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풍삶첫 10과 - 세례, 그 사랑 깊은 언약 / 강정규 목사

2022-10-07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다룰 내용은 풍삶첫 10과 세례에 관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세례’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가운 입은 목사. 세례 문답. 흰 장갑. 물맞을 준비를 하는 성도. 우리는 시각적인 사람이기에 이런 것들이 먼저 떠오를지도 몰라요.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례식에 대한 이미지보다 중요한 것은 세례에 담긴 의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교단에서 ‘세례’라고 사용하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는 ‘침례’를 예식화 한 것입니다. 성경의 세례는 보통 강가에서

행해졌고, 세례자의 몸이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형태였습니다. 그것을 침례라고 하는 것이죠. 그럼 침례만이 옳은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선교를 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도,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니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묶였던 것이 벗어지는 기적이 일어나죠. 그때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알고 자결하려고 했을 때, 바울이 말립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눈앞에 벌어진 놀라운

일들과 책임감으로 자결하려던 간수가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바울과 실라에게 엎드리고 물을 때, 바울이 이야기하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받으리라.” 바로 그날 밤,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환대한 후, 자기와 온 가족들이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빌립보 감옥에는 강이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아마도 감옥에 빗물이 고이는 작은 샘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곳에서 바울이 세례를 행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는

일생에 한 번 진행합니다. 장로교에서 보통 행하는 유아세례를 받은 경우에도 그것이 세례이기에 성인이 되어 세례를 다시 받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가 속한 성결교단에서는 유아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교단별로 해석의 차이가 있지만, 저희 교단이 유아세례를 주지 않는 이유는 세례가 본인의 신앙고백과 결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를 주는 교단들도 나름의 신학적 견해를 갖고 행하는 것이므로 이 경우에는 무엇이 맞고 틀리다의 문제보다는 신학적 다양성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성결교단에서는 아기들에 대하여 ‘헌아식’을 행합니다. 헌아식은 부모가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키우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이죠. 헌아식은 세례는 아니므로, 저희 교단은 청소년기 이후에 본인의 고백에 따라 세례를 베풉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한 지 1년 정도가 지나면, 세례 교육을 하고 세례를 줍니다. 세례교인이 되는 것은 교회적으로 보자면 정회원이 되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세례교인 숫자를

총회에 매년 보고 합니다. 교회 등록과 세례 사이에 일정한 차이를 두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교회를 다니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만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말하기에는 모호하죠. 그러므로 복음과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한 후, 그것을 확인하고 진정한 의미의 신앙인으로 나아가도록 하는과정이 세례입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데이트를 하다가 서로 때가 되면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동반자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일종의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갖고 결단하는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결단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식은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실제로 제가 사역했던 교회들에서도 어떤 분들은 세례를 좀 더 공부하고 받겠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세례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했기 할 수 있는 반응일 수 있습니다. 자, 그럼 한번 이곳에서 우리가 체크를 해봐야겠죠? 세례를 받으신 경험이 있는 분이 대부분일

것 같은데, 혹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이 있으시면 손을 한번 들어주시죠. 그럼 세례를 받은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세례의 순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습니까? 세례의 의미와 감격을 아직 간직하고 계십니까? 저는 솔직히 때가 되어 그냥 받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 세례를 받았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문답을 달달 외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이러한 세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세례의 의미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은 분들이

이곳에 있다면, 여러분도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간단히 하거나 생략하기도 하지만, 우리 문화에는 ‘백일잔치’라는 것이 있죠. 옛날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다 보니 100일을 못 넘기고 죽는 아기가 많았으므로 100일을 넘기는 것을 축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00일을 넘겼으니, 이제는 생존할 뿐 아니라 자라갈 것을 기대하며 축복하는 날이죠.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영적 탄생 – 영적 아이 – 영적

청년 – 영적 부모라는 영적성장의 기준에서 비유해 보자면, ‘세례식’이 바로 100일 잔치쯤과 비슷할 것입니다. 세례식을 받을 때 태어나는 것은 아니죠. 그 전에 회심 사건이 영적 탄생이라면, 탄생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세례식을 통해서 내 영적 생명이 잘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삶 또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마치 백일잔치를 통해서 아이의 생존과 앞으로의 삶을 주변으로부터 축하받는 것처럼, 세례식은

영적인 삶에 있을 지속적인 성장에 대해 결단하고 축복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은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세례는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참여하죠. 그 안에서 결단하고 증인이 되어주는 공개적인 약속입니다. 여러분, 결혼식도 당사자만 할 수 없습니다. 결혼식을 하지 못해서 혼인신고만 하고 부부가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증인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약속이나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기 때문이죠. 언약이란 언약의 당사자 간에 무조건

서로에게 헌신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식을 한 후에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을 내 삶에 더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이죠. 미우나 고우나 부부가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셨고, 그분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깊은 사랑을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조건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치시며,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가면, 이를 남들 모르게 마음으로만 고백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라고 말합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물론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소중한 결단을 사람들 앞에서 선언한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결혼식을

하지 않더라도 부부가 되는 것과 같이, 세례식이 우리의 구원 여부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식을 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마음에서 진실한 고백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구원에 이른 사람들, 구원이 시작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세례식을 통해서 만천하에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누구도, 결혼식에서 처음 서로에게 결혼하자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세례식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구원받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시간입니다. 그럼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산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세례가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다시 일으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내가 주인 되어 살던 내가 왕이었던 나의 삶은 영적으로 죽고,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주님이 거하시는 새로운 나로서 거듭난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롬 6:3)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롬 6: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죠.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는 내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죄는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상태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분이, 우리의 영적 존재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겠다고 하신 일이 일어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죠. 믿음은 진리에 대한 수용입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죽고, 무엇에 대하여 살아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믿고, 우리 자신을 이제 죄에 내어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서,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여정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세례를 받으며 고백하는 믿음은, 내 존재의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저는 개척 후부터 ‘교회’라는 것에 대해서 계속 배워가며, 교회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비전에 있어서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시작한 하나님 나라를 담아내는 주님의 공동체이며, 주님의 몸이라고까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만약 누군가 “나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교회는 나가기 싫어. 나는

그냥 혼자 성경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래.”라고 말한다면, 저는 이 말을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성경을 읽어가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교회에 하나님의 비전과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12명의 제자를 불러서 굳이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자들은 다 유별난 사람들이어서 부딪힘도 컸고 함께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여 그들에게 그럼 그냥 흩어져서 혼자 열심히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또한 그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베풀고, 진리를 가르치고 지켜 행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너희와’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회심의 결단은 개인의 몫입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결단으로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같은 주님을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얻게 됩니다. 제가 지난번에 회심을 확인할 수 있는 3가지 조건으로 ‘믿음’과 ‘삶의 변화’와 ‘공동체에 속함’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그 주인 되신 하나님을 따라 그분의 가족 공동체에 속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렇듯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공동체적 삶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고, 이러한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단지 개념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양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형제자매들과 한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식을 통하여 우리는 공동체 앞에서 결단하고, 약속하고, 축복을 받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정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공동체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지켜주고, 함께 악과 싸우며, 함께 꿈꿀 수 있도록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라고 믿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은 점점 더 개인주의 팽배합니다. 이런 사회와 문화 속에서 우리의 영성조차도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신앙을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유심히 읽어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결코 개인적인 영역, 즉 우리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과 함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는 단지 우리 개인이 주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갔다고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하게 되었음을 경험하고 누리고 고백하고

확인받는 시간입니다. 실제로 구약 시대로부터, 하나님과의 언약은 늘 개인적인 결단이 필요하긴 했지만, 또한 언약 공동체 속에 속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식은 개인의 신앙 고백인 동시에, 자신이 이제 속하여 함께 살아갈 공동체를 찾았고, 그 속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언약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각 개인에게 보내주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 일하셔서,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이자, 머리 되신 예수님께 속한 한 몸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세례를 배우면서 각자가 경험한 세례가 어떤 의미로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내가 세례의 의미를 잘못 깨닫고 있었다면, 이 시간 그 진정한 의미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에 대한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중요한 점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천당 입장권을 갖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세례식 증서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티켓이 아닙니다. 결혼식 사진이 어떠했다고 한들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부부가 그때의 그 서약대로 서로 부족하지만, 함께 서로를 채워주며 살아가고 있느냐가 아닐까요. 동일하게 세례는 우리의 삶에 대부분 한 번 있는 예식입니다. 그날의 경험이 아무리 짜릿했다고 할지라도, 혹은 아무리 무미건조했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그 주님과 어떤 관계로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책에 있는 일부분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한번 받고 끝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어, 그것이 더욱더 풍성해짐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깨지고 상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선언이고, 세례식은 이러한 삶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시작점입니다. 그 시작점으로부터 하나님을 닮아가고 추구하는 마음이 점점 자라 지금에 이르렀다면, 그런

모든 분께 잘 자라오셨다고 축복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하면서 추구할 우리의 목표를 되새깁시다. (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례를 통해서 거듭나게 하시고, 지금도 양육하고 계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자라가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꼭 기억해주십시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여정이 결코 그저 소모되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며 더욱 깊은 사랑으로 충만케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그분 옆으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좌우를 바라보십시오. 어쩌면 오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이렇게 함께 예배하는 것이, 주님께서 약속한 구원의 축복을 맛보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안에 함께하는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주님 안에서 탄생한 소중한 생명들과 함께 예배함을 우리의 감사로 고백하며, 내 삶을 새롭게 하시고 충만케 돌보시는 그 하나님을 오늘도 우리가 의지하며,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