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정결법 : 생명과 죽음" / 강정규 목사

2022-03-20 · 레위기 11-15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레위기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거룩’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 앞에 설 준비를 해야 할 텐데, 거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우리의 거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좀 더 쉬운 표현으로 바꾸면 ‘구별’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을 아담이라고 말하지 않죠. 노아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세상 가운데서 한 사람을 구별하시며 이야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별하여 내셨습니다. 그러나 이 출애굽 백성도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특별히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맺은 직후에도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막이 완성된 이후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을 때, 모세조차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요?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시작. 죄와 이기심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마주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함께 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늘 방법은 하나님이 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참여할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이 바로 ‘레위기’인 것입니다. (레 10:10) 너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여야 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여야 한다.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함-속됨 / 정결함-부정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도표가 지난주에 보여드린 이 그림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인간의 속성은 ‘속됨’입니다. 속된 삶은 즉 3가지 영역을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 / 정결함 / 부정함이 우리의 삶과 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부정한 것을 통해 부정해지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 방법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해지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그 방법을 따르는

순종의 모습을 통하여 정결한 상태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기독교에는 ‘묵상’이 있고 세상에서는 ‘명상’을 합니다. 묵상과 명상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우선 마음 안에 불편함이 생기면 감지합니다. 내 안에 분노가 있거나 복잡한 무언가가 있으면 이것을 해결하고 싶어 하죠. 우선 그것을 걷어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묵상이나 명상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 상태로 묵상한다고 해서 묵상이 되나요?

예배할 때도 그런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오라고 성경이 말하지요. 비어내는 것만으로도 안정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명상도 여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빈집입니다. 오히려 사탄은 그 빈집을 더욱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묵상은 그 자리에 진리의 말씀을 채우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아야 나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세상에 속하여 살면서 갖게 된 여러 생각들을 내려놓고, 여러 소리들을 내려놓고, 비어낸

다음... 그 자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괜찮은데, 우리가 또 세상으로 나가 살다 보면 어느새 이제 말씀이 효력을 잃고, 다시 내가 세상에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레위기의 거룩함과 부정함의 사이클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너무나 은혜가 되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가끔 소개하는

메시지 성경의 서문입니다. 레위기 서문의 내용이 저는 참 많이 와닿았습니다. 레위기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어떤 것인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습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길들이겠다는 고집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길들이겠다고 결심한다. 우리의 계획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방법을 생각해 낸다. 우리의 계획과 야망의 기호에 들어맞는 크기로 하나님을 축소시키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럴 수 없다고 훨씬 더 고집스럽게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에 딱 들어맞으실 리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도구나 기구나 신용카드가 아니시다. 우리는 소원성취라는 우리의 환상이나 세상의 명성을 얻으려는 이상적인 계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한다. 우리의 그러한 시도로부터 하나님을 구별해 주는 단어가 다름 아닌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대로 살아 계시며, 우리의 경험과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살아계신다는 뜻이다. 거룩은 강렬한 순수성으로 타오르는 생명, 접촉하는

것은 무엇이든 변화시키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중심이시며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께 응답하며 살기 위해서는, 많은 가르침과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레위기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가기 위한 길에서 준비하는 시간이다. ‘거룩’을 알지 못하는 문화 속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상세하고도 대단히 신중하게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순간, 우상이라는 일촉즉발의

치명적인 지뢰밭을 지나가야 할 것이다. 그 우상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잘못된 우리의 외침에 부합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환상을 품고 살아가다 보면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레위기를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 번째 사실. 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며,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이 모두 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 우리의 관계, 우리의 환경도 예외가 아니다. 두 번째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안과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그분의 거룩한 임재 속으로 가져가셔서, 그 모든 것이 거룩하신 분의 강렬한 불꽃 속에서 변화되는 길(제사, 절기, 안식일)을 우리에게 제공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우리도 고대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 순간 그분의 임재 가운데 서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근처의 장막이나

집에 거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신자인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쓰시며, 우리 안과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변화시킬 의향이 있으시다. 저는 오늘도 레위기는 이러한 하나님의 초청이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입은 자들에게 허락하신 길과 방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1-15장까지는 무엇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세세한 규례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야기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레위기 11장>이라고 하면, 그냥 그런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고민이 많았던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이스라엘의 ‘음식법’ 규정이 여기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문제는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예민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뭐 먹을까?” 사람들과의 약속에서도, 가정주부에게도

늘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적어도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고민들이 이것들입니다. 제가 작년에 인생 최대의 몸무게를 찍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폭풍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그때는 모든 식사를 ‘다이어트 식단’에 맞춰 먹었습니다. 제 몸은 지극히 정직해서 운동하면서 그렇게 먹었더니 2개월 정도 만에 10kg 넘게 감량을 했습니다. 다이어트를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운동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식단 조절’입니다. 물론 다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겨울이라 운동을 좀 멀리하고... 정결치 못한 야식을 가까이 하고, 특별히 겨울에 한약을 먹고 입맛이 돌아서 5kg 이상을 다시 쪘습니다. 지금 굉장히 부정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조금씩 다시 조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자 진리의 말씀으로 여기며 성경을 읽다 보면, 레위기 11장에서 극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일단 한번 말씀을 살펴봅시다. (레

11:1)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레 1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땅에서 사는 모든 짐승 가운데서, 너희가 먹을 수 있는 동물은 다음과 같다. (레 11:3) 짐승 가운데서 굽이 갈라진 쪽발이면서 새김질도 하는 짐승은, 모두 너희가 먹을 수 있다. (레 11:4)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두 쪽으로 갈라졌더라도, 다음과 같은 것은 너희가 먹지 못한다. 낙타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레 11:5) 오소리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레 11:6) 토끼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레 11:7) 돼지는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쪽발이기는 하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레 11:8) 너희는 이런 짐승의 고기는 먹지 말고, 그것들의 주검도 만지지 말아라. 이것들은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레 11:9)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가운데서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바다에서 사는 것이든지 강에서 사는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너희가 먹을 수 있다. (레 11:10) 그러나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고기 떼나 물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동물 가운데서 지느러미가 없고 비늘이 없는 것은, 바다에서 살든지 강에서 살든지, 모두 너희가 피해야 한다. 아마 현실적으로 여기서 언급되는 동물 가운데 가장 우리를 근심케 하는 것은 ‘돼지’일 것입니다. 잠시 돼지고기가 들어가는 요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벌써 우리의 침샘을 자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돼지만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레위기 11장은 ‘육지생물 / 수중생물 / 공중생물 / 곤충 / 지표면 생물’에 대해서 정한 것(먹을 수 있는 것)과 부정한 것(먹을 수 없는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 기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지생물은 ① 굽이 갈라지고 ② 되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둘 중의 하나라도 조건이 안 맞으면 부정한 것입니다. 다행히 소고기, 양고기, 염소고기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돼지고기, 토끼고기, 낙타고기 등은 안 됩니다. 역시나 돼지가 임팩트가 크죠. 하지만 소도 피째 먹을 수는 없습니다. 스테이크는 무조건 웰던만 가능합니다. 육회도 안 됩니다. 물론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죽인 후 피를 다 빼낸 고기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수중생물은 ① 지느러미가 있고 ② 비늘이 있는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붕어, 도미, 농어 등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 물에서 사는 것 가운데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으면 다 못

먹습니다. 여기에 우리 식탁의 큰 위협이 발생합니다. 고등어, 복어, 장어, 오징어, 낙지, 쭈꾸미, 문어, 조개, 미꾸라지, 바닷가재, 메기 등을 다 먹을 수 없습니다. 언급하지 않은 것 중에서도 조건이 안되면 다 부정한 생물입니다. 공중생물은 육식성 맹금류는 먹을 수 없습니다. 독수리를 포함한 약 20가지의 조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비둘기, 참새, 메추라기 등은 먹을 수 있습니다. 곤충은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팥중이까지 4개만 먹을 수 있고

나머지는 다 부정합니다. 마지막으로 지표면을 기어 다니는 것은 모두 부정합니다. 뱀이나 지렁이가 대표적이죠. 그런데 레위기 11장이 주는 고민이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의 난제는 “왜 그것이 부정한가?”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입니다. 왜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면 정결한 짐승이고, 아니면 부정한 짐승인지... 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으면 정결한 어류인지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삼겹살과 조개구이와 쭈꾸미와 랍스타와

추어탕 및 순대까지도 먹을 수 없는 것일까요? 제가 다 좋아하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두 번째 적용의 난제는 “지금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번도 고민하지 않고 먹었을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큰 고민에 놓였던 경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친밀한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레위기 11장을 읽은 후, 돼지고기를 안 먹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하나님의 명령인데, 그러면 따라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이유였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이었는데,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레위기 11장에 관련된 글과 주석 등을 참 많이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먹지 않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 먹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요즘에 ‘비건’이라고 하죠. 채식주의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저를 가르치셨던 교수님은 평상시에는 다 드셨는데, 몸이 안 좋으면 채식만 하시면서 ‘에덴식’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먹고 안 먹고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설령 그 이유가 레위기 11장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이 이 말씀을 읽고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은 개인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다만,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고 보편화시켜 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엇이든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옳지 못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는 먹어도 됩니다.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둘째, 제가 대화를 나눠본 먹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레위기 11장에 명시된 것만 먹지 않으며 말씀을 지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명시된 생물은 ‘돼지’ 외에는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것이 없습니다. 토끼나 낙타를 우리가 먹지는 않죠. 까마귀나 올빼미도 먹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것은 돼지입니다. 그러나 아까 설명해 드렸다시피 조건을 갖고 구분하다 보면, 우리가 자주 먹는 많은 음식이 다 금지된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을 근거로 돼지는

안 먹는다고 말하면서, 오징어나 조개는 먹는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레위기 11장의 음식법까지도 지켜서 자신을 좀 더 정결하게 하고 싶다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렇게 행해야 진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주변에는 돼지를 원래 안 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레위기 11장 때문이라고 근거를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기호를 성경적 해석과 연결한 것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위에서 언급한 숙제를 풀어봐야겠죠.

기준이 뭘까? 왜 하나님은 이런 구분을 하셨을까? 아마도 관심이 있어서 찾아보신 분들은 수많은 견해 앞에 당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① 독단적 해석(arbitrary explanation) 특별한 이유가 없다. 유대인들의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테스트하기 위해 주신 것이므로 이유를 묻지 말라는 것이다. ② 제의적 해석(cultic explanation) 부정한 짐승들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견해이다. 돼지는 가나안의

성소에서 많이 사용했다. 우상숭배자들을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제의적 관점이라면 ‘황소’가 더 문제가 되어야 한다. ③ 위생학적 해석(hygienic interpretation) 부정한 짐승들은 병균을 옮기는 짐승들이라는 견해이다. 일부분 일리가 있다. 돼지는 잘 익히지 않으면 안되고,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얕은 물에 살아서 박테리아 등 노출이 더 많다. 그러나 정한 짐승 중에도 위생적 문제가 있는 짐승들이 있으며, 그것이 진짜

문제라면 먹기를 금하기보다는 먹는 방법으로 규정을 해야 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또한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같이 말해야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모든 음식을 허락하시는데, 그렇다면 안 좋은 음식을 먹도록 권한 것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 ④ 상징적 해석(symbolic interpretation) 되새김하는 짐승을 정하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묵상하는 삶을 모범으로 삼기 위함이다.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하늘로 향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알레고리, 상징적 해석이다. ⑤ 메리 더글라스의 해석 : 정함(cleanness) = 정상적(normality) • 육지동물: 뛰어다닐 수 있는 갈라진 굽 • 물고기: 수영할 수 있는 지느러미와 비늘 • 새: 날 수 있는 날개 + 걸을 수 있는 두 발 각각의 영역에 맞는 행동양식이 있는데, 그것에 맞는 동물이 정상적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기준이고 경계였으며 그것을 벗어나면 부정(정상적이지 않음)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육지 동물 가운데 되새김질하는 것까지 따졌을까? 이런 고민이 든다. 이것뿐이 아니라, 심미적 해석, 역사적 경험설, 창조질서 표준설 등 매우 다양한 견해들을 갖고 이것을 해석하고자 힘썼습니다. 여러 다양한 견해들이 있고, 지금까지의 견해들은 다 잊어버리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설명은 잘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이 ‘생명’과 ‘죽음’이라는 레위기의 속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야기했지만,

레위기는 거룩하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것과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분은 거룩함 그 자체이시고, 그분께는 생명, 선함, 정결, 공의가 함께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벗어난 곳에는 거룩함이 없으며, 그곳에는 죽음, 불의, 죄악 등이 가득합니다. 레위기 11장의 구분 가운데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부정한 동물들이 대부분 육식성 혹은 잡식동물이거나, 시체를 청소하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의 고기를 먹는 동물은 그 안에 들어있는 피를 함께 먹게 됩니다.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이 대거 언급되는데, 이는 부정함의 전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은 고기를 소화시키지 못합니다. 수상 생물 중에서도, 청소동물들이 부정한 동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결한 짐승에 속하는 소도 피와 함께 먹거나, 혹은 저절로 죽은 짐승의 사체를 먹는 것은 물론, 만지는 것조차 부정합니다. 결국 부정함을 해석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죽음’이고,

이것에 깊이 연결된 것이 몸에서 빠져나오는 것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피’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피가 빠져나오는 것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모두 심각한 부정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갖고 정함/부정함에 대한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서도 바라보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레위기의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내용은 11장의 음식법부터 시작해서 15장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룹니다. 12장은 출산의 문제를

다룹니다. 출산을 하면 부정합니다. 이것은 생명이 빠져나갔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도 ‘산혈’의 문제 때문입니다. (레 12:4)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출산한 후, 정결하게 되는 기한을 보냅니다. 그 후에는 속죄제를 드림으로 정결하게 됩니다. 정결하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정결과 부정의

문제를 다루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부정함’은 죄가 아닙니다. 부정함은 속됨에 속하여 살아가는 인간이 늘 마주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해결이 가능한 방법을 하나님이 모두 가르쳐 주십니다. 죄는 무엇이냐면, 그 방법을 행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 태도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부정함은 하나님 안에서 모두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전히 세상 가운데 머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어가며,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코로나에 걸리면 정해진 기간 동안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제한됩니다. 그리고 면역력을 갖추게 되면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합니다. 레위기는 수천 년 전, 의료시설이 없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제사장이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정결함을 판단하여 일상으로 복귀시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지금 우리의 현실과 닮았습니다. (레 13:2)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레 13:3)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13-14장은 악성 피부병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피부병을 히브리어 ‘차라아트(t[rc)’라고 합니다. 보통 성경에서는 ‘나병’으로 번역합니다만, 이것은 현대의 ‘한센병’을

의미하는 질병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나병을 한센병으로 해석하면 틀린 것입니다. 그보다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입니다. 피부질환을 왜 부정하다고 봤을까요? 나병에 걸리게 되면, 피부가 검게 변하고, 껍질이 벗겨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것도 죽음과 관련된 증상으로 이해했기에, 피부관련 질환에 대해서 엄정하게 다뤘던 것입니다. 부정함의 피부질환으로는 ① 부스럼 ② 생살이 생긴 경우(곪는 경우) ③ 종기 ④ 화상 ⑤ 옴-곰팡이 피부염 / 머리에 나면 비듬 ⑥ 발진

⑦ 대머리 피부질환 등을 다룹니다. 각각의 상황이 모두 바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장시간 지켜보고 신중하게 결정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차라아트’ 상황에서는 부정하다고 선언하여 격리해야 합니다. 7일째 되는 날 재검을 하여 상태를 살펴 일상으로 복귀시키게 됩니다. (레 14: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레 14:9)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피부에 나타난 곰팡이성 질환이 피부병이라면, 의복이나 집에 곰팡이가 나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레 14:34) "나 주가 너희에게 유산으로 준 가나안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였을 때에, 나 주가 내린 악성 곰팡이가 너희가 유산으로 받은 땅에 있는 어떤 집에 생기거든, (레 14:35) 그 집 임자는 제사장에게로 가서,

집에 곰팡이가 보인다고 알려야 한다. 끝으로 15장은 인간의 몸에서 유출이 일어난 경우를 다룹니다. 몽정이나, 월경 등도 모두 해당됩니다. 여성의 유출은 피와 관련된 문제로 이해하면 되고, 남성의 유출은 정액을 생명의 씨앗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정은 생명력의 약화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대속죄일 전날에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 혹시 자다가 설정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의 설교를 정리하면서 우리에게 남은 화두는, 지금 우리에게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입니다. 우선 오늘 가장 깊이 다룬 음식법의 경우는 성경 자체에서 해결책이 제시됩니다. (막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막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막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막 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들을 완성하시는데, 음식법의 정결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레위기는 가나안에서 동화되지 않아야 하기에 구별하는 측면이 강조된다면... 신약시대에는 오히려 이 율법을 근거해서 이방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대표적으로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주십니다. 그 사건은

이방인 고넬료를 백성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정결함과 부정함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부정함은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가만히 방치하면 부정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해서 우리의 영이 죽는 것입니다. 즉 이 문제는 하나님과의 동행,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와야 한다는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은 죄의 문제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레위기를 공부하던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하셨던 이 한마디가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이 모든 규정들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으려는 바리케이드가 아닙니다. 이 모든 규정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못한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들에게 생명으로 나아오는 길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성경 속 나병환자는 하나님을 떠나 죽음으로 가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을 치유하십니다. 12년 동안 피가 흐르는 혈루병 앓던 여인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죽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나아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예수께 나아가 그녀는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이 예배는 어쩌면 세상 가운데 속하여

살던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고자 하나님이 마련하신 주님의 시간이 아닐까요? 이 시간에 오셔서 주시는 말씀 가운데 길을 발견하시고, 그 안에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