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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된 나라" / 강정규 목사

2022-04-03 · 요한복음 13-1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와 말씀을 전합니다. 1장 서론 2-12장 표적의 책 4가지 유대 제도 (혼인잔치 / 랍비 / 성전 / 사마리아 야곱의 우물) 4가지 유대 절기 (안식일 / 유월절 / 초막절 / 수전절) 나사로를 살리심 ---------------------------------------------<예루살렘 입성> 13-20장 영광의 책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세족식 /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 : 성령, 사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 부활하신 예수님) 21장 부록 저에게는 오늘을 포함해 여러분에게 요한복음을 나눌 수 있는 세 번의 설교 기회가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다룰 것이고, 다음 주는 십자가 사건을 다룰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는 부활과 마지막 부록에 대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12장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 향유 섬김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1) 우선 향유 부은 사건은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7장,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이 중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동일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완전히 다른 사건입니다. 일단 베다니가 아니라 갈릴리 나인성의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고, 창기였던 죄인 한 여인이 향유를 붓습니다. 요한복음의 사건은 마태/마가의 사건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라고 본다면 향유 부은 일이 2회 있었던 것이고, 요한복음도 다른 사건으로 구분한다면 3회 있었던

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록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런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사건과 4,000명을 먹이신 사건이 구분되는 것처럼, 이것도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2)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오해입니다. 여러분의 생각 속에 마리아는 어떤 인물입니까? 어떤 마리아가 떠오르시나요? 성경에 마리아가 너무 많다는 것이 우리의 어려움입니다. 마리아의 히브리식 표현이 ‘미리암’입니다. 모세의 누이 이름이죠.

그런데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총 6명입니다. ① 예수님의 어머니 ② 글로바(알패오)의 아내이며 야고보(제자)와 요셉의 어머니 ③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베다니) - 요한복음 향유 사건 ④ 막달라 마리아 –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인 – 누가복음 향유 사건의 가능성 / 부활의 첫 목격자 ⑤ 마가(복음서 저자)의 어머니(다락방 주인) ⑥ 로마의 마리아 – 로마 교회 공동체 성도. 아마도 이 중에 베다니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혼재된 분들이 있을

수 있어서 한번 짚어 드립니다. 향유 사건 이후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양합니다.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사로 사건으로 인해 더욱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요 12:17)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요 12: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요 12:19)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이 시기가 유월절이 가까웠으므로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있었죠. 유명한 예수님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고자 모여듭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2: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요 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요 12: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요 12:26)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이 ‘때’가 되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예수님께 맡겨진 사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는 그러한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담당하신다는 것이 예수님께 괴로움인 이유는 단순히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치 아사셀

염소가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음의 낭떠러지로 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죄 덩어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분에게 하나님과 가장 큰 분리와 결별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하나님이 ‘유기’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오셨고 그것에 순종하기 위해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12: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 (요 12:33)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당하실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이 일은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의 통치를 끝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을 속량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시죠?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린 중요한 개념.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가? 그 언약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백성이 하나이기에, 예수님이 치른 희생이 내 죄가 값을 치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죄의 통치 아래에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나아가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묵묵히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향한 발걸음에서 아마도 예수님의 눈에 가장 밟히는 존재는 사랑하는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가끔 장례식장에 가면 아무것도 모른채, 신나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 자녀들을 만나곤 합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아직 장성하지 못한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면, 그들의 존재가 가장 눈에 밟힐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영적 아이와도 같았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지만, 아직은 오해와 무지가 가득한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었으므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그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할 만큼 때가 가까웠음을 아셨죠. 그래서 13장부터 펼쳐지는 요한복음 후반부는 바로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으로 시작됩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 13장부터 이어지는 최후의 만찬과 마지막 설교를 참 좋아합니다. 제가 얼마 전 있었던 청소년 캠프 집회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우리 학생들에게 이 설교가 마지막 설교라면 어떤 이야기를 전해야 좋을까? 그래서 저는 모태신앙으로 자라고 있는 그들에게 <신앙의 유산>이라는 설교를 전하며, 우리 학생들이

지금 부모님을 통해서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러나 그 신앙의 유산은 반드시 명의이전이 필요한 것으로서, 스스로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기 위한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그 과정에 꼭 성공하자고 나눴습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마지막 설교를 해야 한다면, 저는 별 고민 없이 오늘 이 본문에 대해서 설교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사랑’과 ‘성령’입니다. 다음 세대 사역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하나 있습니다.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말로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게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르치기는 쉽죠.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혹은 가르침을 잘 이해하기 힘든 경우에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것은 먹을 것 사주기. 입이 열려야 마음이 열립니다. 같이 놀던지,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그런 것들이 선행된 이후에 비로소 말로써 가르치는 것들이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제자들과의 시간에 가장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행동을 하십니다. 가르침보다 이것이 먼저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가르친 후에 2부 순서로 이 일을 하겠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발을 씻어 주는 것에는 2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에 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속에서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감히 자신의 발을 스승이신 예수님께 내어드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번에는 또 오버를 하죠. “주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이제 주님과 우리가 상관이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관계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침 얼마 전에 레위기를 보았는데, 언약 백성의 지위가 죄 한번 지었다고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부정함도 죄도 정결법과 속죄의식으로 씻어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조차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불순종의 모습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죠.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가 다 아직 연약함 가운데

있지만, 예수님이 보시는 그들의 마음 중심에 열한 명의 제자는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나 유다만큼은 그 마음이 사탄에게 넘어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섬김의 모범’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법에 따르면, 같은 유대인일 경우에 상전이라도 종에게 발을 씻겨 달라고 명령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발을 씻어 주는 행위는 너무 천하기 때문에 함께 하나님 백성 된 유대 공동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으로서 상전의 발을 씻기는

것도 아니고,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으니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 13:14)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우리가

세상과 반드시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함께 그렇게 살아가자고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죠. 서로 남의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며 섬겨주셨으니, 그와 같이 우리도 서로를 사랑하며 섬겨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도 로마시대 가장 비참하고

굴욕적인 죽음인 십자가로 향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의 발자취입니다. 주님은 발을 씻어 주는 섬김을 행하신 후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요 13: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시내산에서 동물의 피로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 언약 안에서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피로 언약을 맺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새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여러분. 내가 나의 눈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의 허물을 보면 그것을 이해하고 품어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내 옆에 누군가의 행동이 유난히 거슬리고 있다면, 그것은 그 허물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다는

이야기처럼, 도둑이 도둑을 알아봅니다. 물욕이 있는 사람이 물욕이 있는 사람을 알아봅니다. 위선이 있는 사람이 위선 있는 사람을 가장 잘 알아봅니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의 행동에서 안 좋은 것을 자꾸 발견하는 사람은 내 안에도 그것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내가 누군가를 포용하고 용납하려면, 나의 눈이 아닌 예수님의 눈으로, 나의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하나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사람이 그로 인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안타깝게 여기며 우리를 구원할 방법을 찾으신 분이 아니십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랑하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자, 이 사랑에 대한 계명을 가운데 두고, 앞에는 ‘발을 씻어 주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고, 뒤에는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이 연관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 관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행함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실천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사랑을 고민해야 하죠. 저는 여러분이 서로 모였을 때,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대로 여기서 행해져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행하는 태도와 모습이 그대로 여기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만 모습을 숨기라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바꿔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습하고 세상에서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지위를 얻으면 섬김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위를 얻으면 그로 말미암아 편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지위를 맡는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이웃 섬김을 감당해야 합니다. 결코 그것이 더욱 편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서 리더가 될수록 그 삶이 편해지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조금이라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 나라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거꾸로 된 나라’(upside down kingdom)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팀으로 섬긴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전체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 내 시간을 드리고, 내 재능을 드려서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팀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그 예배의 팀 가운데 리더로 더욱 섬기는 것입니다. 그 예배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고, 준비하고, 돌보며 섬겨야 합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시간을 쏟을 준비를 하고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교사로 섬깁니다. 제가 교사들에게 아이들보다 더 나은 예배에 대한 준비와 모범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 자리에서 행해야 할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먼저 예배에 와서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를 온전하게 준비하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하는 것. 그것이 섬김입니다. 대표교사, 대표간사는 무엇입니까? 그 공동체와 그곳을

섬기는 교사들을 위해 한 걸음 더 섬기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팸 리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품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기에 리더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교회 공동체가 유지되고, 하다못해 이 예배의 순서와 이 공간이 준비되고 관리되기 위해서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그 섬김은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법이죠. 리더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을 배워가는 누군가를 위해서, 그 사랑을 조금 더 먼저 고백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죄송하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편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우리가 편해지는 것은 주님 앞에 갈 때나 편해지는 것입니다. 일할 수 있을 때는 헌신하여 일하고, 헌신하기 힘들 때는 기도로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섬기다가 죽는 것. 죽기까지 사랑하며 섬기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내 삶에 나의 섬김과 사랑, 나의

돌봄과 영적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에게 그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넘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4장의 내용이 바로 그것을 말해줘요. 우리가 사랑하라는 계명을 행할 자질이 없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능력이 없다고 느낄 수 있죠.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시키지 않으시거든요. 14장에 그것을 행할 방법이 나옵니다. (요 14: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예수님처럼 어떻게 살 수 있나요? 주님께 묻는다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무슨 소리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거야.” 예수님이 길을 열고 시작하셨다면, 사실 예수님을 전하며 그 나라로 초청하는 일의 열매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의 제자들은 더 오랜 세월을 살며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이것은 더 굉장한 일을 한다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전하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늘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입니다. 최소한 사랑하려는 노력과 도전이라도 있어야겠죠. 우리는 순종하고자 하는 진심이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 사랑을 이루시는 것은 그것 또한 하나님입니다. 내가 나의 힘으로 사랑하고, 나의 힘으로 섬겼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나의 의’입니다. 나의 의를 갖고 섬기고 사랑했다고 여기면, 그 교만함에 또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맡기신 일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우리를 돕는 분, 위로하고 권면하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령님만이 보혜사가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보혜사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보혜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고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더 중요한 사명을 위해 제자들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이것이 예수님이 떠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명을 다하시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계명을 행하며 주님의 승리에 동참하여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요

14:24)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요 14:25)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요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예수님은 제자들 곁을 떠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면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령’이잖아요. 우리의 영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듣고자 하면 성령님께 들을 수 있습니다. 혹시 내가 옆

사람을 바라봤을 때, 예전에는 화났던 것이 나였는데... 어느 순간 옆 사람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내게 없던 마음이 생각나십니까? 그런 말씀들이 기억나십니까? 그것이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사랑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14:21)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앞서 언급한 사랑의 실천, 섬김의 실천을 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더욱 사랑해주십니다. 이것이 내 힘으로 일하는 사람과 하나님 힘으로 일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저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굉장히 강했던 사람이고, 더군다나 인정욕구가 강했던 사람입니다. 목사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내가 목사님의 아들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그런 삶을 살 때 칭찬해주시는

소리 때문에 더욱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수많은 일을 열심히 행하고 바르고 착한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신학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성령님과의 어떠한 교제도 제 안에는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신실한 신학생이고, 교회에서 열심 있는 청년인데... 제 안에 성령님과의 교제와 소통은 없었습니다. 그 모든 행함은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는, 인정받으려는 저의 열심이었죠. 그러니 당연히 탈이 날 수밖에요. 제 안에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더이상 교회 사람들이 아니기 시작하니까 교회에서의 열심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고스란히 학교에서 제가 더 잘 보이고 싶은 대상들 앞에서의 열심히 옮겨가 버렸을 뿐입니다. 교회에서의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하기 싫어졌습니다. 온갖 불평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는 예배만 드릴래요. 예배에 집중을 못 하겠어요.”라며 다시 제게 필요한 결정을 제 스스로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역을 그렇게

그만두었습니다. 그때부터 편한데 전혀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열정적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죠. 그러나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교회에서 자란 저를 다 용납해주는 상황이었다면, 학교의 또래 집단에서는 시기와 질투를 받기도 하고,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힘겹게 하는 공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심의 동기 자체가 사람들에게 있었는데, 그 안에서 오히려

공격을 받는 일들이 있으니, 그 잘못된 동기가 오래가겠습니까? 곧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게 되는 상황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도 전체를 대표하는 리더였는데, 오로지 성실함과 좋은 관계성으로 얻은 자리였을 뿐, 제 안에 성령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신학교 3학년인데도 그게 뭔지를 몰랐습니다. 제게 성령님은 그저 ‘은사’, ‘능력’ 이런 것이었죠. 결국 리더의 자리에서 내 힘으로 일하고, 내 힘으로 사랑하려다가, 더욱 지치는 일이 발생했고, 곧

저는 감당할 수 없는 큰 부담 앞에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위기는 기회가 되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울 만큼 위축되고 작아진 저에게 하나님은 성령님이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내 안에 계신다는 그분을 잠잠히 묵상하고, 그분이 내게 주시는 마음들을 따라서 행하다 보니, 내 생각보다 더 크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가며 그분이 이끄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내 고집을 꺾기가 쉽지 않았죠.

그러나 그분이 행하시는 일이 만들어내는 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을 바라보며 나중에는 더욱 내 삶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여기저기서 설치고 다니면서 그렇게 힘들었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만 하려고 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래서 진심으로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주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행할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힘썼습니다. 순간순간 멈추어 물어보고, 기도하며 행동하고. 교회에서도 다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마음들이 생겨났습니다. 얼마 전까지 그 모든 것이 고되다고 여겨서 다 내려놨는데, 그것이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시 그전에 했던 일들을 맡아서 하게 되었을뿐더러, 전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힘들지 않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 내 힘으로 하면 내가 고갈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심을 날마다 고백하며, 그 사랑이 흐르는 방향으로 함께 흘러가서 사랑을 행해보십시오. 그때 내 힘이 아닌, 영원한 주의 사랑으로 우리는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한결같지 못해서 그런 삶에도 흔들릴 때도 있고 희미할 때도 있지만, 나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그분이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구름이 잠시 태양을 가렸다고 하여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니듯, 내가 잠시 성령님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여 그분이 내 안에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경의 사실을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5: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마지막 제자들과의 시간에 뭔가 더 맡기고 뭔가를 더 짐을 주시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셨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행복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무엇을 말합니다. 우리가 위로

올라가야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그 위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아래에서는 또 내가 올라간 것처럼 올라오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내 위에는 그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이 있을 터인데... 그 쉼 없는 경쟁 속에서 어떤 평안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미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의미있는 삶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요한복음이 쓰여진 로마의 시대가 말하는

평화, ‘팍스 로마나’ 또한 힘으로 억눌러 만든 평화인데... 그 꼭대기에 있는 황제가 얼마나 평안했습니까? 부하들에게 수없이 배신당하며 암살당하던 것이 로마 황제의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는 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으십니다. 이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 계명. 새 계명과 함께 우리에게 와주신 성령님. 그 성령님의 손잡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분을

따라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