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이 다윗 언약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은 구약을 넘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너무나 중요한 약속이죠. 그래서 다윗 언약하면 사무엘하 7장, 사무엘하 7장 하면 다윗 언약이라고 외울 정도로 중요합니다. 다윗 언약 이후에 승승장구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8-10장까지가 모두 다윗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블레셋, 동쪽으로는 모압, 북쪽으로는 아람, 남쪽으로는 에돔까지
확장합니다. 블레셋 영토의 성읍을 차지하고 모압은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삼아버립니다. 북쪽의 아람도 종주권 조약으로 다스리게 됩니다. 남쪽의 에돔도 다윗의 종이 됩니다. 8장의 핵심은 이것이죠. (삼하 8:14b)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하나님이 그에게 승리를 주셨고, 다윗 또한 전쟁의 전리품을 주님께 올려드리며,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다윗의 나라는 이제 더 이상 작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서
더 많은 직책이 생기고 나라가 강대국으로 변모합니다. (삼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정의와 공의. 정의는 ‘미쉬파트’이고 공의는 ‘체다카’입니다. 미쉬파트와 체다카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즉 다윗은 신정 안에서의 왕정을 잘 구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사울 집안의 남은 자, 즉 왕족에 해당하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도 은총을 베풀어 자신의 가족처럼
함께 식탁의 자리에 참여시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볼 때, 그는 정치적 리더로서나, 군사적 리더로서나, 사람으로서조차도 거의 완벽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곤고한 왕권 강화를 이루어가고 있고, 군사적으로는 주변 나라를 정복하여 위세를 드러내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모습을 갖춘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윗의 최정점이고, 이후에 그의 삶은 엄청난 신앙적 위기를 맞이합니다. 1) 성공 : 신앙의 독 이것과
정확히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고통은 신앙의 연료이다. 우리가 고난이 생기면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안 되면 우리 이상의 존재를 찾는 DNA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그 DNA는 내가 뭔가를 잘하면 신을 찾지 않는 쪽으로 발휘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시간 남고 돈 남으면 할 것은 죄짓는 일뿐이다.” 물론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뭘 해도 죄를 지을만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바쁘게 사느라 우리가 다른 짓을 안 하는 것도 맞거든요. 그런데 시간 남고 돈 남으면 죄짓는 일에 매우 취약해집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심할 때,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쓰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임을 아는 사람은 항상 자신을 보호하고자 무장을 하게 됩니다. 영적 무장이죠. 그런데 그 마음이 느슨해지는 순간 우리는 죄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영적 면역력이 떨어져 있어요. 그런데
영적 면역력이 언제 떨어지는가? 잘 나갈 때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윗의 삶을 계속 오면서, 이제 이 정도로 훈련된 다윗이면 영적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니요. 다윗의 위기는 가정에서 소외되거나, 골리앗을 만났을 때나, 사울의 죽음의 위협이 아니라, 바로 지금 가장 칭찬받고 있고, 성과를 내고 있고, 스스로 잘하고 있는 듯 여길 때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수차례 검증되었던 말이 ‘절대권력은 절대부패 한다’입니다. 그래서
정말 피하고 싶은 말이지만, 성경이 주는 진리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편의 고백을 보십시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당하는 중에도 그냥 고난 당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유익이 아니겠죠.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있다면, 하나님께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면 유익입니다. 즉, 고난을 당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그 훈련의 의미를
잘 깨달으면 유익이 됩니다. 반대로 평안할 때는 내가 하나님의 훈련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유혹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평안할 때는 의도적으로 더욱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은 고난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데려다주는 물살과 같다면, 평안은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도리어 밀어내는 물살과 같기에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추구하고자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장에서 암몬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다윗이 전과 조금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암몬의 왕이 죽게 되어 다윗이 조문 사절단을 보냈는데, 암몬의 새로운 왕 나하스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선량한 호의로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지금 다윗이 주변 나라를 다 점령했고 속국으로 삼고 있거든요. 이제 그 주변 나라 가운데 암몬 차례라고 느낄만한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자신들의 왕이 죽었는데, 다윗이 조문단의 이름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암몬 왕은 이 행동을 순수한 조문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아니죠. 이것을 필시 다윗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첩자를 보낸 것으로 생각했겠죠. 그래서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단에게 모욕을 주고 쫓아내 버립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것을 전쟁 포고로 보고 암몬과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전쟁과 달리 다윗은 전쟁에 부하 장수들만을 내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 성에 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을 중심으로 전쟁에서 크게 이깁니다. 이것이 10장의 내용입니다. 2) 붕괴의 전조 증상 쉽게 말해서 우리는 죄를
한순간에 짓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죄는 결코 한순간에 짓지 않습니다. 이미 무너진 그의 내면의 질서가 죄의 행동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 나타나는 행동은 일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미 내면에서 조짐이 있었고 점진적으로 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10장의 내용을 볼 때, 적어도 다윗에게서 그의 내면에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로 볼 때 문제가 생겼다는 3가지 조짐이 나타납니다. 첫째, 암몬 왕 나하스와의 일은 정말
다윗의 선대였는지, 정치적 계산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오해이건 계략이건 사건이 터졌습니다. 갈등이 터지는 것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자, 그럼 갈등의 상황이 생기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뜻을 물어야죠. 갈등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갈등이 없으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야 합니다. 갈등은 꼭 나쁜 것도 아닙니다. 갈등을 겪지 않으면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성을 훈련할 길이 없습니다.
환경적으로 볼 때, 가족 안에 형제가 많으면 이기적인 성향이 훈련됩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훈련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형제가 많은 것이 편하고 좋습니까? 불편합니다. 불편함이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죠. 군대에 갔다 오면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남자들이 철이 듭니다. 왜 철이 듭니까? 불편함을 마주하며 깨닫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군대에 가서 제가 얼마나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인지 처음 깨달았어요.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 됐으니, 저는 어지간히 다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군대에 가니까 제가 전혀 할 생각이 없던 것을 해야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하나둘씩 해나가며 훈련되다 보니, 제대할 즘에는 ‘세상에 못 할 것이 없겠는데?’라는 망상의 병에 빠져서 제대합니다. 그리고 그 병은 세상에서 또다시 어려움을 만나며 치유됩니다. 갈등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그 갈등을 통해 우리가 성장하도록 사용하십니다. 지금
나하스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이 자기를 도발한 것이고,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나하스가 자신을 도발한 것입니다. 갈등 상황입니다. 그럼 나하스야 기분대로 한다고 치고,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혹은 “하나님, 제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기를 원하십니까?” 갈등의 상황에서 자기감정대로 하면 신앙의 하수, 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신앙의 중수,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진짜
행할 수 있으면 신앙의 고수. 이 사람의 신앙이 어느 수준인지 우리의 모습 속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인격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야생마가 길들여지는 것처럼 훈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으세요? 예수님의 성품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 뜻대로 모든 것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예수님 닮은 사람이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태어난 대로 살아라’ 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나를 너에게 주겠다.
나와 함께 하는 삶을 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닮은 것이 인격의 성숙입니다. 다윗이 묻지 않았어요. 다윗이 그 전과 달랐다는 조짐의 첫 번째 정황이죠. 두 번째, 다윗이 전쟁에 나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어요. 다윗이 그러나 전쟁에 나가지 않은 이유? 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죠. ‘내가 이제 이것까지 해야 해?’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다른 중요한 일을 해야 해서 못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죠.
그러나 다윗이 이 전쟁에 나가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에 안 나간 다윗의 모습을 11장에서 보니까 낮잠 자고 있습니다. 게으름이죠. ‘내가 이 나이에, 내가 이 정도 신앙적 연차에, 내가 이 정도 사회적 지위에 있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가 다윗의 두 번째 조짐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주인의 뜻에 언제나 반응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분명 하나님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세
번째, 그런데도 다윗의 군대가 승리합니다. 이전의 다윗은 그러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하나님께 승리의 공을 돌리고 영광과 감사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이 가지도 않은 전쟁에서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는데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는 나라가 크고 자신의 군대가 강력하니, 자신들의 승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일본에 1,000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하는 유명한 서점 브랜드인 ‘츠타야’의 이야기를 다룬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라는
책이 있습니다. 츠타야의 무네아키 사장이 10년 간 직원들 안에서만 공유하던 경영의 깨달음을 묶어서 책으로 낸 것이죠. 여기에 매우 주목할만한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사업을 준비해서 1호점이 성공하면, 2호점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2호점이 실패합니다. 왜 그럴까요? 1호점을 낼 때는 고객의 기분으로, 고객 중심으로 기획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시장조사를 하고, 경쟁사 조사를 하고, 고객의 기분으로 모든 것을 준비했지만, 2호점은 어떻게 합니까?
1호점이 성공했으니까 그냥 그대로 합니다. 그러면 2호점은 망합니다. 츠타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체험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기본적인 것도 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2호점은 실패하는 일이 많다. 세상의 경영에서도 성공했던 경험과 자신감만 믿고 나아가면 실패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내세우는 성공의 비결과 자신감이 통하겠습니까? 그것은 다 변명이고 그냥 영적으로 퇴보한 것입니다. 영적 민감성이 떨어진 것입니다. 먹고살
만하니까. 다윗의 다음 인생 페이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암몬과 다음 전쟁에서도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 아주 배가 불렀습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성 밖을 보는데, 한 여인이 눈에 들어옵니다. 다윗이 그 여인에게 꽂힙니다. 성경에 보면 이 여인은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라고 나와 있으니, 월경 기간이 끝나고 7일간 부정 기간이니, 그 후 정결 예식으로 목욕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다윗 꼬시려고 한 것은 아니죠. 신하를 보내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 찾습니다. 아마도 고대 왕정 사회가 그러하듯 처녀였으면 후궁으로 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녀온 신하가 뭐라고 그 여인을 소개합니까? ‘그 여인은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여기서 신하가 남편의 이름을 정확히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잘 아는 인물입니다. 사무엘하 23장에 보면 다윗의 왕국에 속한 특별한 무장 37인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중에 포함된 한 사람이 우리야(개역개정: 우리아)입니다. 개역개정의 표현으로 보면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라고 신하가 말합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안되겠쥬?” 그런데 다윗이 지금 이미 정욕에 눈이 뒤집혔습니다. 신하가 과속방지턱을 던졌는데, 가뿐히 넘어서 폭주합니다. “여인을 데려와라” 그래서 이 여인과 동침합니다. 남편이 전쟁에 나가 있는 상황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집으로 돌아갔으니 이 일은 그냥 다윗에게 있어서는 지나가는 일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윗에게 사람이 찾아옵니다. 밧세바가 보낸
사람이죠.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밧세바의 정결 예식에 대한 설명은 그녀가 가임기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적어놓은 것은 ‘다윗, 너 오리발 내밀지 마’입니다. 다윗이 이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지위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수습하려 합니다. 일단 전쟁터에 있는 우리야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전쟁터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이렇게 말하죠. “이제 그대의 집으로 내려가서 목욕을 하고 쉬어라.” 개역개정에서 ‘발을 씻으라’는
표현은 부부관계를 의미하는 완곡어법입니다. 즉, 이 아기를 우리야의 아기처럼 보이도록 만들려는 계략입니다. 그런데 우리야가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왕국 문에서 다른 군인들과 함께 잠을 자는 것입니다. 다윗 뜻대로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야에게 묻습니다. 그때 우리야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장막을 치고 지내며, 저의 상관인 요압 장군을 비롯한 모든 신하가 전쟁터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제가 어찌 홀로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야는 충신이었던 것이죠. 다윗 또한 다급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다윗이 직접 우리야를 불러서 함께 먹고 마시며 취하게 합니다. 그래도 우리야가 여전히 왕궁에서 머물 뿐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밧세바와 우리야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하는데, 제가 봤을 때 그보다는 우리야가 가진 강직함을 드러내는 것이죠. 결국 다윗이 죄를 은폐하기 위해 했던 방법이 먹히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는 우리야의 손을 통해 군대장관 요압에게 보내는 비밀 서찰 하나를 써 보냅니다. 요압이 우리야로부터 그 서찰을 전달받고 읽어봅니다. 그 내용은 “우리야를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하여 전쟁 중에 죽게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우리야는 그렇게 전쟁 중에 죽게 됩니다. 그리고 요압이 다윗에게 전령을 보내어 전쟁 상황을 보고 합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말하죠. “왕이시여, 전쟁 중에 우리가 성문 가까이 나아갔다가 적의 공격으로 몇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그 중의
임금님의 장수인 헷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말하죠. “전쟁 중에 그런 일이 있기 마련이니, 요압으로 하여금 위축되지 말고 용기 내도록 전하거라.” 밧세바는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애곡합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죠. 애도 기간이 끝난 후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서 후궁으로 삼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담은 사무엘하 11장의 마지막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삼하 11:27b)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3) 죄의 중독성 10장까지의 모습을 죄로 이해할 수 있는가? 예전의 저는 그것을 죄로 이해하지 못했고, 밧세바 사건부터 죄로 이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이미 10장부터 보여지는 다윗의 모습이 죄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죄를 표출된 행동으로 이해하면, 하나님께 묻지 않고 감정대로 행한 것,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거부하고 예루살렘에 남은 것, 전쟁의 승리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까지는 죄가 아니라고
이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죄가 자기중심성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이미 10장부터 그의 내면에서 죄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죄는 10장부터 발현된 것이고, 11장의 다윗의 행동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문제는 그 죄의 여파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내면에서 시작된 영적 싸움, 하나님과 나의 주도권 싸움은 아직은 나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만, 아직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살면서 이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과 내가 ‘나의 나라’에 대해서 벌이는 왕권싸움에서 하나님께 지는 법을 훈련해나가는 것입니다. 혹시 중간에 내가 이겨서 내 멋대로 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어요. 그때 빨리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한 사람의 모습인 것이죠. 이 기복이 줄어드는 것이 신앙의 성숙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 대해서 화나거나 속상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내 기분이 안
좋아서 나도 말로써 행동으로써 복수를 하거나, 그 사람에 상처를 내고 싶은 마음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고 계셨는데,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내 안에서 통치를 벗어나 마음대로 행하겠다고 하는 순간이죠. 그래도 이것을 정말로 실천하기 전에 하나님은 나에게 마음을 주세요. “STOP.” 그런데 내가 내 마음대로 행하여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행하게 되면 이제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적 문제를 떠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
한 단계 넘어간 것입니다. 말로써 공격하더라도 그것은 언어 살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인격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내 나라를 넘어 다른 사람의 나라에 어떤 형태로든 폭격을 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하나님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이 문제는 조금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밖으로 행동으로 죄가 표출된 후에도 곧바로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면 좋은데... 죄의 속성은 죄를
인정하면 지는 것처럼 여기고 죄를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죄를 짓는 순간, 이미 내 내면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내가 빼앗고 내 마음과 감정대로 행하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의 주도권이 회복되지 못한 채, 죄가 죄를 낳으면서 폭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회복하지 못하면 이제 죄가 그의 인격이 됩니다. 즉, 우리는 양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그분을 따라 살면서 그분의 인격에 이르거나, 반대로 죄를 마음에 품고 죄를 따라 살면서
죄가 나의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면 죄에 모든 것을 빼앗겨서 그 사람의 모든 인격이 죄의식조차 없는 상태로 마비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죄의 중독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인격을 품은 것처럼 보였던 다윗에게 한번 죄가 이기기 시작하니까 죄가 승승장구합니다. 도미노처럼 다윗을 무너뜨리며 죄로 끌고 갑니다. 이 이야기를 분석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나체 여인을 목격한 것이 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에
불과합니다. 죄의 상황을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만났을 때 우리의 대처가 중요합니다. 요셉은 죄를 범하기 싫어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시련을 겪습니다. 그러나 죄로부터 자기의 마음을 지켜냅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았기에 옥에서도 형통했습니다. 둘째, 다윗에게는 멈출 기회가 많았습니다. 신하가 와서 이야기한 것도 멈추라는 싸인이었어요. 다윗은 이 모든 일을 은밀히 행하는 것도 아니라, 대낮에 사람 시켜서 대놓고
행합니다. 우리야의 얼굴을 보고, 우리야의 행동을 보고서 마음에 찔려서라도 멈췄어야죠. 거기서 못 멈추니까 결국은 살인까지 갑니다. 죄는 멈추지 않으면 성장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성숙도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셋째, 요압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전에도 봤지만, 다윗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어요. 그러나 이제 다윗의 왕권이 다시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니 요압은 2인자로서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다윗이 많이 급했죠. 결국 요압을
통해서 우리야를 죽이고자 하는 서찰을 보냅니다. 요압이 거기서 의로운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다윗을 멈췄어야죠. 그런데 요압은 기회주의자입니다. 이것은 요압에게 다윗의 가장 큰 약점을 잡게 만드는 사건이 되죠. 요압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보다 자기 유익을 따라 행합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다윗의 잘못을 지적한 나단에 대해서 볼 것입니다. 세상으로 보면, 다윗에게 있어서 요압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고, 나단은 내부고발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요압은 다윗의 죄에 대한 공범이고, 나단은 다윗을 가장 마지막 상황에서 건져준 은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요압을 죄로 끌어들인 통로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줄 것인가, 고민해보셔야 합니다.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오늘 사무엘하 8-11장을 통해서 살펴본 이야기를 우리는 3가지 관점에서 다뤘습니다. 1. 성공 : 신앙의 독 2. 붕괴의 전조 증상 3.
죄의 특성 : 중독과 전염 저는 오늘 설교를 여러분이 잘 이해해서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면,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유익 삼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난 속에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외적인 평안함과 성공과 성취에 대해 긴장감을 갖고, 내 안에서 혹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중심성으로 회귀하려는 전조 증상이 없는지 잘 살피시고, 혹시라도 지금 내가 죄의 영향력 아래 들어와 있다면 깨달은 부분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벗어나서 주님이 계신 방향으로 달려가십시오. 혼자 할 수 없다면 도움을 청하십시오. 내 죄를 감싸주는 요압과 같은 사람을 멀리하시고, 내 죄가 드러날 수 있겠지만 나를 주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다윗도 그러했다면 우리 누구도 나는 다윗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누구나 다윗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오늘도 주님의 주인 되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소망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