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의 두 번째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서 다윗은 사울 왕이 죽은 이후에도 믿음으로 약속을 기다렸던 시간을 보냈고, 결국 이스라엘에 속한 12지파 전체의 인정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루지 못했지만, 사무엘하 5장에서는 다윗 통치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성을 다윗이 자신의 사병들과 함께 정복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중심이 되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에도, 가나안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땅이 있었는데, 바로 예루살렘이 그러했습니다. 가나안 출신의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죠. 사실 이곳은 어느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 자체가 언덕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이 자신들을 치러 왔을 때도 조롱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다윗의 소유가 됩니다. 그래서 다윗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가나안식
이름인 시온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죠. 즉,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으로 시작해서,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고, 예루살렘의 왕이 되어 전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이것이 매우 통치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는 만약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수도를 어디로 정할 것입니까? 우리가 대한민국 안에서도 수도 위치를 정하는 것은 엄청난 이해관계가 달린 일이고,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죠. 예전에 수도를 충청도로 옮기려는 이야기의 논리는 서울의 위치가
한반도에서는 가운데이지만, 남북 대립의 구도에서는 너무 북쪽에 붙어 있다는 점이기도 했죠. 그만큼 여러 문제가 걸려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지파들에 속해있지 않았어요. 그리고 유다 지파와 북쪽 지파의 중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점령하고 이곳을 다윗 왕조의 중심지로 삼은 것은 그의 통치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예루살렘에서 다윗은 11명의 왕자를 낳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4번째 왕자가 ‘솔로몬’인데, 사실 그 전에
헤브론에서 낳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므로, 엄밀히 말해서 솔로몬은 다윗의 10번째 아들입니다. 그가 왕에 오른 것도 참 놀라운 일이죠. 이러한 예루살렘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고 오늘의 이야기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번 주 묵상한 본문인 사무엘하 6~8장에는 3가지 주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6장 - 언약궤 이야기. 7장 - 다윗 언약. 8장 – 다윗의 전성기 여기에 꼭 설교를 해야 하는 내용이 2개나 있습니다. 제가 한편의 설교에서 두 가지 주제를 다루게 되면,
내용도 길어지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실패할 수 있으므로, 오늘은 과감하게 6장의 내용에 집중해서 언약궤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목이 조금 독특하죠? 틀린 그림 찾기입니다. 여러분, 한 번쯤 틀린 그림 찾기라는 게임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양쪽에 비슷한 그림을 두고 어느 것이 다른지를 고르는 게임이죠. 6장에 언약궤를 가져오는 이야기는 두 번에 걸쳐 시도됩니다. 이것을 틀린 그림 찾기에 대입해서 보면,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언약궤를 가져오는 1차 시도와 2차 시도에 있어서 주목해서 볼 3가지 부분을 중심으로 설교를 나누겠습니다. 언약궤는 낯설지 않으시죠. 우리가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공부하며 ‘언약궤’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증거궤’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하고, 레위기에서는 ‘법궤’라고 부른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에서는 ‘여호와의 궤, 하나님의 궤’ 등으로 부르기도 하죠. 언약궤 위에 속죄소(시은좌)가 올라가 있는 형태이고, 바로 이것이 지성소
안에 보관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상징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읽다 보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갈 때, 물이 마르는 기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에도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갑니다(수 6:4, 8). 하나님이 함께하심의 증거로서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초반부에 이미 언약궤와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설교였죠. 그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결정대로 언약궤를 가져와서 전쟁에 이기는 도구로 활용하려다가 참패하고,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깁니다.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기다니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으로 들어간 언약궤는 블레셋을 초토화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졌을 뿐, 하나님이 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을 깨우치는 사건이었던 것이죠. 결국 언약궤는 블레셋이 감당할 수 없었고,
블레셋은 스스로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블레셋이 속건제물로 바친 금덩이들을 실은 채, 전쟁의 전리품을 갖고 귀환하는 승리의 장수처럼 언약궤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 이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이라는 땅에 두게 됩니다. 오늘 사무엘하 6장은 그로부터 20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수도로 정하고 본격적인 다윗 왕조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1. 행동의
시작 먼저 첫 번째 주목할 포인트는 언약궤를 옮기게 되는 행동의 시작에 대해서입니다. (삼하 6:1)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에서 정병 삼만 명을 징집하여서, (삼하 6:2) 그들을 모두 이끌고 유다의 바알라로 올라갔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올 생각이었다. 그 궤는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궤였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기로 하고 3만 명의 병사와 함께 바알라로 갑니다. 바알라는
기럇여아림의 다른 이름입니다. 첫 번째 시도는 다윗이 주도적으로 행합니다. 하나님께 묻거나,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거나, 어떤 하나님이 주시는 사인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사무엘서를 계속 읽어보신 분들은 이제 대충 감이 오시죠.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합니다. 그럼 틀린 그림 찾기를 해봐야죠. 두 번째 시도는 하나님이 궤가 머문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내려 주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 시도는 잘못된 것으로 심판이 임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복이
임한 것이죠. 그러므로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의 사인으로 여기고 궤를 옮기게 됩니다. (삼하 6:11) 그래서 주님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그 때에 주님께서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내려 주셨다. (삼하 6:12) 누군가가, 오벳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궤를 보관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벳에돔의 집과 그에게 딸린 모든 것에 복을 내려 주셨다는 소식을, 다윗 왕에게 전하였다. 그리하여 다윗은 기쁜 마음으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오벳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가지고 올라왔다. 궤를 옮길 때에 그는 큰 축제를 벌였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분명히 예루살렘 성으로 언약궤가 이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언약궤가 블레셋으로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20년간 머물렀을 뿐,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 성이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때’와 ‘방법’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차지한 후, 자신의 타이밍에 자신의
방법대로 일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다윗이 이번에도 실패했던 이유입니다. 사실 이것은 다윗뿐 아니라, 사울에게 굉장히 여러번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친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조차도 그러할 때가 있었다는 점이죠. 또한 이것은 우리가 자주 실수하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좋은 목적이면 다 괜찮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언약궤를 가져오고자 하는 목적이 좋으니, 다 괜찮다고 여기면 오산입니다. 좋은 일 혹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그 모든 과정조차도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 속에 있어야 합니다. 2. 이동의 방법 두 번째 포인트를 찾아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개역개정과 새번역이 조금 다릅니다. (삼하 6:2b)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_ 개역개정 (삼하 6:2b) 거기에서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올 생각이었다. _ 새번역 이럴 땐 원어를 봐야 하죠. 히브리어 ‘올라’를 개역개정과 새번역성경이 달리 해석한 것인데, 이것은 메고 온다는 것보다는 그냥 옮기는 것입니다. 메어 온다는 표현은 다른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즉 첫 번째 시도에서 다윗은 언약궤를 그냥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병사들을 보내어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나옵니다. (삼하 6:3) 그들이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에,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요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두 번째 시도와 틀린 그림 찾기를 해봅시다. (삼하 6:13) 다윗은, 주님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에,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다. 차이가 있죠? 첫 번째는 수레에, 두 번째는 메어서 옮깁니다. 그럼 무엇이 맞는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를 다루는 방식이 이미 하나님의 명령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 하나님이 주신 규정에 따르면 언약궤는 메어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새 수레에 옮긴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그랬죠? 바로 사무엘상에서 블레셋이 그렇게 언약궤를 옮겼습니다. 블레셋의 방식은 더 쉽고 간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적어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메어서 옮기는 것이었죠.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이 부분에 대하여 해석하며, 다윗이 전통적 방식을 블레셋의 선진기술로 대체하려고 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이방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도 시대마다 변하는 부분이 있고, 그것을 다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일 수 없는 환경에서는 ZOOM이라는 환경을 통해서, 또 유튜브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예배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편해서 그 환경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혹시 이 유튜브 설교를 듣고 계신 분 가운데, 이것이 최선이기에 오늘도 이 방법으로라도 예배하시는 분들은 축복합니다. 그러나 내가 더 나은 방법으로 예배할 수 있음에도 아직 주저하고 있다면 저는 이제는 조금 더 나은 방법으로 예배해 보기를 권면합니다. 혹시 교회를 떠나 신앙이 멈춰있던 분들, 아직은 편한 것이 좋아서 온라인에 머물고 계신다면, 아니면 다른 약속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을 차선으로 선택했다면,
다음번에는 나의 어떠함에 양보하지 말고, 불편함을 각오하고 주일을 예배를 위해 헌신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진짜 예배자가 됩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던 소들은 갑자기 날뛰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명확한 이유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등 다른 상황에서 동물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영적 현상을 감지하는 예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도 그런 해석을 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행렬을 멈추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라고, 즉 STOP SIGN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레를 끌고 가던 소들이 날뛰면서 휘청거리니 웃사라는 사람이 손을 내밀어 언약궤를 붙들게 됩니다. 그 순간 웃사가 죽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권한이 없는 사람이 성물을 만지면 죽습니다. 일전에도 불레셋에서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왔을 때, 벧세메스 지역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가볍게 생각하고 언약궤를 열어 속을 들여다 보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언약궤와 관련해서 성경이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매너와 예의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조차 버릇 없는 자녀를 우리는 가르쳐야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함을 이해한다면 그분이 주신 언약궤를 이동하거나 다루는 가르침에 따라 행했어야 합니다. 6:7에는 ‘웃사가 잘못함으로’라고 할 때 히브리어 ‘하샬’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잘못이 ‘불손함, 경멸’ 등의 어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궤를 붙잡은 좀 전의 행동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옮기는 방식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에 대한 것인지 견해의 차이는 있습니다. 두 가지 잘못이 적어도 여기서 함께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두 번째 시도를 보면, 이번에는 다윗이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가도록 합니다. 깨달은 것이죠. 그에 더하여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 예배를 드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확연한 차이이죠. 불손과
경멸이 첫 번째 시도에서 저주로 이어졌다면, 순종과 예배가 두 번째 시도의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즉 언약궤 내러티브는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관해서 깨닫게 합니다. 어디로 옮길 것인가, 언제 옮길 것인가?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로우심에 있는 것입니다. 궤라는 상자의 모습으로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분이 하나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3. 어떤 신분으로 참여하는가 (삼하 6:5)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은,
온 힘을 다하여서, 잣나무로 만든 온갖 악기와 수금과 거문고를 타며, 소구와 꽹과리와 심벌즈를 치면서, 주님 앞에서 기뻐하였다. 첫 번째 시도가 다윗의 주도하에 이뤄졌고, 다윗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화려한 의식으로 이 행사를 주관합니다. 이때도 주님 앞에서 기뻐했고,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언약궤 이동식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첫 번째 시도에서 다윗은 철저하게 왕의 위치에서 이 모든 것을 통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웃사가 죽게 되는 심판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지금 뭔가를 단단히 잘못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깨달음이 이 구절에 담겨 있죠. (삼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러분 경외함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다윗이 첫 번째 시도의 실패를 통해,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멈추게 됩니다. 언약궤 내러티브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표현을 썼었죠. 나를 하나님의 품 안에 맡겨서 살아가는 것도 동행이고, 하나님을 내 삶으로 가져와 내 삶의 한 요소로 두는 것도 그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하게 다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진실한 동행이 무엇인가? 내 삶의 자리에
하나님을 플러스알파로 두는 것이 정답이 아닙니다. 내가 변하여 하나님의 길로 나아가 하나님 손 붙들고 걸어가야 합니다. 다윗도 자신이 왕의 권위로 언약궤를 가져오려는 시도를 실패하며 깨닫습니다.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따라가야 하는구나. 제가 지난 시간에 다윗의 위대함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실수하고 실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 속에서 잘 깨닫고 돌이킨다는 점입니다. 실수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벽이 아닙니다. 깨달은 것에 대해서 진실한 마음으로 반응하여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후에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고 쫓겨 도망하게 됩니다. 그때 대제사장인 사독이 도망가는 다윗에게로 가져옵니다. 마치 이것을 가지고 있어야 이스라엘의 왕권을 가졌다는 상징처럼 말입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십니까? (삼하 15:25) 그런 뒤에 왕이 사독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님께 은혜를 입으면, 주님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오. (삼하 15:26)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싫다고 하시면, 오직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이루시기를 빌 수밖에 없소." 여러분. 저는 다윗의 이 표현이 정말 멋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왕좌에서 물러나 도망한다고 언약궤도 나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도성에 계신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를 돌아오게 하실
것임을 고백하는 이것이 믿음이죠.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 또한 따라야죠. 이게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삶의 모습이죠. 제가 생활 스포츠들을 좋아해요. 농구도 좋아하지만, 탁구도 좋아하고 볼링도 좋아하죠. 탁구도 조금은 치는 편이고, 볼링도 조금은 치는 편입니다. 그런데 탁구와 볼링을 배울 때 정말 중요한 것이 있어요. 볼링으로 설명한다면, 내가 공을 굴렸는데 계속 오른쪽으로 빠집니다. 그런데도 계속 거기로 굴리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가
없죠. 그럼 반드시 변화를 줘서 다른 방법으로 시도를 해야 합니다. 던지는 각도를 바꾸든, 서 있는 위치를 바꾸든 실패한 방법을 고수하며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것이 아니라, 빨리 문제를 파악하고 바꿔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왕으로 모든 것을 통솔하고 지휘하려던 것이 다윗의 태도였다면, 틀린 그림 찾기로 두 번째 시도를 분석해봅시다. (삼하 6:14) 그리고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만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 (삼하 6: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가문은 환호성을 올리고, 나팔 소리가 우렁찬 가운데, 주님의 궤를 옮겨 왔다. 다윗이 입은 옷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인데, 예배 때 있는 옷을 다윗이 입고 간 것이죠. 첫 번째 시도에서 사용한 악기들은 잣나무로 만든 온갖 악기와 수금, 거문고, 소구, 꽹과리, 심벌즈였습니다. 이번에는 오직 나팔, 그리고 대신 다윗이 예배자로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이 무엇을 깨달았는지가 느껴지십니까? 두
번째 시도에서는 여호와의 궤 앞에 자신은 왕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나아간 것입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도 ‘주님 앞에서’ 있었지만, 동시에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진두지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직 ‘주님 앞에서’ 그분을 기다리고 예배합니다. 왕의 체통 따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예전 다윗과 같이 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죠. 바로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입니다. (삼하 6:20) 다윗이 자기의 집안 식구들에게 복을 빌어 주려고 궁전으로 돌아가니,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맞으러 나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춤을 추는데, 속살도 좀 드러나고 이럴 정도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을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미갈의 눈으로 봤을 때는 ‘방탕한 천민이나 불한당’ 정도로 보였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였을까요? 당연히 미갈 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마음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좋아하는 찬양의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춤을 출 때 다 비웃겠지만, 그들도 주 알게 되면 함께 기뻐 춤을 추게 되리.” 아멘.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는 이유,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래서 때로는 오해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습니다. 그들도 주 알게 되면, 함께 기뻐 춤을 추게 되리.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말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천동설, 즉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요? 그렇게 보이니까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당대의 모든 사람들은 느꼈죠. 지동설을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를 향해, 미쳤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의 주장은 철저하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코페르니쿠스가 마음속으로 이렇지 않았을까요? “그대들도 언젠가 진리를 알게 되겠지. 내가 옳았다는 것을...” 미갈이 다윗을 향해서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고 타박을 할 때, 다윗이 어떻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삼하 6:21-22b)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대하며 다윗이
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봅니다. 여러분. 초등학생 6학년만 되어도 어린이 예배에서 폼을 잡습니다. “난 이제 율동 안 해.” 최고참이라 이거죠. 교회에서 조금 나이 들면, “나는 이제 은퇴하련다. 이제 니들이 해라.” 때가 되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내가 결정하여 스스로 은퇴하는 것은 다른 것이죠. 나의 나아감과 물러남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물으셔야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다시금 ‘교만’과 ‘겸손’에 대해서
떠올리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만과 겸손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기준으로 나를 보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 외에는 다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다 하시는데, 내가 그보다 나를 높게 보는 것도 교만이요, 나를 낮게 보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가 하나님 없어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것도 교만이고, 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못한다고 구는 것도 교만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만큼, 나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대로
나도 나를 그렇게 여기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겸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도 우리의 실수와 실패 속에서 다듬어 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해 주십시오.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좋은 왕이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한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를 하나님이 채우시고 붙드셔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왕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 비결은 깨닫고 고치는 것.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힘쓰는 것.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야 할 것들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도 말씀과 내 삶을 놓고 틀린 그림 찾기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발견된 모습에 대해서 우리 또한 다윗처럼 철저하게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모든 것을 나 중심적인 입장에서 행하고 판단했다면... 혹시 내가 나의 편의대로 하나님을 여전히 도구로
삼고 있다면... 여전히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서 조차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마음과 생각을 두고 있다면... 저는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의 삶에도 교정이 일어나길 원합니다. 오늘 다윗과 대조되었던 것은 미갈입니다. 그녀는 공주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세상이 비웃을지라도 괜찮은 단단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의 기쁨과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시선도 다윗이 바라보았던 그 하나님께 있어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가 늘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