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거룩(카도쉬)" / 강정규 목사

2022-03-13 · 레위기 8-1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레위기에 대한 두 번째 설교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레위기를 이해하면서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들을 몇 가지 나눴습니다. 창세기가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어가시는 준비단계라면,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식을 맺은 이후, 이제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실제적 동행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죠.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찾아가서

거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인간 사이에 머물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막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는 언약식 이후 곧바로 성막에 관한 이야기가 후반부를 모두 차지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가운데 위치하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오시고,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불러서 그것에 대해서 가르치는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애굽에서 열 재앙 사건,

유월절 사건, 홍해 사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등 수많은 기적을 그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을 뵈러 올라가서 오지 않자,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합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인간이 지닌 죄성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뵈러 올라간 40일을 참지 못하고 저지른 일입니다. 그 일의 주동자들은 심판당하지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용서의 길을 마련하시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여시는 것이 레위기의 내용입니다. 레위기는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하지 않을뿐더러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는 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죄는 봐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죄를 봐주신 적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해결할 방법을 주시거나 혹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구약은 바로 우리가 죄를 해결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동물의 희생이라는 대가 지불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동물 제사를 원하시거나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특권입니다. 레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거룩’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이제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요구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을 히브리어로 ‘카도쉬’라고 하는데, 레위기 안에 이 단어는 무려 152번 등장합니다. 구약성경 전체의 23%에 해당합니다. 또한 ‘정결’이라는 표현도 74회 등장하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의 1/3에 해당합니다. 반대 개념인 ‘부정’이라는

단어는 132회로 구약성경 전체의 약 절반 정도가 레위기에 등장합니다. 레위기를 잘 모르는 사람이 레위기를 읽으면 이 책은 제사법 매뉴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단순히 제사법을 다루는 것이 아니지요. 유명한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이 있죠. ‘I BELIEVE’ 음악이 깔리면서, 차태현이 자신의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말해주는 장면이죠. 레위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알아감의 목적은 그분과 더 깊은 동행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 가운데로 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룩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듯,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반응의 방법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거룩을 명하는 것은 절대적 거룩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거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을 잘 아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으로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어요. 이제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의 거룩함을 알려주시고, 그것을 행하도록 하셨어요. 그것이 우리의 거룩입니다. 그래서 거룩을 조금 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꾸면 ‘구별’입니다. (레

20: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우리 교회의 올해 표어가 ‘어두움에서 빛으로’ 아닙니까?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우리가 어두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죠. 어두움과 빛이 만나면 둘 중의 하나만 남습니다. 함께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것은 내 안에 빛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그분이 주인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빛이죠. 레위기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제사의 방법에 순종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에 동참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세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만약에 하나님이 선악과만 먹고 나머지는 다 먹지 말라고 했으면, 그건 좀 하나님이 너무 하셨죠. 그런데 아니잖아요.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모든 것을 허락해주셨어요. 선악과 하나만 유일하게 막으셨어요. 배고파서 이거 먹은 것 아닙니다. 이 열매가 제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웠다고요? 다른 것보다 이것이 유난히 맛있어 보이게 만드셔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선악과는 늘 거기에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거기에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꿔놓습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이야기를 듣고 나무를 보니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그때부터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거짓된 욕망의 필터가 눈에 덮였거든요. 그러니 유혹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고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주세요. 언제나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문구처럼, ‘순종의 사람은 방법을 찾고, 불순종의 사람은 핑계를 찾습니다.’ 이미 마음을 먹고 그렇게 바라보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시험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탄의

시험(유혹)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것이지만, 그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탈락시키려고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대한으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자신을 맞추시어 다가오시고 사랑으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말씀하시는 거룩이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은 절대적 의미의 완벽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고자

하는 진정성과 순종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나의 라이벌은 ‘어제의 나’인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좋은 신앙인이 되려는 마음보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 내가 조금 더 하나님 앞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쓰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모든 내용들은 우리와 동행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규정들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진정한 의미의 제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 1-7장을 통해서 5가지 제사가 무엇인지 우리가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위해 적용해야 할 텐데, 그 안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자의 역할입니다. * 레위기 1장에 나타난 번제의 순서 (수송아지 기준) 예배자 :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 후, 소를 죽인다. 제사장 : 소의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린다. 예배자 : 소의 껍질을 벗기고 토막 낸다. 제사장 : 제단에 불을 지피고 나무를 가지런히 놓은 후, 토막 낸 번제물의 머리와 기름 있는 부위를 올려둔다. 예배자 : 제물의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는다. 제사장 : 제물의 모든 부분들을 제단에서 불태운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번 강조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의 주체가 예배자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제사에 참여만 하고, 제물만 가져가면

제사장들이 알아서 다 해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레위기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성막을 신혼집에 비유했잖아요. 부부는 서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으로 섬기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구약의 제사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오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제물의 목을 칠 때 튀어 오르는 피를 뒤집어쓰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때의 피비린내와 내장과 다리를 씻을 때의 역겨운 악취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그의 제사는 살아 있는 제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물을 잡으면서 사실은 제사드리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삶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인 됨에 대한 인정과 고백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주인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잖아요. 그러한 세상의 가치관에서 내가 구별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예배입니다. 예배의 최선은 결국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그러한 우리의 결단을 담아낸 행위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특권의 시간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앞에서 나를 내려놓고, 그처럼 내 마음의 문이 열리고, 내 심령 안에 자리가 생길 때,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역사하고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일주일 동안 자신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예배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거룩함입니다. 구약의 제사에 있어서 예배자는 회중도 있지만, 레위인과 제사장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예배자입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8-10장은 바로

제사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에 대한 부분은 우리 가운데 2가지 관점으로 나눠서 적용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적 측면에서 제사장은 오늘날 목회자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은 공동체의 예배를 위해 존재하며, 이스라엘 전체 지파의 제물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했던 것도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섬기고, 백성들은 제사장을 섬깁니다. 서로 섬기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섬김의 선순환 구조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사장에 대한 것이 목회자나 교회의 리더에게만 적용이 가능한 말씀이라면,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이 부분을 다루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성경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과의

관계 앞에서 모든 신자는 제사장입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첫 번째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한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아론의 아들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등 4명입니다. 아론까지 5명이 제사장으로, 특히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세워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론은 황금 송아지를 만드는 일에 동조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부분을 보면 성경은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인위적으로 만들려 해서 그 종교의 정경을 쓴다면, 저는 결코 성경의 내용처럼 이상하게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이상한 부분이 많아요. 예수님을 전하려고 성경을 썼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아주 난잡한 집안이라고 폭로해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론인데, 바로 앞에서 아론은 황금송아지 사건의

방조자입니다. 무슨 책이 이래요. (출 32:23) 그들이 나에게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인도하여 줄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모세라는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기에, (출 32:24)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 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던 사람이 아론입니다. 저에게 가상으로 꾸며서 성경을 쓰라고 했으면 저는 절대 이렇게 안 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하기에 성경이 사람이 쓸 수 없는 책이라고 점점 더 느낍니다. 이 책은 우리의 이성과 합리성을 뛰어넘어요. ‘이런 얘기도 쓴다고? 이런 사람도 사용하신다고?’ 이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은 그토록 연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론을 용서하시고 그를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요? 자격 없는 나에게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시는 분.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는 백성을 대표하여 서 있고, 백성들 앞에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서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의복에 신발은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은 신발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오늘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제사장의 사명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대제사장은

누구일까요? 담임목사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계시죠.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큰 대제사장’은 사실 문법적으로는 어긋난 표현입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표현한 것은 지상의 대제사장보다 더욱 구별된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시라는 표현이죠.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요한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죠. 예수님의 모습이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있습니다. 신약의 끝에 있는 요한계시록에서 구약의 대제사장 모습으로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구약의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의 사명이 신약의 교회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성도는 제사장입니다. 교회는 제사장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롭게 이뤄지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을 비추는 제사장으로 이곳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흩어져 거룩한 사명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8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의식이 행해집니다. 7일 동안 행해지는 의식은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안에 제사가 시작됩니다. 그것이 9장입니다. (레 9:4) 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숫양을 가져오고 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하매 (레 9:5)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회막 앞으로 가져오고 온 회중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선지라 (레 9:6) 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예배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그분과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빠진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때 가능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를 예배 가운데 경험해야 합니다. 목사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도구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따라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순종의 모습 가운데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예배에 참여한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레 9: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민수기 6장에 보면

아론의 축복기도가 나옵니다. 이 대제사장의 축복기도를 삼위일체로 바꿔놓은 것이 현재의 축도입니다. 오늘날 예배가 축도로 끝나는 것은 예배하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 온 회중과 함께 드린 첫 번째 제사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바로 그 제단에 하나님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레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모세에게 처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떨기나무의 불로 보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예배 가운데 거하시며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막이 완성되고, 드디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제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불은 하나님의 불로써, 절대 꺼트려서는 안 되는 불이 되었습니다. 불은 곧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불이 꺼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며 경탄해야 합니다. 경외해야 합니다. 예배는 거룩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 앞으로 우리가 초청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셨기에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 예배를 통해 내 삶이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늘 순종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적용되는 신앙의 상식입니다. 언제나 예배를 통해 받으시는 것은 형식이 아닌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살아감을 깨닫게 되는 것이 8-9장의 메시지라면, 불순종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10장입니다. (레 10:1) 아론의 아들 가운데서, 나답과 아비후가 제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불을 담고 향을 피워서 주님께로 가져 갔다. 그러나 그 불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과는 다른 금지된 불이다. (레 10:2) 주님 앞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죽고 말았다. 앞에서 7일에 걸쳐서 열심히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는데, 그중에 두 아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10장에 언급된 내용들을 보았을 때, 그들의 잘못은 크게 2가지 측면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의 방침을 마음대로 어겼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측면이 그것을 드러냅니다. 둘째, 그들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신 후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기 때문입니다. (레 10:9) 너의 아들들이 너와 함께 회막으로 들어올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라. 어기면 죽는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구별된 삶이 곧 거룩한 삶이기도 합니다. 구별은 내가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서 나답과 아비후의 불순종은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모습으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레 10:3)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게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나의 거룩함을 보이겠고, 모든 백성에게 나의 위엄을 나타내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론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모든 방편을 마련하시고 길을 내어주시고 자격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으로 임명된 나답과 아비후는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망각해버립니다. 마치 자신들이 제사장이 되었으니 자격을 갖췄다는 착각에 빠졌을까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지켜야 할 계명을 무시하고, 구별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크게 깨닫게 됩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이 일 후에 4번이나 언급됩니다. 아마 이 사건에서 술의 문제가 언급되기에, 혹시 술과 가까운 분들은 마음에 찔림이 더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찔림을 여러분이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 부분에 대해서 주시는 마음들이 있다면 더욱 깊이 그 마음을 묵상해보십시오. 저는 술을 마시는 것보다도 그런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거룩은 순종하는

것이 시작이고, 구별된 삶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술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제가 드리는 권면은 늘 이렇습니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 된다는 금지명령으로 이것을 대하기보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일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삶을 살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그렇게 여러분이 변화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거룩을 배웠습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적 사명이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하죠. (레 10:10) 너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여야 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여야 한다. 거룩, 속됨, 정함, 부정함 등의 단어가 다소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표로 이것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 점선은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우선 여기서 ‘속됨’을 기억하십시오. ‘속된 사람’(common person)은 피조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점선은 바뀔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속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실 서원을 하면 평범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서원이 끝나면 다시 평범해집니다. 오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별하는 것, 즉 거룩하게 하는 것과 속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함’(깨끗함)과 ‘부정함’(더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이것은 어떤 사람이나, 장소, 또는 사물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것이 정함과 부정함 사이를 오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결케

하는 것, 즉 씻는 것과 오염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됨의 영역은 ‘정함’과 ‘부정함’을 같이 접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것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나 부정함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즉, 부정한 상태에서 거룩한 상태로 갑자기 옮겨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회개를 안 했는데 성령을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부정한 사람은 먼저 깨끗하게 된 후에, 거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거룩은 우리의 삶에 부정함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우리의

삶이 정결함으로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따름으로, 내가 세상의 욕망과 죄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두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삶이 너무나 부정해져 있다고 느낄 때면 더욱 힘을 내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왜냐하면 신약에서 부정함은 거룩하신 주님을 만나 거룩함으로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더욱 힘써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부정하다 취급받던 문둥병자의 삶도 주님께 나아가자 정결하게 되었고, 부정한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주님을 만지니 깨끗하게 됩니다. 오늘 이 예배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의 거룩함으로 함께 하기 위해 허락해주신 시간입니다.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의 살길입니다. 오늘 이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지 마시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며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최선의 마음을 주께 드리기 위해

힘쓰십시오. 어제의 나보다 오늘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힘쓰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