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다시 일어서는 법 / 강정규 목사

2021-03-07 · 시편 51편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며 우리 안에 더듬어 찾을 수준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함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신을 예배합니다. 고대 부족 사회조차도 장례 문화가 발달한 증거들을 통해 그들이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소망이 있음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게 인간이 가진 특성이죠. 하나님만큼 우리에게 관심을 가진 존재가 하나 더 있는데 사탄입니다.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 마귀입니다.

제가 사탄은 하나의 존재라고 이야기했어요. 그에게 귀신 등의 수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찬송가 중에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오류입니다. 사탄은 단독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죠. 마귀 혹은 마귀 무리들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인간에게 다른 의미로 관심이 많고 우리를 오랫동안 연구해왔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그 마음을 유혹해서 다른 것을 추구하고 찾도록 속삭이죠. 제가 명절 예배문에도 썼지만, 대표적으로

4가지 요소를 통해 세상은 우리에게 이것을 추구해야 행복하다고 속삭입니다. 쾌락(PLEASURE), 명예(PRESTIGE), 권력(POWER), 재산(PROPERTY)이 그것입니다. 그에게도 경험치가 쌓인 것이죠. 어떻게 하면 사람이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을까? 사탄은 지금 우리의 시대에는 저러한 것들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면 행복하다고 말하거나,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고 유혹하죠. 이것은 성경에도 나타난 사탄의 오랜 거짓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은 여전히 그것에 잘 넘어갑니다. 특별히 재물은 맘몬이라고 불리며 우상의 한 종류라고 성경이 말하기도 하죠.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소유의 주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리고 나는 청지기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긴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십일조를 왜 하나요? 처음부터 성경에서 십일조는

세금이 아니었죠. 세금은 내고 나면 나머지는 내 것입니다. 십일조는 그런 의미와 거리가 멀리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고백을 담아서 1/10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예물로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 주 뜻대로 사용하겠다는 고백이죠. 우리는 그런 믿음의 결단과 고백을 통해서 자꾸 세상이 주는 유혹으로부터 내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즘에 더 경기가 불황이 되면서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물질이 주는 유혹이 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저는 부동산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이 상황에 대해서 섬뜩함을 느낍니다. 성경에서 땅에 대한 문제를 중요하게 말씀하셨잖아요. 부동산값이 폭등하면서 있는 사람들은 소유의 증대에 집착하고, 자기 집 하나 없는 사람들은 그만큼 불안해합니다. 세상이 정말 우리는 너무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어지간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여기서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돌보신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로 삶에서는 부동산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할 것처럼 자꾸 유혹을 받지요. 성경에서도

성실한 삶이 중요한데, 그 성실함의 가치가 너무 형편없이 떨어졌어요. 물질이 주는 염려와 근심, 혹은 강력한 추구함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 중에 물질의 유혹 앞에는 끄떡없는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그분들이 또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나이가 들수록 ‘명예’에 대한 유혹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누가 나를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들이 다 명예이죠. 우리는 무명하나 유명하다는 주의 말씀을 믿으면 무명해도 괜찮을 텐데, 그 유혹도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열을 따지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가 부교역자 때 그것이 심했던 교회는 장로 권사도 임명받은 순서대로 기록해야만 했어요. 세상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권력, 즉 힘을 갖기 원하는 유혹도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 완장은 잘 안 차려고 해요. 섬기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 완장이 힘이 되는 곳에서는 서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내가 말하는 대로, 내 뜻대로, 뭔가 이러지는 힘을 갖기 원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쾌락을 얻고자 하는 마음들이 우리 안에 있지요. 먹는 것, 마시는 것, 보는 것, 입는 것, 누리는 것 등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자 합니다. 즐거움이 필요하죠. 그러나 제한된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집중하면 점점 더 강력한 쾌락만을 좇게 됩니다. 쾌락을 적정선에서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과하게 추구하다 보면 인간성이 훼손되기에 이릅니다. 또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다 보면, 동시대에 사는 이웃, 가까이에 있는 자기 가족의 즐거움까지 무시하거나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표제를 갖고 있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바로 성적 쾌락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그는 명예도 있었어요. 권력도 있었습니다. 재산도 있었어요. 쾌락도 이미 왕궁에서 많이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강렬한 쾌락을 좇게 됩니다. 부하의 아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죄는 죄를 낳게

됩니다. 죄를 지었는데 어물쩍 넘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계략을 세웁니다. 남편 우리야를 부릅니다. 그런데 충성스러웠던 우리야는 전쟁 중에 집에 가서 아내와 머무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윗의 계략이 실패했어요. 집요하게 다시 다음날 불러서 술을 취하게 합니다. 그래도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쟁터로 갑니다. 급기야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는 것까지 행하게 됩니다. 어쩌다 다윗이 저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알던 그 다윗은 어디에 갔을까요? 마틴

루터가 한 유명한 말이죠. “참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유혹은 언제나 있습니다. 평생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유혹을 붙잡지 않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유혹 앞에 반응하면 곧 둥지를 틀게 됩니다. 유혹이 왜 유혹이에요? 그만큼 매력이 있어 보여요. 사람은 세상이 주는 유혹에 약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안에는 재미가 있어요. 즐거워 보여요. 그래서 추구하게 만들어요. 쾌락의 재미가 있고,

명예를 가지면 기쁘고, 권력이 있으면 좋고, 재산이 있으면 안전해 보여요. (욥 20: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성경도 죄를 짓는 것이 우리를 유혹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해요. 죄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죄악의 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잠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잠깐의 쾌락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말해요.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가끔 그리스도인 가운데 본인이 약해서 넘어지게 되는 죄를 멀리하고자 저에게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술을 어떻게 끊나요? 중독을 어떻게 끝나요? 저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생각에서 멀리하고 눈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일단 생각에서 멀리한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어떤 죄를 짓지 말자, 어떤 죄를 멀리하자”라는 것도 내가 생각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은데, 그 방법은 더욱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통 제가 이것을 죄는 그것을 미워해서 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사랑해서 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워져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사랑해서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 결단을 믿지 말고, 나는 그 유혹 앞에 넘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나를 좀 인정해야 해요. 그래서 내가 마주해도 이겨내겠다는 생각보다 아예 그것을 마주하지 않는 것이

필요해요. 죄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해야 합니다. 아까 설교 초반에 말한 것처럼 우리 내면에는 공허함이 있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채우고자 합니다. 사탄은 그러한 우리의 상황에다가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을 계속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들어오려고 하면 “방 다 찼어요, 다음에 오세요”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다른 것이 차 있고, 내가 그것과 벗하여 살아가고 있으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죠. 이 이야기는 반대로 내 안에 하나님이

가득하게 거하시면 우리는 죄의 유혹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방법입니다. 죄가 주는 즐거움보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더 커야 하죠. 우리 안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 성령이라고 부르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과 깊은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죠. 성령은 인격입니다. 이것은 저장해놓는 개념이

아니고, 레벨업하는 개념도 아닙니다. 친밀한 관계적 개념이에요. 관계의 특징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은 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신앙은 관계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한번 그 경험을 갖고 쭉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성 안에 머물고 있는지가 중요해요. 물질적인 나라는 시민권도 얻을 수 있고 한번 왔다 갔다 하려면 오래 걸리는데, 관계를 그렇지 않지요. 늘 충만할 수도 있지만,

시시각각 변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곧 신실함, 충성심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그 관계 안에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 신실한 것이 믿음이 좋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꾸 관계가 멀어지고 죄와 가까워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다윗은 참으로 오랫동안 그 누구보다 신실했습니다. 성령 충만했어요. 꾹 찌르면 바로 하나님이 나오고 하나님이 묵상 되고 하나님이 고백 되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유혹이

와요. 보통 언제 오냐면 평탄할 때 옵니다. 다윗의 삶의 위기도 그 어느 때보다 잘나갈 때 왔어요. 고난은 보통 기도의 연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이 있으면 그것을 연료 삼아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탄해지면 하나님 앞에 충성심을 오히려 잃습니다. 다윗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대체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나, 그도 느슨해졌을 때 유혹 앞에 속절없이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제목이 <다시 일어서는 법>인 것처럼, 우리가 오늘 다윗이

넘어진 곳에서 어떻게 일어섰는지를 잘 기억하셔야 해요. 다윗은 범죄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돌아와야 할 때 돌아왔어요. 우리가 이 부분에서 다윗과 사울을 많이 비교하잖아요. 죄의 크기와 중대함을 보자면 사실 다윗이 사울보다 더 큰 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위대함은 돌이킨 것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2017년 처음으로 1박 2일의 짧은 수련회를 갔어요. 저는 스키를 잘 못 탑니다. 그때가 스키는 처음

탄 것이었어요. 한 무리는 보드를 타러 갔고, 저와 다은이랑 태희는 스키를 탔는데, 문제가 있었어요. 셋 다 처음이었어요.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도 없어서 처음에 스키를 신고 일어서는 것도 잘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1시간 정도 허우적대니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죠. 그래서 초급자 코스에서 내려오는 것까지는 곧 문제가 없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희가 저희의 분수를 모르고 중급자 코스로 갔다가 정말 고생을 했습니다. 자칫 수련회 때 스키 타다가 순교할 뻔했거든요. 제가

수련회가 끝나고 스키 타는 법을 검색해봤더니, 스키 특강 입문자 코스 첫 시간 주제가 ‘넘어지기 / 일어나기’ 이었어요. 스키를 타다가 넘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를 죄인지도 모르고 벗하여 살아가기도 하고,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죄의 유혹 앞에 넘어질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잘 일어나는 법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성장하는 것이잖아요. 스키의 고수가 된다는 것은 이제 더 큰 위험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신앙의 성숙도 같은 문제 앞에 넘어지지 않으며 자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넘어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넘어질 수 있어요. 성경은 어쩌면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여실히 보여주잖아요. 다윗의 삶도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죠. 정말 치명적인 죄가 발생했어요.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다윗이 하나님의 경고를 잘 알아듣고 돌아왔다는 것이 참 중요해요.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어 다윗의 숨겨진 죄를

들추셨을 때, 다윗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더 가지 않고 돌이켰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듣고 회개를 너무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윗의 이 이야기는 결코 범죄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분명 그 죄로 인해 심판을 당한 부분들도 존재합니다. 아이의 죽음과 다윗의 아들들 안에 다툼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죠.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를 철저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다윗이기에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공의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내 삶의 방향을 바꾸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길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는 그 죄를 다시 짓지 않는 것에 진정성이 있습니다. 저는 열왕기서의 이

부분을 통해서 다윗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왕상 1: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의미 없어 보이는 기록일 수 있으나, 다윗의 말년의 이 기록이 그가 밧세바 사건 이후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회개는 다시 그 죄를 반복하지 않아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다윗의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서 다윗을 고발합니다. 거기에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죄는 그 상대방에 대한 잘못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회복 또한 두 가지 대상에 대해서 모두 필요한 것이죠. 우리가 지난주 설교를 통해서 ‘용서’에 대해서 다뤘었죠. 누군가를

실족하지 않도록 힘쓰고, 반대로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을 한 경우에는 용서하라는 말씀이죠. 그 용서함에는 진정성 있는 ‘회개’가 담보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진정성 있는 회개 앞에 용서하는 은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눅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우리가 죄를 지은 경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 어려움을 당했다면 그 상대방을 향해서도

진실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가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만 용서를 구하고, 상대방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생략하는 경우가 있죠. 이것을 철저하게 고발했던 영화가 ‘밀양’입니다. 저는 그 영화의 고발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저희 집 둘째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런 교육을 하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라고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말하면 ‘괜찮아’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그랬더니 누나한테 잘못하면 ‘미안해’라고 합니다. 그런데 때론 누나가 ‘괜찮아’라고 5초 안에 말하지 않으면 그거 안 했다고 다시 삐칩니다. 기계적이에요. 상대방에게 우리는 용서를 구하고, 만약 상대방이 분이 다 풀리지 않았다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짜 용서겠죠. 결국, 진정성의 문제잖아요.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진정성 없는 회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었는가, 그의 기도를 살펴봅시다. (시 51:1)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시 51:2)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시 51:3)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제가 설교 초반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과 죄는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죄는 멀어지고, 죄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내 안에 성령님이 멀어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그러한 초점을 갖고 하나님께 다시 매달립니다. 하나님께 먼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3절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요. “내 죄악이 나를 노려보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악한 지 잘 압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핑계하지 않습니다. 죄는 어두움 가운데 숨겨두면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는 내가 그것을 들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 나아가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 모르게 할 수도 있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숨겨서는 안 됩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해놓고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면 ‘정죄’합니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사탄은 그 죄를 갖고 날마다 우리를 정죄합니다. 죄를 미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정직한 회개입니다. (시 51:6) 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는 주님, 제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을 보시고, 다시 주님이 오셔서 새롭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슬초’는

지중해 지역의 무성하고 향이 짙은 약초인데, 유월절과 관련되어 정결 예식에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결하게 하시면 깨끗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을 다시 희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정죄감에서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새하얀 눈(snow)보다 희게 하시는 주님의 용서를 믿고, 사탄이 주는 죄의식과 정죄감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

51:10)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시 51:11)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죄가 없어지는 것으로 우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다시 성령의 충만한 모습으로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시인은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마음’은 고대인들에게 지혜와 양심의 자리였습니다. ‘영’은 정신과 기질을 포함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육체만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과정을 창조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창조하실 때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처럼, 거룩한 영, 거룩한 숨결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절히 간구합니다. (시 51:12)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죄를 짓는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는 그곳으로부터 다시 주님 곁으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죄로 끌고 갈 때도 ‘잠깐의 기쁨’을 미끼로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 곁에 돌아왔다면 계속 그 관계 안에 살아갈 수 있는 자원하는 심령, 자발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시 51:13)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내가 주님의 길을 가르치게 하여 주십시오. 죄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여, 다른 죄인들에게 주님께 돌아오는 길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Wounded Healer’라는 말이 있죠.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입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치유 받아 본 경험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진정한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아야 하겠으나, 혹시 내가 경험했던 여러 가지 회복의 과정을 통해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누군가의 회복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윗은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끝으로 우리의 진정한 회복은 다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잃고 교회를 떠나 있는 사람을 가나안 성도라고 말하죠. 그 회복은 다시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시 51:15) 주님, 내 입술을 열어 주십시오.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내 입술로 전파하렵니다. (시 51: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되어 주님을 찬양하길 다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께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은 다 갖고 계세요. 그러나 딱 하나 우리의 마음을 갖고 계시지 않아요. 그래서 원하세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길 원하십니다. 예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비워지고 낮아진 마음으로 주를 구하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넘어집니다. 어떻게 다시 우리는 일어설 수 있는가? 어떻게 주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3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우리 안에 죄에 대한 유혹이 언제나 있음을 기억하고, 더욱 성령의 보호를 구하십시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도 있는 것과 같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보호를 요청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날마다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2) 우리가 크고 작은 죄의 유혹 앞에 넘어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죄와 친밀해졌다면, 돌이킴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죄는 죄를 낳습니다. 내가 죄를 갖고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으면, 빛을 보고 나아오지 않고 숨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런 여러분을 먹잇감 대하듯 달려들어 정죄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나오셔야 해요. 다시 성령을 구하셔야

합니다. 3) 중심의 진실한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정결케 하고 회복시킬 것입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결단하고 다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죄를 멀리하고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 회복을 경험 삼아 다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오늘도 더 가까이 갑시다.

내 걸음이 한 걸음 더 주께 가는 것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실함이고 우리의 신앙의 성숙입니다. 그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