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1 (삼하 12:1-12)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유하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는 양 떼와 소 떼가 아주 많았으나,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사서 기른 새끼 암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 양은 한 가족처럼 자랐습니다. 그의 접시에서 먹고 그의 잔에서 마시며 그의 침대에서 잤습니다. 그에게 한 양은 마치 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루는 한 나그네가 부자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 소 떼나 양 떼 중에서 짐승을
잡아 손님의 식사를 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인색한 사람이었던 그는 힘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있는 한 마리 암양을 빼앗아, 그것으로 식사를 차려 손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왕이시여.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윗 왕에게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들려준 이 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식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나라에 이런 못된 부자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는데, 그런 일을 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그를 죽이고 율법에 따라 어린 암양에 대하여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하리라.” 그러자 나단이 다윗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여러분은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시겠습니까? 다윗은 밧세바와의 성범죄를 저지른 후, 그것을 여러 방법으로 감추려 하였지만 실패합니다. 결국 그의 부하 요압을 통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
중에 고의적으로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임신한 밧세바도 데려와서 후궁으로 삼습니다. 이로써, 자신이 밧세바와 아이의 삶을 책임지는 것으로 마음에 남은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왕으로서 이 사건을 수습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죠. 자신의 그 모든 행위가 사람들 눈에서는 잊힐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살아가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죄가 그의 눈을
가리고 그의 영적 민감성을 떨어뜨려서,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보고 계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다윗이 스스로 이 나라에 그런 부자가 있다면 죽어야 마땅하다가 선고한 것은 자신이 심판당해 마땅한 사람이라고 선언한 것이죠. 나단은 이어서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큰 악을 행하였느냐?”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이 행한 일로 인하여, 2가지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① 다윗의 집에 칼부림이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 ② 다윗 또한 가까운 사람에게 아내를 빼앗기게 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1.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이란? 첫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체가 동일합니다. (삼하 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9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고 말하고, 10절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주인 됨의 특성은 주인의 말에 대해 내가 따르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말하였으나 무시한다면, 그것은 주인을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인된 삶’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 특별히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죄가 어떠한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자기중심성임을 여러 차례 나눴습니다. 죄의 본질은 내 안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거나, 무시하는 것입니다. 회심이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그의 안에 거하는 삶이라면... 하나님이 약속대로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전히 그분의 뜻을 따를지 안 따를지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하나님, 좀 가만히 계세요. 이건 제 일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을 뒷방에 가두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인된 삶을 살았던 이들의 특징은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고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묻고, 듣고, 따르는 것에 대해서 설교 시간마다 강조하니까, 우리 성도님 가운데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어제 설교를 듣고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빨리해야 할 때, 주님께 물었는데도 답이 없고 결정은 바로 해야 하면 어떻게 하나요?” “그때는 최대한 주님의 마음을 구하며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때 최대한 하나님 앞에 묵상하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찬양도 이 일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선명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최선을 다하며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후로도 지속적인 인도를 구하며 한 걸음씩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계속 반복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집니다.” 결국 이 삶이 지속되면 이심전심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내 마음이 같아지는 것이죠.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삶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둘째, 다윗의 왕좌는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삼하 12: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고대사회의
왕은 말 그대로 모든 나라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의 모습은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었습니다. 즉,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내가 관리하거나 소유하거나 맡은 일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가진 사람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완전하게 다른 태도로 나타납니다. 당연히 저는 사귐의교회 담임목사의 역할을 하나님이 저에게 맡겼다고 생각합니다. 개척 목사일지라도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맡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역할이 언제까지일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을 얼마나 혹은 언제까지 맡길지는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될 때, 내 힘으로 살아가면서 누릴 수 없었던 하나님께 속한 자의 삶에 허락되는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이라면
내가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하나님의 것이라면 나는 내가 할 일만 잘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에 오르기까지 다윗의 노력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왕의 자리가 주는 힘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요즘에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위해 쓰실 교회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 교회에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우리는 그 뜻을 잘 이해해야지 교만하거나 우리의
능력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급하신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이 이 시대를 위해 쓰실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때로는 힘을 주시고, 때로는 물질을 맡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탄도 부흥하는 교회가 스스로 착각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힘쓰고 있고, 성도의 형통한 삶을 넘어뜨리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내가 어느 자리에 있던지, 내가 어느 정도의 물질을 맡고 있던지, 그보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된 자인지 우선적으로 점검하십시오. 내가 설령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어떠함이 나를 흔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잘 될 때나, 안 될 때나, 밤이나 낮이나, 주님이 주인된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 제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아니, 제 삶이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메시지. 2 (삼하 12:13-25)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어 다윗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이때
다윗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나단을 통해 죄를 들추신 하나님 앞에 즉각적인 용서를 구합니다. 바로 앞장까지의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덮으려고 하였습니다. 죄가 죄를 낳았던 그 모습을 더이상 반복하지 않습니다. 사울 왕은 이러한 죄에 대한 지적에서,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고백에는 이것이 우리야와 밧세바에 대한 죄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라는 코람데오 신앙의
인식이 느껴집니다. 그러자 나단이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께서 왕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왕께서 이번 일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행동으로 인해 왕이 낳은 아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 나단의 이 말을 남기고 떠난 후,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기가 앓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모든 일을 멈추고 아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다 그 자리에서 잠들고 일어나서 또 기도합니다. 실로 간절한 기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을 갖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에도 7일 후에 아기는 죽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기도를 멈추고 처음으로 일어납니다. 그는 얼굴을 씻고, 머리를 단장하고, 새 옷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처음으로 먹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이, 아이가 죽은 후 이렇게 행동을 하니까 궁금하죠? 신하들도 의아해서 묻습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자비를 베푸셔서 아이가 살게 될까 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소.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려가셨으니, 이제 아이는 내게 올 수 없소.” 즉,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일어난 일임을 받아들인 것이죠.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으나, 하나님이 아이를 데려가신 것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일에 대하여 더이상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상심에 빠져 있는 밧세바에게 나아가 그녀를 위로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셨다는 뜻으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다시 아이를 주십니다. 다윗이 그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어 그 아이의 이름을 ‘여디디야(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고 지어주십니다. 이 일이 이제 지나간 것입니다. 2. 회개란 무엇인가? 첫째, 회개는 하나님께로부터 선행된 은혜입니다. 우리는 종종 회개가 나의 어떤 행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회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기로 마음먹으시고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기회를 주시기에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꼭 나단을 보내셔야 했나요? 용서의 기회를 주시지 않으려면 그냥 다윗을 치시면 됩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용서하지 않으려면,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단을 보내어 다윗의 죄를 지적하신 것은,
다윗을 향한 정죄가 아니라 사실은 다윗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아직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이것 이것이 잘못된 것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사실 이미 부모는 용서할 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잘못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회개란 잘못에 대한 진실한 반응이고, 인정과 반성이고, 그 회개의 진정성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윗이 만약 여기서 죄를 지었다고
고백은 하지만, 바로 다음 장에서 비슷한 잘못을 또 저지른다고 해보십시오. 누구도 그것이 진실한 회개였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기에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죄와 싸우는 진실한 모습, 진짜 애씀이 있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진짜 애쓰는 가운데 넘어지는 것을 우리는 연약함이라고 말하지, 대충하다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그것은 악함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나단의 말을 듣고도 하나님을 무시했다면 다시 기회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그 순간 즉각적으로 해야 합니다. 둘째, 회개는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간음 사건으로 태어난 아기를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바꾸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끝내 아이를 거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그는 확인하고 받아들입니다. 아이가 죽자 일어나서 뭐하러 갑니까? 예배하러 갑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가 수용하고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때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시겠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난 후, 밧세바를 위로하며 동침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관련하여 우리가 겪는 고난의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딛고 넘어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다윗과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다시 태어난 아이에게
‘솔로몬’이라고 이름 짓는데, 솔로몬은 ‘샬롬’과 같은 어원입니다. 즉, ‘평화’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다시 회개한 모습으로 살겠다는 다윗의 고백적 결단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확실한 응답을 주십니다. 바로 심판을 예언한 나단을 보내어 그 아들에게 ‘여디디야’라고 이름 지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이 다윗과 밧세바에게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용서하시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인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받은 자로 사는 삶입니다. 메시지. 3 (13:1-16:22) 다윗의 죄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부분 가운데 아기에 대한 심판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나단을 통해 미래에 있을 예언적 심판을 말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① 다윗의 집안에 칼부림이 있을 것, ② 다윗의 눈앞에서 아내를 빼앗기게 될 것을 말씀하시죠. 이런 말씀들은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미래적 예언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이지만, 우리의 차원 밖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해보자면 만화책을 생각해보십시오. 만화책 안에서는 시간의 과거-현재-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화책 밖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한 손안에 쥐어진 일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미래의 죄악들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벌이시는 일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합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 있었던 모든 칼부림의 원인 제공자고, 간음죄의 주동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성으로 이해해야 할 뿐,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들 가운데 악을 심으셔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미래를 다윗에게 예고하신 것입니다. 즉, 다윗의 죄는 용서받았지만,
이 일들을 통해 다윗은 이제 다시 죄악된 삶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살아야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13장에서 예언이 현실이 됩니다. 다윗의 아들 중 후계자 1순위인 장남 암논이 이복 누이인 다말을 사모합니다. 상사병 수준이죠. 그래서 꾀병을 부린 후, 병간호를 핑계로 다말을 불러서 성폭행합니다. 그런데 암논은 누이 다말을 강제로 범한 후, 마음이 돌변하여 이번에는 다말을 멀리하고 쫓아내는 것입니다. 누이이긴 했으나, 당시 왕가에는 후궁이 많았으므로,
배다른 동생 사이에서 결혼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암논은 그러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그의 상사병은 단순한 욕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암논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을 다윗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다윗의 대처에 사심이 들어갑니다. (삼하 13: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개역개정에는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노하고
끝. 그래서 메시지 성경은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윗 왕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격분했으나 암논을 징계하지 않았다. 그가 맏아들이었으므로 다윗은 그를 아꼈다.” 이 표현은 다윗의 어긋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들 사이의 더 큰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은 암논의 잘못을 덮고 지나갔지만, 압살롬은 복수의 때를 노리고 있었죠. 2년이 지나서 그는 가족 잔치를 빌미로 암논을 초청한 후 살해합니다. 형제간의 살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도망하여 3년을 지냅니다. 다윗은 또다시 자녀에 대해 약해집니다. 형제를 죽인 압살롬에 대한 마음도, 점차 미움에서 그리움으로 변하게 되고, 결국 주변의 권유를 못 이기는 척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부르게 됩니다. 하지만 좀 애매하게 행동합니다. 예루살렘으로까지는 불렀으나, 왕궁으로는 오지 못하게 합니다. 용서한 것도 아니고, 용서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서 2년을 더 보냅니다. 그러니 압살롬이 더 애가 타죠. 일종의 희망 고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나라의 2인자인 요압을 만나서 다윗에게 뜻을 전합니다. 이렇게 대할 것이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결국 다윗이 압살롬을 궁으로 부릅니다. 다윗 왕의 이러한 태도는 압살롬의 잘못을 그냥 덮고 또 받아들인 셈이죠. 압살롬의 잘못에 대해 다윗이 정확히 징계하거나, 압살롬이 뉘우쳤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압살롬 또한 자신이 벌인 복수는 정당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오히려 암논을 처단하지 않았던 것을 자신은 더 정의롭게 했다고
여기고, 그래서 다윗이 결국 자신을 벌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다윗의 어설픈 용서는 압살롬에게 왕자의 지위를 회복해줬고, 압살롬은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갑니다. 결국 4년이 지나서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킵니다. 그 일로 다윗은 궁을 버리고 도망치게 됩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성에 남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경고하셨던 모든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3.
정의와 사랑 다윗은 암논의 잘못된 만행에 분노만 할 뿐, 실제적인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잘못에 대해서 아기를 죽임으로 책임을 물으신 것과 다릅니다. 다윗의 그러한 결정은 비뚤어진 사랑에 불과했고, 그로 인해 형제 압살롬이 대신 복수 살인을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윗이 암논의 죄에 대해 화 한번 내고 넘어간 일이, 아비로서 올바른 사랑을 했다고 볼 수 있나요?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했어야 할까요?
저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누가 봐도 정의롭고 공정하게 엄히 다스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것이 용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 없는 사랑은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다윗 스스로가 나라의 정의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결국 그 행동이 반발심을 낳고 압살롬의 복수를 부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또 압살롬의 잘못을 대함에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의 죄에 대해 다루시는 방법은 가혹해 보이지만, 그로 인해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같은 잘못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자신의 삶 가운데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무엘하는 그런 다윗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어쩌면 다윗은 그런 아들들의 잘못을 볼 때마다,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며 자책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다윗이 용서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올바른 용서를 본인이 누리지도, 또 행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와 죄의 책임에 대해서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금 조금 쉬운 이해를 위해서, 제가 사장과 아르바이트생 이야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제가 사장입니다. 만약 아르바이트생이 현금 보관함에서 돈을 훔쳤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서 이 일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의 반응을 보고 이 일을 한번은 용서하고 넘어갈지, 아니면 즉각적으로 자를지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부릅니다. “내가 네가 돈을 가져간 일을 알고 있어.” 그때 아르바이트생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고 용서하고 함께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알겠어. 네가 진심으로 반성하니 용서할게. 대신 네가 가져간 금액만큼은 내가 차감하고 월급을 줄 거야. 그래야 너도 이 일에 대해서 떳떳하게 책임을 지는 거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제가 이 친구를 용서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용서했고, 계속 같이 일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아르바이트생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그 약속은 유효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일은 죄를 덮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완전한 죄 사함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율법에 따라 훔친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책임이죠. 다윗이 우리야의 생명을 해하였기에,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총 4명의 아들의 취하십니다.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그리고 밧세바와 간음하여 나은 아이까지 정확히 4명입니다. 학자들은 아이가 죽는 것이 사실 다윗의 생명을 취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다윗 언약으로 인해 다윗을 대신하여 간음의 대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로서 다윗은 그 아이를 보내며 자신의 잘못을 더욱 깊이 통감했을 것입니다. 죄의 무서움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 참된 정의를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정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정의는 그릇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정의를 행하셨고, 동시에 용서하시며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짜로 다윗을 용서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그래서 밧세바와 다윗의 관계를 이제는 용서하시고 정식 부부로 인정하시며, 그 사인으로 솔로몬을 주신 것이죠. 값을 치르는 책임을 다한 용서 끝에 사랑의 징표로 화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암논이나 압살롬의 잘못을 바라보며 자신과 닮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아프더라도, 아비라면 사랑으로써 정의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징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로서 오히려 과거의 죄에 붙잡히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로
행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가 있다면, 더이상 그것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회심하셨다면, 이제 용서받은 자답게 살아가시면 됩니다. 혹 누가 나의 과거 잘못을 들추더라도,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에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균형을 잃으면 안 됩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서 ‘정의’와 ‘사랑’으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단과 요압도 이 차이였죠. 요압은 죄를 지은 다윗의 죄를 감춰주었습니다.
정의가 무너진 나름의 의리이고 사랑입니다. 반면,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죽음을 무릅쓰고 다윗 앞에 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나단이 다윗에게 향한 것은 다윗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도 나단의 그 모습이 자신을 사랑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압과 다윗의 최후는 파국이요, 나단은 다윗의 좋은 동역자로 끝까지 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우리는 이 사랑과 정의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대하셨던 방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봐주셨나요? 아닙니다. 만약에 내 죄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그저 봐주신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얻기 위해서 어떤 것을 내어주셨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죄의 대가를 스스로 치르십니다. 우리의 죄가 그냥 아무 대가 없이 용서받는 것이라면, 십자가의 예수님은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죄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값을 다 치르셨기에 더 이상 죄가 우리를 구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최고의 사랑과 완전한 정의가 머무는 곳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합시다. 오늘 세 가지 키워드를 다뤘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 회개란 무엇인가, 정의와 사랑.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매우 유명한 이 말씀을 우리는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6절에만 주목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에만 주목합니다. 그러나 17절은 세상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눈감아 주실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주셔서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거저 주어진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값을 치르셨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믿음 또한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책임지시고 사하신 죄는 다시는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나의 옛 모습의 죄에 얽매여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돌아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돌아가지도 마십시오. 이제 말씀은 우리에게 오늘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회개가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은혜임을 믿으며, 그 은혜를 받은 자로써 주님의 뜻을 수용하며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주님을 닮은 정의와 사랑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 앞에 삶으로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