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흐름을 위해서 3주전에 했던 누가복음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다시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의 여행 단락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르침이 부담스러워졌어요. 그러면서 무리와 제자가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을 세우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셨던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모든 민족에게 전할 도구로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자
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통로입니다. 신앙의 최종 목표는 ‘나의 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신앙의 시작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통해 복음을 듣고, 사랑을 받고, 영적 성숙을 했다면... 나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 따라 살겠다고 매주 고백하잖아요. 주님이
어떻게 제자를 세웠습니까? 사랑으로 세우셨어요. 섬겨주셨어요. 그럼 우리도 그것이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기에 독생자를 주신 것이에요. 주님도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방법입니다. 사람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인가요? 주님은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지극히 작은 사람을 사랑하라.
형제 중에 먼저 그렇게 하라.” 하나님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워요. 하나님은 사랑받기 합당한 분이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서 드러난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시는데, 내가 누군가를 실족시키지 않도록 더 신경 쓰고, 혹 다른 이가 나에게 잘못을 범했을 때 용서를 구하면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에 주님이 바라시는 모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3주전에 다뤘던
누가복음 8번째 설교의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9번째 메시지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2가지인데, 18:18~30, 19:1-10을 함께 볼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부자 관리와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마침 이 이야기가 <성경 Q n A> 질문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삭개오 이야기는 여행 단락의 거의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삭개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가복음은 소외된 자들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부의 불균형에 대한 경고와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마태복음을 통해 배울 수 있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음을 마가복음 통해서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서 요한복음을 통해 배울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의 삶에 지극한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복음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설교 중 살펴보았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잠시 다시 기억해봅시다. 사실 우리의 기대는 의인들로 여겨지는 제사장/레위인에게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위해 선을 행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었죠. 그러나 정작 의를 행한 것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어쨌든 ‘비유’였습니다. 이번엔 실제적인 상황입니다. 부자 관원과 삭개오는 실제 존재한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지위가
안정적이었고, 부자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만난 자에게는 ‘구조’가 필요했고, 이번에 이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는 물질을 나누어 ‘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뭐가 더 어렵습니까? 여러분은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이 더 어려우세요? 재산을 처분해서 구제하는 것이 더 어려우세요? 저는 솔직하게 후자가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구조는 한 순간의 의로움으로 가능하다면, 구제는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재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부자 관리의 이야기부터 살펴봅시다. 부자 관리는 영생을 얻는 법을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답을 주십니다. 그러자 부자 관리는 내가 그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한 자기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그 예수님의 명령 앞에 대답할 수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크게 근심하고 돌아갑니다. 그가 실패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당황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눅 18: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눅 18: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가 이 이야기를 여러 번 해석해드렸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보다 더 쉽다는 것인데, 아시겠지만
낙타는 바늘구멍으로 못 들어가요. 그러니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늘 이 본문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상호간에 곤란하게 하는 본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부터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은 고민이었습니다. 왜냐? 있는 그대로 전하면 부자의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부자 관리처럼 교회로부터 떠날까 고민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 마음 달래기에 들어갑니다. 첫 번째는 낙타를 줄여보는 것입니다. 낙타(카메로스)라고 쓰인 단어를
‘카미로스’로 바꾼 사본이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카미로스는 ‘밧줄’입니다. 그러니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을 바꾼 것입니다. 낙타보다는 훨씬 부담이 줄었지만 여전히 바늘귀를 통과하기는 무리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제 바늘귀를 늘리는 시도입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고대 도시에는 큰 문의 옆에 작은 쪽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늘구멍이 사실 그 쪽문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쪽문은 낙타가
모든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굽히면 간신히 밀어 넣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좀 포기하면 들어갈 수는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을 보면, 그러한 시도 자체가 옳지 않음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유대인들의 특성대로 하나님을 ‘하늘’로 바꿔서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도 ‘하늘나라(천국)’으로 표현하죠.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딱 2가지 경우에만 천국이 아닌 ‘하나님 나라’라고 써요. ‘하나님’을 직접 거론하니까 눈이 번뜩이는 것이죠.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할 때와, 부자가 못 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할 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2가지 조건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조건으로 여겨지고 있었어요. 이스라엘 사람이고, 물질이 많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신 것이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이스라엘이라도 못 들어가고, 부자라도 못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복잡한 해석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만 봐도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이 됩니다. (눅 18: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제자들의 물음이 유대인들의 물음인 것이죠. 예수님의 이야기에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누가가
제시하는 이야기가 ‘삭개오’ 이야기인 것이죠. 그러므로 부자 관리 이야기와 삭개오 이야기는 연결해서 봐야 그 의미가 명확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배열이 정말 기가 막혀요. 부자 관리 이야기 앞에는 [어린 아이 이야기]가 나와요.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고 먼저 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어린아이와 같지 않았던 부자 관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낮은 위치와 의존성입니다. 어린 아이는 홀로 있지 못합니다. 항상 의존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얻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죠. 부자 관리의 이야기, 그리고 낙타와 바늘 귀 이야기를 가르치시죠. 그 이후에는 [거지 맹인]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이 사람은 거지이면서 맹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력을 다해 소리칩니다. ‘예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이 그를 고치십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바로 이 맹인의 모습이 어린 아이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부자 관리는 실패했으나, 거지 맹인은 실천합니다. 그럼 우리는 “그는 부자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가능하지.”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로 그 뒤에 [삭개오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부자 관리보다 더 부자였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가 맹인처럼 주님을 보기 원했고, 보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변했습니다. 어른은 주변을 신경 쓰죠. 사람들의 평판에 우리는 귀를 기울입니다. 거기에 엄청난 함정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았고, 그의 태도는 앞서 언급한 맹인의 그 갈망함 그대로 였습니다. 그리고 삭개오 이야기 후에는 [열 므나 이야기]가 나오며 여행단락이 끝납니다. 이 이야기는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주제이죠. 왜 이것이 삭개오 이야기
뒤에 나오는가? 주어진 재물을 사용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투자입니다. 재물은 그것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평가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행단락에 위치한 마지막 가르침이었어요.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마찬가지로, 부자 관리와
삭개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는 달랐습니다. 부자 관리에 대한 기대치가 더 높았어요. 그러나 그는 마치 강도만난 자를 놓고 지나쳐버린 레위인과 제사장처럼 재물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소유를 나누겠다고 합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던
부자관리는 못하던 것을, 세리장으로 살았던 삭개오가 합니다. 우리로 따지면 부자관리가 신앙생활을 더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그것은 진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하였지만, 정작 율법의 완성인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물을 축복으로 여기는 자기가 원하는 기준 안에서 율법을 잘 지켰던 것이고, 정작 예수님이 원하셨던 자기 포기에 대한 명령은 듣기 싫었던 것입니다. 부자 관리가 처음에 물었던 질문은 ‘영생’을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실상은 재물에 대한 갈급함이 더욱 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생을 위해서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갈급함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무엇에 갈급한 사람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잃기 싫습니다. 그래서 제 목표는 이곳에 있는 여러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내 안에 부자 관리와 같은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조차도 부자 관리와 같았어요. 그러나 오늘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들을 귀 있는 우리는 들어야 해요. 결국 언젠가 주께서 우리에게도 물을 것이고,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이 가장 귀한 분이 되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부자 관리와 같이 떠나버릴 것입니다. 부자 관리에게 예수님이 물으셨듯이 우리 각자의 삶속에
주님이 “진짜 네가 나를 믿느냐? 진짜 내가 너의 전부이냐?” 저는 그때 여러분이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래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왜 성경은 부자에 대해서 그토록 강력한 경고를 하실까? 부자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를 벌던지, 내 소유가 얼마 만큼이던지 그것에 마음을 두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더 마음을 둘 수 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부자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붙들리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어떤 것에도 믿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의 안전을 재물에 두면, 그것이 바로 재물에 믿음을 둔 것입니다. 부자 관리 또한 예수님을 믿는 줄 알았으나 돈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 다 갖고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니까 못 택했어요. 누가복음은 부자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을 고발합니다. 부자를 말함에 있어서
항상 그 안에 따라다니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지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를 대충 읽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해요. 거기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염색한 자색 옷은 당시의 굉장히 귀한 옷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명품을 두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이름조차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아요. 반면 거지의 이름은 기록합니다. 나사로. 세상은 반대잖아요. 아마
그 비유 속 세상에서도 부자의 이름은 오히려 사람들이 알았을 것이고, 거지의 이름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 드러나죠.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일부러 음식을 흘리지는 않았을 테죠.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당시 부자들은 기름기가 가득한 육류를 주로 먹었습니다. 그들은 손으로 고기를 먹은 후, 기름기를 닦는 용도로 빵을 사용했습니다. 푸석푸석한 빵은 그들의 손에 있는 기름때를 닦는 용도였습니다.
그러한 빵들이 상 아래로 버려졌고, 그것이 나사로의 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부자는 문 밖의 나사로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자에 대한 책망의 이면에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역행하고 있음이, 그 불순종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주님. 저는 그런 부자 아닌데요.”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그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럼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내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라. 아마 그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한 모습 가운데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조금씩 힘쓰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면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나 주님께 나아온 부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은 잘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정확한 가르침, 단호한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이죠. 저는 우리 교회에 부자가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 교회에는 대한민국에서 말하는 부자의 기준을 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지라도
이 말씀이 우리를 빗겨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를 찾는 것이 어렵다면 내 옆에 더 가난한 자, 도움이 필요한 자를 찾아보십시오. 반드시 찾아질 것입니다. 바로 그에게는 내가 부자입니다. 저는 헌금이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그리고 목회적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목회자로서만 살았을 때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았으니 당연히 십일조는 꼭
신앙이 아니더라도 선택의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해보면서 돈 버는 것은 하나 같이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되면서, 사실상 돈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돈은 소중해요. 그러나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는 제 의지가 담기고 마음이 담긴 고백이더라고요. 과부의 두렙돈이 귀한 것은 그녀에게는 그것이 정말 소중한 자신의 것 가운데 드린 고백이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저는 이곳에 있는 여러분이 꼭 그러한 고백을 삶 가운데 드리는 분들이 되길 바래요. 만약
필요하면 그 헌금의 대상이 이 교회가 아니더라도 좋아요. 더 어려운 교회여도 좋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교회에 헌금 많이 한다고 알아드리지도 않아요. 그래서 사실 더 여러분의 헌금이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마음을 아세요. 그리고 또 내 삶의 일부는 누군가를 위해서 사용되는 돈이길 바래요. 제게 많은 아이디어를 주는 교회들이 있는데, 그 중에 <지정헌금>이라는 것을 하는 교회들이 더러 있습니다. 저희도 한번 시작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구제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 이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에게 물질을 통해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통로입니다. 익명으로 교회가 그 상대방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A라는 사람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싶으세요. 방법이 뭐겠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마음으로 누군가의 어려움을 눈여겨보며 그를 위해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정말 돈이 없고
막연했던 때가 있었거든요. 제가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 몇 년 정도의 기간 동안 경조사를 거의 못 갔어요. 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상황에서 재정적으로 더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어요. 그때 몇 사람들이 조금씩 물질적 도움을 주었어요. 감사하더라고요. 성경에 보면 우리가 다른 빚은 지지 말아야 하지만, 사랑의 빚은 허용되거든요. 만약 그러한 물질이 재물의 빚이면 그들에게 갚아야겠죠. 그러나 사랑을 받은 것이고, 제가 조금 나눌 수 있는 상황이 된 후에는
그 마음으로 부단히 나누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물질은 잘 사용하면 그 안에 사랑이 전해집니다. 제가 지난달에 제주도에 있는 한 교회의 수련회 설교를 했어요. 그 청년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설교 초반에 10년 후의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해보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몇몇 청년들이 자기는 10년 후에 그 교회에서 중고등부 부장교사가 돼서 섬기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친구는 아까 부장한다고 했던 언니 옆에서 총무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뻐요. 교회의 상황이 넉넉하지 못해서 사례비가 적다고 애초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례비를 받자마자 바로 청년부 후원헌금으로 보내드렸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그 교회의 목사님 통해서 연락이 왔어요. 청년부가 자신들의 회비를 모은 것 중에서 소액이지만 올 한해 저희 교회에 선교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겁니다. 참 귀한 청년들이다 느꼈어요. 금액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죠. 여러분. 돈에는 힘이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이 없으면 물질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돈에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더욱 돈에 끌려 다니면 안 됩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도 있어요.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더욱 철저히 하나님을 의존하고 돈은 그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신앙적 목표 가운데 하나는 ‘철 들지 않는 것’ 입니다. 세상이 자꾸 우리에게 주입하고 가르치는 세상의 가르침들에 길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 아이 같은 것입니다. 부모의 품에
있을 때 그 어느 것도 부럽지 않은 만족과 평안이 있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정리해봅시다. 1. 제자들의 질문, 그에 대한 대답 (눅 18: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낙타와 바늘귀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제자들의 질문은 “그럼 도대체 누가...”였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 다음에 제자들에 대해서 먼저 이렇게 말씀하세요. (눅 18: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눅 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고 한번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너희가 그러한
결단으로 나를 따른 것은 너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르신 측면이 강조되었다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무 위에 올라가는 어린 아이와 같은 갈망함을 보였던 삭개오. 바로 그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에 대한 가장 극적인 대답입니다.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의 변화.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로 응답한 이야기가 삭개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에는 반전이 있어요. 지금 우리의 모습이 나약해보일지라도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어쩌면 저도 깜짝 놀랄 믿음의 변화를 일으킬 사람이 이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약할지 모르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그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로 반응하며 믿음의 삶을 보여줄 모습 말입니다. 2. 직업이 아니라 태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직무를 의롭게 수행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직업이나 환경 자체가 선하지 않아서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나의 변화가 아니라 내 상황과 환경의 변화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바꿔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의 변화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태도로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선하게 수행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 나를 어디로 옮겨주시면 주 뜻대로 산다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돈에 무너져온 그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여러분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넘어짐의 반복일 뿐입니다.
결국에는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직업이 아니라, 환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것.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 사실 삭개오는 소외된 자였습니다. 사회적 가난 가운데 머물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갔을 때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한 자를 찾으시고, 잃은 자를 찾으시기에 삭개오에게 다가가십니다. 우리는 주님, ‘인싸 쓰시죠.
왜 나에요’ 생각할 수 있어요. 혹은 주님의 관심도 세상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으로 변명하지도 스스로를 방어하지도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자신의 아픔, 자기의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남탓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 자신의 죄를 돌이키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삭개오는 이제부터라고 잘하겠다고 지나버린 날들에 대한 변명을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지난 삶조차도 최선을 다해서 반성하고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눅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에 합당한 열매’. 바로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삭개오의 모습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우리는 압니다. 그 나무가 무엇인지. 그 믿음이 무엇인지, 그 회개가 무엇인지, 성도인지, 아닌지. 부자 관리를 보고 알고, 강도 만난 자 앞에서의 모습을 보고 압니다. 누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지. 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18-19장에 담아서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 그 간절함. 그 순수함.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면 변화되는 그 아름다운 일의 결과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는 하나님.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동역자를 모으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 간절히 여러분을 찾고 있습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제가 주님의 동역자가 되겠습니다. 부자 관리의 길로 멀어져가는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길로 주님께 나아오는 그 일이 오늘 이곳에,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주님 내 생명을 모두 드리니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 뜻대로 사용하옵소서. 특송 다음세대 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