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요한복음 14장 / 나의 성령님 / 강정규 목사

2021-03-26 · 요한복음 1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가 지난주에 우리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에서 온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분의 의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분을 잘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그 성령님이 어떤 분이고 왜 그분이 우리의 힘이 될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령님에 대한 성경의 내용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지난주에도 살펴봤던 로마서 8장인데요. 그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라면, 성령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요한복음 14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성령님에 대해서 소개하고 설명해주시는 부분입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바로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헬라어 ‘파라(para-)’는 ‘옆으로’라는 의미이고 ‘클레토스(kletos)’는 ‘불림 받은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해석을 해본다면 ‘옆에 와서 돕도록 부름을 받은 이’정도가 될 것입니다. 같은 어원을 담은 ‘파라칼레오’는 ‘위로하다, 권면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므로, 우리는 그를 ‘보혜사’라고 번역하여 부르게 된 것입니다. 지킬-보, 은혜-혜, 스승-사. 보호하고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는 선생님. 영어 성경에서는 전통적으로 파라클레토스를

helper(돕는자), counsellor(상담자), comforter(위로자), advocate(변호자) 등으로 번역을 해왔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했던 것은 이미 예수님이 그 역할을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혜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의 곁을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가장 좋아서, 예수님이 십자가 길을 가시는 것조차

막고 끝까지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죠.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명을 하셔야 비로소 세상을 이기고 구원의 온전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큰 일도 한다고 말씀하시죠. 왜냐하면 지금 말씀하시는 순간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완성하지 않으셨지만, 후에

제자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며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을 해나갈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이 땅의 사역을 마치신 후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 교회에 오셔서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계속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그분의 역할을 뭐라고 설명하는가? 요한복음의 설명들을 함께 보겠습니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성령은 제자들(교회)에 와서 그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합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도록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깨닫게 합니다.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그리스의 것을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로는 주님의 뜻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신자의 삶에 영원한 동행을 하십니다. 왜 성령님이 그런 능력이 될 수 있었는가?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굉장히 힘써 가르치는 것이 있는데요. 14:16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성령을 요청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다고 합니다. 14:26에서는

하나님이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다고 표현합니다. 15:26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통하여,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것으로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자신을 보낸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래 하나님의 가르침이었으므로 성령님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가르침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가르치는 것이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초월적 세계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우리 안에 잠시 계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실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초월자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역사의 어떤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셨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을 깨닫도록 계시하시고 구원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동행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 신앙에 빠질 수 없습니다. 김세윤 교수님의 설명을 통해 삼위일체가 왜 중요한지를 나눠보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믿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해야 비로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초월자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전능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보다 더 크시고 우주 밖에서 계시는 분이어야만 고장 난 이 우주를 고칠 수 있고 병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 초월자 하나님이 단지 하늘 위에 앉아 계신다면, 여기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의 노예인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월자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셔야 비로소 우리에게 구원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초월자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내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초월자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내재하셔야지, 내재하시기 위해 그의 초월을 포기하시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초월자로서 오셔서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하셔야 구원이 일어납니다. 즉, 전지전능하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만든 세계 안으로 찾아오셨을 뿐더러,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 안에 거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온갖 한계 안에 있던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시고, 새로운 존재로서 변화하셔서,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이라는 개념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죠. 초대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며, 바로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에, 자신들의 마음 가운데 내재하시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시어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는, 이제 자신의 영(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 가운데 내재하시어 우리에게 계시와 구원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심과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이 삼위일체 신론인 것입니다. 가장 크신 하나님이 가장 작은 나의 하나님으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요한복음의 이 설명을 듣고 아무리 이 존재 방식을 이해하려고 해도 우리의 제한적 한계, 제한된 이성으로는 여전히 완전하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없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고 거짓은 아닙니다. 바다속 물고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루살이가 내일이 존재하고 한해가 지나감을 어찌 알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하고 터득할 수 있다면, 그는 초월자이기는커녕 우리 인간보다 더 작은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우리보다 크신 초월자이고, 전능자이고, 완전한 자여야 제한성과 불완전성 속에서 죽어가는 인류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은 인간의 이성 안에 담기는 분이 아니라 그 이성으로 터득할 수 없는 분이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한 만큼 이해할 뿐입니다. 그 믿음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주어진 시간을 살고 나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 타락 이후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그 존재적 한계 이상의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꿈꾸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이어 주신 것입니다. 꺾여나간 가지와 같던 우리가 다시 생명에 접붙임 받은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구원이 그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그 진리를 붙잡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 안에서, 구원이 가능함을 알고, 감사함으로 그 존재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바울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치 표면이 울퉁불퉁했던 옛날 구리거울에 비추어 보듯 부분적이고 알쏭달쏭하게 볼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시듯, 나도 주를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그분의 다스림은 변함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고 영생의 길이 되신 것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오셔서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성령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그 뜻을 순종하도록 ‘파라-클레토스’ 옆에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이 비추는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험했죠. 눈으로 확인하는 예수님은 놀랍고 위대해 보였겠죠. 그래서 그분께 의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처럼 당당했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면 불안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옆에 계시니 칼을 휘두르다가도,

예수님이 자신의 기대와 달리 나약하게 끌려가니까 본인도 나약해지고 소심해졌던 것이죠. 자신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어요. 다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느니, 자신들도 그의 제자로서 당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가장 낮고 비참한 십자가로 향하시니, 거기서 발생한 괴리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상에 굴복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경험하고

나니 그들이 갖고 있던 그 의존성이 이제는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들의 능력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이 의존하고 있는 그 성령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이들을 당당한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제 그 모든 말씀을 이해하고, 진리 위에 서서,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존하게 되니 그들의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제자들의 상태를 아셨고 그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연약해질 것을 염려하셨어요. 고아와 같이.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나 성령이 오시는 것이 더욱 완전한 연합을 이룰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안정감을 줍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성도들에게 더욱 유익한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역이 끝나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시는 것이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창조주의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영으로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으로 가는 승리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찾아오는 두려움, 연약함, 죄의 한계, 죽음을 모두 극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의존하고 그분을 붙잡아 꺾인 가지와 같은 내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못하지만 그분께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드시고, 나를 만드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생각나게 하고, 말씀대로 살자고 권면하고,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사탄의 저항과 투쟁은 계속 될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이 성령님과 친밀해지는 것을 못 견딥니다. 여러분 안에 끊임없는 싸움이 있을 것입니다. 죄를 짓도록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마치 내가 죄를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능력이에요. 죄와 사망의 능력은 우리가 그것을 상대해주지 않으면 힘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해방된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육신을 따르지 마십시오. 그것이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자꾸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고 내 육신이 시키는 것을 따르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령과 연합한 삶을 살려면, 우선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아야 해요. 때로는 육신의 생각은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옳은 생각이 아니라서 듣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몇 백번을 져도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을 따르면 죄와 가까워지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입니다. 사탄과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육신을 따르면 결코 하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육신의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므로 말씀을 마치며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육신에게 지지 마십시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들에게 복음을 전해놓고 정작 나는 육신을

따라 살다가 버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말합니다. 죄와 친밀한 채 성령과도 친밀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 안에 들어오는 죄와 싸우셔야 합니다. 거짓된 속삭임을 끊으셔야 합니다. 진정한 주님의 자녀다운 삶,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제 그분이 주시는 생각을 따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분을 다시 한 번 의지하십시다. 그분이 우리의 삶에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말씀이 필요한 순간마다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나의 생각은 죽고 그분이 내 안에서 이길 수 있기를 결단하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이 내 안에서 이기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나의 패배를 기뻐하십시오. 거기에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그 승리들이 쌓여서 이기는 삶이 되고, 그 이기는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모든 주의 자녀들 되기를 바랍니다.