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 의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시작점이 된 예루살렘교회 공동체의 두 번째 지도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인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게 되고 사도들과 일곱 집사들은 흩어지게 됩니다. 그로 인해 복음전파의 계기가 마련되었죠. 다만 누군가는 예루살렘 교회를 돌봐야 하는데, 바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며 사도행전 15장의 공의회를 주관하기도 했죠.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 야고보의 역할은 컸습니다.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이 표현은 초대교회 내에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권위를 가진 야고보나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반면 우리에게는 최고의 사도로 여겨지는 바울은 오히려 당시의 상황에서는 사도권에 대한 의심까지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래서 바울도 기독교 공동체의 질서를 따라 야고보와 사도들의 리더십을 존중하였습니다. (갈 2: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게바)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보다도 먼저 야고보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라고 볼 수 있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권면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이방인 사역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이방사역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할례자들(유대인)에게,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을 대상으로 사역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의 사역 대상을 잘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사역 대상이 달랐고 그로 인해 이들의 사역의 초점과 방향도 달랐죠. 즉 교회의 지리적 위치와 구성원들에 따라서 다른 신앙적 특성들은 있었고, 초대교회는 종합적으로 볼 때 2가지 상반된 신앙적 문제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순차적으로 혹은 돌아가면서 나타났습니다. 당연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르침도 2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제가 이것을 좀 쉽게 설명해보고 싶은데요. 제가 원래 정말 약을 잘 안 챙겨먹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40 가까이 되니까 사람들이 건강식품을 선물로 많이 주더라고요. 솔직히 저는 피자 치킨 쿠폰이 더 반가웠는데, 유독 올해 비타민 등을 많이 선물을 받아서, 몸 관리를 좀 하라는 주님 뜻으로 알고 비타민 등을 챙겨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타민에도 균형이 필요하잖아요. 너무 한 가지 요소를 많이 먹으면
그것이 오히려 건강을 깰 수 있죠. 적당한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저는 초대교회 뿐 아니라,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성경 안에서, 혹은 설교와 가르침 안에서 이 2가지 약을 잘 구분하고 나에게 맞는 약을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차례차례 한번 설명을 해보려고 합니다. 한쪽 가르침의 대표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 가르침의 대표는 야고보입니다. 먼저 바울 서신의 내용 중 구원에 관한 강조점입니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이 스스로 무엇을 행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당시의 시대에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알게 모르게 그 생각이 기독교 신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바울이 가장 대적하고 있는 문제는 <행위구원론>, <율법주의
구원론> 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반대하며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우리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강조합니다. 은혜라는 것이죠. 은혜는 내가 그것을 얻을 수 없지만 받을 때 은혜가 되는 것이죠. 이것을 믿으시죠? 믿으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일점일획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종교가 없어요. 당시에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고, 다른 이방 종교들도 뭔가를 지극정성으로 하는 것을 강조했거든요. 그런데 기독교에서만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다른 방편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되는 예수님과 12사도도 다 유대인이었죠. 첫 복음 전파의 대상도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 준수는 가장 기초되는 삶의 관습이었어요. 또한 유대교는 누군가 유대교로 들어오려면 유대인처럼 되어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고 살아가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 불가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으면 된다.”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좋은 가르침도 과잉복용하거나, 잘못 사용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행위구원론이나 공로주의라는 잘못된 부분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은
좋았는데, 과다복용을 해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고 믿음만을 취한 후 행함은 버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행위까지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을 하는데, 전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가 믿음과 행함을 나누라고 했나요? 바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믿음 외에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도, 그 외의 어떤 종교적 열심과 자기
수행도 구원에 이르는 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 것이지요. (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엡 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다를 수 없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것과 다를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럼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 때에도 있었어요. 그리고 바울의 가르침을 자기 뜻대로 해석하여 ‘주여 주여’만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시 많아진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르지는 않고, 바울이 잘못 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안에 여러 다른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했던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초대교회는 모두 통일된 복음을 전했고, 같이 이 부분들을 논의하기도 했었죠(행 15장, 예루살렘 공의회).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장의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도 동일합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그 복음을 받아야 될 대상의 상황에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균형이 필요한 것이죠. 그러므로 바울 과다 복용자들을 위해 야고보가 등판합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신약성경의 배열을 따르면 복음서 다음에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서신 13편이 나온 후 공동서신(일반서신)이 나옵니다. 공동서신의
저자가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 등인데...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유다의 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복음서나 바울서신에 비해서 많이 주목받지 못하지만, 당시에 가장 권위 있는 자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후 369년의 아나타시우스의 부활절 편지에는 신약 정경목록이, 복음서-사도행전-공동서신-바울서신 순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당시 초기의 정경목록은 대부분 이런 순입니다. 성 어거스틴이라는 기독교 역사에 매우
유명했던 인물이 있는데, 그도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진 자들, 지금으로 말하면 구O파와 같은 자들에 대해 경고하며 가르칠 때,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등의 말씀으로 그들의 주장을 물리칩니다. 이처럼 공동서신에 나타난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주목하는 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듣고 믿었던 구원관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문제들로 고민할 때마다 그것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쳤던 사도들의 가르침이 진하게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이제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치유하기 위한 약입니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제가 앞서서 바울이 전한 복음의 강조를 담은 4개의 구절을 보여드렸고, 야고보가 기록한 책은 1권이니 야고보서의 내용 중에서 또 4개의 구절을 보여드렸습니다. 내용을 살펴보시면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잘 보신 것입니다. 이쪽에서도 과다 복용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다시 믿음보다 앞선 행위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진짜라면 그것에 합당한 삶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다시 행함 쪽으로 깊이 치우치면, ‘공로주의’나
‘자기 의’를 강조하는 신앙으로 기울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구원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도 행위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죠. 야고보 과다복용도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신앙을 잘 잡아주고 우리를 어느 한쪽으로라도 잃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바울도 사용하시고 야고보도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구원하겠느냐?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우리가 이 두 사도의 주장이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신앙적 상황과 모습에 따라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곧 구원의 확신과 구원탈락의 경고에 대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강조하면 내가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지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과 가까워집니다. 이 태도는 때로는 무차별적인 확신을 갖게 되어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지 않고, 구원받았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죠. 반면, 행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 내가 구원받기에 부족하지 않은지 계속 돌아보게 되죠. 그러나 때로는 구원에 대해서 자신이 없으므로 계속 구원을 받기 위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도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쪽 극단이 행위구원론자라면, 다른 쪽의 극단은 열매 없는 신앙인 혹은 구O파 신앙에 빠져 버립니다. 구O파의 한 종류인 기쁜소식선교회에서 쓴 글을 보게 되었어요. “내 행위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구원은 가짜다.” 이 이야기가 맞을까요, 틀릴까요? 그 행위가 어떤 행위인지에 따라서 다릅니다. 믿음과 무관한 행위라면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러나 믿음의 행위조차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이면 바로 그들이 가짜입니다. 구O파의 문제는 행위를 구원에 관련된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한 회개로 구원을 받으면 일상의 죄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말합니다. 균형을 잃은 것이죠. 특별히 가톨릭의 신앙은 행위를 강조하는 측면이
컸습니다. 가톨릭의 모습과 다른 길을 가고자 했던 마틴 루터는 바울신학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울 사상이 종교개혁에 조금 더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물론 종교개혁은 더 크고 중대한 점들을 비판한 것이기에 옳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조금은 기독교 신앙의 색깔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기독교 안에도 2가지 정도의 잘못된 사상이 유행하게 됩니다. 1) 상급론입니다. 구원은 믿음의 고백으로 받고, 대신 행함으로 구원 이후의
상급을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행함이 없어도 구원은 받지만, 그 경우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테니, 행함도 부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2) 구원의 서정론입니다. 17-18세기 조직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칭의 → 성화 → 영화’를 시간과 단계로 나눠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계, 특별히 순차적인 것으로 설명할 경우에는 칭의는 구원의
필수로, 성화는 선택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칭의론입니다. 이러한 칭의론은 결과적으로 위의 상급론으로 연결되어 버립니다. 칭의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성화에 대한 보상으로 상급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성화-영화를 논리적 구분까지는 가능하겠으나 순차적인 시간적 단계로 구분 짓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교회의 구원론은 구O파식 구원론과 큰 차이가 없다. 구O파는 대놓고 말하고 한국 교회는
은근히 말한다. 구O파와 같은 구원론에 대해서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신학자들이 노력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도 초대교회 시대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균형을 잃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끊임없이 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계속 이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있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하고 바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바울과 야고보는 본질적으로 같은 사역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양쪽을 다 치유하며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각각의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 뿐 신학적으로 믿음과 행함은 함께 합니다. 바울 서신에서도 교리적으로는 믿음과 은혜에 대한 측면이 강조하지만, 뒷부분에는 삶의 실천에 대한 강조가 함께 묻어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반드시 믿음에 근거한 삶의 모습입니다. 믿음과 무관한 나의 행위가 아닙니다. 즉 믿음과 행위는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여러분은 누구의 가르침이 필요한 상태입니까? 여러분에게는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한 강조가 더 필요합니까?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삶의 모습에 대한 강조가 더 필요합니까? 구원을 흔들림 없이 확신해야 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아니면 구원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항상 힘쓰는 것이 필요할까요? 대체로 구원의 탈락에 대한 고민이 있으면 뭔가를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구원받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라면 그것은 옳은 방향이 아닙니다. 내 구원을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인데, 때로는 그쪽으로 치우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가득한 사람은 무책임한 삶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큰 나머지 구원이 영원한 보증수표를 받은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죠. 때로는 예배조차 드리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자신하기도 합니다. 썬데이 크리스천, 무늬만 크리스천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내 신앙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나요? 제가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게 된 이유는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러한 두 가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며, 때로는 한 사람 안에도 이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저는 김세윤 교수의 진단처럼, 종교개혁 이후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 아래 구O파와 유사한 신앙이나 상급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여기기에, 설교를 통해 ‘삶’에 대한 중요성과 강조점을 많이 언급합니다. 제가 마주하는 시대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가끔씩 설교를 듣고 그만큼 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시거나, 고민하시는 이야기들을 상담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자체가, 그
삶을 향해 치열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기에 그때는 격려를 드립니다. 보통 그런 고민을 하는 분들은 크게 걱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아무리 그런 설교를 들어도, ‘나는 믿는다’는 것 외에 어떠한 반응도 나타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제가 <성도의 악행이 구원을 취소하는가?>라는 주제로 열린 목회자를 위한 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백석대학교 채영삼 교수님의 발제에서 강조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약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는 성도란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낳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가 거듭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적 생명력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는가? 내 안에 영적 생명력이 있는가와 동일한 질문입니다. 구원은 생명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되요. 생명은 스스로 증명합니다. 살아있음을. 생존 반응이 없으면
아무리 우겨도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자라고 성장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안에 심기어졌다면, 우리도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적 성품(열매)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마귀적 성품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주장을 쉽게 정리하면 이런 것입니다. 씨앗을 심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싹이 나야합니다. 그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죠. 그런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씨앗의 원래 목적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 안에 진짜 생명이 있었는지도 의심하게 됩니다. 싹이 나지 않은 씨앗은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싹이 나는 법입니다. 이것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나타납니다. 나타나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남을 판단하지 마시고 자신을 보시면 됩니다. 내 안에 믿음이 시작되고 나는 그 생명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진심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그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김경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가 성경의 엄중한 경고들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아직 불신자이다. 그러나 악행을 하던 성도라도 성경의 엄중한 경고를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성도이다. 진정한 성도는 성경의 경고 앞에 회개하여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성경이 가르치는 바, 성도란 말씀 앞에 반응하는 자입니다. 말씀 앞에 반응하는 자에게 구원이란 불안해 할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 앞에 반응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소속되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예배 안에서, 말씀 앞에서, 반응이 일어나야 합니다. 변화가 일어나고 내 영이 살아 있고 꿈틀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내 삶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구원은 늘 함께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성도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지키시는가, 취소시키시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성도인가의 문제입니다. (요일 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한은 우리 안에 말씀이 거하고 그 말씀이 흉악한 자를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살아있으면 생존반응이 있습니다. 생존반응이 있으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계속 살아가십시오. 내가 죽은 자와 다름은 내 삶에 나타난 복음의 생명력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늘 있는 것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성도다운 삶, 그 생명령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 생명력이 약하면 자라기 위해 힘쓰고 강하면 꾸준하기 위해 힘쓰면 됩니다. 그 생명력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늘 기억하며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곳에서 예배하는 분들이 이런 거룩한 소망 안에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면, 말씀의 열망을 안고 끊임없이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확신합니다. 얼마나 뭘 이루었는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반드시 내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나타냅니다. 저는 하나님이 과정을 보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못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안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연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완악함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드린다면,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반드시 붙들고 그의 나라로 이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를 누구보다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늘 애쓰십니다. 변화는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 계시다는 믿음 안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실 것입니다. 다만 그분이 전적으로 하실 수 있도록 참된 믿음으로 여러분의 전심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반응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주님의 주신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까이에 여러분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그분이 있습니다. 그 존재를 전적으로 바라보고 붙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갖고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내가 주님만을 원합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만을 구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