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비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비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주님을 마주할 날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르치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도 바로 신자들에게 그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우선 달란트 비유는 성경에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이 있죠. 성경에는 항상 맥락이 있어요. 달란트 비유 앞에는 ‘열 처녀 비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이 주여 주여 외치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말하고 있어요. ‘준비’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죠. 그리고 달란트 비유 뒤에는 심판의 날 ‘양과 염소’가 구분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심판대 앞에서의 결과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받기로 결정된 양의 무리는 자신들이 왜 구원을 받는지 모릅니다. 내가 배고플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집이 없을 때 너희가 내게 방을 내주었고 내가
떨고 있을 때 너희가 내게 옷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내게 문명을 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내게 면회를 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양의 무리는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그때 주님은 “너희가 무시당하거나 남이 알아주지 않는 사람한테 그런 일 하나라도 하면, 그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말합니다. 반대로 염소로 구분된 무리는 책망을
받고, 그들의 항변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무시했습니까?” 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무시한 주목하지 않던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마태복음 24장 마지막 부분에는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었어요. 쭉 연결해서 맥락을 짚어보면, 주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3가지 비유가 나오고, 그 결과로 양과 염소의 비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종의 예상보다 주인이 일찍 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들러리들의 예상보다 신랑이 늦게 옵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는 오랜 시간,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주인이 옵니다. 즉, 이 비유들은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가 함부로 예측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언제일지 모를 그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여부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실패한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은 자신들이 해야 할 임무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느긋하다가 실패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악한 종은
어떠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악한 종은 자신의 임무를 실제보다 너무 ‘힘들게’ 생각하고 안일하다가 실패했어요. 우선 이 비유를 들으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맡겨진 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에게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여 하지 않거나, 너무 힘들다고만 여기며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비유가 가르치는 것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주인이 3명의 종에게 달란트를 맡깁니다. 일단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에게 맡긴 달란트의 차이입니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 가장 많은 자와 가장 적은 자에게 맡긴 것이 5배까지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 맡겨진 것을 무엇으로 해석하느냐 이것은
꽤나 중요할 수 있죠. 이것을 원래의 의미대로 ‘돈’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주권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조금은 억울한 측면도 있겠죠? 애초에 시작이 다르지 않나요? 금수저, 흙수저 문제로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20년 품삯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연봉을 3000만원으로 잡아도 6억입니다. 결코 작은 돈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주인이 이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돈을 다르게 주었다면 차별적 요소가 부각되겠지만,
이것은 이들이 주인을 위하여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맡긴 돈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들에게 맡긴 것은 ‘책임’이라고 표현합니다. 종들에게 각기 다른 ‘책임’을 맡긴 것입니다. 책임을 많이 맡았다고 하니까 어떻습니까? 5달란트면 30억의 자산 운용에 대한 책임을 맡은 자가 되는 것인데, 갑자기 부담이 되죠? 저에게 마태복음을 가르쳐주신 <양용의 교수>는 여기서 달란트는 산상설교에서 가르친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한다고 정의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서는 안 되며, 제자로서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책임의 크기를 정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다만 내게 맡기신 책임 앞에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인은 각 사람에게 최소 6억 이상의 자금을 지원하고, 그것으로 이윤을 남기도록 맡기고 먼 길을 갔습니다. 그에 대한 세 종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 25: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5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합니다. 그 결과 2배의 이윤을 얻습니다. 2달란트 받은 자도 ‘그와 같이, 즉 바로 가서’ 장사를 하였고 마찬가지로 2배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배경 사전을 찾아보면, 당시의
사회에서는 현금을 보유한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충분한 현금을 갖고 장사를 하면 몇 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2배의 이익을 낸 것은 막대한 수익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대치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죠. 두 종이 엄청나게 뛰어난 장사꾼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맡겨진 책임 앞에 해야 할 일을 했고, 그 노력에 따른 최소한의 결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주인이 훗날 그들을 마주했을 때, 그들의 칭찬합니다. ‘적은 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특징적이죠. 그리고 더욱 큰 책임을 맡길만한 사람이 되었음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메시지 성경의 해석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주인이 그를 칭찬했다. “수고했다! 일을 잘 했구나! 지금부터
내 동업자가 되어라.” 제가 왜 이 표현에 주목했냐면, 저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그 일을 함께 해나가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 싶거든요. 이것은 제가 지위 상승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저는 종이지만, 주님이 믿고 맡길만한 그러한 신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에요. 함께 꿈꾸고 함께 나눌 수 있는... 또한 우리는 5달란트 받은 자와 2달란트 받은 자가 같은 모습으로 행했고 동일한 칭찬을 받았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책임의 크기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러나 주어진 것에 대한 신실한 반응이 같다면 칭찬도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는 5달란트를 더 벌어준 사람이 더 큰 일을 한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1달란트 가진 자가 같은 모습으로 행했다면, 그 또한 같은 칭찬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달란트 받은 자는 그들과 달랐어요. 그는 그 책임을 땅에 묻어둡니다. 그렇게 묻어두는 것은 그에게 책임을 맡긴 주인에게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며, 주인의 명을 무시하는 것이므로 주인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1달란트 받은 종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당신은 기준이 높은 분이기 때문에,
저는 실패할까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숨겨두기 적당한 곳에 잘 보관하고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손실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에 대한 최소한의 행위도 하지 않은 것이죠.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주인은 그에게 이렇게 책망을 합니다. “너는 나를 잘 모른다. 네가 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차라리 그 돈을 은행에라도 맡기는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다.” 메시지 성경의 번역을 따르면 주인은 1달란트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조심조심 살다니 한심하다! 내가 최선을 요구하는 줄 안다면서, 어째서 너는 최소한에도 못 미치는 행동을 했느냐?” 제가 비유를 시작하면서 여기서 부여받은 달란트는 제자로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제자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즉, 이 비유의 메시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책임에 대한 회피라는 것이죠. 각자에게 주어진 기회가 다를 수 있고, 각자의 최선이 다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주인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그에게 맡겼던 1달란트는 이제 10달란트를 가지고 동업자가 되어 일할 그 사람에게 더해집니다. 이제 그는 주인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30절의 ‘무익한 종’을 잘 해석해야 하죠. 우리가 얼마 전에 ‘무익한 종’을 이렇게 사용했어요. 내게 맡겨진 것에 최선을 다한 후, 그것을 나의
자랑삼지 말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고백을 하는 ‘무익한 종’의 태도를 갖자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기서 5달란트, 2달란트 가진 종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을 때,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했으면 그것은 겸손한 고백입니다. 주인에게 칭찬 받을만한 일을 했지만, 그것을 마땅한 일로 여기는 겸손이죠. 30절의 무익한 종은 다릅니다. 그는 정말로 주인에게 무가치한 유익이 없는 모습을 보였어요. 그는 주인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선 열처녀 비유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결말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1달란트 종은 오히려 ‘교만한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경이 말하는 교만과 겸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모습입니다. 이것보다 내 스스로가 나를 더 높게 보면 교만이죠. 그럼 이것보다 내 스스로가 나를 더 낮게 보면...? 그것도 교만입니다. 이건 겸손이 아닙니다. 이게 1달란트 가진 종의 태도였거든요.
뭐냐면,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스스로 내 모습을 결정하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자기 뜻대로 결정하고 행동해요.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한 척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고, 자기가 하나님보다 앞선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날 바라보시듯 나도 나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5달란트 가진 자는 ‘더 주세요, 혹은 부담스러워요’가 아니라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것에 최선을 다했어요. 2달란트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이 겸손입니다. 주께서 날 쓰시겠다하면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저는 우리 개개인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달란트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제자다운 삶을 실천할 기회들이 있죠. 그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영적 생명을 얻고 영적 성장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도 있죠. 그것이 주인의 뜻에 합당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 책임의 크기는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도 몰라요. 저도 제 한계조차도 모릅니다.
왜냐면 제 한계를 스스로 정하는 것도 제가 종이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저의 관심이어서도 안 됩니다. 저는 그저 제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죠. 저는 언제나 주님이 제게 맡기신 일이라면 제가 하길 원하시는 것이라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랄 뿐입니다. 제가 옛날에는 빼는 것이 미덕인지 알았어요. 한국 사람들은 그렇잖아요.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고도 ‘차린 것이 없네요’ 말해야 겸손한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동양의 예의 기준입니다.
그것은 겸양지심이죠. 겸손은 주인께 맡기고 주인의 요청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쓰겠다고 하시면... 주님이 나와 함께 일하고자 하시면... 그래서 저는 아무리 바빠도 설교 요청이 들어오면 가능하면 하려고 합니다. 사례비는 저희와 상황이 비슷하거나, 작은 교회면 다시 헌금해요. 그냥 주님이 하시는 일에 함께 참여한 것이 기쁨이죠. 우리 교회도 교회로서 맡겨진 달란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책임감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의 교회가 되기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그것에 대한 최선의 반응으로 좋은 결과가 나와도 그로 인해 스스로 우쭐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예 하지도 않고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언제 설지 그것도 우리가 모른다고 했어요. 그것을 너무 먼 미래로 보는 것도 틀렸음을 성경은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주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함께 주를 위해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사용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