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실패 보고서’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마디로 줄이면, 인간이 세운 시스템의 한계입니다. 앞으로 보게 될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계속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기본적으로 왕정 시스템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왕정은 좋은 선택이었는가?’ 어쩌면 열왕기서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왕정이 왜 생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 나라에서 왕의 역할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필요시 ‘사사’를 세워서 백성들 안에 있는 군사적, 법적 문제를 도우신 것입니다. 사사는 세습되는 직책도 아니었고, 필요에 따라 활동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를 보니 모두 눈에
보이는 ‘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지만, 우리가 불안해하는 이유입니다. 인간 왕을 가진 나라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우리도 왕을 주십시오.’ (삼상 8:5b)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삼상 8:6)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 달라는
장로들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삼상 8: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보다, 왕의 통치를 받기 원하는 이스라엘의 선택은 더 위험한 길을 자초하게 됩니다. 왕정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세운 피라미드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세계는 늘 피라미드화 됩니다. 그 피라미드 세계의 정점에는 ‘왕’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세계 또한 피라미드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만 독보적 존재입니다. 그분의 권위에 따라 역할이 주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다른 신분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역할을 위해 주신 권위에 대해 하나님의 권위 안에서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왕의 삶은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세계의 피라미드에서는 왕을 위해 모두가 존재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를 위해 왕이 존재하고, 모두를 위해 왕이 목숨을 버려 섬겼습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섬기는 것이었지만,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사랑과 섬김의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계시는 동안 보였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진 왕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왕을 주시지만, 하나님이 기대했던 것은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리더’를 원하므로, 사람을 ‘왕’으로 세우지만, 하나님이 그 왕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왕이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한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백성 가운데 보여주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란, 하나님의 통치하심 앞에서 왕은 먼저 종이 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통치하는 왕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그나마 왕이 존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게 되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상의 실패 보고서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들이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실패는 왕들의 실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 원인은 백성들의 요구에 있었던
것이므로, 이 실패는 어쩌면 자초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조차도 하나님의 뜻하신 모습보다, 이방 나라의 시스템인 피라미드 구조화 됩니다. 그래서 사실상 애굽의 피라미드 세계를 탈출했지만, 이스라엘도 애굽의 피라미드 세계처럼 되고 맙니다. 간혹 다윗과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왕도 있었지만, 그 왕들이라고 온전했나요? 다 허물이 있었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자리가 주는 힘과 권위가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기에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아주 작은 불순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은 왕에게 하지 말 것을 이미 가르치셨습니다. (신 17:17) 왕은 또 많은 아내를 둠으로써 그의 마음이 다른 데로 쏠리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자기 것으로 은과 금을 너무 많이 모아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다윗도 아내를 많이 두었습니다. 아내를 많이 둔다는 것 자체가, 왕의 권한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이상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윗에게서 ‘왕자의 난’이 계속 발생합니다.
압살롬의 반역 사건도 결국은 아내가 다른 왕자들의 문제로부터 야기되었고,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왕위 계승 다툼도 같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나라 왕조도 몇 번의 피바람이 불지 않습니까?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일 말입니다. 결국 열왕기상 초반부도 형제를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다툼으로 시작합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2장에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장면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라’는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5절부터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반대파를 숙청하라는 매우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신앙으로 살고자 하면서도, 피라미드 구조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밟고 끌어내리고, 모두 경쟁자로 삼게 되는 것이 피라미드 구조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이런 부분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잘 할 수 있어요.’ 어쩌면 이스라엘의 마음은
이랬을 것입니다. ‘우린 다른 나라랑 다를 거예요.’ 그러나 왕권은 시스템적으로 더 어려운 길입니다. 그들이 추구한 시스템에는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왕이 되었는데 왕처럼 살지 않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왕의 이야기는 우리의 지금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일까요? 당연히 지금은 왕이 없습니다. 왕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정은 피라미드 구조의 시대적 모습일 뿐입니다. 왕정이 아니더라도 다른 의미의 피라미드 구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합니다. 요즘에는
국가 단위를 넘어서서, 부의 서열화가 전세계적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약소국의 통치자보다 기업 하나가 힘이 더 세기도 합니다. 왕정 사회의 시스템보다 어쩌면 더욱 치열한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그 치열함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국가입니다.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는 모두가 그 구조가 주는 영향력 아래서 위기를 맞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적 기준의 성공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열등감에 시달리고, 치열한
삶의 고통 안에서 신음합니다. 피라미드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우월감과 교만함 속에서 방황합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재정적 원칙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발적 검소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과정이 정직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해야 하고, 그 돈에 대한 주권을 내게서 하나님께로 양도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하면 자발적 검소가 아니더라도 그냥 검소하게 됩니다. 물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또 주어진 환경 안에서의 치열한 훈련 속에서 나타납니다. 반면 부유한 환경 속에 있으며, 검소하게 사는 것은 환경이 나를 돕지 않기에 더욱 굳은 결단이 아니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일용할 양식’을 기준으로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겠으나, 내 안정성을 하나님께 두라는 의미는 확실합니다. 그에 부합한 삶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정한 나의 몫 외에는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것이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가난한 자보다 더 많이 누리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의 포기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실제로 그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한 방법은 동일합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리고 이 예수님의 비유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요구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우리가 알다시피 부자 관원은 예수를 따르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가 가진 부유함이 그가 예수를 따라 사는 삶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간 남고 돈 남으면 할 것은 죄 짓는 일뿐이다.’ 우리는 내 삶이 안정적이고 내 삶이 부족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저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는 삶은 어쩌면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이중직을 하면서 목회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두렵고
떨립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 경험적으로 압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어떤 상황 속에서 뜨거워졌고, 자랐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러분, 우리교회가 작았을 때, 가족처럼 지내기는 쉽습니다. 작으면 그냥 그 자체가 가족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데 가족처럼 지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 큰 에너지와 노력과 헌신이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작은 공동체로 머무는
것이 답인가? 그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겠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탕자의 형처럼 동생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잘 품어야 하는 사명 앞에 있고, 정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영혼들을 부탁하고 맡기실 때는, 도리어 그 상황이 주는 위기와 한계 앞에서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정리해보면, 여기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언제나 성경에서 ‘위기’는 원하는 것이 주어졌을 때 일어나요. 다윗이 승승장구할 때 그것이 위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위기는 인간 왕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가 성취되었을 때이고,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위기는 아이러니하게 가장 태평성대했던 솔로몬 시대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시스템이 모조리 붕괴된 것이 포로기입니다. 그런데 포로기를 통해서, 그들이 가장 실패한 상황이라고 여겨지는 그 순간을 통해서, 그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재정비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아이러니입니다. 내 뜻대로 되면 위기가 오고, 내 뜻대로 안 되면 거기에 주님의 뜻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우리가 계획한 좋은 환경, 좋은 시스템이 아닙니다. 우리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내 삶의 태도를 재편할 때 우리는 삽니다. 3. 한계가 없는 하나님 열왕기상 1~2장은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에게로 왕권이 계승되는 내용입니다. <실패 보고서>라는 제목처럼, 열왕기서는 이것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신앙의 모델이지만, 그에게도 연약함과 닮지 말아야 할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열왕기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또 하나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다윗이 늙어서 왕으로서의 정치적 장악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아도니야를 중심으로 요압과 아비아달이 뭉쳐서 왕권을 노립니다. 다윗은 이것을 막아낼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대상 22:9) 보아라, 너에게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는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사방에 있는 그의 모든 적으로부터, 평안을 누리도록 해주겠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지어라. 그가 사는 날 동안, 내가 이스라엘에 평화와 안정을 줄 것이다. (대상 22: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그의 왕위가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서게 해줄 것이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어가는 시점에,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다시 개입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다윗이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선포합니다.
다윗과 맺으신 언약대로 하나님은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위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에 개입하셔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한계, 시스템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다윗도 늙었고, 곧 죽을 것이며, 어떤 사람도 영원하지 않고 다 유한합니다. 인간이 세운
시스템은 결점도 많고, 그 안에서 악한 것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늘 변함없이 존재하는 하나님은 한계가 없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망해서 다윗의 왕조가 끊어지고, 성전은 무너지고, 땅을 잃고 다른 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어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때 새로운 역사는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여러분이 세운 계획이 다 무너졌다고 할지라도,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은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십니다. 그분
앞에 맡겨진 인생이 위태롭지 않은 것은, 우리는 이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한계가 없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오늘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분석하는 보고서. 그 보고서에는 실패의 원인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소망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 하나님입니다. (시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지키고, 주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지키고, 내 삶에서 주님의 왕 되심을 지켜나갈 때, 그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이가 되어, 내 삶을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믿음을 지켜서 우리의 삶은 실패로 보고되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승리한 자로 기억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