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밑바닥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 강정규 목사

2021-03-14 · 시편 62편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이 시의 표제는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즉, 여두둔을 따라서 부르는 노래라고 나옵니다. 여두둔은 다윗 시대의 3대 지휘자 중 하나입니다. 아삽, 헤만, 여두둔이 그 3인이죠. 이 시의 배경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하여 쫓겨 다니던 때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힘이 있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힘이 빠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배신을 합니다. 다윗도 다르지 않았어요. 다윗이 영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내려간 것이 밧세바 사건 때라면, 육적이고 정신적으로 가장 힘겨웠던 때는 압살롬의 배신 때일 것입니다. 물론 이 시의 배경을 그때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배경을 단정 짓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어려운 순간에 대해 적용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가장 힘겨운 상황, 가장 위기의 순간에 시인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밑바닥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고 잡게 된 것입니다. 시편인 만큼 오랜만에 여러분에게 시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인데, 저자는 기독교인입니다. 밑바닥과 같은 마음, 상한 영혼에게 드리고 싶은 위로입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_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1983년

발표된 시입니다. 이 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고통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면하여 이겨내자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은 고통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그 안에서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음을 믿자는 마지막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죠.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동안 내가 믿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지 드러난다고 합니다. “통장부터 챙겨야지”라고 하면 돈이 가장 우선인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먼저 요청하는 사람도 있어요. 둘 다 중요하지만, 그 순간에 ‘아버지 하나님’을 떠올리고 짧은 도움의 기도라도 내뱉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가장 어려운 절망의 순간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우리는 히브리어로 성경을 보지 않다보니까 62편에 담긴 독특한 메시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보면 이 시의 첫 단어는 ‘아크’(&a')라고

나타나요. 아크는 ‘오직’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죠. 2절도 ‘아크’로 시작합니다. (시 62: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절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2절에서는 오직 그분만. 62편 전체 12절 속에 무려 6번이나 ‘아크’를 사용하는데, 그 중 4번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강조에 사용되고 있어요. 지금 시인의 상황은 밑바닥입니다.

2절에 보면 흔들리지 않겠다가 아니라 크게 흔들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것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흔들릴만한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흔들릴 수 있어요.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내진 설계라고 하죠. 그것은 흔들릴 수 있음을 알고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흔들리지 않는 존재처럼 여기면 작은 흔들림에도 감당이

안 됩니다. 신앙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그러나 나를 지키시는 분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붙잡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선언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영혼에 대해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하나님을 바라볼 것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catfish effect’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요. 일명 ‘메기 효과’입니다.

바닷가에서 잡히는 생선 중에 ‘정어리’라는 생선이 있습니다. 북유럽에서 많이 잡히는데, 문제는 바다에서 이것을 잡아서 항구로 돌아오는 동안 대부분 죽습니다. 살아 있으면 식감이 아주 좋은 탓에 높은 가격에 팔리는데, 살아 있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북유럽 어부들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한 어부만 유일하게 정어리를 살아 있는 상태로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법을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 비법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정어리가 있는 수족관에 ‘메기(catfish)’를 집어넣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었습니다. 메기는 정어리의 천적입니다. 정어리가 가득 담긴 수족관에 천적인 메기를 넣으면 정어리들이 잡아 먹혀 손해가 막심할 것 같지만, 오히려 정어리들이 생존을 위해 꾸준히 움직이기 때문에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위기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지만, 사실은 너무 긴장감이 없으면 우리는 쳐져요.

그리고 영적으로는 죽기 십상입니다. 기독교 영성가 ‘필립 얀시’는 유독 고난에 대한 책을 많이 썼는데요. 대표적으로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고통이라는 선물> 등을 쓴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해요.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잘 될 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다가, 고난만 찾아오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이유도 정답도 잘 모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해요. 고난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가장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하는데요. 즉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이 문제 말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주권적 고백을 하죠. 그 주권적 고백은 옳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과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옳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사건을 일으키신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정권에서 재난이 터지면 대통령의 잘못이라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배추값이 떨어져도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말해요. 통치적 주권이 있기 때문이죠. 주권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사건 하나하나를 대통령이 주도해서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가끔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인은 공감 능력 제로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큰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하신 것인데 뭘 그러느냐 반응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정말로 주도하여서 일으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하나님이 압살롬을 통해 다윗에게 반역하도록 일하신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압살롬의 정권에 대한 욕심, 즉 그의 나쁜 마음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밧세바와 관련된 범죄를 저지른 것 또한 다윗의 죄로 인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만,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도하여 일으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일들이 주님이

통치하는 세상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으실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다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세요? 제가 가장 많은 예화로 드는 이야기죠.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을 선택해요. 선악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죠. A로 가야하는데 B로 간 것입니다. 그 잘못된 선택에 대해 책임질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안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항상 대안이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입니다. 우리의 실패, 우리의 죄로 인한 좋지 않은 결과까지도 하나님은 수용하시고 그 안에서도 길을 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 때까지 주께 포기란 없습니다. 설령 정말 안 좋은 일로 생명이 태어났어요. 극단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서 아기가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아이에 대한 계획을 갖고 그 삶을 인도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에요. 그게 하나님이시죠. 저는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넘어지고 고난 앞에서 무력합니다. 신앙은 무엇인가? 그 상황을 맞이하지 않는 특수한 힘을 힘입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분은 이 고난도 다루실 수 있으시니까.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인은 세상과 다른 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지경까지 무너지면 절망합니다. 그들은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시인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죠.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 나는 구원할 능력이 없어요. 나는 이 상황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며,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능력이 나타남을 믿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렵지 않다는 것과 힘들지 않은 것은 다른 것이죠. 고난은 언제나 힘겨울 수 있어요. 그러나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방법이 없어도 하나님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죠.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라. 시인은 말끝마다 1인칭으로 ‘나의’를 반복하고 있죠. 반석-구원-요새라는 고백은 그 구원의 든든함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위처럼, 또한 외부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안전한 요새처럼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주는 평안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지라도 넉넉히 견디어낼 것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두렵지는 않은 것입니다.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반면 세상은 다릅니다. 3절부터 보시죠. (시 62: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개역개정의 이 표현은 마치 대적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새번역은 좀 달라요. (새번역)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공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지금 공격을 당하는 사람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울어 가는 담, 무너지는 돌담. 공격하지 않아도 힘겨운 사람들을 향해 공격하는 것이 세상의 악함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힘든데 세상은 그런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해요. 악인의 모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 62: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해요.

성경은 사탄의 문화, 사탄의 가치로 세워진 세상을 피라미드 세상에 비유했어요. 위로 올라가려면 누군가를 끄집어내려야 하고, 밑에서 올라오지 못하도록 밟아야 해요. 그 구조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 한 순간도 평안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탄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가치관 안에 빠져들면, 거기는 친구도 없어요, 다 경쟁자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축복을 하지만 속으로는 저주를 하고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되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라미드 구조와 다른 가치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면, 사람은 모두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이야기를 하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그러하시듯 ‘사랑해줘야겠구나’ 긍휼함을 배워요. 그것으로 서로를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줄게” 신뢰를 표현하는 것은 신앙적 ‘믿음’이 아니라, 사랑의 한 태도이죠.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 62: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인은 한번 더 고백합니다. 나의 소망도 그로부터 나오고, 구원과 영광도 그에게 있고,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흔들리지도 않겠다고 말해요.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마찬가지로 ‘아크’로 5절과 6절이 시작되고 있어요. 하나님만! 다윗이

원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뭔가가 이뤄지길 바란 것도 아닙니다. 수단과 도구로 하나님을 구한 것도 아니에요. 내 문제가 해결되길, 내가 원했던 것이 이뤄지길 바라며 구한 것도 아니라, 오직 나의 사랑의 대상, 고백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만 간절히 원해요.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그분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배당을 크게 짓는 과정에 부임을 하게 됐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공사는 끝났지만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항상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를 바라보면 담임목사가 죽는다고 말해요.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해요. 여러분. 혹시 교회 와서 목사가 보이시면 초점을 바꾸셔야 해요. 누군가 어떤 사람이 나를 바꿀 수 없고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의지의 대상이 눈에 보이는 담임목사나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주님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그게

나도 살고 그도 살아갈 방법입니다. 8절을 보면, 언제든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라고 말하고 있어요. 기도 모임을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사람들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그 공동체 의지해도 안 돼요. 교회는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사람 믿으면 상처만 받습니다. 사람 의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사람은 품어주는 것입니다. (시 62: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 62: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9절의 ‘아 슬프도다’는 진짜 슬프다가 아니라 ‘덧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아크 헤벨’이에요. 아크는 ‘오직, 진실로’라는 의미이니 ‘참으로 공허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입김에 불과하고, 인생은 속임수이며, 모두 저울에 달아봐도 그 입김보다도 가볍다는 것이죠. 다윗의 생은 수많은 사건을 마주했습니다.

무명에서 갑자기 이스라엘 최고의 인기 있는 사람으로 치솟아요. 그로 인해 미움을 받아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왕으로 또 높임을 받습니다. 그 승승장구함 속에 큰 죄에 빠지기도 하고, 아들의 반역으로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인생은 입김에 불과하다. 불면 사라져요. 속임수와 같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10절은 그러하니, 힘을 의지하지하여 포악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누리려는 헛된 희망도 믿지 말고, 재물이 늘어났다고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입김과 같습니다. 영원하지 않아요. 영원하지 않은 것에 마음을 두면 영원한 것을 잃습니다.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가 되었는데, 자라감에는 끝이 없음을 느껴요. 제가 개척하고 제일 많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일희일비하지 말자’입니다. 이중직으로 목회를 해나가며 장사를 하게 되었어요. 거기서도 매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일희일비하지 말자’입니다. 자꾸 영원하지 않은 것에 마음을 두면 요동칩니다.

마음을 빼앗기면 감당이 안 됩니다. 목회를 열심히 해서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끈끈한 공동체가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언제든 입김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시 62: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시 62: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이 부분도 새번역 성경이 좀 더

의미가 명확한데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요, ‘한결 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것은 다시 한 번, 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가 커보일지라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주는 위로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한결 같은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다른 것은 다 변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흔들려요.

그러나 하나님만이 온전하십니다. 신앙은 그분께 기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하죠.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수사학적 표현이죠. 하나님이 어리석을 수 없죠. 그러나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조차도 사람보다 강하다.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강함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 62편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믿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려울수록 단순하게 생각을 해야 해요. 신앙은 단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 필요하죠. 그러나 그 지식이 깊지 않더라도 정말 내게 필요한 순간에 그 단순한 지식을 믿는 것이 옳아요. 이러한 심플한 믿음의 태도가 우리를 평안하게 해줍니다. 어린 아이는 옆에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으면 그것으로 평안함을 느낍니다. 그 아이는 엄마 아빠만을 바라보기 때문이에요.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믿을 것이 하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불안전한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클 때에는 그로 인해서 떵떵거림이 있지만, 곧 그것이 입김과 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때마다 불안합니다. 밑바닥으로 가면 끝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신앙의 힘은 오히려 연약할 때 위력을 발휘합니다. 때로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약함을 보게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그 과정이 아플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밑바닥에 있는

내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해요. 그러면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약함을 통해 주를 의지할 수 있음을 경험하며 그것이 주께서 주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함으로 나아갑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주님을 반만 믿어요.” 그것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반만 믿는 믿음은 없어요. 오직, 즉 전적으로 그분만을 믿어야

해요. 믿음이 자란다고 해요. 그것은 내 안에 믿음이 10% 50% 100% 되어간다는 것이 아니에요. 50%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러나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작은 고난에 믿음을 발휘해요. 그러면 그 안에서 주님의 돌보심을 경험합니다. 그럼 다음에 조금 더 큰 어려움이 왔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보일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마음에 반응하여 작은 포기를 합니다. 거기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 경험

안에서 끝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믿음의 삶을 경험하기를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루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에 힘쓰십시오. 그러면 그 하루가 이틀이 되고, 그 시간이 쌓여서 내 삶이 온전하게 믿음의 삶으로, 복음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나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성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밑바닥

같은 상황에 있더라도 혹은 구름 위에 있더라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가 나의 반석이시고, 요새이며,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다윗처럼 결단합시다. 주님 내가 오직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오직 주님만...! 다음세대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