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대속죄일과 언약의 피" / 강정규 목사

2022-03-27 · 레위기 1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레위기의 네 번째 설교이자 레위기 전반기 마지막 설교입니다. 레위기 17장까지 3월 묵상 후, 다시 요한복음이 4월에 이어집니다. 레위기 남은 본문은 8월에 만나볼 예정입니다. 우리가 지난 세편의 설교를 통해서 레위기와 조금은 가까워지고자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레위기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지난 설교 가운데 여러분이 기억하기를 바라는 몇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위해 방편을 마련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제사(예배)의 방법을 허락하십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사법은 여러 순종의 훈련과 대가 지불을 담고 있습니다. 대가를 바래서가 아니라, 그 대가 지불을 통해 다시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제사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안에 함께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법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외규정이 항상 존재합니다. 번제는 비둘기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의무제인 속죄제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 비둘기로도 제사하지 못하는 자들은 곡식으로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벌하시려는 하나님이 아니라, 어떻게든 우리와 함께하고 싶은 하나님의 최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제사의 방법에 순종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에

동참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세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말씀하시는 거룩은 절대적 의미의 완벽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고자 하는 진정성과 순종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 내가 조금 더 하나님 앞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레위기의 정결법 규정들은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생명/죽음이라는 키워드로 그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채워주시기 위해 길을 만드시지만, 우리의 삶은 부정함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정함은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가만히 방치하면 부정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해서 우리의 영이 죽는 것입니다. 즉 이 문제는 하나님과의 동행,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와야 한다는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레위기의 메시지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으로 여러분에게 오늘도 들려지길 소망합니다. 레위기를 시작할 때 레위기는 모세오경의 중심에 있는 굉장히 중요한 책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가운데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오경 자체가 교차 대칭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도 민족의 이동이고, 민수기도 민족의 이동입니다. 그 사이에 레위기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어떻게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레위기 자체가 교차대칭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레위기 관련 영상을 보면 이것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1-15장 : 제사 법전 이스라엘의 죄와 부정 16장 : 대속죄일 죄와 부정을 깨끗게 함 17-27장 : 성결 법전 거룩과 헌신으로 나아감 1-7장 제사 규정 8-10장 제사장 규정 11-15장 정결

규정 16장 속죄일 17-20장 거룩 규정 21-22장 제사장 규정 23-27장 절기 및 축제 규정 의식.1 : 5제사 제사장.1 : 제사장의 위임 정결.1 : 의식적 정결 속죄일 정결.2 : 도덕적 정결 제사장.2 : 제사장의 자격 의식.2 : 7절기 모세오경 안에서는 ‘레위기’가, 또 레위기 안에서의 ‘16장 – 대속죄일(=속죄일)’이 중심에 있음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요. 레위기 16장 안에서도 교차대칭 구조는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장의 구조> 서론 :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절) A. 아론은 오직 정해진 때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 (2절) B. 아론의 제물과 특별한 복장 (3-4절) C. 백성이 제물을 바침 (5절) D. 아론이 바치는 속죄제 수송아지, 염소, 아사셀 염소 (6-10절) E. 아론이 황소를 바침 (11-14절) F. 속죄제물로 바쳐진 염소 (15절) X. 속죄 예식 (16-20a절) F’. 광야로

보내진 염소 (20b-22절) E’. 아론의 마무리 (23-25절) D’. 아론이 바치는 속죄제 수송아지, 염소, 아사셀 염소 (26-28절) C’. 백성이 스스로를 낮춤 (29-31절) B’. 대제사장이 특별한 복장을 하고 속죄 예식을 집행 (32-33절) A’. 대제사장이 일 년에 오직 한 번 속죄할 수 있다 (34절) 결론 : 야웨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34절) 우리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 히브리 문학 구조가 갖는 신학적 강조점에 대해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매우 정교한 구성이죠. 더 나아가 이런 구성을 하게 됐던 이유에는 본래 성경이 구전문학과 같이 전수되어 왔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요와 판소리도 굉장히 긴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외워서 전수되었던 것처럼, 성경의 내용도 이스라엘 안에서 전수되었죠. 대칭적 구조를 갖는 것은 형태를 완전하게 보존하여 전수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의 초점은 하나입니다. 그럼 도대체 ‘대속죄일’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살아가기 위해서는 순서가 있습니다. ① 내용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②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③ 적용하는데, 적용은 ‘의미’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먼저 내용부터 살펴봅시다. 여러분. 지금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을 지킬까요? 네. 여전히 그들은 대속죄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방식은 조금 변경되었습니다만, 여전히 그들은 대속죄일(욤 키푸르)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속죄일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힌트처럼, 이것은 속죄를 위한 날입니다. 이 날에는 두 가지를 정결케 해야합니다. 성소를 깨끗하게 하고,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속죄일은 1년에 단 한 번 정해진 날입니다. 우리가 앞서 정결법에 대해서도 다루고 속죄의 제사 등에 대해서도 다뤘습니다. 백성 중 누군가는 죄를 짓고도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있기에, 이날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위해 대제사장이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지냅니다.

대속죄일은 일종의 영적 대청소의 날입니다. (레 16: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레 1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특별히 지성소의 속죄소(시온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속죄소는 언약궤 위에 있었으므로, 속죄소는 하나님의 보좌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제사장은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대속죄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날이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대제사장의 의복은 화려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서 있을 때는 화려한 대제사장의 의복을 착용하지만, 이날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므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대제사장 또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분의 죄 사함의 은혜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향을 피우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 안에 향을 피워 속죄소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성소 안을 연기로 가득 덮이게 해야 합니다. 이 향은

반드시 번제단에 있는 불을 가지고 피워야 합니다. 앞서 레위기 10장에서 아론의 두 아들들이 다른 불을 임의로 사용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성소 안에 연기가 가득 덮인 것. 혹시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하나님의 임재 때 늘 함께 하는 ‘구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단어에서 ‘연기’와 ‘구름’은 같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 때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와도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적 차이가

크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기 위해 임재하시고 찾아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물은 수송아지 1마리, 숫염소 2마리, 숫양 2마리를 준비합니다. 먼저 대제사장 아론은 먼저 제사장 자신과 집안을 위해 수송아지를 잡아 속죄제를 드립니다. 속죄의 제물로 바친 수소의 피를 받아서 손가락으로 찍어 속죄소 덮개 동쪽에 한번,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려야 했습니다. 지성소에 피를 뿌리는 것은 죄와 부정결로 인해 더럽혀진 지성소를 깨끗하게 청소하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의

속죄가 끝났으니, 이제 모든 백성을 위한 두 번째 속죄 의식이 진행됩니다.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에는 수송아지를,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제에는 숫염소를 사용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숫염소가 양보다 더 귀한 짐승이었습니다. 숫염소는 2마리를 준비했습니다. 제비를 뽑아 제물로 쓸 숫염소를 택합니다. 그것을 죽여서 그 피를 수송아지의 피와 섞어 성소의 분향단 뿔에 바르고 그 위에 일곱 번 뿌립니다. 이것은 성소를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속죄제 수송아지와 숫염소의

기름은 번제단에서 태웁니다. 남은 고기는 진 밖에 있는 번제단의 재를 버리는 곳에서 완전히 소각합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부정결은 완전히 제거됩니다. 여기까지 진행하면 제사장과 백성, 지성소와 성소에 대한 속죄 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염소 한 마리가 남아있습니다. 중요한 의식이 하나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숫염소 2마리 중에 제비뽑아 하나는 제물로 사용했고, 제물이 되지 않은 염소가 남아있는데, 이 염소가 여러분이 들어봤을 수 있는 ‘아사셀 염소’입니다.

‘아사셀’이란 이름은 바위 절벽이나 낭떠러지, 악령의 이름 등으로 해석됩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과 가장 반대되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좋은 표현이 아니죠. 대제사장은 남은 숫염소 머리 위에 안수합니다. (레 16: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안수할 때도 의미가 나눠진다고 보는데, 한 손은 동일시의 의미를

갖는다면, 두 손으로 안수하는 것은 ‘전가’의 의미를 갖습니다. 즉 숫염소에게 이스라엘의 부정결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염소를 데리고 먼 광야로 끌고 갑니다. 여기서 광야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와 가장 먼 거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사셀의 이름이 광야에 거주하는 악의 세력을 의미하므로, 원인 제공자에게 죄를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이 염소는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인도해나갔던 사람은 돌아와 정결

의식을 통해 자신을 깨끗게 한 후,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번제를 숫양으로 드리며 속죄일 제사는 마무리됩니다. 속죄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는 가장 크고 중요한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일체의 노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날의 목적은 축제가 아니라 심판과 정화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과 회개를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것이 대속죄일에 행해지는 예식의

과정입니다. 즉 내용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럼 이제 모세오경의 중심, 레위기의 중심에서 속죄일이 왜 중요하게 다뤄지는지를 알려면, 속죄의 방법보다 속죄의 신학에 담긴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속죄일에 대한 이 내용을 그냥 읽으면 마찬가지로 하나의 매뉴얼에 불과합니다. 각각 정해진 짐승을 잡아서 속죄제사를 드린 것이죠. 하지만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과감하게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피를 죄인인 인간에게 뿌리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뿌리는가? 그리고

성소에 뿌려진 피를 통해 왜 인간이 속죄를 받는가? 이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출애굽기의 말씀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맺는 장면이 24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 아론의 아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부르십니다. 그중 모세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즉, 여기서는 시내산이 성소인 것이죠. 여러분, 원래 성전/성소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성소입니다. 시내산이 효험이 있는 산이 아니고, 성막의 텐트가 무슨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므로 그곳이 하나님의 성소와 같이 된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순종하여 지은 텐트에 하나님이 임하시니까 그곳이 성막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번듯하게 지어놓은 예루살렘 성전도 강도의 소굴을 만들어놓으니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 것이지요. 반대로 말하면 성스러운 직이라고 하는 목회자의 직책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이 성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시스템이나 방법에 하나님을 가둘 수 없어요. 다만 하나님이 임하시면 그곳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전반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할 때 방법을 개발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방법! 여러분, 제발 그런 것들에 속지 마십시오. 애초에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움직이겠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불순한 것입니까? 그냥 우리가 드릴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의 고백뿐입니다. 그것이 좀 부족해도 그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예쁘면 그곳에 응답하시고 그 삶에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기도가 ‘조건을 정해놓는 배우자 기도’입니다. 1) 키는 180 이상. 2) 어떤 성격. 3) 어떤 직업군. 어떤 사람들은 배우자 기도를 50개씩 정해놓고, 그리고 만나면 그것이 맞는지

체크해요. 하나님이 결혼 정보회사도 아니고, 우리는 너무 이상한 것에 때로는 심취해 있습니다. 점보는 데서 하는 것을 똑같이 하나님 앞에 적용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배우자 기도를 정말 하고 싶으시면,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 기도하세요. 내가 만날 좋은 배우자상을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안에서 훗날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훈련할 것인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내 조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쓰는 것이 우리의 옳은 태도입니다. 다시 출애굽기 24장의 언약식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시내산에서 백성들은 산 아래, 아론의 가족과 장로들은 중턱에, 모세는 산 정상으로 갔어요. 이것은 시내산이 성소가 된 것이고 중턱은 성소, 정상은 지성소에 해당하는 것이죠.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신 후, 백성에 전할 주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받고 산에서 내려와 언약식을 진행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말씀대로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기둥 열두 개를 세웁니다. 그리고 수송아지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12지파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위한 제물을 잡았으니 24마리의 소를 잡은 것이죠. 그리고 그 피의 절반은 그릇에 담고, 절반은 제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율법책을 읽은 후,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서약합니다. 그리고 그릇에 담아놓은 피를 백성에게 뿌립니다. (출 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바로 이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부릅니다. 언약의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반씩 뿌린 것이죠. 고대의 부족 간의 언약식은 짐승을 쪼개고 그사이를 함께 걸어갔다고 합니다. 죽음을 맹세하는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폭 영화 같은 데서도 함께 피를 내어서 섞어 마시지요. 그것은 피로 맺은 언약이고 배신하지 않겠다는 의지 아닙니까?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그렇게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로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 언약 체결을 통해 이스라엘과 성소는 ‘한 몸’으로 묶인 것입니다. 공동 운명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어디가 함께 부정해집니까? 성소가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성소를 정화하면 누가 함께 정결하게 됩니까? 이스라엘이 함께 정결하게 됩니다. 이것이 속죄일에 정결함의 예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속죄의 신학입니다. 제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이해일 수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왜냐하면 오늘 우리도 사실은 속죄의 신학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우리가 굉장히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냥 공식처럼 외우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정작 ‘그게 어째서 그래?’라고 질문하면, ‘그냥 그렇데’라고 이야기 하게 됩니다.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신학적 개념이 담겨 있고, 그것을 이해하려면 대속죄일의 속죄를 통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아까 우리가

대속죄일의 속죄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었다면,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하는 것이죠. 어떻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자 성전이죠.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봤던 것처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시죠. 그리고 설명되는 것이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성전, 즉 구약의 성소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로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이 그분 안에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이신 예수님은 언약으로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스라엘의

부정함이 성소를 부정하게 만들고, 성소의 정결함이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는 것처럼...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가진 의미와 능력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어요. (마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가 성찬식을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하시면서 잔을 나누실 때, 이것이 언약의 피라고 하셨어요.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의 피가 언약의 피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그 언약 안에 묶인 우리가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레위기의 속죄일 규정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사이의 시간의 간격이 1500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우리의 간격이 2000년쯤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구약도 예수님과 지금 우리의 간격만큼이나 시간의 간극이 커요. 그런데 하나님이 레위기를 통해서 마련하신 속죄의 규정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미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능력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보여주시잖아요.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한 인간이 죄를 범한 후,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옷을 만드는데... 하나님이 정하신 규정대로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하시지만, 그들을 내보내실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가죽옷은 동물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동물의 희생을 통해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에게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이미 드러난다고 보는 본문입니다. 유월절 사건에서는 양의 피로 구원하시고,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서 그 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시간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성경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기에, 오늘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 사함의 은혜를 얻는 것은...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와 예수님이 언약 안에 하나가 되어, 그분의 죽음이 곧 나를 살리는 생명이 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율법의 완성이시고, 성취이시며, 그는 또한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대속죄일은 1년에 한 번 행하는 구별된 중요한 날이지만, 그래도 그것의 효력은 1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 되신 속죄의 제사는 영원한 효력을 지닌 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지성소에 하루에 한 번 들어가서 향이 가득한 연기 속에서 주님을 만났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어주신 길을 따라 걸어가는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성전이 되어 그분과

동행하여 살아가는 삶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에게도 1년에 한 번 허락된 지성소인데,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나아갈 수 있냐고 묻는다면... 자격 없는 우리에게 자격을 허락하신 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바로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커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언제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예배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레위기 전반부 네 편의 설교를 나눴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설교들 가운데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새겨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설교를 준비하는 저에게 한 달간의 레위기 여정이 남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원하시는 분이구나’라는 사실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_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 나 없이 살기보다는 나를 위해 죽는 편을 택하셨다.” 제가 순종의 사람은 방법을 찾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하셔야 할 분이 아님에도 사랑하시기에

늘 우리를 회복시킬 방법을 찾는 분이라는 사실이 저에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속죄’의 원뜻에 포로나 노예를 그 주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고 '되사는 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전에 노예들은 몸값이 있었습니다. 몸값을 지불하면 지불한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를 다시 찾아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지불해야 할 몸값이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되찾아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롬 3: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롬 3:25a)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23절은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고 그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할 수 없기에 우리가 죽음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4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러므로’가 아니라 ‘그러나’로 시작하는 것이 은혜이죠. 우리의 죄가 가져온 결과이지만, 하나님은 그러나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닙니다. 내가 피를 보면서 소름이 끼치거나, 피로써 씻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사실(FACT)에 대해서 내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소를 피로 정화할 때, 이스라엘이 정화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그분과 언약의 백성된 우리의 죄를 씻어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의 피를 믿을 때 유효합니다. 아! 자격 없는 나인데, 하나님이 이런 나를 구하시려고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셨구나! 그 사실을 믿으며 힘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자격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음을 고백하며 내 힘이 아니라

주의 힘을 의지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온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함께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가 더이상 죄의 정죄함 아래 있지 않고, 나의 부족함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한 마음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자유를 노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작게 보이게 할 때가 있습니까? 피라미드와 같이 위로만 올라가야 할 것 같은 세상에서 나 자신이 무력해 보일 때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존재 가치는 세상이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존재가 작게 보이거든,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생명의 값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존재적 가치입니다.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존귀한 여러분의 삶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