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풍삶첫 4과 / 인격적인 하나님, 어떤 분이신가? / 강정규 목사

2022-04-01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 인격적 만남 인격적이라는 표현을 교회에서 많이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곤 하죠. 그럼 인격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하면 ‘사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성부-성자-성령,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 형태를 말로써

표현한 것이지,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논리와 현실 속에는 없습니다. 세분이시며 한분이라는 것이 명백한 하나님의 존재방식인데, 이것을 우리의 언어와 논리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을 때도, 하나님의 하늘 보좌가 비어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하늘에 있든, 바닷속에 있든 언제 어디서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도, 예수님께 기도해도, 성령님께 기도해도 우리는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세분이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파를 나누고, 눈치를 보면서 곤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예배한다고 예수님이 삐치는 것 아니야?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계시면서 ‘나는 왜 안보냐?’ 하시는 거 아니야?”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분이 하나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예배해도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삼위 하나님은 함께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은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학자들은 그것이 복수로 기록된 것을 ‘천상의 회의’ 등 소통과 연합의 장면으로 이해합니다. 세 분 하나님이 각자의 뜻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서로 소통하시며, 무엇보다도 깊은 사랑 가운데 온전한 연합(하나됨)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누렸던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기도 합니다. (요

17:5)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십니다. 즉, 인간에게도 삼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소통하고 사랑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인간과 동물이 구별되는 중요한 구별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특별하게 지으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동물 가운데 한 개체가

진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도 동물이나 다른 피조세계처럼 유한합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동물이나 다른 피조세계가 누릴 수 없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은 만들어 낼 수 없는 사상, 과학, 예술,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 측면에서 하나님이

그런 특별함을 주셨지만, 존재적 측면으로서 보았을 때는 우리도 피조물의 유한함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역을 초월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그분을 찾을 수 없고, 우리의 인식으로 그분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차이입니다. 그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본래 우리의 능력으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우리는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설 수 없습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합니다. 성경이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롬 3: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값없이’라는 표현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먼저 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마 20: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주일 설교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몸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는 죄 아래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길을 내셨다”라는 표현을 제가 자주 쓰는데, 우리가 길을 만들고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돈으로도 못가요, 힘있어도 못가요, 맘 착해도 못가는” 하나님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죄의 속박 아래 있던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은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향해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소통법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무언가를 행하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가끔 이런 표현을 씁니다. 하루살이는 다음 주를 알지 못합니다. 바닷속 물고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존재론적 한계가 모든 피조물에 적용됩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서 알 수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스스로 더듬어 터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인식과 사고, 감각과 체험의 한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계시’라는 표현이 그것인데, 커튼을 열어서

보여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어떻게 계시하셨나요?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완벽한 계시가 성경입니다. 여러분, 글은 인간에게 허락된 미디어입니다. 강아지가 글을 쓰지는 않지요. 글은 오랜 세월 계속 볼 수 있는 인간이 가진 최고의 소통 수단입니다. 글로 남겨진 것은 객관성을 갖습니다. 성경은 약 1500년에 걸쳐 40여 명의 다양한 배경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성령의 영감 가운데 쓴 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지 다양한 역사적

환경에서 다양한 문학적 형식(장르)을 빌려서 기록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가 오늘 이곳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무의미 할지도 모릅니다. 각자가 직통계시로만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면, 여러분이 굳이 저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하나의 신앙 안에서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또한 우리의 개인적/사회적/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고통이 만연한 깨어진 세상 속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 보여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사역에 초대하십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스스로를 갈고 닦아 자신이 신이 되거나, 신과 합일하는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와주신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얻고, 그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아가며, 그 뜻을 이해하고 그를 따라가는 것을 추구합니다. 3. 만남의 실제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면, 우리는 오감으로 하나님을 느끼고 소통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기도, 설교나 찬양 중에 드는 어떤 느낌이나 체험을 인격적인 관계라고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체험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체험이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체험은 주관적입니다. 주관적 체험은 함부로

객관화 할 수 없습니다. 주관적 체험은 검증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앞서 언급한 객관적 진리인 성경 안에서 검증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체험에 대한 영역을 열어두어야 하지만, 거기에 의존하는 신앙은 지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표적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이지만, 표적 자체에 마음을 뺏기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가져오는 일도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더 견고하게 신앙을 세워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좋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런저런 체험은 뒤따라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장애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오해가 장애물이 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만 대하고 있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필요하면 찾고,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싶은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는 쉽지 않습니다. 또 소통이 없는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가부장적’ 하나님으로 오해합니다. 혹은 우리를 늘 감시하고 규율을 위반하면 처벌하는 ‘경찰’ 같은 하나님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편견’ 혹은 ‘선입견’이라는 장애물에 빠지면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면 내가 가진 오해와 편견이 해소되며 이해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인격적 관계도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며 이런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다행인 것은 하나님은 그런 오해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추구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기쁨으로 오셔서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말씀 가운데 거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호 6:3)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지금 호세아 선지자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매년 가을비가

오고, 봄비가 어김없이 오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주님을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우리가 고행과 수련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이미지는 다른 종교가 갖고 있는 신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보다 크십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떻게도 그분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알고자 하면, 그래서 성경을 찾고, 예배를 통해

그분 앞에 서면... 누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저는 그래서 이 그림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이 그림에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예수님 쪽에 문을 여는 손잡이는 없습니다. 이 문은 우리의 마음의 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이고자 하면, 우리보다 더 우리와 함께 해주려고 찾아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실 것입니다.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는다면, 성령님을 통해서 주관적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님은 그 말씀을 우리 삶에 해석하여 알려주시는 친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님꼐서 어떻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기도를 도우시며 일상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지는, 이 다음에 이어지는 주제 속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비로운 체험보다,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가끔씩 설교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때 “목사님, 오늘 설교를 듣고 제가 너무 찔리기도 하고 고민이 많아요.”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부터 저는 다시 고민에 빠지곤 했습니다. 내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힘이 되기보다 고민을 안긴 것이 죄송한 것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합니다. 설교가 그냥 회중에게 던져진 메시지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메시지가 되었다면, 저는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설교가 그저 들렸다 사라지는 메시지가 될 바에는, 찔러 쪼개는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요즘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교회는 새벽예배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여러 가지를 하고 있죠. 그래서 교회도 바쁘고 저도 바쁘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스스로 시간에 대한 결단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시간이 잘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10-10-10을 나눴습니다. 하루에 세 번 10분씩이라도 하나님과의

시간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삶을 시작한다면, 저는 우리의 삶에 놀라운 영적 여정이 시작되는 첫걸음이 되리라 믿습니다. 알아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알아가는 일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드리지 않고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운동도 하지 않고 근육을 만들려는 것이 말이 되지 않고, 데이트도 하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기도를 드릴 때 나를 아시고 나를 이끄시고, 내 기도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진실되게 나아가십시오. 오늘 이 기도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십시오. 가까이 계시는 주님, 오늘 내 마음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고, 그분께 나누고 그분께 구하고 그분의 마음을 듣고자 하십시오. 오늘 이 시간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예배, 소중한 찬양과 기도의 시간이 이어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