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사도행전 2장 / 우리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 강정규 목사

2021-03-19 · 사도행전 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가 신약의 파노라마를 하면서 2시간 정도를 사도행전의 흐름에 대해서 배운 바 있습니다. 일단 사도행전은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후속 이야기로서, 예수님 승천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특별히 우리와 가장 밀접한 교회 시대의 이야기, 선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니, 우리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가슴이 뛰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보통 선교단체에서 어떤 책을 묵상할 때 가장 많이 묵상하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흐름을 담고 있는 1:8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바로 성령의 주도하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더 나아가 땅 끝까지 전파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의 승천 직후 제자들이 약속한 성령을 받기 위해 준비하다가, 2장에서 성령 강림이

일어난 후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궁극적으로 당시의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제국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까지 담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120명이 마가의 집에 모이게 됩니다. 흔히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부르죠. 거기서 그들은 유다의 자리를 채워 12명의 제자를 만드는 일을 먼저 합니다. 구약의 12지파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이 되었다면, 이제 성령님이 강림하며 교회 시대를 열기

위해서 12사도를 채우기 위한 일이었죠. 모여서 기도하던 그들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서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행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경건한 유대인이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거주자들이 아니라 이방 나라에 거주하고 있지만, 오순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종교적 열심을 가진 자들이었죠.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역사는 바로 경건한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1:8을 다시 기억해봅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주시는 이유, 힘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증인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인데, 그 방법은 예루살렘에 모인 여러 나라 태생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행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예수님의 주 사역 무대가 갈릴리였기에 그곳 사람들이 제자 가운데 많았는데,

그들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있으니 이는 매우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행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참 여러 지역에서 모였죠. 그런데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많은 주석가들은 이 부분이 바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려 했던 바벨탑 사건 때에는 언어를 흩으셔서 그들을 흩어버리셨지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흩어진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소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이 광경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서 집중하고 주목하게 되었고, 그때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 2: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삼시는 아침 9시라는 것입니다. 즉, 미루어보건대 그들이 밤새 기도하며 성령을 받고 증언하게 된 것이겠죠. 베드로는

너희는 우리보고 취했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취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일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막바지 하이라이트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 이야기에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서 그럼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3000명입니다. 예루살렘 대부흥성회가 펼쳐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때 생겨난 신자들의 모임이 ‘예루살렘교회’라는 초대교회의 첫 시작이 된 것이죠.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러분, 사람의 욕심으로 이것은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성령으로

변화 받은 사람들 안에서 이런 모습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수 없이 나누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말하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로 뒤집어진 교회는 그것을 해냅니다.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함께 연합하여 필요에 따라 나누며 날마다 성전 뜰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정 공유는 그 안에 더욱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 배려의 모습이었어요. 집마다 돌아가며 모이고,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연합 가운데서 하나님은 찬미를 받으시고, 또한 사람들에게도 덕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어려서부터 기독교 모임 안에서 많은 것을 겪었고, 저도 임원으로 때로는 리더로서 모임을 이끌어보기도 했는데.. 그 안에서 제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와도 같은데요. “성령이 답이다”입니다. 저는 친교를

엄청 좋아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친교적 능력을 갖고 모임을 잘 이끌어가려고 해봐도 한계가 명확해요. 사람이 주는 위로는 한계가 명확하고, 사람의 친밀함으로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기독교 동아리 등에서 다툼이 생겨요. 서로 만나서 풀어보려고도 하고, 단합회도 하고, 그 어떤 것을 해봐도 잠깐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귐의교회입니다. 우리도 사귐 좋아하죠. 그러나 그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이웃과 세상과 사귐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

삶의 어떠한 문제, 신앙적 문제, 관계적 문제를 만났을 때, 원인을 찾으면 수많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결국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성령님이 내게 오셔서 내가 그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삶도, 사역도, 관계도 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GOD의 노래였는데, 기댈 수 있죠. 서로에게. 그러나 계속 기대보세요. 결국 끝까지 못 받아줍니다. 주님이 아니면 다른 것은 모두 다시 목마름이 생깁니다. 영원한

생수 되시는 하나님께로 내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상태를 세밀하게 잘 몰라요. 그런데 찬양인도를 맡은 집사님이 많은 분이 지치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잘 오셨습니다. 주님께로! 이곳에서 사람의 위로, 잠깐의 격려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 품에 안겨서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일어서십시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사도행전 4장에는 베드로의 또 다른 설교가 기록되어 있어요. 사실 베드로 사도가 설교하는 것 보면 저도 놀라요. 아니 이분이 우리가 알던 그 베드로님이 맞으신가?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어요.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죠. 그들이 본래 학문 없는 범인, 쉽게 말해서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서 주목해보니 바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죠.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 역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다른 방향으로 역행하는 사람은 잘 티가 나잖아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가운데 살아가되, 세상과 다른 가치를 갖고 살다 보니 모난 돌처럼 눈에 잘 띕니다. 그래서 실제로 정도 잘 맞죠. 그러나 그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특이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잘 보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함, 연합, 행복이 있으면 사람들은 주목해요. 어떤 면에서는 신기해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그냥 쟤는

우리와 다른 사람, 이렇게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관심을 갖는 순간이 열릴 수 있어요. 대표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마음의 문이 열리는 타이밍이 있을 수 있어요. 그때가 관심을 갖고 우리를 보게 되는 때입니다. 복음은 그때 강력하게 전해야 합니다. “너도 알잖아. 우리 그리 잘 나지 않은 갈릴리 출신 사람들이야.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삶이 바뀌게 되었어. 우리가 믿은 예수님은 이런 분이야. 그분이 약속한 것이 성령이고 바로 지금 내가 그 성령을 경험한

거야.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면 너도 성령을 받을 수 있어.” 이것이 사도들의 삶이 보여주는 메시지였어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멀리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복음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있는 그 모습을 궁금해 하고 때로는 놀랍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이 상황에서 이렇게 반응을 할까? 어떻게 얘는 나보다 가진 것이 없어도 만족하고, 더 나누며 살까? 얘는 이

상황이면 힘들만도 한데 뭐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렇게 힘을 낼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사용하세요.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이 없다고 세상 앞에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그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행동이잖아요. 당당해야 해요. 내가 가장 좋은 것을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은 당당합니다. “너는 돈이 있어? 나는 예수님이 있어. 너는 빽이 있어? 나는 성령님이 함께 하셔. 너희 아빠 사장이야?

우리 아빠는 하나님이야.” 자꾸 내가 위축되고 넘어지는 것은 내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 시선이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없는 순간이 있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것입니다. 구별이 없어요. 그러면 아무 힘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다른 의미로 의아해 하죠. 저는 아버지가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것으로 평가를 받곤 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옛적에 술을 마시던 때에는 너 교회 다닌다며, 너네 아버지 목사라며... 똑같네. 세상은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욕하면서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조금은 다를 것이라 기대하는데, 정작 우리는 스스로 그 자존심조차 못 지켜요. 저는 세상에서 교회를 욕하고 무시해도, 여전히 세상은 한편에서는 우리에게 기대함을 느껴요. 그래도 선을 행하는 일에 저들이 뭔가 더 열심을 내겠지. 그래도 쟤네는 좀 다르겠지. 하다못해,

구걸하는 분들도 교회를 찾아오고 찬양을 틀고 하는 것은 그래도 우리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문제는 우리가 그 기대를 더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똑같네. 교회 다닌다면서 똑같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인데, 우리가 그들과 동일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원인이 하나에요. 아직 내 안에서 내가 주인인 것입니다. 내 바깥 호적은 그리스도인으로 바꿨는데, 아직 내 내면에서는 내 뜻이 하나님 뜻보다 강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자기가 크다고 싸우기 일쑤였어요. 반면 세상 앞에서는 나약하고 도망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그들은 완전히 바뀝니다.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의 삶은 더욱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같이. 성령님이 내 안에서 주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소유를 아끼지 않고 나누는 것도 가능했고, 15장 회의 때를 보면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나는 예수를 믿지만 왜 내 삶은 그리스인의 특별함이 없는가 고민이 되십니까? 다른 것 다 멈추고 성령님을 간절히 구하시는 것부터 하십시오. 다른 여러 가지 원인을 찾는 일도 필요 없습니다. 내가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여러분. 저도 목회가 힘들어지는 여러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사실 그건 목회가 힘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약해지고, 내 안에 하나님의 주인 됨이 잃은 것입니다. 우리가 외부의 다른 일이 힘들어서 힘든 것이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다른 것 지키지 말고,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어요. 여기서 지면 바람만 불어도 무너져요. 그러나 이곳에 성령님이 충만하면 폭풍우를 만나도 잠잠한 것입니다.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고민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버리지 못한 채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영의 생각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 있으면 ‘기도해봐’라고 말하잖아요. 사실 그 이야기는 무조건 정답이거든요. 왜 그런지 아세요? 기도는 내가 눈을 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에요.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분께 집중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분의 뜻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기도하면서 결정하는 것이 영의 생각을 따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을 따르는 자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사탄은 언제나 우리를 속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는 우리가 두렵기 때문이에요. 저는 압니다. 이것은

저의 경험이에요.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답을 찾지 못하도록 자꾸 우리를 속여서 내가 영의 문제를 보지 않도록 내 시선을 자꾸 외부로 외면으로 유도합니다. 천만에요. 문제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에게 성령님은 계십니다. 계세요. 믿으세요.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다만 여러분이 그분을 찾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면 그 행위는 여러분이 성령님을 일하시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메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반응하고 순종하는 순간, 여러분의 삶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나는 못 해요. 맞아요. 나는 못 해요. 그러나 성령님은 하십니다. 나는 작은 것 하나도 나누기를 아까워하고,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무너지고 화내고 좌절하는 것이 나의 모습일지 몰라요. 그런 나의 편을 들어주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세요. 성령의 충만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분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관계는 멀어지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그분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그분을 마주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그분과의 관계가 멀어졌다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간구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특별히 내 안에 성령님이 잘 느껴지지 않고, 의지하는 법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잘 새겨들으십시오. 이 일에는 우리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를 보여야 해요. 간절한 마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분을 찾고 두드리고 그분을 향한 내 마음을 고백하셔야 해요. (눅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령님은 특별한 사람들이 경험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믿으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령을 의지하며 살기를 누구보다 원하시는 분이세요.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두드리지도 않은 채... 포기하지 마십시오. 120명의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특별하다면 우리도 특별합니다.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며칠을 기도했습니다. 그러한 간절함 가운데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7일 동안 믿음으로 행진했던 것과 같이,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을 인내하고 소망하며

담갔던 것처럼, 오늘 내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성령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을 힘쓰십시오. 우리의 참된 힘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되지 않습니다. 간절함을 갖고 진실함을 갖고 나아가십시오. 좀 더 깨어서 기도하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이 시간 피하지 마십시오. 도망치지 마십시오. 의지를 보이셔야 합니다. 이 기도회의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