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레위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로는 레위기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책가운데 하나인데, 가장 오해를 받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성경 가장 앞에 나오는 책인 모세오경은 성경의 전반적인 신학적 토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이 성경의 세계관을 말해주고 있거든요. 그런데 모세오경 안에서 레위기는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가운데는 가장 중요한 자리를 의미합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면, 출애굽기를 통해서
애굽에서 나온 모세와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계가 된 것이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 언약식은 어쩌면 신랑과 신부의 혼인 서약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을 통해 특별한 관계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면, 결혼생활은 그에 걸맞게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약식 이후, 하나님과 사람이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언약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연합하고 동행할 수 있는가 이것입니다. 단순히 언약만 맺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동행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특별한 방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언약식 이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특별한 방법, 다시 말해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선물이 ‘성막’입니다. 레위기는 쉽게 말해서 성막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는 책이죠. 하나님과 우리가 결혼으로 연합한 부부와 같다면, 성막을 통해 그 연합이 사실이 되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은 결혼반지와 같다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막은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는 가장 중심에 위치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기 위한 방법. 우리의 생애 동안은 하나님이 세상에 찾아와 주시는
것이고, 그것이 성막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을 마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으로 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어떻게 언약적 삶을 살 수 있는지 말해주는 너무나 중요한 책이기에, 우리가 레위기를 제외하고 성경을 읽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중요한 핵심 이야기를 놓쳐버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레위기의 구조는 아주 단순합니다. 바로 레위기 16장의 대속죄일을 기준으로 전반부, 후반부가 대칭됩니다. 1-15장
: 제사 법전 이스라엘의 죄와 부정 16장 : 대속죄일 죄와 부정을 깨끗게 함 17-27장 : 성결 법전 거룩과 헌신으로 나아감 1-7장 제사 규정 8-10장 제사장 규정 11-15장 정결 규정 16장 속죄일 17-20장 거룩 규정 21-22장 제사장 규정 23-27장 절기 및 축제 규정 의식.1 : 5제사 제사장.1 : 제사장의 위임 정결.1 : 의식적 정결 속죄일 정결.2 : 도덕적 정결 제사장.2 : 제사장의
자격 의식.2 : 7절기 우리가 지난 3월에 레위기 설교 4편을 나눴는데, 그것이 전반부의 3개 단락과 중심에 있는 대속죄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대칭구조의 중심에는 가장 핵심 메시지가 위치하니, 레위기의 핵심은 결국 ‘속죄’입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속죄의 전제는 ‘언약’입니다. 언약이 맺었기에 언약의 피에 의한 ‘하나됨’ 때문에 속죄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피의 언약으로 하나 되었기에,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정결예식으로 언약백성이 함께 정결케 되었다는 것이죠. 즉, 언약관계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속죄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히브리서는 이러한 언약 신학에 기초하여,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우리와 새언약을 맺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가 새언약 백성의 죄를 사하게 되셨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자신을 먹고 마시라고 하시죠.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우리가 새언약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찬을 진행할 때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식탁에 가족으로 참여했음을 설명드립니다. 즉, 우리가 새언약의 백성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효력을 미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새언약 백성을 향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행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셨음을 받아들일
때(믿음), 그 은혜 안으로 우리는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이러한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첫 번째 언약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언약백성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삶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가장 바깥쪽 대칭은 1-7장과 23-25장입니다. 의식 1) 1-7장 5가지 제사 :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의식 2) 23-25장 7가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저와 함께 <구약의 파노라마> 공부를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거기서 레위기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때 ‘5제사 7절기’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한 것입니다. 5가지 제사에 관한 규정과 7가지 절기에 관한 규정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럼 5제사 7절기를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주셨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실제적 의미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고 싶지 않으면 관계를 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그 자녀와 계속 동행하려면, 그래서 “네가 이것 이것을 하고 나에게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녀를 향한 사랑이 자녀가 여러분을 향해 저지른 잘못보다 크기 때문이 아닐까요? 레위기의 하나님은 딱 그런 분입니다. 구약의 제사, 우리로 보자면 예배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안에서 우리를 받아주신 하나님을 느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 하나를 생각해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녀가 다시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려면, 용서는 해주지만 이 잘못이 어떤 것인지 깨닫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대가를 지불함으로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을 먹도록 교육해야죠. 이것은 그 대가를 바래서가 아니라, 그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려는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 정성이 들어가고, 복잡한 과정이 들어가고, 제물이 사용되는 의미는 그와 같습니다. 그 과정을 겪으며 자신들이 행한 잘못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로 말미암아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5제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라면, 7절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7번의 절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모든 시간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니라, ‘시간의 종교’입니다. 어디를 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드리는가에 의해 우리가 구별됩니다. 교회라는 장소에 들어와 있어서 우리가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구별된 시간을 드리기에 예배자입니다. 두 번째 대칭은 8-10장과 21-22장에 나오는 ‘제사장’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제사장 8-10장 제사장의 위임 : 아론과 아들 / 규례를 무시했다가 심판 제사장 21-22장 제사장의
자격 : 보다 나은 도덕성과 정결함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제사장의 대표인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는 백성을 대표하여 서 있고, 백성들 앞에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서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의복에 신발은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은 신발이 없기 때문이죠. 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러 모든 성도를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만인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조금 있고 전신자 제사장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모든 성도는 제사장입니다. 교회는 제사장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롭게 이뤄지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을 비추는 제사장으로 이곳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흩어져 거룩한 사명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구별된 삶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입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이 죄의 근본이고, 올바른 신앙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내 삶이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예배의 핵심 또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예배의 핵심은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모든 백성 가운데 가장 모범 된 모습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도표가 이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표입니다. 결국 이
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리더는 먼저 그 길을 선택하여 삶으로 보여주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는데, 10장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의 방침을 마음대로 어겼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신 후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습니다. 이것은 가장 모범 된 예배자가 되어야 할 그들이 가장 모범이 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권한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서 나답과 아비후의 불순종을 심판하십니다. 거룩하지 못한 모습으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므로 그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크게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 대칭은 정결에 관한 규정들입니다. 11-15장과 18-20장에 나옵니다. 17장부터라고 보시는 분들도 있고, 17장을 16장의 속죄일에 붙여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11-15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정결 11-15장 정결함 부정함 (죽음과 생명)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기억하게 하는 상징들 제가 예전에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함-속됨 / 정결함-부정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도표로 이 그림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 점선은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인간의 속성은 ‘속됨’입니다. 속된 삶은 즉 3가지 영역을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
/ 정결함 / 부정함이 우리의 삶과 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부정한 것을 접하면 부정해집니다. 그러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 방법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기에 ‘정결해지는 방법’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 방법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정결한 상태로 변화되고, 그러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1-15장까지는 무엇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 각 상황에 따른
해결 방법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밀접한 요소인 ‘음식법’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음식법에 관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음식법 규정에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서 금지된 음식은 대부분 육식성 혹은 잡식동물이거나, 시체를 청소하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부정함에 이르는 것은 ‘죽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몸에서 빠져나오는 것들을 ‘죽음’의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피’입니다. 피는 생명을 담고 있고, 피가 빠져나오는 것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모두 심각한 부정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몸의 유출에 관련된 것들이나, 피부에 드러나는 변질이나, 가옥의 곰팡이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구분됩니다. 그러한 주제가 15장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12장은 출산의 문제를 다루는데, 출산도 부정하다 말하는 것은 생명이 빠져나갔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도 ‘산혈’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출산한 후, 정결하게 되는 기한을 보냅니다. 그 후에는 속죄제를 드림으로 정결하게 됩니다. 정결하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죠. 우리가 정결과 부정의 문제를 다루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부정함’은 죄가 아닙니다. 부정함은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 이 땅에 속하여 살아가는 인간이 늘 마주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해결이 가능한 방법을 하나님이 모두 가르쳐 주십니다. 죄는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정/부정의 규칙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기 위한 정결함을 무시할 때, 그 태도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불순종이 죄입니다. 부정함은 하나님 안에서 모두 해결이 가능하지만, 불순종은 우리의 마음에서 결정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결함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연합하여 살기 위해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자신을 주고싶은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1-15장의 내용이 대체로 구약시대에 요구되는 내용들이었다면, 18-20장에 나오는 내용은 모든 시대에 요구되는 정결에 관한 규정입니다. 학자들은 대부분 18-20장 부분의 정결함을 ‘도덕적 정결’이라고 말합니다. 정결 18-20장 도덕적 정결 : 성적인 순결, 가난한 자의 구제, 사회 정의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정결은 거룩에 대한 실천이고 거룩은 구별됨에서 시작됩니다. 거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언제나 중요한데, 그 실천방법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첫 언약의 백성은 음식을 구별하여 먹으며 정결함을 지켰지만,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의 구별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민족과 다르게 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신약의 교회에게는 세상과 다르게 살라고 요구하십니다. 레위기 11~15장의 구별은 구약의 시대에 해당하는 특성이 있다면, 18-20장의 도덕적 정결은
어느 시대에나 따라야 할 이야기들입니다. ‘~답게’는 기독교 신앙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니, 이제 새로운 존재답게 살아감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설교에 빗대어 보자면, 탕자가 돌아와서 다시 아들로서 받아들여졌으니, 아들답게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며 좋은 아들로 살아가면 그것이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8-20장에
나오는 많은 내용이 있지만, 그 중 핵심내용 2가지만 나누겠습니다. 순결 18-20장의 내용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성 윤리’입니다. 아시다시피 족장시대에는 종족 내 결혼, 즉 가족 안에서의 결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족단위의 사회를 넘어서면서 이에 관한 규정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기 전에 부족 안에서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위반한 것이 아니지만, 레위기 이후에는 이 규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민감한 이슈가 많습니다. 그중에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는 동성애일 것입니다. 저는 동성애가 죄라는 것에 대해서 성경을 기준 삼아 말하는 것에 두려움은 없습니다. (레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롬 1:27)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다만 목사로서 이와 관련된 2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동성애 논쟁과 차별금지법 논쟁은 비슷하면서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대부분 반대 의견을 갖고 있으나, 차별금지법 논쟁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뉩니다. 한쪽은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므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쪽은 차별금지법이 생기는 순간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수 없기에 막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솔직히 동성애에 대해서는 반대,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공부 중입니다. 워낙 가짜 뉴스도 많고, 차별금지법의 효력과 역할에 대해 너무나도 다양하고 상반된 의견이 제시되고 있기에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여러분도 고민하시되, 지나친 정치 논리에 입각한 판단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지한 고민과 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준을 세우기 위해 힘써 주십시오. 양 진영의 극단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선동에 휩쓸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동성애가 모든 이슈를 뒤덮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이 있는 부분입니다. (고전 6:9)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고전 6:10)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동성애’에 꽂혀서 동성애자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정의 내리곤 합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만, 음행, 우상숭배, 간음, 도둑질, 탐욕, 술 취함 등의 이야기는 너무 가볍게 대합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 안에 남아있는 대부분은 동성애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무관한 것, 혹은 내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에는 철퇴를
내리치면서, 나와 관련된 것, 나도 저지를 수 있는 죄의 목록에는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동성애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나와 관련된 모습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성찰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내가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노력이 있어야 균형이라도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것에 저는 동의하지만, 동성애는 수많은 죄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교회 안에 동성애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와서 예배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도 와서 예배할 수 있어야 하고, 간음하는 사람들도 와서 예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저는 우리가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깨달으며 변화되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문턱은 낮아야 합니다. 적어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오는 것에는 문은 최대한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세상의 흔한 말이지만, 저는 복음은 능히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끝까지 믿는다면 저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이 변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래서 제힘으로 할 수는 없지만, 주님은 하십니다. ‘성 윤리’에 있어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순결’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심이 1이라면 순결에 대한 성경의 관심은 100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거룩과 순결’이 닮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이요, 성 범죄를 ‘육체적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나를 순결하게 하는 것이 ‘거룩’이고, 육체적으로 나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순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20대에 봤던 기독교 서적의 내용이 당시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는데, 그것은 ‘순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했고, 그 이후 회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지만 계속해서 순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상담에 관한 저자의 답변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면 이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나는 순결하다고 말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다음부터 항상 그렇게 청년들과 상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결을 오해합니다. 순결에 있어서도 ‘혼전순결’이라는 단어에만 꽂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혼전순결을 일생의 유일한 한 번의 무엇이라고 생각하여, 그렇지 않으면 순결하지 못한 삶이라고 낙인찍기 쉽습니다. 하지만
‘순결’은 결혼 전의 상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우리의 싸움이며, 이 전투에 있어서 첫 번째 방어선이 무너졌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이겨내기 위해 힘쓰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혼전순결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한번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면, 그 이후의 삶에서 이겨내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제가 생각하기에 그 강조 이상으로 더 필요한 것은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돌아가
‘순결’을 위한 싸움을 지속하느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회심 전에 정말 자유롭게 살았던 사람이 회심 이후 그런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자신을 바꾸어 가는 것이 더 대단하고 기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혼전순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혼외순결(외도)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전순결을 잘 지켰을지라도 혼외순결의 문제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에는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혼외순결이 무너진 사람 또한 저는
철저한 회개 속에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결의 문제는 끝까지 죄와 싸우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결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지 않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웃사랑 도덕적 정결을 위해 강조하는 것이 ‘이웃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웃사랑이 왜 정결함인가? 왜 그것이 거룩함을 의미하는 구별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웃사랑이
거룩이라는 점에 완벽히 동의합니다. 세상은 점점 이웃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참되고 바른사랑을 행하면 구별됩니다. (레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연합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적극적 모습입니다.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은 하나님 앞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삶을 통하여, 이웃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이웃사랑을
행합니다.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양심’을 주셨기에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들보다 더 낫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마 5: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마음에 품고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웃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레 19: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레 19: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우리가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고 돌봐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도 언제나 고민이 필요합니다. 수확물을 주면 가난한 자들이 마음이 상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스스로 거두도록 합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이 철저하게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자기중심성’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이웃사랑을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정말 상대방을 위해 내가 선을 베풀 때도 ‘어떻게’라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웃사랑이 있습니다. (레 19:17)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레 19:18)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성경은 이웃사랑을 할 때, ‘내 몸처럼’이라고 말합니다. 기준은 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남이 아니라 나와 같이 여기며, 미워하는 마음을 품거나,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해야 합니다. 반면 해야 하는 것이 있죠.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을 가만히 놔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너무 개인주의적이라서 나쁜 일을 해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나만 예배 잘 드리면 됩니다. 그럴까요? 우리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어떻게 이 사람이 좋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좋지 못한 모습에 대해서 함께 아파하고, 하나님 안에서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타일러야 합니다.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구약의 핵심이 이웃사랑이라면, 신약의 핵심은 원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원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정답은 이렇습니다. 구약시대 백성들에게 주신 기준이 ‘내 몸처럼’이라면,
신약시대 이후 우리들에게 주신 기준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저는 우리의 삶에 이 생각이 항상 맴돌아서, 내가 하나의 말, 하나의 행동을 할 때 이 기준에 근거하여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거룩하리라 믿습니다. 당연히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성경의 예수님과 다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살아가십시오. 깨달은 만큼 실천하십시오.
본 만큼 따라가십시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레위기의 전체적인 그림을 다시 되새기며, 특별히 ‘정결’에 대한 18-20장의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정결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가기 위한 모습입니다. 거룩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기로 약속하셨는데, 그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 싶은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감을 통해,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안내해주십니다. ‘거룩’에 대한 가르침이 우리를 괴롭히려는 규정이 아닌 이유입니다. 거룩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단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내 삶에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계속 머물고 함께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시 한번, 레위기를 공부하던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하셨던 이 한마디를 여러분에게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이 모든 규정들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으려는 바리케이드가 아닙니다. 이 모든 규정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못한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들에게 생명으로 나아오는 길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여러분을 세워, 말씀이 가르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고자 진실한 결단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열 걸음은 더 다가오셔서 우리 손을 붙잡고 인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의지하여 우리가 오늘도 삶을 향해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