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한 권의 책을 시작할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레위기가 소개팅하는 날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레위기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오늘 소개받을 상대의 이름이 ‘레위기’라는 것을 듣자마자, 벌써 마음 문을 굳게 닫으신 분들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레위기는 꽤 악명높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레위기에 대해서 들어왔던 내용은 “재미없는 책”, “구약의 수면제”, “보지 말아야 할 책” 등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저도 성경을 처음 읽는 분들에게는 역사 위주로 읽어가는 것을 권하며, 그때는 과감하게 출애굽기에서 레위기를 건너뛰고 민수기를 읽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레위기가 잘못된 책이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레위기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개팅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레위기를 남자에 비유하면 이 남자 너무나 멋진 사람인데.. 조금 진지해서 이 남자와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그런 깊이 있는 남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저는 이번 기회에 우리가 레위기를 함께 볼 수 있어서 굉장히 기쁩니다. 이제는 우리가 충분히 만나볼 수 있을 만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너무 겁을 먹지 말고, 선입견도 좀 내려놓고, 마음을 열고 이 책을 대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인기가 없는 책일지 모르나, 적어도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봤을 때 이 책은 매우 독특한 위치에서 매우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였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인들의 언어이고, 헬라어는 그리스 로마 세계의 언어였죠. 히브리 사고에서는 중요한 것을 가운데에 위치시킵니다. 모세오경 안에서 레위기는 세 번째 자리, 즉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중심주제인 ‘거룩, 속죄, 예배, 삶’은 구약 성경 전체의 중심주제로 확장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창세기는 우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출애굽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왜 출애굽 시키십니까? (출 7:16)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나를 임금님께 보내어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에게 예배하게 하라, 하셨는데도, 임금님은 아직까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바로 시내산으로 향합니다. 가나안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들을 이끄시는데, 그 목적지는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음으로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계가 된 것이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출 19:5)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출 19: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이 언약식은 어쩌면 신랑과 신부의 혼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그 관계 안에서 한 약속과 같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결혼한 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마련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것은 신혼집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 머무는 공간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찾아가서 거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인간 사이에 머물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막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언약식 이후 곧바로 성막에 관한 이야기가 도배됩니다. 성막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가운데 위치하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오시고,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 공간을 준비시키는 장면이 출애굽기의 뒷부분입니다. 성막을 다 지은 후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 하시는 장면이 출애굽기의 마지막입니다. (출 40:33)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다. (출 40:34)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그리고 민수기는 어떻게 시작합니까? (민 1: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이 년이 되던 해 둘째 달 초하루에, 주님께서 시내 광야의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의 회막은 성막을 나타내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가운데 계시는 주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든 백성의 수를 세고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도
민족의 이동이고, 민수기도 민족의 이동입니다. 그 사이에 레위기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어떻게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혼집에서 어떻게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레위기를 제외하고 성경을 읽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중요한 핵심 이야기를 놓쳐버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내용을 여러분이 혼자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우리와 레위기 사이에 수천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고, 고대 근동의 유목민인 히브리인과 우리 사이의 문화적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야기를 하면 오늘날 서양의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고유의 유교적 전통과 예절, 제사법을 설명하는 것만큼 시대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이 레위기를 여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데 가이드가 되어 드릴 것이고, 성령께서 우리의 선생님이 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깨달음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레위기를 대한다면, 이 안에 담긴 보석과 같은 진리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구조는 아주 심플합니다. 둘로 나누면 되는 것이죠. 1-16장 :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17-27장 : 세상 속에서의 삶 오늘날 교회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와 삶의 예배를 말하는 것처럼, 레위기는 동일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자, 그럼 레위기의 첫 메시지를 만나봅시다. (레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이 짧은 두절의 말씀이 레위기의 서론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출애굽기 마지막에 성막이 지어지고 하나님이 임재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모세조차 성막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언약식 이후 하나님이 성막을 주시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이 그것이죠. 언약식 직후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지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만약 그것에 대해 여러분이 정말 용서하고 싶지 않으면 관계를 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그 자녀에게 “네가 이것 이것을 하고 나에게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녀를 향한 사랑이 자녀가 여러분을 향해 저지른 잘못보다 크기 때문이 아닐까요? 레위기의 하나님은 딱 그런 분입니다. 구약의 제사, 우리에게는 예배라고 할 수 있죠. 예배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측면 하나를 생각해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녀가 다시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려면, 용서는 해주지만 이 잘못이 어떤 것인지 깨닫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대가를 지불함으로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을 먹도록 교육해야죠. 이것은 그 대가를 바래서가 아니라, 그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려는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 정성이 들어가고, 복잡한 과정이 들어가고, 제물이 사용되는 의미는
그와 같습니다. 그 과정을 겪으며 자신들이 행한 잘못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로 말미암아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2절이 그것을 말해줘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표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아담’입니다. 아담을 고유명사로 사용하면 사람의 이름이지만, 보통 명사로 사용되면 ‘인류’를 가리킵니다. 레위기
제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포함한 모든 예배하는 백성. 그들에게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레위기의 가르침은 저와 같은 목회자나 신학자들에게만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임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1-7장까지는 구체적인 제사의 방법들을 가르치십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라는 다섯 가지 제사가 그것입니다. 저희가 작년 말에 금요기도회
설교 중 <새신자반 – 예배란> 부분을 다루며 이 부분을 한 번씩 소개했습니다. 그중에 중요한 키워드는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선 번제는 구약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제사입니다. 이 제사의 특징은 제물을 드리되 온전히 불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물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레 1: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여러분, 이스라엘은 유목민족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말씀에서 봤던 것처럼, 목자는 양을 사랑합니다. 양만 사랑할까요? 소는 더 귀할지도 모르죠. 그런데 내가 예배하러 갈 때, 그중에서도 가장 흠이 없는 귀한 녀석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요즘 시대의 반려동물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예배라는 것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를 진행하기 전, 가져간 제물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이 안수를 통해서 제사자와 제물 사이에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물이 죽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죽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제사를 드리며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동물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학교 앞에서 보통 병든 병아리를 판다고 하는데, 저는 어린 시절 병아리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병아리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찍은 사진들이 많더라고요. 밖에도 잘 데리고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쯤에 병아리를 밖에서 데리고 놀다가 손에서 놓쳤는데, 옆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웃집 개가 그 병아리를 입에 물고 자기 집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200~300m 떨어진 곳에 있는 집에서 키우는 개였는데, 저는 막 울면서 그 집까지 쫓아갔습니다. 같이 간 친구와 열심히 쫓아가서 돌멩이를 던졌더니, 개가 병아리를 입에서 떨어뜨렸어요. 다행히 살았더라고요. 그래서 데리고 구해서 데려왔던 기억도 있습니다. 흰 닭이 될 때까지 키우기도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동물도 소중하고 잘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대신 내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과학주의 무신론에 근거하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잘 진화된 존재에 불과할 뿐이죠.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여 지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의 제사를 완성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희생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피가 흘렀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보혈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것은 감사를 표현하는 제사였습니다. 땅에서 수확한 곡물로 제사함을 통해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 된 마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소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룩의 특징은 과장하는 것을 의미하고, 성경에서는 대체로 죄와 관련되어 자주 사용합니다. 꿀은 유혹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죄의 유혹을 멀리하며 드려져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잔치의 특성이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제사이지만, 제물을 다 태우지 않고 돌려받아 이웃과 나눠 먹는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보통 화목제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이웃과의 관계로 그것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목제의 규정에서 기억할 것은 제물을 먹는 기한이 굉장히 짧다는 것입니다. 당일이나, 다음날 안에 모든 제물을 다 먹어야 합니다. 다 못 먹으면 화목제의 효력이 상실될뿐더러 그 행위 자체가 죄가 됩니다. 만약 소를 제물로 드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제사장의 몫을
제외하더라도 300kg 이상의 제물을 돌려받습니다. 500근입니다. 한두 사람을 불러서 먹을 수 없는 양입니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평소에 친밀하지 않았던 사람, 혹은 미운 사람도 불러서 함께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먹고 마심에 있어서 우리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룬 번제, 소제, 화목제는 자원제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 가지 제사는 드리고 싶을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다릅니다. 이것은 의무제입니다. 구체적인 죄를 지었을 때,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속죄제를 히브리어로 ‘하타아트’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하마르티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마르티아의 의미를 설명할 때 ‘과녁에서 벗어나다’라고 표현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하마르티아의 의미가 그것이 아니라, 하타아트의 의미가 그것이기에 그것을 옮긴 하마르티아도 같은 의미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양궁을 잘하죠. 양궁은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 경기입니다. 빗대어 보자면, 과녁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기대하는 삶의 방식이죠. 그것을 벗어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정리한 것이 율법입니다. 성경에는 613가지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경에 기록된 숫자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둘로 나눌 수 있죠.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개, ‘~을 하라’는 명령이 248개입니다. 레위기 4장의 속죄제는 ‘하지
말라’는 것을 했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5장의 속죄제는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을 경우에 드리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속죄제는 실수나 무지함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경우에도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지만, 족장이나 제사장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더 엄중히 다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는 이 속죄를 다루면서,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해결하라고 명하실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죄가 들어가는 곳마다 오염됩니다.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것은 우리가 부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공급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어도,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해결하고 나아오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방편은 열어두시고 초청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속건제는 죄를 해결하는 측면에서는 속죄제와 비슷합니다. 두 제사의 차이는 배상의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레 6:5) 거짓으로 증언하면서까지 자기의 것이라고 우긴 물건이든, 모두 물어 내야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모자람이 없이 다 갚아야 할 뿐 아니라, 물어 내는 물건값의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값을 보태어 본래의 임자에게 갚되, 속건제물을 바치는 날로 갚아야 한다. 즉, 우리가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행했다면,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선적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반드시 그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고 실질적인 배상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피해에 대하여 20%의 책임을 더 짊어짐을 통하여 일종의 잘못에 대한 인정을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규정 또한 출애굽기와 자칫 모순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출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왜 출애굽기와 레위기 사이에 차이가 발생할까요? 출애굽기는 들켰을 경우에 관한 규정이고, 레위기는 스스로 고백하는 경우에 대한 것입니다. 스스로 죄를 고백하면 20%만 더하여 배상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400~500%로 배상을 하는 것이죠. 이 규정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지 않으신가요? 신약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고백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도둑질한 것을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자발적 고백이지만,
그 시작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셔서 빛으로 자신의 삶을 밝혀주신 결과이므로, 4배의 배상에 관한 규정을 다짐했다고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율법의 요구를 뛰어넘는 삶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회개한다는 것에는 이러한 실제적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는 용서를 잘 구하면서 정작 사람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지 못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매우 실제적이고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내 방법대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으로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진정성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기독교인들의 회개는 너무 쉽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회개 기도를 자판기에서 물건 뽑듯이 합니다. 내가 회개한다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용서라는 응답으로 반응하는 것이 끝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는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누군가는 더욱 상처를 받고 고통당하고 있다면, 그 사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지만 물건을 훔쳐서 달아난 상황입니다. 종이 주인의 소유물 취급을 받던 당시의 시대에서 그런 잘못을 저지른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였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바로 실제적인 속건제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 오네시모가 바울 앞에서만 회개하고, 바울의 동역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빌레몬에게 알려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도 빌레몬의 마음에는 오네시모에 대한 미움과 함께 바울에 대한 오해나 서운함도 싹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과거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일도 감사하지만, 그 잘못의 대상인 빌레몬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행위를 통해서 오네시모도, 빌레몬도 함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나님이 레위기를 통해서 가르치신
다섯 가지 제사를 정리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레위기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매우 실제적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여러분이 다시 한번 기억할 것은,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사를 가르치셨는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노동과 의무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듯이 힘겹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죄의 유혹을 택하여,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님이 주신 특권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제물이 하나님께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동물을 받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 과정을 통해서 죄와 멀어지고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깨닫게 하기 위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제사법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외 규정들이 항상 존재합니다. 앞서 번제의 표준 예물은 소, 양, 염소이지만,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를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라고 시작했던 것처럼, 가난한 자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은 길을 열어두신 것입니다. 속죄제는 의무제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인 죄를 저질렀으면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비둘기도 못 드리는 형편이면 속죄를 못 받을까요? 아닙니다. 속죄제 규정에는 비둘기도 못 드릴 경우, 곡식이라도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늘 우리의 최선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 최선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에 하나님이 감동하셨던 것은 제물의 크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예물임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 예배자들의 마음에 함께 하시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예배가 소중합니다. 레위기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이 예배를 통해 그 하나님을 누리고, 삶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