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역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이들을 겪었는지에 대해서 이해하면 되는데,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후손들이 애굽(이집트)이라는 나라로 이주하여 살게 됩니다. 70명의 사람들이 이주했으나, 당시 최강대국 애굽의 보호 아래서 400년간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제는 하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숫자로 늘어납니다.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오게 된 사건이 출애굽기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내던 시절을 지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이제는 유목민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체제로 살아가게 되면서, 처음에는 '사사'라는 직책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후에 '왕정 통치' 체제로 이스라엘도 바뀌게 됩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 왕정의 첫 번째 왕이었으나, 그는 실패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여기까지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무엘서의
내용이라면, 이후의 역사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다윗의 손자인 르호보암 왕 때 나라가 남북으로 나라가 나눠지게 됩니다. 북왕국과 남왕국, 북이스라엘 남유다가 그것이죠. 다윗 가문의 통치를 벗어나 세운 왕국이 북왕국인데, 그들이 먼저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북왕국 이스라엘도 선지자를 보내어 몇 차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것을 경고하였지만, 북왕국은 한 번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멸망합니다. 다윗의 후손인
남왕국은 기복적 신앙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때도 있지만, 더욱 많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남왕국에게도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면 나라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습니다. 여러분, 심판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겠어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우리가 죄악 이전의 모습처럼 하나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원래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갈
때 가장 평안과 사랑이 충만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악은 우리에게 있는 평안과 사랑의 주머니에 구멍을 뚫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을 따를 때, 그들이 비록 연약할지라도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꾸 잘못된 길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녀가 그릇된 길로 갈 때, 당연히 말로 권면부터 할 것입니다. 한 번에 화부터 내는 경우는 없죠. 우리가 볼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징계 또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심판과 징계도 사용하십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이스라엘을 돌이키려는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1단계는 선지자를 통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최후의 단계는 매를 드십니다. 성경은 바벨론 제국이 하나님의 회초리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역사상 가장 빛나는 제국이 고작 하나님의 회초리에 불과하다고 하니,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면 참 우스운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세상 모든 것 위에 계신 존재라면, 제국 또한 그분의 손에 주어져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다윗의 후손인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으니, 다윗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전설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죠. 도대체 그들의 이러한 근거 없는 자신감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 전설의 시작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무엘하 7장입니다. 소위 '다윗 언약'이라고 부르는 말씀이죠. 아니,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이기에 이스라엘은 그리도 뻔뻔하게 살았는가? 과연 그들의 그러한 자신감은 옳은 것이었을까? 우리가 오늘 그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 다시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돌아보면, 과연 바벨론의 회초리를 드신 하나님
앞에 다윗 언약에 근거한 그들의 뻔뻔함은 통했을까요?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바벨론의 공격에서 멸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남유다를 다스렸던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포로로 끌려갑니다. 왕조도 망하고, 남유다도 멸망합니다. 유다 백성 대부분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까지는 1143km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3배 거리를 걸어갔던 것이죠. 남유다 출신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을 '유대인/유태인'이라고 부릅니다. 바벨론 유배 사건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철석같이 믿었던 다윗 언약이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건은 그들의 신앙에 가장 큰 위기이자 기회가 됩니다. 위기라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모든 신앙의 근원부터 흔들리게 된 것이죠?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실까? 하나님이 우리를 왜 안 지켜주셨을까?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약하신가? 우리를 버리셨나? 기회라면, 그들의 잘못된 신앙의 뿌리가 다 뽑혔기에 드디어
바르고 진실한 신앙이 새롭게 형성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고, 그러나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징계의 시간일 것이며, 70년이 지나면 다시 그들을 돌아오게 하리라는 것에 대해서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을 하며 진지하게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서 고찰하게 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리고 포로지에 있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에스겔
등의 선지자를 세우셔서 어떻게 하면 다시 가나안 땅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렇게 포로생활을 하는 70년의 세월 동안 그들의 신앙은 교정되고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들이 잘못을 돌이키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에서 돌아올 수 있게 하십니다. 놀랍게도 그 방법은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라는 나라를 일으키시는 방법으로 진행됩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세계 역사를 뒤흔든 강대국의 간판 교체를 통해서
유다 백성이 정말 거짓말처럼 70년 만에 본토로 귀환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일이 구약의 역사이고 인류의 세계사입니다. 그리고 다윗 언약이 깨어진 약속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약속이며, 다만 구약의 백성들이 그 약속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확인시켜주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살펴볼 내용들이 그것이죠. 그럼 이 모든 일에 대한 키워드가 되는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을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되고, 예루살렘 성을 차지하게 된 것과, 두 번의 시도 끝에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가져온 이야기를 살펴보았죠. 다윗은 승승장구합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이자 평화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릴 수는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그에게는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죠. (삼하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그는
왕으로서 자신이 머무는 거처와 하나님의 궤가 머무는 곳을 비교하며 바라보니, 죄송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민은 그가 비록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종의 마음이었다는 태도를 보여주죠. 그의 내면의 신앙과 삶의 행동이 진실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선지자 나단을 불러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민을 들은 선지자 나단 또한 맞장구를 칩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과 나단의 이야기를 들으신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날 밤에, 나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단아,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얼른 내 마음을 전하거라.” 하나님이 매우 급하게 이 문제에 개입하신 것이죠. 아주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전하신 메시지는 ‘성전 건축 반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는 것을 반대하십니다. 왜 반대하셨을까요? 사무엘하 7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반대하신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건물 성전은 하나님의 진정한 집일 수 없습니다. (삼하 7:5b-6)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은 알겠으나, 그 의도는 좋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자유로움과 초월성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물질적인 세계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건물에 있다고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전 중심의 신앙은 이방종교의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 언약을 하시고, 자신의 존재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두신 것은 임마누엘 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적으로 동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장막이나 성막의 형태로
하나님의 거처를 짓도록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나아가고 머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마음은 소중하고 귀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자칫 하나님의 임재 방식에 대한 오해가 될 수 있기에, 하나님은 일단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이 나중에 성전을 허락하시지만, 이러한 우려대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성전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도리어 예수님이나 스데반은 다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선포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스데반이 죽기 직전 전했던 설교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행 7:48a)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판 삼아 머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을 제한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다윗의 이러한 생각을 우선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존재적 차이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과 존재가 다른 개미가 여러분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개미가 어느 날 나에게 집을 지어주겠다며,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개미의 마음이야 알겠다만, 개미가 여러분을 위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존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개미집을 지어주기는 쉽죠. 즉, 성전은 다윗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생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표현입니다. “그럴 수 없다”가 결론이겠죠. (삼하 7:7) 내가 이스라엘 온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닌 모든 곳에서,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한 이스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라도, 나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백향목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그것이 왕으로서 다윗에게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표현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다윗의 성전 건축 의지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단 넣어두고, 지금 내가 원하는 이것을 잘하면 그것으로 충분해.’ 오히려 이방의 종교들은 대체로 화려함과 웅장함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화려한 예배, 의식, 신전 등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요새 저의 목회적 고민을 아십니까? 첫째, 사역자 청빙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 공동체가 제법 커졌고, 다른 목회자들이 다 놀라는 것은 우리 교회에 저 말고 목회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이가 40명, 청소년이 20명이 넘으며, 청장년들을 통해서도 여러 가지 목양과 사역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는 저뿐입니다. 모두 성도들과 함께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의 이런 모습들이 좋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계속 공동체가 성장하고 있으므로 미래를 생각하면, 전문 사역자의 청빙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됩니다. 둘째, 공간 확장의 문제입니다. 올해 청소년은 다른 건물로 예배공간을 마련하여 나갔지만, 어린이부가 공간 부족으로 고민이 많습니다. 또 금요일에는 팸 모임을 진행하기에 벅찰 정도가 되어서 이 부분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여러모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적 시선에서 보자면, 목회의 동역자도 필요하고, 별도의
공간에 대한 부분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또 2가지를 함께 해나갈 여력이 현실적으로 아직은 부족합니다. 그리고 사실 이 모든 고민은 교회가 너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에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로서 인간 강정규는 주어진 상황 앞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인 것은 둘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면 기꺼이 주님의 뜻을 따라서 불평하지 않고 감당할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다른 목회자를
우리교회에 두지 않기를 원하시면, 그 상황에 순종하여 조금 더 지혜롭게 사역을 감당하며 성도님들과 함께 풀어갈 마음이 제게 있고, 하나님이 만약 우리에게 다른 공간을 허락하지 않기를 원하시면, 그 또한 주어진 환경 안에서 양해를 구하며 최선을 다해서 방법을 고민하며 나아갈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지만,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어느 것도 무리해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너무나도 선명한
일하심에 대한 경험 때문입니다. 저희는 감히 이 시대에 예배당이 없는 상태로 교회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당이 없으므로 교단에 가입하지도 못한 채, 아무도 알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사귐의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첫 시작 때, 저희교회의 한 달 수입은 50만 원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조차 개척했다고 아름아름 보내어준 선교비를 합친 금액이 그 정도였습니다. 회의실을 빌려서 예배를 시작했던 5년 전 저희교회의 모습이 요즘
너무 감사한 이유는, 지금 목회의 길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우리의 존재 자체가 희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없어도 교회는 시작될 수 있고, 그렇게 시작된 교회가 지금 하나님 안에서 이렇게 생존해 있다는 소식 자체가 그들에게 소망이 됨을 저는 너무나 많이 느낍니다. 회의실에서 예배하며 선교비를 합쳐서 한 달 예산이 80만 원 정도는 되기 시작했을 때, 월세를 얻어 사용할 공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전교인이 성인 10명이 안 되었기에 예배할 공간을 함께
보려고 다니곤 했어요. 그때 저희가 월세 50만 원 정도에서 보려고 다녔던 장소 중에는 10평짜리 공간도 있었습니다. 저희가 그때 정말 심도 있게 고민했습니다. ‘10평을 얻으면 유아실 2평을 하고….’ 이러면서 말입니다. 어느 날 20평대 공간이 정말 괜찮은 가격에 나온 것을 발견했습니다. 위치, 금액 다 마음에 들었고, 다른 업종으로 쓰던 곳인데 몇 곳만 고치면 예배당으로 쓰기에도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주인도 교회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변수가
있었죠. 같은 건물에 이미 교회가 지하에 들어와 사용 중인 것이었죠. 말 안 하고 입주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 듯하여, 전화를 드렸어요. 제가 간판도 달지 않겠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예배를 위한 공간이 필요할 뿐이니, 시작하는 교회를 위해 양해를 해달라고 했지만, 결론은 반대였습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그 교회에도 서운했지만, 하나님께도 참 서운했습니다. 그런데요. 그 이후에 하나님이 더 좋은 장소로 우연히 저희를 보내어주셨어요. 그곳이 고읍에서
예배했던 장소입니다. 30평대의 예배당은 당시 저희 기준에서는 너무 과분한 장소였고, 그곳에서 3년을 잘 보내고 이 예배당으로 이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옥정에 오는 것도 여러 쉽지 않은 일이 있었죠.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제 생각보다 크게 일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배우며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목회를 해나가는 내내 저와 우리 공동체가 훈련받고 배우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있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없다고 다 안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같습니다.
후원하는 교회 하나 없이 개척했음에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지금껏 우리는 잘 왔고, 광야와 같았던 여정을 잘 지나왔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사람이 많아져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저를 바라보며,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는 땅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때가 되면 땅도 주십니다. 땅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삶에 있고 없고의 문제입니다. 교회에 정말 하나님이 주인 되어 계시는가의 문제입니다. 저희가 첫 예배를 드릴 때, 앞에 뛰어놓았던 PPT가 이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찾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우리가 아무것도 없어도,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나아가면, 우리는 괜찮다. 5년 전 우리가 첫 예배를 시작하며 쥐뿔도 없지만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깡다구였습니다. 저는 저희가
저것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수사 의문문입니다. ‘너 지금 뭔가 잘못 알고 있어.’ 하나님이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마음이 싫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의 순수한 마음은 받으셨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의 보호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다윗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하나님은 다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지으시는 주체를 바꾸어 버리십니다. 집은 누가 짓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짓는 것입니다. (삼하 7:8b-10)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어서,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쳐 주었다. 나는 이제 네 이름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과 같이, 빛나게 해주겠다.
이제 내가 한 곳을 정하여, 거기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심어, 그들이 자기의 땅에서 자리잡고 살면서, 다시는 옮겨 다닐 필요가 없도록 하고, 이전과 같이 악한 사람들에게 억압을 받는 일도 없도록 하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다윗아. 너를 세운 것이 나야. 네가 지금 누리를 평안도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야.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땅에서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삼하 7:11) 이전에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사사들을
세워 준 때와는 달리, 내가 너를 너의 모든 원수로부터 보호하여서, 평안히 살게 하겠다. 그뿐만 아니라, 나 주가 너의 집안을 한 왕조로 만들겠다는 것을 이제 나 주가 너에게 선언한다. (삼하 7:12) 너의 생애가 다하여서, 네가 너의 조상들과 함께 묻히면, 내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삼하 7:13)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그리고
주시는 이 말씀들은 다윗 왕조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이죠. 이 약속은 이중적으로 성취됩니다. 하나는 눈에 드러나는 성취입니다. 바로 솔로몬을 통한 성취이죠. 그러나 그 성취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영원한 약속에 대한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온 인류의 구원자이자 왕이시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조금 눈여겨보아야 할 포인트가 13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후계자가 성전을 건축할 것인데, 그를 통해 하나님은
오히려 그 왕위를 튼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인간 왕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과 그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복의 통로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성전 건축을 바라보지만, 실상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침 이번 주에 한 성도님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어떠한 사역을 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사실 그 사역을 통해서
내가 기쁨을 얻고, 신앙의 동력을 얻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도 맞지만, 사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행복과 기쁨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직업에 어려움이 있지만, 저도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힘든 길을 가야 할까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할까? 그런데 저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래도 이 일이 좋아서 합니다. 목회해나가며 겪는 힘듦보다, 목회해나가며 누리는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더 큽니다. 저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여러분의 사역과 여러분의 삶이 그런 고백 속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수없이 사역을 그만두겠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특히 저희교회는 매년 사역을 다시 원점에서 결정하게끔 하니까 더욱 그러하죠. 제가 사역적 경험이 없던 시절에는 사역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교회와 그 사역을 위해서 붙잡곤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붙잡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최근에는 다시 적어도 한번은 붙잡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일이 펑크 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사역을 안 하면 에너지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절약된 에너지와 시간이 여러분의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사역을 안 하는 대신 그 시간을 하나님께 다른 방법으로 드리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저도 그 약속을 지킬 정도로 강하지 못함을 압니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하나님께 사용하던 시간과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사용되면서 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의 일을 위해서 아니라 성도의 영혼을 위해서 한번은 만류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그 부분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기 때문입니다. 저는 좋습니다. 좋아서 저는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일에 헌신합니다. 저는 여러분도 그런 고백으로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입니다. 그래서 이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이죠.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다른 것에 시간을 쏟고, 다른 것으로 기쁨을 얻고자 찾고 헤매어 봤지만... 내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기쁘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 언약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약속에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릇되게 행할 때, 하나님이 보이실 행동에 대한 말씀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보시죠. (삼하 7: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사랑한다는 것은 방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가 망나니가 되어가는데 가만히 내버려 두면 부모가 아니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그가 우리를 방관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여 포로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거나 하나님이 약속을 어기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삶에 어떤 고난과 고통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모든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은 아닐 수 있습니다. 죄악 된 세상의 깨어짐의 흔적이 서로를 괴롭게 하는 경우들도 있죠.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삶에서 마주하는 어떤 고난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므로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잃어버리지 않으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다못해 목사인 저도 인간인지라... 제가 조금 ‘쎄게’ 누군가에게 직언하여 이야기할 용기는 제가 그 사람과 친밀감이 있을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때로는 아프지만 필요한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그 삶에 개입하시고 방향을 바꾸기 위해 장애물을 두시고... 그러시지 않습니다. 내가 분명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지 않은데, 평안하면 오히려 영적으로 긴장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눈물을 머금고 매를 드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돌이키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나게
하십니다. 그제야 바벨론 땅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이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납니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돌아온 자는 품어주시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분이 돌이켜야겠다고 마음먹은 부분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돌이키십시오. 용기를 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고 기다리십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고백하며 시작된 이 이야기는 도리어 이런 약속으로 주도권이 바뀐 채 끝이 납니다.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집은 누가 세우시는 것입니까?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다윗의 집을 다윗의 나라를 하나님이 붙들어주시겠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주어진 말씀이 정말 이루어졌는가?
그것입니다. 말씀이 정말 이루어졌는가? 그래서 우리의 역사 히스토리(history)를, 다르게 풀어서 그의 이야기(his story)로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신이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심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북이스라엘. 다윗의 왕조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독립한 왕국입니다. 분열왕국 기간 동안 북왕국은 19명의 왕이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왕조가 무려 9번이나 등장합니다. 왕조가 등장했다는 것은 정변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왕의
집안이 계속 바뀌는 것이죠. 남유다.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그 이후로 멸망할 때까지 다윗의 집안이 대대로 통치합니다. 그리고 다시 귀환하여 성전을 세우는 스룹바벨. 그는 다윗의 후손이죠. 비록 포로로 끌려갔지만,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포로가 된 땅에서도 지키셨고, 다시 그들을 귀환하게 하시어 약속의 땅에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신약의 첫 책인 마태복음은 이 약속을 기억하며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헬라어 :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휘우 다비드 휘우 아브람 직역하면 ‘계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과’ 이 계보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는 바로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표현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족보를 마태복음은 기록합니다. 그 족보에서 다윗이 태어나고,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그리고 족보를 이렇게 요약 정리합니다.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왜 족보를 14대 단위로 끊어서 요약합니까? 바로 14가 다윗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숫자가 매겨져 있습니다. 다윗은 4.6.4입니다. 즉 4.6.4를 더해서 나온 ‘14’라는 단어는
다윗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즉, 마태복음이 구약 이후 400년의 침묵기를 끝내고,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다윗의 후손을 통해 영원한 통치, 영원한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으로부터 예수님의 탄생까지가 1000년입니다. 100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 1000년이 두 번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붙들기를 원합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사무엘하에서
다윗의 의도나 행동을 정치적 관점으로 분석하는 학자들은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였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분석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7장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나라의 흥망성쇠, 왕권의 권위는 그러한 우리의 어떠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성전 세운다고 왕권이 강화되고 나라가 영원무궁한 것이 아니죠. 도리어 성전이 완공된 후,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 집중하며, 그들의
신앙은 건물에 갇혀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눈에 뭔가 보이면 안정감을 누립니다. 그래서 자꾸 보이는 것을 업그레이드해서 내가 좋은 삶을 살았노라고 스스로 위안을 얻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겉 사람을 단장하느라, 무너져 가고 공허해져 가는 나의 속사람, 나의 영의 피폐함을 외면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의 종말을 예언하셨고, 로마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며 주님의 말씀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성전은 무너졌지만,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은 자들을 성전 삼아주시고, 그 안에 참된 성전을 이루어가는 자들에게 누리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채우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는 일을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양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가장 가치 있고 행복하게 이끌어 갈 것입니다. 바울은 보이는 것보다 소중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성도들에게
가르칩니다. 그 말씀으로 저도 여러분에게 권면하며 설교를 마칩니다.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소중한 이유는, 우리의 삶 또한 역사 안에서 하나의 점으로 남겠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그 한 번의 인생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 속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안에 있음을 확인한 분들이라면 고난 앞에서 결코 돌아서지 마십시오. 아직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일지 고민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살아계신 주님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끝으로 내가 주님께서 멀어져 있음을 느끼는 분이라면, 지금도 내가 떠난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주님의 사랑 앞으로 용기 내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우리에게 기회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