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가족 친교모임을 통해 올해 등록한 새가족들을 환영하며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중 익명으로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제 행사가 끝나고 저에게 질문지가 도착해서 어제 답을 못드렸습니다. 질문이 딱 3개였습니다. 먼저 제 나이를 묻는 것인데, 가장 간단히 답을 드릴 수 있죠. 1983년생, 올해 마흔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주변에 우리교회 예배를 온라인으로 접하며 좋지만 너무 길어서 고민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죠. 어쩜 저와 이렇게 똑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주일 오전 예배 외에는 격주 금요기도회 정도에만 말씀을 나누는 시스템이기에, 한번의 예배만큼은 조금 길더라도 더 의미있게 채워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말씀을 잘 전하고자 하는 열심에 늘 더 집중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은 설교 중간에 사용하는 말씀구절의 번역본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사용하는 번역본은 개역개정이 아니면 새번역성경입니다. 그 외 번역을 쓸 때는 항상 어떤 성경인지를
밝힙니다. 보통 메시지 성경을 쓸 때 그렇죠.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모두 대한성서공회의 공인된 성경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을 아예 교회의 표준성경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죠. 새번역 성경의 가장 큰 장점은 개역개정과 메시지 성경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상의 언어로 조금 더 쉽게 풀어썼지만, 그래도 의역을 적당히 하면서 원문에 충실합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성경을 함께 읽는 목적은 말씀의 의도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므로, 개역개정보다는 조금
더 읽으며 바로 의미를 알 수 있는 새번역을 사용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성경 NIV는 영어판 새번역 성경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는 정서상 개역개정을 읽을 때 조금더 성경 특유의 화법을 느끼기에, 저는 암송은 개역개정, 의미파악은 새번역이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귐의교회가 질문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도 궁금한 점이 생기면 제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러나 충분히 여러분이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찾는
훈련을 해보며 그것을 검증하는 차원에서 저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음을 큰 특권으로 여기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한걸음 나아가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구약의 역사서로 왔습니다. 사무엘하를 10월까지 다룰 예정입니다. 5월에 7편의 설교로 사무엘상을 나눴던 것에 이어서 이번에는 6번의 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제 마음에 여유가 좀 찾아왔습니다. 역사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도 하고, 6번이라는
설교를 사무엘하를 다루는 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쉽게 설교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의 묘미가 각 책마다 장르가 다르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역사서가 줄 수 있는 새로운 맛으로 사무엘하 시리즈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역사서가 좋은 이유는 삶을 다룬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그 안에 모두 굴곡이 존재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오점 없는 인간의 삶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의 흔적에는 모두 하나님이 숨어서 계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서에는 놀라우리만치 하나님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드뭅니다. 여러 페이지에 걸쳐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빚어가고 계신 모든 일이 삶의 모습으로, 역사의 흐름으로 드러납니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사실 하나의 연결되는 긴 이야기입니다. 분량 때문에 둘로 나눴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연결해서 읽으면 더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주인공이 명확합니다.
사무엘서 전체에 3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사무엘, 사울, 다윗입니다. 사무엘서 초반에는 사무엘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까지의 가교역할을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고 사사들이 있었죠. 그러나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최악이었습니다. 결국 왕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사실 왕이 세워지는 것은 창세기부터 예언된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에도 그 내용이 나오거든요. (창 17: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특별히 창세기 후반부에는 야곱의 12 아들 중에 유다 지파를 통해 통치자가 나올 것이 약속됩니다. (창 49:10)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 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아시다시피 다윗도 유다 지파이며, 진정한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도 유다 지파입니다. 예언이 성취된 것이죠. 그러므로 왕이
세워지는 일은 예견된 일인데, 다만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만연한 왕정국가와 다르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원하셨던 것은 신정왕국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신정 안에서의 왕정, 즉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왕을 통한 대리 통치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들이 사무엘과 하나님께 왕을 요구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요구는 하나님이 원하셨던 신정왕국의 왕이 아니라, 주변 다른 나라와 같이 하나님을 배제한 자율적인 인간 왕의 통치입니다.
그들의 그런 요구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삼상 8: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사무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는 인간 왕을 중심에 둔 나라가 어떻게 될지 설명합니다. 왕은 철저히 자기중심적 통치를 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경고대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은 그런 왕이 되고 맙니다. 사무엘상이 내내 보여주는 것이 사울 통치의 실패입니다. 사실 사무엘상을 가장 쉽게 요약한다면 사울이 성공하다가 실패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떠오르다가 몰락하는 그래프는 그와 대비되는 또 하나의 그래프와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다윗의 이야기죠. 사실 사람들의 기대는 사울에게 있었고, 다윗은 오히려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에서 먼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적 요소보다 중요한 내적요소로 보자면, 사울은 하나님에게서 먼 삶을
살았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보았듯, 사무엘상은 사울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찾아와 장사를 치러주는 장면입니다. 왜 이 장면으로 사무엘상이 끝날까요? 바로 사울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을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과 관련된 사울의 이야기는 바로 사울의 초창기입니다. 이때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 승리를
거두며, 암몬으로부터 길르앗 야베스를 구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습니다. 사무엘상의 마지막 장면은, 그때의 그 사울의 모습을 독자들로 회상하도록 만들며, 사울의 삶에 기대되는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의 참혹한 죽음과 대비하여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이 다윗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받았던 훈련을 보여주고 있죠. 광야의 훈련학교라는 제목으로 그래서 제가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다윗 주변에는 사회적 하층민으로 굴곡 많고, 상처 많은 사람들,
깨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이끌면서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력을 훈련받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다윗은 결코 꽃길을 걸어서 왕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야생에서 피어났고, 품기 어려운 사람들을 품어가며 그는 리더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신정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가 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광야훈련이었죠. 사무엘하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다윗의 무리가 머무는 시글락으로 사울의 진영에 있던 병사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윗 앞에 오더니,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고, 다윗 앞에 엎드러져 절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묻죠.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가 말하기를 “저는 사울 왕의 군인인데 가까스로 도망쳐 살아왔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사울 왕과 요나단 왕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사울 왕의 왕관과 팔찌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울 왕은 사무엘상의 기록에 의하면 스스로 자결했습니다. 그런데 이 병사가 다윗 앞에서 하는
이야기는 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부상 당한 몸으로 자신을 부르더니 ‘어서 나를 죽여다오.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기에도 살 가능성이 없어서 사울이 시킨 대로 그를 죽이고 그의 왕관과 팔찌를 이렇게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에 대한 순종인가, 우리는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다윗을 향하여 ‘주’라는 왕께 부르는 호칭을 사용하며,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직
이스라엘의 왕권은 사울에게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경로로 사울의 유품을 챙겨서 다윗에게 오게 되었고, 그가 온 것은 다윗으로부터 어떤 대가를 기대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번 있었음에도,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기에 죽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왕관을 가져와 바치는 이 병사에게 보상을 한다면, 그것은 지금껏 다윗이 보인 행동과 맞지 않죠. 다윗은 오히려 왕을 죽였다고 하는 이 병사를 처형합니다.
이것은 왕의 권위에 대해 신하로서 다윗이 보여온 행동과 일관성이 있는 것이죠. 분명 사울의 왕관과 팔찌가 다윗에게 온 것은 다윗에게 왕권이 넘어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신하로서 자신이 보여야 할 행동을 보이며 앞서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이었던 사울과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구인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 그가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애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야 될 사람이라면 우리가 인위적으로 그 자리를 탐하지 않더라도 그 자리로 가게 될 것이므로, 괜히 섣부르게 먼저 욕심내지 말라는 것이죠. 저는 지금 다윗이 하고 있는 행동은
이것에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욕심이 모두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은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내게 주고자 예비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때에 이루시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죠. 사울의 실패는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자리 지키는 것에 모든 초점이 향한 나머지, 하나님의 마음을 받고자 하는 중심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에는 정치적 공백이 생기게 되고, 이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뭐라고요?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동입니다. 분명 다윗에게 정치적으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주님은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헤브론은 유다지파에 속한 성읍입니다. (삼하 2:4a) 유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곳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유다 사람의 왕으로 삼았다.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서 어린시절에 남들 모르게 예언적 의미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이제
유다 지파의 통치자로서 공식적인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유다 지파는 다윗을 지파를 다스리는 왕으로 추대하고, 다윗 중심으로 집결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공식적인 정치체제 밖의 인물이었죠. 그럼 이스라엘의 나머지 11 지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사울에게 속한 세력의 2인자는 군대장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을 앞세워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된 것이고,
통일 왕국의 왕이 되기 전까지 7년 6개월간 유다지파의 통치자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스보셋은 고작 2년 동안 왕이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윗과 이스보셋의 통치기간이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이스보셋이 왕이 되기 전까지 아브넬이 사울 왕국의 통치자 역할을 하다가 후에 이스보셋을 앞에 내세웠을 가능성입니다. 둘째는 반대로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다가 일찍 죽게 되고, 그 뒤로 몇 년의 공백기가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무엇이든 11지파에게는 5년 6개월의 왕이 없는 시간이 존재합니다. 확실한 것은 사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유다 지파와 북쪽 지파로 2개의 세력이 나눠졌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훗날 분열왕국을 만든 2개의 중심세력이죠. 이미 그전부터 이러한 이견과 대립이 있었던 것이죠. 정치적 혼란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북쪽 지파들은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았고 아브넬이 군지휘관이 되었다면, 남쪽 유다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삼았고 군지휘관은 요압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양쪽이
기브온에서 대립하여 동족간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양측의 군사령관 아브넬과 요압의 대결입니다. 이 전쟁에서 다윗의 군대가 이스보셋의 군대를 압도하게 되어 아브넬이 도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이 아브넬의 뒤를 추격하죠. 아브넬은 추격하는 아사헬을 보고, 이미 이 전투는 너희가 이긴 전투이고 공을 세웠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만약 더 쫓아오면 죽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그러나 아사헬이 더 큰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끝까지 추격합니다.
아브넬이 다시 경고합니다. (삼하 2:22) 아브넬이 다시 한 번 아사헬을 타일렀다. "너는 나를 그만 뒤쫓고, 물러가거라. 내가 너를 쳐죽여서, 너를 땅바닥에 쓰러뜨려야 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내가 너를 죽이고, 어떻게 너의 형 요압을 보겠느냐?" 하지만 아사헬은 아브넬의 경고를 듣지 않고 맞섭니다. 결국 아브넬이 창으로 아사헬을 죽입니다. 동족 간의 내전은 곧 휴전으로 마무리 되지만, 이 전투로 인하여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은 동생을 잃었고, 그에게 아브넬은
동생을 죽인 원수가 되고 맙니다. 사울의 죽음으로 갈라진 2개의 세력 중에, 시간이 갈수록 다윗의 세력은 강해지고, 이스보셋의 세력은 약해져 갑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으로 있으면서 6명의 아들을 낳은 것이 기록되는 것은, 이 시간이 다윗에게 위협이 큰 상황이 아니었음을 반증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기록을 통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죠. 그러면서 다른 국면으로 전개됩니다. 바로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에 생긴 분열과 갈등입니다. 결국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아니라, 다윗의 편에 서기로 결심을 하게 되죠. 그래서 다윗과 은밀하게 협상하게 됩니다. 아브넬은 명성이 있는 인물이며, 북쪽 지파들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이 다윗 편으로 망명 의사를 밝혔으니, 다윗은 통일왕국으로 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은 셈입니다. 실제로 아브넬은 망명을 하면서, 북쪽 지파의 지도자들과 충분한 상의를 하였습니다. (삼하 3:19) 아브넬은 베냐민 사람들과도 상의한 뒤에,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람 전체가 한데 모은 뜻을 다윗에게
전하려고, 헤브론으로 떠났다. 즉, 아브넬과 북측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이스보셋’을 겪으면서,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릴만한 왕이 되기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러므로 다윗에게 힘을 보태어 통일왕국의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넬이 대표로 다윗을 만나서 이러한 뜻을 전한 것이죠. 크나 큰 기회이고, 다윗도 이 일에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좋은 기회 앞에서 다윗이 이번에는 하나님께 뜻을 묻지 않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하나님께 뜻을 묻는 것보다, 눈 앞에 있는 현실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은 굉장히 좋은 정치적 기회이고, 이 기회를 잡으며 동시에 다윗에게 풀어야 할 숙제가 떠오른 것이죠. 바로 자신의 군대장관 요압과 아브넬의 적대적 관계 말입니다. 3장에서 다윗은 의도적으로 요압이 없는 틈을 타, 요압 몰래 아브넬을 불러들여서 논의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풀어나가며 하나님께 묻고 듣고 따르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한 방법으로 이 기회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일종의 다윗의 인간미입니다. 참 우리 같잖아요. 그러나 역시나 그의 인간적인 계산은 어긋나고 말죠. 이 일을 요압이 알게 됩니다. (삼하 3:24) 이 말을 듣고, 요압이 곧바로 왕에게로 가서 항의하였다. “임금님이 어찌하여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아브넬이 임금님께 왔는데, 임금님은 어찌하여 그를 그냥 보내어서, 가게 하셨습니까?” 요압은 다윗을 찾아가 질책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보내어 아브넬을 잡아 옵니다. 그리고 헤브론 성에서
아브넬을 죽입니다. 요압이 다윗이 하려던 계획을 완전히 박살내 버립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이 처해있던 한가지 현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다윗의 고민 ‘요압이라는 인물의 존재’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실 다윗에게 요압은 참 어려운 존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고 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요압은 다윗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대로 아브넬을 죽인 사건은 다윗을 무시한 것과 다름이 없었죠. 그런데
이 사건을 다윗이 겪으면서 다윗은 자신의 약함을 깨닫습니다. 그가 요압의 이러한 행동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스스로 느끼며 이렇게 표현합니다. (삼하 3:39) 스루야의 아들들이 나보다 더 강하니, 비록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고 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약하오. 그러므로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주님께서 그 죄악에 따라 갚아 주시기만 바랄 뿐이오. 다윗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온전한 리더십을 갖춘 그런 왕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늘 관계적인 어려움 속에 근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사울이 그랬다면, 이제는 그의 동료이자 부하인 요압이 그에게 일종의 시험거리였습니다. 어쩌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겠죠. 요압을 통해서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울이 가니 요압이 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 속에 자주 있는 일입니다. 저는 예전에 교회는 갈등이 없는 곳이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배워가며 지금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할뿐더러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갈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한쪽이 너무 강할 때입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라면 때로는 갈등을 직면하기도 하죠. 교회는 피라미드와 같은 권위로 누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의 다양성도 더욱 잘 드러나기 마련이죠. 교회는 갈등을 이겨내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훈련하고 배워가는 곳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격적 성숙은 대부분 사람과의 갈등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이뤄집니다. 혼자 살다가 부부가 되어 살면서 우리는
성숙합니다. 그러나 그 성숙은 그냥 주어지지 않죠.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을 극복해나가며 이뤄집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품는 것도 그러하죠. 아직 덜 성숙한 인격체를 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성숙함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 내 삶의 문제를 바라봐야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나를 훈련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유독’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사실 내 안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떤 부분들이
‘유독’ 있어서 그것을 깨닫게 하고 다루어 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 밑에서 자연스럽게 목회를 어깨너머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 큰 자산이라고 느낍니다. 가장 큰 자산은 아이러니하게도 목회의 어려움입니다. “목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이 없어지길 바라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뿐이다. 간혹 더한 사람이 온다.” 부모님이 경험으로 가끔씩 말씀하셨던 이야기입니다. 관계는 피한다고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극복해 나아가는 것에
더욱 소중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요압이 좋은 존재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요압은 나중에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윗의 생애에서 요압은 하나님이 다윗을 훈련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더 나아가게 하는 원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울이 갔다고 끝났나요? 아닙니다. 요압이 있고, 또 압살롬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북쪽 세력을 규합하여 다윗을
통일왕국의 왕으로 추대하려던 아브넬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수포가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일이면 그분의 방법대로 될 것입니다. 그 후, 이스보셋은 다른 신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를 당합니다. 그렇게 북쪽 지파는 스스로 자멸합니다. 사실 7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다윗의 세력은 점점 커졌고, 이스보셋은 세력을 잃어갔기에, 다윗이 무력으로도 얼마든지 이스보셋을 제거할 기회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했다면 저는 다윗이 선을
넘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윗이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쳐서 그의 왕권을 빼앗았다면, 저는 결코 통일왕국을 다스릴 리더십을 얻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힘으로 눌러서 얻어낸 인정이 아니라, 북쪽 사람들로부터 우러나오는 인정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게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겠다는 것은, 때로는 쉬운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가 외쳤던 로마의 강력한 힘에 의한 평화, 힘으로 눌러서 만들겠다던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 같지만 도리어 영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은 기회를 잡고자 하는 기회주의자 같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옳은 방식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신뢰함 속에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보셋이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에도, 무력으로 북쪽을 정복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만약 이스보셋이 다윗과 비슷한 시기에 왕이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이스보셋이 죽은 후, 약 5년의 세월 동안 다윗은 기다린 것입니다. 다윗은 삶에서 여러 실수를 하지만, 그는 실수를 통해서 빨리 깨닫습니다. 다윗의 기다림은 분명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이 다윗이라는 사람에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하고자 했으면 정말 그러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임을 어린 시절부터 약속받았고, 평생을 그것을 기다려온 삶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가 늘 넘어야 할 하나님의 테스트는 왕이 되기 쉬운
기회를 지나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기회마다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왕에서 물러나야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만, 그 기회를 자신의 욕심대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게 주실 것임을 믿은 것이죠. 그저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훈련 앞에 집중합니다. 이스보셋까지 죽은 정치적 공백. 그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관심이 없는 것을 기다리기는
쉽겠습니다만, 다윗과 같은 상황에서도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해나가며, 영혼의 성장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중요성을 참 많이 배웁니다. 그것이 우리가 ‘SLOW CHURCH’라는 마음으로 개척 초기를 보내었던 이유이며, 예배당이 없는 상황에서도 때를 기다리며 한 걸음씩 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특별히 개척 후 수많은 교회의 필요들 앞에서 헌신을 짜내기보다, 성도들에게 은혜가 먼저 채워지길 기다리는 것은 목회자로서 기다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두고두고 잘한 일이라고 되새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변화, 혹은 여러분 주변에 있는 한 영혼이 변화되어 자라가는 일에도 때로는 기다림이 너무나 중요할 것입니다. 원래 가까이 있으면 더 자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봐야 변화를 알죠.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면, 생명이 살아있는 것은 자란다는 믿음을 갖고, 우리는 때로는 사랑함으로 기다려야 하는 순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인내. 결국 11 지파에서도 점차 다윗의 통치를
원하는 마음들이 모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이 다윗을 찾아와 요청합니다. (삼하 5: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으로 왕을 찾아오니,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언약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이렇게 다윗은 7년간은 유다의 왕, 33년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 이렇게 성취됩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하지만 정말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한 사람을 다루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오늘 사무엘하 1~5장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삼하 5:10) 만군의 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점점 강대해졌다. 제가 지난 시간에 ‘복음의 선물’이라는 설교를 통해서, 결국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였을 때 우리가 얻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고 나눴습니다. 다윗이
대단히 잘나고 특출난 탁월함을 갖춰서 그가 승승장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보면 허점도 많고, 그의 옆에는 정작 다윗이 인간적으로는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용맹한 부하도 있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 그의 역량, 부족함 이런 것에 집중하면 가장 중요한 답을 놓칩니다. 결국 다윗의 삶의 초점은 그가 하나님께 집중하고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보다 앞서지 않고, 또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는 뒤처지거나 물러서지 않고 나아갔던 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그 다윗의 삶은 한순간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신앙에 대해서도, 또 주변의 모든 일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을 붙들었다면, 목표를 확인했다면 이제는 인내함으로 걸어가십시오. 그 길을 위해 주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은 6일 동안 1번씩 성을 돌고, 7일째 7번 돌고 난 후였습니다. 13번째
성을 돈 후라는 것이죠. 그전까지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고 하여도 그 인내와 순종이 헛된 것은 아니죠. 나아만 장군이 피부병이 나은 것은 요단강에 7번 들어간 후였습니다. 6번까지 그에게 변화가 없다고 하여 그 6번의 시도를 인내와 순종으로 하지 않았다면 7번 끝에 나타난 기적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요즘 ‘회심’과 ‘변화’를 많이 이야기하니, 혹시 나는 어떤가 생각하면 조급해질 수도 있겠죠. 방향이 맞다면 속도는 주님의 때에 우리는 맡길 뿐입니다.
그것이 나의 변화이든 내 옆 사람의 변화이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믿음을 잃어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 약속 믿고 믿음으로 걸어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